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진이훈은 당장이라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전 다친 데다 방금도 한번 올라갔던 터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태웅이 진이훈을 보며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괜찮겠어?”“저...”“됐어. 차라리 내가 갈게!”나태웅은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평생 이렇게 지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장담했다. 예전에 안지영 때문에 비슷한 적이 있긴 했다. 그때는 대협곡에서 비까지 쏟아지던 때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오르막길이 완만한 도로였으니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하지만 이 천국의 계단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나태웅은 씩씩대며 계단을 올라갔고 진이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나태웅의 속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안지영만 쫓아다니더니 지금은 안열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한편, 안열은 몸이 원래 불편했지만 안지영의 부탁 때문에 이를 악물고 뒤따라 올랐다.아마도 이현이 고은지를 안고 가느라 속도가 느렸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잡을 수 있었다.하지만 말을 걸기도 전에 이현은 고은지를 안은 채 갑자기 발길을 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현의 얼굴은 다급함이 가득했고 눈빛에도 절박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은...그 순간 안열은 확실히 보았다. 바로 고은지였다. 고은지와 함께 있는 사람은 이현이었다.고은지의 얼굴은 핏기가 전혀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두 사람은 안열과 스쳐 지나갔고 이현은 바람처럼 고은지를 안고 급히 내려갔다.이현은 안열을 알아보지 못했다. 안열은 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사실 쫓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고은지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안열은 제자리에 서서 몇 번이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전 너무 급하게 달려왔던 탓이었다. 게
고은지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아 몇 걸음 걷다가는 멈추어 숨을 고르고 다시 걷다 또 쉬기를 반복했다.이때 이현은 고은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꼭 보화사에 오겠다고 하는 거야?”요즘 들어 고은지는 의식이 돌아왔지만 몸 상태는 좋지 않아 늘 졸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기어이 보화사에 가겠다고 하자이현은 고은지의 몸이 걱정돼 외출을 막으려 했지만 고은지는 고집을 부렸다.이현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보화사가 아주 유명하잖아요. 강성에 있을 때부터 이 절간은 영험하다고 들었어요.”이현은 대답 대신 침묵했고 그 말에 이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래서 누구를 위해 기도하려는 거야?”“이현 씨와 희주를 위해서 기도하려고요.”이 순간 고은지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고은지의 몸은 원래 큰 상처를 입어 큰 병을 앓았기에 지금은 더욱 쇠약해진 게 느껴져 언제라도 죽음이 찾아올 듯한 위기감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왜 너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이현은 단숨에 고은지를 안아 올렸다. 고은지는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이현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내려놔요. 여기는 밖이에요!”그러나 이현은 고은지를 꼭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얌전히 있어. 움직이지 마. 지금 네 몸은 무리하면 안 돼.”사찰의 대문에서 계단 입구까지는 약 1킬로미터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무려 999보나 걸어야 했다.이현의 목소리 속에 묻어나는 다정함을 느끼면 고은지의 가슴은 더욱 쓰라렸다.이현의 이 다정함에 고은지는 차마 마음을 내어줄 수 없고 감히 내어줄 수도 없었다.그렇게 이현은 고은지를 안은 채 안으로 향하는데 고은지가 무언가 말하려다 이현의 턱 밑에 어슴푸레 드러난 수염을 보고는 결국 말을 삼켰다.“이현 씨, 이럴 필요 없어요.”고은지가 깨어난 뒤 이현은 강성에서 고은지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게 되고 그녀를 무사히 빠져나오게 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은지의 가슴은
안열은 지금 안지영에게 알린 걸 후회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고 거기에다 나씨 가문 남자들의 개 같은 성격은 괜히 엮이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그동안 나태웅을 대할 때도 늘 조심조심하고 혹시라도 그가 예전에 안지영에게 대했던 집요한 기세로 자기한테 달려들까 봐 두려웠다.지금 홉스랑 안씨 가문 때문에 숨이 막히는데 나태웅까지 더 얽히면 견딜 수가 없었다.왜냐하면 나태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빨리 가서 가져다줘요.”“안 가!” 나태웅은 고민하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계단이 천여 개지? 절대 안 올라가.”“당신이 남자잖아요.”“남자면 피곤하다고 하면 안 돼?”나태웅은 그대로 받아쳤다.안열은 할 말을 잃었다. 있지, 물론 있지만...“왜 안 대표님이 도련님을 택하고 죽어도 당신 깊은 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뭐라고?” 나태웅의 목소리가 순간 싸늘해졌다.“아주 신사답지 못해서 그래요!”이 말을 들은 나태웅은 숨결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이 여자 진짜!”“가져다주면 신사로 인정해 줄게요. 어서 가요.”안열은 이미 보화사 정문 앞에 도착해 차 문을 닫고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열의 엉뚱한 말에 휴대폰 너머의 나태웅은 냉소를 지었다.“내가 네 신사상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거야?”‘신사? 웃기고 있네. 그딴 게 뭐가 필요 있어? 안지영 같은 여자는 머리가 둔해서 신사여도 애초에 상대도 안 됐을 거야. 신사라니...’“도대체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안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안열이 지금 뛰어 들어가도 중간에 고은지를 막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문제는 나태웅이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그도 역시 산에서 내려오게 되기 때문이다.이 상황은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안열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고 휴대폰 너머 나태웅은 이를 악문 채 단호하게 내뱉었다.“안 가!”“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왜 이래요? 짜증 나게.”이런 고집불통 같은 놈은 안 미울 수가
