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열은 지금 안지영에게 알린 걸 후회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고 거기에다 나씨 가문 남자들의 개 같은 성격은 괜히 엮이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그동안 나태웅을 대할 때도 늘 조심조심하고 혹시라도 그가 예전에 안지영에게 대했던 집요한 기세로 자기한테 달려들까 봐 두려웠다.지금 홉스랑 안씨 가문 때문에 숨이 막히는데 나태웅까지 더 얽히면 견딜 수가 없었다.왜냐하면 나태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빨리 가서 가져다줘요.”“안 가!” 나태웅은 고민하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계단이 천여 개지? 절대 안 올라가.”“당신이 남자잖아요.”“남자면 피곤하다고 하면 안 돼?”나태웅은 그대로 받아쳤다.안열은 할 말을 잃었다. 있지, 물론 있지만...“왜 안 대표님이 도련님을 택하고 죽어도 당신 깊은 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뭐라고?” 나태웅의 목소리가 순간 싸늘해졌다.“아주 신사답지 못해서 그래요!”이 말을 들은 나태웅은 숨결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이 여자 진짜!”“가져다주면 신사로 인정해 줄게요. 어서 가요.”안열은 이미 보화사 정문 앞에 도착해 차 문을 닫고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열의 엉뚱한 말에 휴대폰 너머의 나태웅은 냉소를 지었다.“내가 네 신사상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거야?”‘신사? 웃기고 있네. 그딴 게 뭐가 필요 있어? 안지영 같은 여자는 머리가 둔해서 신사여도 애초에 상대도 안 됐을 거야. 신사라니...’“도대체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안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안열이 지금 뛰어 들어가도 중간에 고은지를 막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문제는 나태웅이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그도 역시 산에서 내려오게 되기 때문이다.이 상황은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안열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휴대폰 너머 나태웅은 이를 악문 채 단호하게 내뱉었다.“안 가!”“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왜 이래요? 짜증 나게.”이런 고집불통 같은 놈은 안 미울 수가
세상일이란 정말 우연이 겹쳐야 성립되는 법이다.고은지는 어렵게 나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 갔는데 결국 나태웅도 그곳에 왔다.“방법을 생각하라고요? 지금 내가 어떻게 방법을 생각해요?”안열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배어 있었다.안지영이 말했다.“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열이 씨, 부탁할게요. 제발 방법을 생각해 줘요.”말투에는 이미 간청이 담겨 있었다.사실 이 일은 안지영과 관련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태현 개 같은 인간이 나중에 정말로 고은지를 괴롭히게 된다면 고은영이 골치 아프게 되기에 안지영은 그걸 차마 내버려 둘수 없었다.“알겠어요.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안열은 다소 난처하게 말했다.“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요.”안지영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 묻어 있었고 안열은 침묵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안지영에게 통보하는 게 안열의 한계인데 안지영이 안열에게 방법까지 찾으라고 했다.“어떻게든 고은지가 나태웅 개 같은 남자를 만나게 해서는 안 돼요.”안지영이 다급히 말했다. 나태웅이 알게 되면 나태현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알겠어요.”안열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사실 안열은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너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하지만 안지영이 이미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안열은 안지영과 통화를 끝낸 뒤 운전 중이던 디예에게 말했다.“차를 돌리세요.”디예는 안열이 강성 사투리로 통화했기에 방금 통화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강성 방언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그러나 안열이 차를 돌리라고 말하자 디예의 얼굴빛이 굳었다.“이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말했잖아요. 돌리라고!”안열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안지영에게 알리지 말 걸 그랬다. 이제 와서 이 일을 그냥 둘 수도 없게 되었다.디예는 잠시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하지만 안열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차를 돌려 돌아갔다.차
‘무슨 일이야? 잠깐...’안열은 두 손을 꽉 쥐고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나씨 가문의 일은 사실 안열과 상관이 없다. 나씨 가문이든 고은지든 안열과 단 한 치의 관계도 없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안열은 곧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일련의 번호를 눌렀고 전화를 걸었다.안열은 안지영과 연락을 끊은 지 오래여서 오랜만이다. 강성에서 자취를 감춘 뒤로 두사람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안열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안지영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안열이 고은지라는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안지영은 손으로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장선명이 방에 없는 걸 확인한 후 안지영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향했다.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나태현은 미쳐가고 있는데 고은지의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식은...발코니에 나온 안지영의 얼굴은 긴박감으로 가득했다.“뭐라고 했어요? 고, 고은지요?”“맞아요. 고은지요.”안지영은 할 말을 잃었다.‘고은지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동안에 나타났다고? 안열이가 직접 봤다고 했으니...’안지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혹시 잘못 본 게 아니에요?”“잘못 본 게 아니에요. 착각할 리 없어요.”안열은 확신이 찬 말투로 말했다. 안열은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고 게다가 고은지를 몇 번 본 적이 있어 착각할 리 없었다.안지영은 또다시 침묵했다. 그렇다면 고은지가 동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그동안 고은영은 고은지 때문에 얼마나 잠 못 이루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는 걸 안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은지가 동안에 나타난 것이다.“정말 잘못 본 게 아니죠?”안지영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동안 강성은 고은지 때문에 이미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진 상황이었다. 지씨 가문은 파산했고 나태현은 나씨 가문과 절연까지 했다.있을 때는 별 영향이 없어 보였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강성 전체가 엉망진창이 된 것
