퇴사 사유: 대표님

퇴사 사유: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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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In-update ngayon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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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차 비서 원지유는 사직서의 퇴사 사유 칸에 딱 세 글자를 썼다. «대표님». 대표 우시환의 답도 한 줄이었다. «수리합니다.» 두 달 뒤, 문구 브랜드 회사 종이달 첫 출근 날. 대주주가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돌아오라는 말 아닙니다. 내가 따라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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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1화. 사직서

사직서를 내밀자 우시환 대표의 손이 멈췄다.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 가방에 넣을 것 같아서, 책상 가운데까지 밀었다.

3월 3일 화요일 아침. 온빛타워 18층 대표실.

나는 5년 동안 이 책상에 온갖 서류를 올렸다. 일정표, 회의 자료, 출장 결재판. 그중 내 이름이 맨 위에 적힌 서류는 처음이었다.

시환은 펼쳐 놓았던 자료를 덮고 사직서를 읽었다.

소속. 이름. 퇴사 희망일.

그리고 사유.

『대표님』

세 글자였다.

개인 사정이라고 쓸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써도 됐다. 인사팀에서 좋아하는 문장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칸까지 예쁘게 정리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시환의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대표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몇 분이 지났는지 알고 있었다.

3초쯤 뒤, 시환이 고개를 들었다.

“수리합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당연히 수리해야 했다. 붙잡으면 곤란했다. 곤란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바로 끝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인수인계는 이번 달 말까지 마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3월 31일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인사팀에 전달하겠습니다.”

“원지유 씨.”

손목에서 시선을 떼었다.

시환은 사직서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늘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손목이 보였다.

“네, 대표님.”

“일정은 인사팀과 정하십시오.”

“네.”

더 기다릴 말은 없었다.

나는 결재판을 품에 붙이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을 닫은 뒤에도 손잡이를 잠깐 놓지 못했다.

‘끝. 됐다.’

손잡이를 놓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내 자리로 돌아오니 어제 수정한 일정표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3월 2일 월요일 저녁.

『맞선』

직접 적어 넣은 두 글자였다.

장소를 확인하고, 이동 시간을 비우고, 앞선 회의가 길어지지 않게 자료까지 정리했다. 그 일을 다 끝낸 뒤에야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소개받을 상대의 이름보다 저녁 일정 옆에 적힌 말이 오래 보였다.

그때 사직서를 열었다.

종이달 경력 공채 합격 안내는 이미 받아 두었다. 입사할지 묻는 연락에도 답했다. 필요한 건 제출 버튼이 아니라 대표실까지 걸어갈 용기였다.

그 용기가 하필 맞선 일정에서 나왔다.

나는 화면을 닫고 남은 인수인계 목록을 열었다.

이번에는 손이 제대로 움직였다.

▲

인사팀장은 내 사직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원본은 여기서 보관해요. 사본 필요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표님이 결재란 옆에 뭘 적으시던데.”

서류를 정리하던 인사팀장의 손이 잠깐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뭘요?”

“작게 쓰셔서. 확인하고 알려 줄까요?”

“아니요.”

너무 빨리 대답했다.

인사팀장이 나를 봤다. 나는 무릎 위 가방 손잡이를 바로 잡았다.

“수리하셨으면 됐습니다.”

사직서는 다른 서류 사이로 들어갔다. 결재란도, 그 옆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무엇이 적혔는지 보지 못했다.

3월 31일 화요일, 내 책상을 비웠다.

인수인계 자료는 회사에 남겼다. 일정 파일도, 거래처 문서도, 서랍 열쇠도. 상자에 넣은 것은 내 컵과 손목 받침, 그리고 종이달 다이어리 다섯 권이었다.

해마다 한 권씩 썼다.

회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말, 약속을 잡을 때 조심할 점, 거래처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려고 적은 특징. 내 손으로 적은 메모가 다섯 권을 채웠다.

맨 아래 다이어리의 모서리가 눌리지 않게 상자 안쪽으로 밀었다.

그 위에 검정 재킷을 접어 얹었다.

마지막으로 명패를 떼었다.

『대표이사 비서 원지유』

명패를 뒤집어 상자에 넣었다.

▲

5월 4일 월요일, 종이달 앞에서 잠깐 멈췄다.

솔숲길의 3층 벽돌집은 공고에 올라왔던 사진보다 창문이 컸다. 1층 문 안쪽으로 종이 상자가 쌓여 있었고, 계단 위에서는 뭔가 끄는 소리가 났다.

물결동 집에서 걸어오니 딱 좋은 거리였다.

