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경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그녀는 진정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진정훈이 말하는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으니 말이다.“아니,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진유경은 끝까지 믿지 못했다.“진씨 가문이 이렇게 된 건 우리 어머니께서 그때 힘들게 일궈낸 덕분이야.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모든 걸 너에게 주려고 하셨어.”‘어머니는 그 시절 너무 힘든 일을 하며 병이 났는데 친딸에게 남기려던 재산도 남편과 시어머니가 대신 나눠 가져버렸지. 그래서 할머니가 아버지와 박경숙을 계속 연결해 주려 했던 거라고!’사실 박경숙이 친딸이고 진유경은 박경숙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진유경은 두려움에 휩싸인 채 진정훈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숨겨진 숨 막히는 진실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진정훈이 갑자기 그녀와 할머니를 집에서 내쫓으려 한 이유도 이제야 알겠다.“오빠, 제발 저랑 할머니를 이렇게 내몰지 마세요.”진유경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진실을 몰랐을 때는 진정훈의 화가 풀리면 다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게 된 그녀는 진정훈이 다시는 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어쩌면 그녀와 할머니는 영영 이 월셋집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유경의 애원에 진정훈은 일어서며 말했다.“가서 할머니에게 전해.”‘뭘 전하라는 거지?’말을 하려다 만 진정훈은 고개를 숙인 채 진유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만약 그때 내 어머니한테 조금이라도 잘 대해줬다면 나도 이렇게 냉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인과응보야. 그러니까 늙었다는 핑계 대지 말라고 전해.”진유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진정훈의 눈빛에는 온통 혐오가 가득했다.“그리고 앞으로는 여기도 오지 말고.”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그녀에 대한 경고였다.“전에 네가 은영이한테 그렇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봐줬을 지도 몰라.”하지만 진유경 같은 사람은 이
진유경은 가슴이 계속 울렁거렸다. 고은영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가득했다.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고은영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몰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왜 이렇게 된 거지?’...진정훈은 아침에 나태현 집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진유경이 란완 리조트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왔다.그가 도착했을 때, 진유경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고은영은 없었고 란완 리조트 사람들에서고 진유경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진정훈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고 이내 눈동자에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오빠?”“여기서 뭐 해?”진정훈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어조에서 위험함을 느낀 진유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그녀는 당황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고은영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진씨 가문 사정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진정훈 앞에서는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진정훈은 그녀 앞에 와서 쪼그리고 앉아 긴 손가락으로 진유경의 턱을 들어올렸다.그렇게 두 눈이 마주치고 진유경은 진정훈 눈동자 속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를 뚜렷이 보았다.‘한때 날 그렇게 아껴주던 오빠가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을까?’순간, 진유경은 진정훈의 시선에 머리가 얼얼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조여오는 공기에 숨이 막혀서 외쳤다.“오빠!”“너랑 할머니가 왜 집에서 나가야 했는지 알아?”“모, 모르겠어요!”진유경은 정말 몰랐다.그날,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할머니와 그녀의 물건을 쓸어냈으니 말이다. 처음엔 단지 고은영에게 지분만 돌려주면 된다고 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쫓겨나게 되었다. 진유경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몰랐고 진정훈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그녀는 진정훈에게 물었다.“오빠는 저랑 할머니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전 친여동생이 아니지만 할머니는 친할머니잖아요?”‘설령 오빠가 고은영
돈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진유경은 얼굴이 굳어졌다. 고은영의 눈빛에는 참지 못할 분노가 일렁였지만 그녀는 애써 감추고 있었다.진유경은 약간 딱딱하게 말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배준우 씨 아내시잖아요.”‘강성의 최고 명문가로 시집온 사람인데 돈이 없다고? 그냥 주기 싫은 거면서...’고은영의 이런 태도에 진유경은 더 분노가 치밀었다.“은영 씨 친할머니잖아요.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고요. 정말 그냥 보고있기만 할 겁니까?”친할머니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고은영의 신경을 건드렸다.고은정은 이번 생에 가족과의 인연이 너무나도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량천옥 사건도 그녀에게 가혹한 교훈을 주었고 진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진정훈과 진윤만이 그녀에게 확고한 태도를 보였고 진유경의 본성을 알지 못했다면 진호영은 지금까지도 양녀와 친여동생 사이에서 양녀를 택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할머니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유경 편이었다. 진유경이 친할머니라는 단어를 쓰자 고은영은 코웃음을 쳤다.“제 친할머니인 건 맞지만 저 혼자만의 친할머니인 건 아니잖아요. 어릴 때 누구를 제일 많이 아꼈으면 그 사람이 책임지면 되는 거죠.”‘갑자기 달려와서 1억을 요구한다고?’만약 처음부터 진씨 가문에서 고은영을 찾았으면 지금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할머니가 처음부터 그녀를 받아들였다면 둘째 오빠와 첫째 오빠도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진유경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더욱 초조해졌다.“아무도 할머니를 돌보지 않는 건 다 은영 씨 때문이에요.”“둘째 오빠랑 셋째 오빠가 할머니한테 막 대하는 것도 다 은영 씨 때문이잖아요.”진유경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씨 집안은 원래 잘 살았다. 아버지의 사랑, 할머니의 보살핌, 형들의 총애까지 받으면서 자랐다.하지만 고은영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졌다. 두 오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잃었고 유일하게 그녀 편을 들어주던 할머니가 갖고있던 돈도 둘째 오빠가
