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여비가 싸늘하게 금영을 바라보며 가시 돋은 말을 내뱉었다."용태까지 회임하고 폐하의 총애까지 독점하신 분에게 신첩이 어찌 감히 불만을 품겠습니까?"바로 그때 금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신첩이 이리 여쭌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이리 건강하신데, 여덟 해 전이라면 회임하기에 훨씬 더 좋은 시기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그 귀한 아이를 아무런 연고도 없이 잃게 되셨는지... 문득 의구심이 생겨 여쭈었을 따름입니다."서 황후가 싸움을 부추기려 한다면, 금영 역시 그 판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다."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여비가 날카로운 눈으로 금영을 쏘아보며 물었다.금영이 나직하게 답했다."신첩이 실언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엄격히 다스리는 내궁에서 일반 사가의 후택처럼 음흉한 계략이 오고 갈 리 없겠지요."겉으로는 실언이라며 꼬리를 내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금영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없었다.서 황후는 금영이 무해한 겉모습 아래에 이런 칼날을 품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저 한없이 유순해 보이기만 했었는데, 좀 전의 말로 자신의 이간질을 완벽하게 되받아쳤다. 하긴 마냥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고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면, 애초에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서 황후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영비가 이 말을 하니, 본궁의 해묵은 과오가 떠오르는구나."황후는 이어서 여비를 돌아보며 나직이 탄식했다."당시 본궁이 태묘로 기도를 올리러 떠나지 않고 내궁을 지켰더라면, 여비가 그런 참담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서 황후의 얼굴은 금세 뼈아픈 자책으로 물들었다. 여비는 감동한 듯 서 황후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마마, 자책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얼마나 신첩을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비는 미색은 빼어났으나, 아름다
물론 안빈처럼 포기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품계가 낮은 이들 중에는 대개 평온하게 세월을 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황제가 후사를 보는 데 전혀 문제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당연히 다시 경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금영을 향한 이 적의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금영의 온화한 반응에 안빈은 살짝 주춤하며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가르침이라니요,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편히 분부해 주십시오."안빈이 태도를 전환하자, 금영도 미소로 화답했다.그렇게 비빈들과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던 사이 여비가 도착했다. 하지만 현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잠시 뒤, 드디어 서봉전 문이 열리는 동시에 환옥이 나지막이 알렸다."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조금 늦게 기침하셨으니, 양해 바랍니다."그렇게 서 황후를 마주한 순간이었다.팔선의자에 기댄 그녀의 모습에는 어제의 화려하고 눈부신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변한 안색은, 마치 양기를 전부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몹시 초췌해 보였다.어제 일은 그녀로서도 상당히 타격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체면은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서 황후가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다니, 어딘가 이상했다."신첩, 황후마마를 뵙습니다."금영이 마음속 의문을 눌러 담고는 예를 올렸다.그러자 서 황후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어서 일어나거라. 여봐라, 얼른 영비가 앉을 의자를 가져오거라. 홀몸이 아니니,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여비처럼 되는 일이 없도록..."거기까지 말한 서 황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여비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올해 여덟 살은 되었을 텐데..."금영의 시선이 여비에게 향했다. 후궁들의 외모에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여비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치 설화 속 선녀 같은 외모였다.여비는 서
금영은 억울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유혹이라니... 내가 언제 유혹했다고...'하지만 그 억울해하는 표정은 되레 황제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꼴이 되었다.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금영의 아랫배로 향했다.그녀의 몸은 평소처럼 가늘고 여려 한 손에 잡힐 듯 가냘펐다. 만약 진맥으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 작은 몸에 자신의 피붙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본래 황제는 욕정에 쉽사리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금영에게만 예외로 자꾸만 흔들렸다.그의 깊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린 금영은 괜히 마음이 살짝 조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얼른 화두를 바꾸었다."폐하, 시각이 늦었습니다. 얼른 조회에 드셔야지요."황제는 더 머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이상 함께 있다가는 정말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금영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황제를 배웅한 뒤, 해수를 바라본 금영이 입을 열었다."해수야, 나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이제 서봉전에 가서 황후마마께 문안 인사 드려야지."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입궁 첫날부터 황후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랬다가는 그녀에게 총애만 믿고 교만한 후궁이라는 오명이 붙을 것이다.금영은 봄에 어울리는 산뜻한 색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안 그래도 고운 얼굴에 밝은 옷까지 더해지자, 아주 후광이 비춰지는 듯했다.서봉전에 도착하자, 몇몇 비빈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품계가 높지 않은 이들이었다.그들은 금영을 보자, 잇따라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영비마마를 뵙습니다."금영은 무척 온화하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네. 어서들 일어나게."비빈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총애를 한껏 입고 입궁한 영비가 이토록 겸손한 모습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이때, 얼굴이 유독 고운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영비마마, 신첩들 모두 마마보다 품계가 낮은데 어찌 이