이제 출근길에 대표님의 아침 일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차가 막히는지 살필 필요도 없었다.

대신 내 신발 끈이 풀렸다.

‘좋네. 내 일정부터 엉망이네.’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끈을 묶었다. 일어날 때 상자 안에서 다이어리가 움직였다. 종이 모서리끼리 부딪치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문 옆 안내판을 확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서 짧은 머리에 색 핀을 꽂은 사람이 나를 봤다.

“혹시 원지유 대리님?”

“네. 오늘부터 출근하는 원지유입니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김은채예요. 상자 무겁죠? 이쪽으로 주세요.”

은채가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어디에 놓으면 될까요?”

“안쪽 책상요. 제가 길을 먼저 치울게요.”

은채는 발밑에 놓인 포장재를 옆으로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프린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화로 납기일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펼친 종이 위에 손바닥을 대고 색을 비교했다.

내 책상에는 빈 서류 받침과 새 명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여기가 대리님 자리예요. 의자 높이 안 맞으면 말씀하세요. 밑에 손잡이가 좀 뻑뻑해서.”

“감사합니다.”

상자를 내려놓자 은채가 명함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미리 준비했어요. 첫날부터 명함 받는 사람 별로 없는데.”

뚜껑을 연 은채의 입이 멈췄다.

나는 명함보다 은채를 먼저 봤다.

“왜요?”

“어떡하지.”

은채가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한』

직급도, 부서도 맞았다.

이름이 나를 빼고 맞았다.

‘첫 출근. 새 직장. 새 사람.’

너무 새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최종 파일을 제대로 못 봤어요. 인쇄 전에 확인했어야 했는데.”

은채는 곧바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랍을 열더니 수정액을 들고 왔다.

나는 수정액과 명함을 번갈아 봤다.

은채도 자기 손을 봤다.

“이걸로 고칠 건 아니고요. 저도 왜 이걸 집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웃음이 났다.

“한 글자 차이로 다른 사람이 됐네요.”

“다시 신청할게요. 이건 외부에 쓰지 마세요.”

“네. 오늘은 원지유라고 직접 인사하죠.”

은채는 수정액을 내려놓고 명함 상자를 챙겼다. 대충 고쳐 쓰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새 주문 파일을 열고,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원. 지. 유. 이번에는 대리님도 같이 확인해 주세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예요.”

은채가 그제야 어깨를 내렸다.

나는 상자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섯 권을 책상 옆에 세우자 높이가 조금씩 달랐다. 많이 펼친 책은 등 부분이 벌어져 있었다.

“전부 우리 거네요?”

은채의 눈이 다이어리로 갔다.

“네. 쓰던 것들이에요.”

“이걸 다 채우셨어요?”

“빈칸도 있어요.”

“저는 앞부분만 예쁘게 쓰고 뒤는 거의 비어 있거든요.”

“앞부분이라도 예쁘면 됐죠.”

“제 것보다 대리님 게 훨씬 열심히 산 것 같아요.”

나는 가장 두꺼운 다이어리를 안쪽으로 밀었다.

열심히는 썼다. 한 사람의 일정에 맞춰서.

이번 책상에서는 다른 걸 적을 생각이었다.

▲

“지유 씨 왔어요?”

곱슬 단발의 여자가 종이를 든 채 다가왔다. 작업복 앞에 작은 잉크 자국이 있었다.

면접에서 봤던 채보경 대표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인사부터 하고 나서 속으로 멈칫했다.

‘다른 대표님. 괜찮아. 흔한 호칭이야.’

채 대표는 내 책상과 옆에 세운 다이어리를 살피더니 웃었다.

“오자마자 우리 제품 검사하는 줄 알았네. 은채 씨가 자리 잘 알려 줬죠?”

“네. 명함도 확인했습니다.”

은채가 뒤에서 작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덧붙였다.

“수정해서 새로 신청해 주신다고 했어요.”

“어떡해. 이름 틀렸어요?”

“네. 제가 마지막에 놓쳤어요. 새 파일은 대리님이랑 같이 확인했어요.”

“그럼 됐어요. 이번에는 제대로 나오게 해요.”

채 대표는 내게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출시 일정 자료예요. 규민 팀장님이 설명해 줄 거예요. 오늘은 읽어 보고, 이해 안 되는 것부터 물어봐요.”

나는 종이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우린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맡는 일이 딱 나뉘지는 않아요. 그래도 지유 씨는 브랜드팀이에요. 대표 옆에 붙어 있을 필요 없어요.”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 대표는 이미 다른 책상의 시안을 보고 있었다.