고은영이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끝에는 울먹임까지 섞여 있었다.배준우가 물었다.“무슨 일인데? 은지 씨, 어디 있는데?”“공항 가는 길에 있어요. 방금 전까지 통화 중이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답을 안 해요.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아요.”‘교통사고라니...’강성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산길이 한 구간이 있었는데 그 길은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 날씨는 고은지가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눈도 내리고 얼음이 얼 정도로 매우 추웠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고은영은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전화 너머로 배준우는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고은영을 다독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당장 사람 보내서 확인할게.”“빨리요.”전화를 끊은 고은영은 집사를 향해 말했다.“집사님, 차를 준비해 줘요. 저도 갈래요.”“알겠습니다, 사모님.”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차를 준비하러 갔다. 고은영은 아직도 전화를 끊지 못한 채였다.집사가 돌아서자 그녀는 다시 전화기 너머로 외쳤다.“언니, 언니, 내 말 들려?”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별장 문을 나섰다. 밖은 생각보다 너무 추웠고 그녀가 입은 옷은 날씨에 비해서 너무 얇았다.하지만 고은정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빨리 고은지를 찾으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유경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급히 다가왔다.“은영 씨, 드디어 절 만나러 나와주신 건가요?”고은영이 반응도 하기 전에 진유경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고은영은 고은지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냉랭한 표정으로 손을 뺀 뒤 말했다.“뭐라고요?”“은영 씨, 미안해요. 그동안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찾으러 온 거예요. 할머니께서 아프셔서 수술비 1억이 필요하거든요.”진유경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고은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서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유경임을
‘사실 확실한 거지만...’“이번에 가서 희주를 찾지 못 하더라도 난 강성을 떠날 거야.”“그래? 그럼 우린...”“어제 원래 너랑 같이 샤브샤브를 먹으려고 했거든? 근데 윤설 씨가 아이를 낳았다며. 너도 많이 걱정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못 불렀어.”‘어젯밤이라고? 그래서 어제 나한테 만나자고 했던 거구나?’고은영은 어제 밤새 병원에 있었고 오늘 아침에야 집에 돌아왔다.“그럼 내가 공항으로 갈까?”고은영은 고은지가 강성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고은영이 강성에 있는 대학을 고른 건 안지영 덕분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은지가 곁에 있어 든든했기 때문이었다.“오지 마. 비행기 시간이 다 됐어. 이미 늦었어.”“그럼 좀 일찍 전화하지 그랬어.”“게다가 오늘 눈이 와서 길이 위험해.”고은지는 고은영이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고 급하게 공항에 오지 못하게 일부러 시간을 맞춘 것이다.“일부러 그런 거야?”“은영아, 너만 잘 지내면 돼.”고은지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럼 나태현 씨랑 량이모 사이 일은요?”고은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고은지가 지금 떠나는 게 또 다른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됐던 것이다.나태현은 나태웅과 마찬가지로 고집이 센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고은지가 천락 그룹에서 뭘 했는지 안 봐도 뻔했기에 만약 그 일로 천락 그룹에 이 손해를 보면 나태현은 절대 고은지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만약 나태현이 정말로 고은지를 괴롭히려 한다면 차라리 고은지가 강성에 남아있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배준우에게 부탁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고은지는 고은영이 걱정하는 바를 알고 대답했다.“다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하지만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은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전화 너머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쿵’ 하고 무언가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전화 너머로도 그
고은지는 강성을 떠났다. 숨 막히고 온통 가시투성이였던 이 도시에서 벗어났다.“어디로 갔는데요?”나태현이 물었다.“그건 말해줄 수 없어.”량천옥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과거의 일들이 다 밝혀졌으니 이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인연도 남아선 안 됐다. 고은지도 분명 그걸 원할 것이었다. 이젠 나태현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니 그녀를 찾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나태현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그럼 강성을 떠났다는 거예요?”“태현아, 나랑 너희 할아버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너랑 은지가 왜 이어져서는 안 되는지 너도 알았겠지.”량천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자꾸 고은지의 행방을 묻는 걸 보며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하고 있었다.나태현은 전부터 고은지에게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증오 때문에 그 감정을 억눌러왔던 것이다. 이제 진실이 밝혀졌기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전처럼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나태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량천옥의 호흡이 깊어졌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이제 다 밝혀졌어. 그렇게 오래 짓눌러온 과거의 진실이 드디어...’그녀 자신도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인정했고 딸의 앞날이 부디 평온하길 바랐다. 량천옥은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태현의 증오를 낳았던 그 끔찍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은지도 이제는 나태현, 그리고 그 가문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다....그 시각, 나태현은 차에 올라타 담배를 껐다. 그리고 앞좌석에 있는 양지호에게 말했다.“공항으로 가.”“네, 알겠습니다.”양지호의 대답과 함께 차는 단지를 빠져나갔다.2층 창가에 선 량천옥은 그 차가 멀어지는 걸 끝까지 바라봤다.그녀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당당히 마주하려 했지만 그래도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날의 일을 고백하는 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