'특히, 죽은 그 천것이 가장 심했지...'누구를 떠올린 것인지, 서 황후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그 바람에 짓눌린 배명월의 뺨에 상처가 나며 두 줄기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서 황후가 분부했다."약을 가져오거라."환옥이 서둘러 약함을 받쳐 들고 다가오자, 그제야 서 황후는 배명월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호갑을 끼지 않은 손가락으로 흰 약고를 조금 찍어 얼굴에 펴 발라주었다.서 황후가 작게 탄식했다."참으로 가여운 모습이구나. 본궁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그러더니 배명월을 바라보며 물었다."많이 아프냐?"배명월은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불안해하며 답했다."아... 아닙니다. 아프지 않습니다."서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프지 않다니, 다행이구나."하지만 돌연 목소리가 의미심장해졌다."이따가 태자가 묻거든,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잘 알겠지?"배명월이 몸을 떨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마, 마를 먹으면 원래 피부가 부어오르는데… 제가 실수로 마가 든 다과를 먹고 탈이 났다고 아뢰겠습니다. 그래도 하루만 지나면 가라앉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렇게 태자 전하를 안심시키도록 하겠습니다.”배명월의 대답에 서 황후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배명월을 부축한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착하구나. 하지만 내가 널 벌한 이유는 잘 기억하길 바란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거라."배명월은 겁에 질린 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예, 절대로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서 황후가 미소 지었다."되었다. 이제 나가서 태자를 보자꾸나."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한 사람은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뺨이 가득 부어오른 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더라면 혹독한 괴롭힘이라도 당한 줄 오해했을 것이다.평소 태자였다면 이 모습을 보는 즉시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넋을 잃은 채 배명
눈물이 저절로 고였다. 배명월은 너무나도 억울했다."황후마마, 배금영의 이간질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주십시오! 그년은 아주 오래전부터 폐하께 빌붙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그러자 서 황후가 차갑게 받아쳤다."설령 그 아이가 진작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한들, 폐하께서 어떤 분인지 모르느냐? 약에 당하지 않고 그 아이를 품을 분 같으냐?"이제 모든 의문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날 밤, 황제가 처소로 목욕물을 세 번이나 들이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금영이었던 것이다.어쩐지 배명월이 금영의 몸에도 미향이 묻어 있을 거라며 행적을 추궁했을 때, 황제가 이례적으로 직접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은 진상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철저히 금영의 뒤를 봐주고 은폐하기 위함이었다.서 황후는 황제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체면과 명성을 중히 여기는 그가 장차 태자비가 될 여인을 함부로 건드렸을 리 없었다. 미향이 그의 이성을 어지럽힌 게 틀림없었다.배명월이 참지 못하고 변명했다."마마, 전 정말로 그날 미향을 쓰지 않았습니다!"그녀가 쓴 것은 미약이었다.배명월도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금영은 자신이 미약을 쓴 것을 빌미 삼아 미향을 더했고, 황제를 유혹한 것이 분명했다.참으로 깊고도 무서운 계략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서 황후에게 배명월의 해명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당장 어딘가에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다. 이 일이 정말 배명월이 원인이었든 아니었든, 오늘 그녀의 눈에 띈 이상 재앙을 피할 길은 없었다."본궁의 말에 감히 변명하려 들다니, 당장 더 매를 쳐라!"온화했던 서 황후의 얼굴에 매서운 독기가 서렸다.배명월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토록 온화하고 다정했던 서 황후가 사석에서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줄은 말이다.궁녀 조씨는 눈물에 젖어 더 애처로워진 배명월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
금영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입구를 바라봤다.곧이어 황제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황제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금영이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에 팔을 붙잡으며 막아섰다."회임했으니, 앞으로도 굳이 짐에게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서 황후가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폐하, 정무 처리하시느라 바쁘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연회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음을 머금은 채 금영을 쳐다봤다.서 황후는 그 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제가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것은 금영 때문이었다. 속살이 씹히며 입 안에서 비릿한 핏맛이 퍼졌다."그런데 좀 전에 무슨 일 있었느냐?"연회장에 막 들어섰을 때, 금영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망설임을 떠올린 황제가 물었다.그러자 금영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마마께서 신첩에게 차를 내리셨는데, 호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으나... 요즘 통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여기에 차까지 마시면 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요."황제가 눈을 들어 서 황후를 바라봤다."황후, 앞으로 영비의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네."서 황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당연합니다. 영비가 귀한 용손을 품었으니, 각별히 살피겠습니다."하지만 금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은 아마 서 황후에게 수천 번은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이다.그렇게 황제가 나타난 덕에 연회는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고, 모두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이때, 금영이 곁에 선 황제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바쁘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오늘은 못 오실 줄 알았는데..."황제가 바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연회장에서 홀로 비빈들에게 둘러싸일 금영이 떠오르자 서둘러 일을 처리했다.거기에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볼 것이라 순진하게 말하던 모습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