“은채 씨, 이 색은 실물로도 보여 줘요. 우리 거 예쁘잖아. 사진이 못 따라오면 아깝지.”

“대표님, 그래서 지금 뽑고 있었어요.”

둘의 말이 오가는 동안 나는 받은 종이 맨 위를 읽었다.

출시 일정. 거래처 진행 현황. 팝업 준비.

내가 맡을 일이 적혀 있었다.

온빛에서는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다음 말이 비슷했다. 대표님 일정, 대표님 자료, 대표님 손님.

여기서는 내 앞에 제품명이 놓였다.

“원지유 대리님.”

고개를 들었다.

둥근 안경을 쓴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브랜드팀장 전규민입니다. 면접 때 뵀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우선 자리에 필요한 게 있는지부터 확인하시고요. 자료는 같이 보죠.”

규민 팀장이 옆에 의자를 당겼다. 나는 안경을 꺼내 쓰고 서류를 펼쳤다.

팀장은 내가 담당할 칸을 손끝으로 짚었다.

“출시 일정 관리하고, 거래처 연락하고, 팝업 준비하는 일까지요. 오늘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만 보시면 됩니다.”

“거래처 쪽은 인계받을 연락 내용도 있나요?”

“있습니다. 관련 메일도 공유해 드릴게요.”

나는 서류 여백에 표시했다. 연락이 필요한 일과 내부에서 먼저 확인할 일을 나눴다.

규민 팀장이 내가 짚은 칸을 봤다.

“그건 오전 회의 끝나고 같이 확인해요.”

“네.”

당장 잘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알아야 할 것을 물었다. 누구에게 확인해야 하는지, 변경된 일정은 어디에 남기는지. 팀장은 하나씩 답했고, 모르는 것은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서류를 넘길수록 출근했다는 실감이 났다.

면접에 붙었다는 안내보다, 책상에 앉아 질문하는 지금이 더 확실했다.

연봉은 4,200만 원에서 3,900만 원이 됐다. 계약서를 쓸 때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잘못 읽은 게 아니었고, 그래도 서명했다.

명함에는 이름까지 잘못 나왔지만.

‘괜찮아. 그건 고칠 수 있어.’

나는 명함이 있던 자리에 출시 일정 자료를 놓았다.

▲

오전 회의는 3층이었다.

은채가 자료를 챙기면서 내 쪽을 봤다.

“대리님, 컵 들고 올라가세요. 오늘은 회의가 조금 길 수도 있대요.”

“첫날부터요?”

“대표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요. 저도 뭔지는 몰라요.”

나는 빈손으로 일어나려다가 책상 위 자료를 챙겼다.

습관대로 회의 참석자를 먼저 세려다 그만뒀다. 내가 자리를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대표가 앉을 방향도 정하지 않아도 됐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자료만 다시 확인했다.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종이달은 나까지 직원 28명이었다. 서로 자리를 조금씩 당겨 주며 앉았고, 늦게 들어온 사람은 벽 쪽 의자를 가져왔다.

나도 문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은채가 옆으로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제대로 찍힌 명함 나오면 제가 제일 먼저 드릴게요.”

“이번엔 원지유 맞죠?”

“네. 다른 사람 안 만들게요.”

나는 웃으며 자료를 펼쳤다.

채 대표가 들어와 앞에 섰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우선 새로 오신 분 소개할게요. 브랜드팀 원지유 대리님이에요.”

의자를 조금 밀고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원지유입니다. 출시 일정과 거래처 업무를 잘 익혀서 도움이 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인사가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비서 경력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누구를 모셨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소개가 끝나자 채 대표는 손에 든 서류를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오늘 꼭 말씀드릴 게 있어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우리 대주주가 바뀌었어요.”

나는 펼친 자료에서 손을 뗐다.

면접 때 투자 이야기를 들었다. 유통망을 넓히려면 자금과 협력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새 투자자가 들어온다는 말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채 대표가 말을 이었다.

“온빛이에요.”

서류 끝을 다시 잡았다.

엄지로 누른 곳이 조금 구겨졌다.

‘온빛.’

서울에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문구를 파는 곳도, 유통하는 곳도 많았다. 꼭 내가 나온 회사일 필요는 없었다.

은채가 내 쪽을 잠깐 봤다.

나는 고개를 숙여 구겨진 모서리를 폈다.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채 대표가 문 쪽을 확인했다.

“오늘 오셔서 직접 말씀해 주시기로 했어요.”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려다 손을 내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 버릇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온빛이라고 모두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직원만 410명이었다.