안씨 가문 사람들이 안열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 가족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인연을 끊는 게 낫다. 괜히 이어가다가는 강성에서 쌓아온 자신의 지혜와 자존심만 짓밟히게 될 뿐이다.게다가 안열이 홉스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나태웅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아직 조사하지 못했어요.”진이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못 찾았다는 그 한마디에 나태웅의 얼굴빛이 다시 굳어졌다.안열이 왜 그렇게까지 홉스의 말을 따르는지 알 수 없었고 도대체 무슨 약점을 홉스에게 잡힌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그래서 나태웅이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안열은 그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이 일에 끼어들지 마요. 휘말리면 당신한테도 좋을 거 없어요.”그 말만 남기고 그 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일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나태웅은 끝내 알지 못했다.“죽일 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봐.”나태웅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말했다.예전에는 안지영 일 때문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해, 결국 안지영이 장선명을 찾아가 버렸지만 지금은 자신이 먼저 다가갔는데도 안열의 태도는 이 모양이었다.이 생각만 하면 나태웅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진이훈은 나태웅의 기세에 입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태범이 재촉하고 나태웅은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더더욱 불안했다.지금 동안은 어수선하지만 강성 쪽이라고 상황이 나을 것도 없었다.진이훈은 나태현이 아예 나씨 가문과 절연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전에 강성에 있을 때는 분명 고은지한테 잘해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안열은 보화사에서 나오던 길이었다.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문득 익숙한 그림자가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처음은 얼떨떨했지만 곧 자세히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남자의 등판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디예가 이미 차 문을 열어주고 있
나태웅은 화가 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나태웅은 안열을 죽일 여자라고 속으로 욕했고 왜 그녀의 세상은 이렇게 뒤틀려 있고 주위 사람들도 전부 미친놈들이라고 의문했다. 그리고 요즘 안열의 가족들이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면 저게 무슨 가족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나태웅이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안열은 따라가지 않았다. 나태웅은 도대체 이 썩은 곳에 뭐가 아쉬워서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여기가 집이라고 하기에는 여기서 안열을 가족으로 여긴 사람은 없고 오랫동안 돌아오지도 않았다.그런데도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열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한다. 마치 안열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고 모두가 죽여 없애야 할 악인 것처럼.진이훈은 나태웅 얼굴의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는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둘째 도련님, 회장님께서 또 전화하셨어요. 즉시 강성으로 돌아오시라고 해요.”원래도 어두웠던 나태웅의 표정은 진이훈의 말을 듣자 한층 더 굳어졌다.고은지 때문에 나태현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해의 원한까지 따져보면 자신의 아버지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짜 원망해야 할 사람은 자신의 할아버지다.나태현은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그분께 못 돌아간다고 전해.”“단집사가 회장님께서 이미 중환자실에 계신다고 했어요.”그 말을 들은 나태웅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안열의 처지를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그해 그 교통사고는 도대체 어디까지 조사된 거야? 그리고 안열...”교통사고!홉스와 안열의 언니 안이연의 결혼식 전날 안이연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홉스는 안열의 짓이라 믿고 그 뒤로 줄곧 그녀를 쫓아 죽이려 했다. 그리고 안열이 정말 홉스를 좋아하는지, 이런 일들은 나태웅에게 전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하지만 나태웅은 안열이 홉스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안열의 성격상 그런 미친놈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리고 나태웅의 눈에 홉스는 그냥 변태였다.그럼 안열한테 복수하는 건가? 이렇게 가다 안열
하지만 안씨 가문의 위아래를 통틀어 안열을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그들은 모두 안열을 증오했다.그런 증오를 안열은 이미 그해에 뼈저리게 느꼈다.원래 이곳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알았을까? 안열의 마음을 유일하게 흔들었던 남자 홉스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비록 안열이 동안에서 도망쳤다 해도 나태웅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안열의 목소리를 듣고 나태웅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나태웅은 무심코 안열의 배를 보았지만 옷이 헐렁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나태웅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날 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이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지금 당장 돌아오라 하세요.” 디예가 불당 문밖에 나타났고 말투는 공손했으나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그해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안열을 극도로 혐오할 것이다.홉스의 비서인 디예조차 안열을 증오했고 모든 걸 망쳤다고 여겼다.디예의 목소리를 들은 안열은 눈을 떨구고 말없이 있었다.나태웅은 안열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슬픔을 느끼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나태웅은 고개를 돌려 디예를 노려보았다.“네 개 같은 주인에게 전해. 안열은 안 돌아간다고!”“너!”개 같은 주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디예의 눈빛이 즉시 살기로 번뜩였다.나태웅을 바라보는 디예의 눈은 음울하고 사나웠다.하지만 지금 나태웅이 동안에서의 지위를 고려했기에 디예는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디예는 안열의 등을 보며 말했다.“이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노하시면 그 대가는 감당 못 하실 거예요.”말에는 날카로움과 위협이 깔려 있었다.이런 암시적인 경고에 안열은 눈을 뜨고 머리를 들어 부처상을 마주했다.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안열은 극도로 참고 있었다.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무거움을 억누른 채 몸을 돌렸다.겨우 한 발 내딛자 손목이 나태웅에게 거칠게 붙잡혔다.“안열!” 글자를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나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