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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last update 게시일: 2026-07-01 14:42:06

수혁은 그 표정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에선 늘 같은 순서였다.

거짓말, 분노, 그리고 침묵. 수혁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결과를 확정하는 눈이었다.

“선택하시죠.”

수혁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낡은 가죽 의자가 낮게 삐걱거렸다.

“지금 이 가격에 넘기고 가시든가, 아니면 사기 미수로 경찰서에서 커피 한 잔 하시든가.”

남자는 이를 갈며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종이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중고 자동차 250대가 수혁이 원하는 가격에서 한푼도 더 깎이지 않고 매입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를 살리는 일은 거래 하나를 이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더러워서 진짜… 독사 같은 새끼.”

문이 닫히자 대표실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창문 틈으로 매매 단지의 매캐한 공기와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끈적한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후, 수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고쳐 매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임원들과 실무 팀장들, 외부 자문 변호사인 정민우, 그리고 수혁이 이곳으로 좌천될 때 유일하게 따라온 직원인 한지우 대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방금 전 대표실에서 들려온 고성 때문인지, 아니면 스크린에 띄워진 붉은색 그래프 때문인지 회의실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수혁이 상석에 앉자마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는 말없이 레이저 포인터를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설명해 보시죠.”

수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난 분기,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매입량도 늘었고, 회전율도 업계 1위입니다. 그런데.”

포인터의 붉은 점이 그래프의 바닥, ‘0’에 수렴하는 영업이익을 짚었다.

“이익이 제로인 이유는 뭡니까? 차를 팔았는데 남는 게 없다는 게, 산술적으로 말이 됩니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관리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게… 노후 차량 매입 비중이 늘면서 수리비 지출이 예상보다 컸고, 악성 재고 처리에 따른 감가상각이 발생하여….”

“핑계 대지 마세요. 수리비가 매출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게 정상입니까? 부품을 금으로 갈아 끼운 것도 아닐 텐데.”

수혁은 답답함에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알 리가 있나, 나도 찾지 못하는 것을.

아니면, 알면서도 자기 주머니 채우느라고 모른척 한다든가.

“도대체 어디가 문제입니까? 매입입니까, 판매입니까? 아니면 관리입니까? 회사가 이렇게 기형적으로 굴러가는데, 원인을 아는 사람이 여기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수혁의 일갈에 팀장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살폈다.

다들 짐작 가는 곳은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회의실에는 숫자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는 한지우의 눈에는 수혁의 눈빛만 가득했고, 서류 위에 포개진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정민우 변호사가 조용히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 공기를 비집고 들어왔다.

“법리적으로 말씀드리죠. 이대로 결산 넘어가면 국세청 조사 들어옵니다. 매출은 높은데 이익이 없다? 이건 탈세 아니면 배임으로 의심받기 딱 좋은 구조예요. 대표님이 덤터기 쓰실 수도 있고요.”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인사팀장에게 물었다.

“박 팀장.”

“예, 대표님”

“채용 공고에 지원자가 있습니까?”

“꽤 많이 몰렸습니다. 지금 인사팀에서 1차 서류 필터링 중입니다. 쓸만한 친구들 추려서 실무 면접 올리겠습니다.”

추린다라…

수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들이 걸러낸 사람을 믿을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모범생이 아니라 회사를 뒤집을 사람이었다.

“아니요. 서류, 전부 가져오세요. 1차 심사부터 제가 직접 봅니다.”

“하, 하지만 대표님. 지원자가 수십 명입니다. 그걸 다 보시려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단호한 명령이었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가져오래잖아요.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인사팀장의 옆에 앉은 직원이 작은 소리로 채근을 했다.

“제가 직접 챙깁니다. 이상.”

회의는 수혁의 말로 정리됐다. 사람들이 도망치듯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은 잠시 남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뒤, 정민우가 남아서 수혁을 불렀다.

“재무제표 꼴 보니까, 버티는 것도 기적이다. 어딘가 구멍이 크게 뚫린 건 확실해 보이는데.”

수혁도 알고 있었다.

회사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문제는 아직 그 구멍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민우는 혀를 차며 수혁의 어깨를 툭 쳤다.

“여태까지 이걸 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네. 너답지 않게.”

“그래서 뽑으려고. 독한 놈으로.”

수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민우는 더 묻지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나갔다.

잠시 후, 수혁은 넥타이를 풀고, 인사팀 직원이 가져다준 서류 더미를 앞으로 당겼다.

하나, 둘.

지원자들의 화려한 스펙, 열정적인 자기소개.

하지만 수혁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다.

민우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재무제표가 엉망이라….”

수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찾던 그 칼이,

자신의 회사를 살릴 유일한 사람이 될지,

아니면, 모든 것을 뒤흔들 폭풍이 될지를.

모든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었다.

별것 아닌 선택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는 첫 번째 단추가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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