투자 담당자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임원일 수도 있었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걷어 올린 셔츠 소매가 먼저 보였다.

그다음에는 내가 5년 동안 아침마다 확인했던 얼굴.

우시환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그 눈이 회의실을 한 바퀴 돌다 내게서 멈췄다.

‘아니. 아니지. 왜.’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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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사직서
사직서를 내밀자 우시환 대표의 손이 멈췄다.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 가방에 넣을 것 같아서, 책상 가운데까지 밀었다.3월 3일 화요일 아침. 온빛타워 18층 대표실.나는 5년 동안 이 책상에 온갖 서류를 올렸다. 일정표, 회의 자료, 출장 결재판. 그중 내 이름이 맨 위에 적힌 서류는 처음이었다.시환은 펼쳐 놓았던 자료를 덮고 사직서를 읽었다.소속. 이름. 퇴사 희망일.그리고 사유.『대표님』세 글자였다.개인 사정이라고 쓸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써도 됐다. 인사팀에서 좋아하는 문장은 얼마든지 있었다.그런데 마지막 칸까지 예쁘게 정리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시환의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나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대표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몇 분이 지났는지 알고 있었다.3초쯤 뒤, 시환이 고개를 들었다.“수리합니다.”‘아니. 그렇게 쉽게.’입술 안쪽을 깨물었다.당연히 수리해야 했다. 붙잡으면 곤란했다. 곤란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바로 끝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인수인계는 이번 달 말까지 마치겠습니다.”“알겠습니다.”“3월 31일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인사팀에 전달하겠습니다.”“원지유 씨.”손목에서 시선을 떼었다.시환은 사직서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늘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손목이 보였다.“네, 대표님.”“일정은 인사팀과 정하십시오.”“네.”더 기다릴 말은 없었다.나는 결재판을 품에 붙이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을 닫은 뒤에도 손잡이를 잠깐 놓지 못했다.‘끝. 됐다.’손잡이를 놓았다.‘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내 자리로 돌아오니 어제 수정한 일정표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3월 2일 월요일 저녁.『맞선』직접 적어 넣은 두 글자였다.장소를 확인하고, 이동 시간을 비우고, 앞선 회의가 길어지지 않게 자료까지 정리했다. 그 일을 다 끝낸 뒤에야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소개받을 상대의 이름보다 저녁 일정 옆에 적힌 말이 오래 보였다.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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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인수 합의서
시환의 시선이 내 앞에 놓인 자료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나는 구겨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펴는 건 포기했다. 더 구기지만 않으면 됐다.“이쪽에 앉으세요.”채 대표가 자기 옆의 빈 의자를 당겼다. 시환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온빛 대표실에서 보던 그 셔츠였다. 소매는 걷혀 있었고, 손목에는 익숙한 시계가 있었다.다른 것은 책상이었다.여기 회의실 책상은 가운데에 종이 색을 비교하다 생긴 얼룩이 있었다. 시환은 그 얼룩 옆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왜 저렇게 자연스럽지.’나는 첫날부터 명함 이름도 틀렸는데.저 사람은 남의 회사에 들어와 의자부터 맞았다.“온빛 대표이사 우시환입니다.”시환이 사람들을 둘러봤다.“오늘부터 온빛이 종이달 지분 70퍼센트를 보유합니다. 인수 금액은 48억 원입니다.”옆자리에서 누군가 숨을 작게 들이켰다. 맞은편 사람은 자료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나는 숫자보다 이름을 보고 있었다.회의실 앞에 놓인 문서에도, 채 대표 옆에 앉은 사람에게도 온빛이 붙어 있었다.종이달까지 걸어서 출근했다.그런데 전 직장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대표는 채보경 대표님이 계속 맡습니다.”시환이 말을 이었다.“제품 개발과 운영 방식도 종이달이 결정합니다. 이번 인수를 이유로 한 직원 구조조정은 없습니다.”이번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움직였다. 멈췄던 자료가 다시 넘어갔다.채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부분은 계약할 때부터 확인했어요. 우리 제품은 우리 사람들이 만들어야 하니까요.”뒤쪽에 앉은 직원이 손을 들었다.“거래처에 보내는 계약서도 대표님 이름으로 나가는 건가요?”“네. 기존대로 제 이름으로 나가요.”채 대표가 답한 뒤 시환을 봤다.시환도 고개를 끄덕였다.“종이달의 계약과 업무 결재는 기존 체계를 유지합니다. 온빛에서 건별로 승인하지 않습니다.”나는 그제야 앞에 놓인 안내 자료를 제대로 읽었다.대주주 변경. 대표이사 유임. 운영 체계 유지.내가 방금 들은 말이 짧게 적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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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출입증 발급 신청서
나는 메신저 창을 닫고 가방을 들었다.퇴근 뒤 10분.일정표에 넣을 필요가 없는 약속이었다. 회의실도 잡지 않고, 참석자에게 자료도 보내지 않았다.그런데 손목시계부터 봤다.‘버릇. 그만.’“내일 뵙겠습니다.”규민 팀장에게 인사하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은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흔들다가, 내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들었다.“대리님, 뒷문으로 나가세요?”“네.”“계단 마지막 칸이 조금 높아요. 조심하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회사에서는 서류 받침이 빠졌다는 것도, 계단 높이가 다르다는 것도 누군가 먼저 알려 줬다.그건 좋았다.뒷문 계단 앞에 전 직장 대표가 서 있다는 건 아직 판단을 미뤘다.시환은 1층 계단 아래에 있었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른 손은 비어 있었다.내가 내려오자 문을 열었다.바깥 공기가 계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 칸을 보고 발을 내디뎠다.“여기서 말씀하시게요?”“괜찮습니까.”뒷문 옆에는 빈 운반 상자가 벽에 붙어 있었다. 창고 안에서는 누군가 테이프를 끊는 소리가 났다.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네. 10분이면요.”시환이 손목시계를 봤다.내가 알던 사람은 약속 시간을 남에게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정한 시간을 확인했다.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고쳐 걸었다.“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네.”“종이달은 작년 10월부터 온빛 인수 검토 리스트에 있었습니다.”가방 끈을 잡은 손이 멈췄다.시환은 내 표정을 보고도 말을 끊지 않았다.“자체 브랜드와 디자인 역량이 있습니다. 젊은 고객층도 꾸준하고요. 온빛에서 검토할 사업 이유가 충분했습니다.”그런 회사였다.대학 때부터 신제품이 나오면 찾아봤고, 이직 공고를 보기 전에도 다이어리를 샀다.그런데 저 입에서 들으니 내가 아는 종이달과 온빛이 보는 종이달이 처음 겹쳤다.“제가 여기 온 건 나중에 아셨고요?”“네.”“그런데 인수는 빨라졌어요?”“당신이 여기 온 걸 알고 순서를 앞당긴 건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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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회의록
나는 시환이 남겨 둔 자리로 지나갔다.계단을 오르는 동안 뒤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2층으로 가는 소리였다.‘출근. 진짜 출근.’사무실에 들어서자 은채가 고개를 들었다.“의장님, 출입증 책상 위에 놨어요.”“감사합니다.”시환은 창가로 갔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당겼다.나는 내 자리에 앉았다.저쪽에서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고, 이쪽에서는 거래처 메일을 열었다.모니터 위로 고개를 내밀면 바로 보이는 거리였다.나는 화면의 글자 크기를 키웠다.‘일해. 글자 봐.’▲목요일 아침, 규민 팀장이 내 책상 앞에 자료를 내려놓았다.“오늘 첫 브랜드팀 회의예요. 하반기 다이어리 출시 일정부터 볼게요.”종이 위에는 날짜가 빽빽했다. 지워진 날짜 옆에 새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시 화살표가 있었다.“어느 게 최신이에요?”“파일은 이게 최신인데요.”규민 팀장이 맨 아래를 짚었다.“어제 인쇄소에서 연락이 와서 여기만 바뀌었어요. 아직 반영을 못 했습니다.”나는 안경을 썼다.디자인 최종본 전달일과 종이 입고일 사이가 좁았다. 인쇄 시작일 옆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거래처에 보낸 일정도 이거예요?”“거래처마다 조금 달라요. 필요한 날짜가 다르거든요.”규민 팀장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들어 보였다.“그래서 오늘 한번 맞추려고요.”나는 자료를 모아 들었다.한번 맞춘다는 말은 쉬웠다.한번에 맞을지는 종이를 봐야 알았다.은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컵을 세었다.“대표님, 커피 드시죠?”“응. 진하게.”채 대표는 작업복 앞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고 회의 자리로 왔다. 은채는 규민 팀장과 나를 보고 손가락을 접더니 창가 쪽을 봤다.“의장님도 커피 드세요?”시환은 펼쳐 놓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옥수수차 있으면 그걸로.”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안 마신다.커피는 안 마신다.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낯설었다.“옥수수차가 어디 있어요.”은채가 탕비실 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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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명함 신청서
답장 칸에 감사하다고 썼다가 지웠다.잘 보셨다는 말에 감사하면 됐다. 틀린 답은 아니었다.그런데 기획자라는 글자를 다시 읽고 나니 손이 멈췄다.나는 화면을 끄고 가방 안에 넣었다. 걸음을 떼자 바로 다시 울렸다.은채였다.『김은채: 대리님, 새 명함 신청했어요. 이번에는 이름 맞아요. 제가 세 번 봤어요.』나는 골목 한쪽에 서서 답장을 썼다.『원지유: 감사합니다. 저도 받으면 세 번 볼게요.』이건 금방 보냈다.‘명함은 쉽네. 명함부터 하자.’▲5월 11일 월요일, 내 책상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은채가 의자를 밀고 왔다.“열어 보세요.”“제 거예요?”“대리님 이름이잖아요.”상자 옆면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원지유.일단 겉은 맞았다.뚜껑을 열자 흰 명함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맨 위의 한 장을 꺼냈다.『종이달 브랜드팀 대리 원지유』나는 이름부터 읽었다. 직함을 보고, 회사 이름을 보고, 다시 이름을 봤다.은채가 내 손을 살폈다.“세 번 보셨어요?”“네. 이번엔 저네요.”“다행이다.”은채는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먼저 받은 명함은 원지한이었다. 그때 수정액을 들고 달려온 사람이 이번에는 제대로 찍힌 글자를 내 손끝까지 따라 읽었다.“틀린 건 제가 회수했어요. 혹시 남아 있으면 주세요.”“서랍에 있어요.”나는 서랍을 열어 이전 명함을 건넸다. 은채는 빈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지한 씨는 퇴사 처리할게요.”“입사도 못 하셨는데요.”“이름만 출근하셨잖아요.”나는 웃다가 새 명함을 내려다봤다.온빛에서는 회사 이름 아래 대표이사 비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명함을 내밀면 상대는 거의 늘 비슷한 질문을 했다.대표님은 언제 오세요.대표님 일정은 어떻습니까.대표님께 전달해 주세요.이번 명함에는 내가 맡은 팀과 내 직함이 있었다.나는 한 장을 지갑에 넣고 나머지는 명함집에 옮겼다.은채가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오늘 가져가실 거죠?”“네. 처음 쓰겠네요.”“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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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사내 규정 안내문
은채가 시환의 뒤쪽을 봤다.카페 문에 붙은 메뉴를 읽는 눈이었다.“정말 없네요.”“확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시환이 짧게 답했다.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물 한 잔 마시고 나온 사람에게 더 물을 말은 없었다.그런데 은채에게는 있었다.“저희는 버스 타고 갈 건데요. 의장님도 돌아가세요?”“온빛으로 갑니다.”“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은채는 인사를 하고 내 옆에 붙었다. 시환은 길을 막지 않고 한 걸음 비켰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수고하세요.”“원지유 씨도요.”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은채가 내 팔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물도 차 마신 걸로 치나요?”“본인 기준인가 봐요.”“기준이 좀 넓으시네요.”나는 대답 대신 명함집이 든 가방을 눌렀다.내 외근은 끝났다. 저 사람 일정은 몰랐다.그렇게 나눠 두면 됐다.▲5월 13일 수요일, 나는 글벗문구에 보낼 확인 메일을 읽고 있었다.견본 전달일은 적었고, 선주문 수량은 보류로 남겨 뒀다. 매장별 출고 목록은 아직 오지 않았다.규민 팀장이 내 화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대로 보내 주세요. 물류비는 목록 받으면 같이 확인하고요.”“네.”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계단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잠시 뒤 사무실 문이 열렸다.각진 어깨에 짧은 머리.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안찬영이 문 앞에 섰다.찬영은 나를 찾자마자 허리를 숙였다.“선배님, 안녕하십니까.”은채의 의자가 멈췄다.나도 손을 멈췄다.‘아니. 선배님. 여기서.’“안녕하세요. 그렇게 크게 안 하셔도 돼요.”“알겠습니다.”대답도 컸다.규민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찬영이 다시 인사했다.“온빛 대표이사 비서 안찬영입니다. 의장님께 전달할 서류를 들고 왔습니다.”온빛 대표이사 비서가 의장님을 찾았다.맞는 말이었다. 한 사람이었다.나는 창가를 가리켰다.“저기 계세요.”찬영은 방향을 확인한 뒤 곧장 걸어갔다. 시환은 읽던 서류를 내려놓았다.“왔습니까.”“예. 검토 서류와 오늘 일정 변경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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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출장 품의서
나는 찬영의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다음 주 금요일이면 5월 22일이었다. 내 일정표에는 글벗문구에 견본을 보내는 일이 적혀 있었다. 시환의 저녁 일정은 없었다.없어야 맞았다.나는 이유는 모른다고 답하고,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전송한 뒤 휴대폰를 뒤집었다.‘확인. 내 일정 아님.’그런데 날짜는 외워 버렸다.안 외워도 되는 걸 외우는 데에는 5년 경력이 도움이 안 됐다.▲목요일 오후, 규민 팀장이 내 책상에 서류를 놓았다.『출장 품의서』“내일 종이 공장에 가요. 대표님하고 저, 대리님. 하루 자고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에요.”나는 출발 시간보다 먼저 방문 목적을 봤다.종이 재단과 포장 공정 확인. 하반기 다이어리용 종이 출고일 협의.“솔숲인쇄는요?”“출발 전에 들르려고요. 종이 공장 쪽하고 제가 통화는 했는데, 직접 보고 날짜를 잡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럼 인쇄소에서 필요한 입고일을 먼저 확인할게요.”“네. 공장 일정만 듣고 돌아오면 또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어서.”규민 팀장이 숙소 안내를 짚었다. 채 대표와 내가 한 방을 쓰고, 팀장은 따로였다.나는 교통편을 확인하다가 손을 멈췄다.참석자 칸 맨 아래에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우시환.“의장님도 가세요?”“생산 현장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대표님하고 얘기하셨대요.”창가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나는 그쪽을 봤다. 시환은 고개를 들었다.“대주주로서 생산 현장을 봅니다.”물어보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일정은 그대로 진행하십시오. 나는 참관만 합니다.”“차도 같이 타세요?”“가능하면요.”내가 규민 팀장을 보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명이면 한 차로 가도 돼요. 숙소도 방 하나 추가했고요.”나는 참석자 이름 옆에 확인 표시를 했다.금요일 저녁이 비었다는 말은 다음 주였다. 이번 출장은 이번 주였다.‘아니. 구분은 잘하네. 내가.’종이 한 장에 저 사람 이름이 들어온 것뿐인데, 준비할 물건이 갑자기 늘어난 기분이었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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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견적서
나는 재킷을 벗으려던 손을 멈췄다.조금 더 덮고 있었으면 한다는데, 얼마나 더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물으면 종이달에 도착할 때까지라고 답할 것 같았다.‘아니. 다 깼다고 했는데. 듣고도 저러네.’옆에서 채 대표가 뒤척였다. 나는 재킷을 무릎 쪽으로 당겨 옷자락이 넘어가지 않게 했다.“도착하면 드릴게요.”“네.”이번에는 시환도 더 붙잡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정리하다 만 연락처가 펼쳐졌다. 공장 담당자 이름 옆에 쓰려던 글자가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그 아래에 연락할 내용을 마저 적었다.재킷 소매가 손등에 닿을 때마다 글씨가 조금씩 어긋났다.▲5월 19일 화요일, 내 책상에는 견적서가 두 장 놓여 있었다.전량을 한 번에 받을 때의 운송비와 나눠 받을 때의 운송비였다. 종이 공장에서 보내온 자료였다.나는 안경을 쓰고 항목을 나란히 맞췄다. 출고를 나누면 차가 한 번 더 움직였다. 그 돈만 보면 한 번에 받는 편이 나았다.문제는 인쇄소였다.종이를 늦게 받으면 다음 작업에 걸렸다. 종이달 일정만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나는 견적서 옆에 인쇄소 공정표를 펼쳤다.규민 팀장이 내 책상 앞에 섰다.“추가 운송비 확인됐어요?”“네. 차가 한 번 더 오는 비용이에요. 포장비는 같고요.”“대표님께 같이 드리면 되겠네요.”“이것도 붙이려고요.”나는 공정표에서 입고일과 작업 시작일을 짚었다.“한 번에 받으면 이 날짜를 못 맞춰요. 비용만 보시면 왜 나눠 받는지 다시 물으실 것 같아서요.”팀장은 견적서 두 장을 번갈아 봤다.“제가 설명하려던 게 벌써 여기 있네요.”“결정하시려면 같이 보셔야 하니까요.”“대리님, 이런 거 잘 묶으시네요.”칭찬을 받았는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서류 아래쪽을 맞추고, 빠진 항목이 없는지 봤다.예전에는 시환의 책상에 올리기 전에 하던 일이었다.지금은 내가 확인한 생산 일정이었다.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할 사람도 나였다.나는 종이 맨 위에 짧게 적었다.『분할 입고 검토』“팀장님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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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업무 인수인계서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옆에 있겠다는 말에 괜찮다고 답하는 것도 이상했고, 알겠다고 답하면 자리를 내주는 것 같았다.결국 오늘 알려 줘서 고맙다는 말만 보냈다.서랍을 닫고 가방을 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 은채가 펼쳐 놓은 비교표를 한 번 더 봤다.내일 확인할 항목이 남아 있었다.내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이 많았다.▲5월 25일 월요일, 규민 팀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책상에는 금요일에 정리한 공정표가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창고에 내려갔다가 올라올 시간이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휴대폰를 확인했다.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규민 팀장이었다.다시 걸자 신호가 길게 가지 않았다.“대리님.”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팀장님, 전화하셨어요?”“네. 제가 오늘 회사에 못 갈 것 같아서요.”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도 작게 섞였다.“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어요. 조산 기미가 있다고 해서.”나는 의자를 당기려던 손을 멈췄다.“지금은 어떠세요?”“일단 지켜보고 있어요. 제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네. 회사 일은 말씀 주세요.”“대표님께는 연락드렸어요. 제 책상 위 공정표부터 봐 주실 수 있을까요?”나는 팀장 책상으로 갔다. 서류가 날짜순으로 놓여 있었다.맨 위에는 인쇄소에 확인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보고 있어요.”“오늘 종이 입고 시간 확인하고, 글벗 쪽 자료는 아직 보내지 마세요. 제가 조건표를 덜 붙였어요.”“공장 먼저 확인하고, 글벗 자료는 기다릴게요.”“네. 미안합니다.”“팀장님, 회사에 못 오시는 건 제가 적을 항목이 아니에요.”전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지금 말씀하신 일만 적었어요.”규민 팀장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럼 부탁할게요.”전화를 끊고 공정표를 내 책상으로 가져왔다.은채가 계단에서 올라오다 빈자리를 봤다.“팀장님 외근이세요?”“병원에 계세요. 오늘은 제가 연락받을게요.”은채는 손에 든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았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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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좌석 배치도
나는 결재란을 다시 봤다.브랜드팀장 대행.내 이름을 쓰면 되는 자리인데 펜을 쥔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확인한 일정만 공유하겠습니다. 바뀌는 건 따로 알려 드리고요.”“네.”“보고용이라고 해서 매일 새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팀에서 쓰는 표를 같이 보시는 겁니다.”“그걸 요청했습니다.”나는 결재란에 이름을 썼다. 서류를 시환에게 돌려주자 시환이 받아 들었다.돌아가는 방향이 낯설었다.‘확인. 내가 돌려주는 쪽. 적응하자.’시환은 서류를 자기 책상에 놓고 가방을 들었다. 나는 팀장 자리의 서랍을 닫기 전에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규민 팀장의 물건은 그대로 뒀다. 내 물건을 넣을 곳부터 비워야 했다.▲5월 28일 목요일, 나는 빈 상자를 발로 밀어 통로 밖으로 옮겼다.상자 안에는 책상에서 내려놓은 서류 받침과 다이어리가 들어 있었다. 안경은 이미 쓰고 있었다. 책상을 옮기는 날에도 일정 확인은 멈추지 않았다.은채가 돌돌 만 종이를 들고 올라왔다.“대리님, 이거 봐 주세요.”펼친 종이 위에 책상들이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 통로가 좁고, 복사기 앞에는 의자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나는 그 의자를 가리켰다.“이거 누구 자리예요?”“제 자리요.”“복사하려면 은채 씨가 일어나야 하네요.”“맞아요.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 제일 자주 일어나요.”은채가 의자를 안쪽으로 옮겨 그렸다.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규민 팀장 책상 앞에 서류를 내려놓으면 사람이 지나갈 자리가 없었다.나는 창고로 내려가는 문부터 회의실 계단까지 손가락으로 따라갔다.“이쪽은 비워야겠어요. 출고 서류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여기로 지나가니까요.”“서류장은 벽으로 붙일까요?”“문이 끝까지 열리는지만 봐 주세요.”은채가 일어나 서류장 문을 열었다. 문 끝이 내 상자에 걸렸다.둘이 동시에 상자를 봤다.내가 발로 다시 밀었다.“제 것부터 치울게요.”“저도 여기 옷 걸어 둔 거 뺄게요.”의자 등받이에 걸린 은채의 옷이 팔걸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은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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