세상일이란 정말 우연이 겹쳐야 성립되는 법이다.고은지는 어렵게 나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 갔는데 결국 나태웅도 그곳에 왔다.“방법을 생각하라고요? 지금 내가 어떻게 방법을 생각해요?”안열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배어 있었다.안지영이 말했다.“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열이 씨, 부탁할게요. 제발 방법을 생각해 줘요.”말투에는 이미 간청이 담겨 있었다.사실 이 일은 안지영과 관련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태현 개 같은 인간이 나중에 정말로 고은지를 괴롭히게 된다면 고은영이 골치 아프게 되기에 안지영은 그걸 차마 내버려 둘수 없었다.“알겠어요.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안열은 다소 난처하게 말했다.“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요.”안지영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 묻어 있었고 안열은 침묵했다.지금 이 상황에서 안지영에게 통보하는 게 안열의 한계인데 안지영이 안열에게 방법까지 찾으라고 했다.“어떻게든 고은지가 나태웅 개 같은 남자를 만나게 해서는 안 돼요.”안지영이 다급히 말했다. 나태웅이 알게 되면 나태현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알겠어요.”안열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사실 안열은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너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하지만 안지영이 이미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안열은 안지영과 통화를 끝낸 뒤 운전 중이던 디예에게 말했다.“차를 돌리세요.”디예는 안열이 강성 사투리로 통화했기에 방금 통화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강성 방언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그러나 안열이 차를 돌리라고 말하자 디예의 얼굴빛이 굳었다.“이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말했잖아요. 돌리라고!”안열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안지영에게 알리지 말 걸 그랬다. 이제 와서 이 일을 그냥 둘 수도 없게 되었다.디예는 잠시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하지만 안열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차를 돌려 돌아갔다.차
‘무슨 일이야? 잠깐...’안열은 두 손을 꽉 쥐고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나씨 가문의 일은 사실 안열과 상관이 없다. 나씨 가문이든 고은지든 안열과 단 한 치의 관계도 없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안열은 곧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일련의 번호를 눌렀고 전화를 걸었다.안열은 안지영과 연락을 끊은 지 오래여서 오랜만이다. 강성에서 자취를 감춘 뒤로 두사람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안열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안지영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안열이 고은지라는 이름을 말하는 순간 안지영은 손으로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장선명이 방에 없는 걸 확인한 후 안지영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발코니로 향했다.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나태현은 미쳐가고 있는데 고은지의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식은...발코니에 나온 안지영의 얼굴은 긴박감으로 가득했다.“뭐라고 했어요? 고, 고은지요?”“맞아요. 고은지요.”안지영은 할 말을 잃었다.‘고은지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동안에 나타났다고? 안열이가 직접 봤다고 했으니...’안지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혹시 잘못 본 게 아니에요?”“잘못 본 게 아니에요. 착각할 리 없어요.”안열은 확신이 찬 말투로 말했다. 안열은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고 게다가 고은지를 몇 번 본 적이 있어 착각할 리 없었다.안지영은 또다시 침묵했다. 그렇다면 고은지가 동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그동안 고은영은 고은지 때문에 얼마나 잠 못 이루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는 걸 안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은지가 동안에 나타난 것이다.“정말 잘못 본 게 아니죠?”안지영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동안 강성은 고은지 때문에 이미 뒤집어질 대로 뒤집어진 상황이었다. 지씨 가문은 파산했고 나태현은 나씨 가문과 절연까지 했다.있을 때는 별 영향이 없어 보였던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강성 전체가 엉망진창이 된 것
안씨 가문 사람들이 안열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 가족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인연을 끊는 게 낫다. 괜히 이어가다가는 강성에서 쌓아온 자신의 지혜와 자존심만 짓밟히게 될 뿐이다.게다가 안열이 홉스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나태웅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아직 조사하지 못했어요.”진이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못 찾았다는 그 한마디에 나태웅의 얼굴빛이 다시 굳어졌다.안열이 왜 그렇게까지 홉스의 말을 따르는지 알 수 없었고 도대체 무슨 약점을 홉스에게 잡힌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그래서 나태웅이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안열은 그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이 일에 끼어들지 마요. 휘말리면 당신한테도 좋을 거 없어요.”그 말만 남기고 그 외에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일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나태웅은 끝내 알지 못했다.“죽일 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봐.”나태웅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말했다.예전에는 안지영 일 때문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해, 결국 안지영이 장선명을 찾아가 버렸지만 지금은 자신이 먼저 다가갔는데도 안열의 태도는 이 모양이었다.이 생각만 하면 나태웅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진이훈은 나태웅의 기세에 입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태범이 재촉하고 나태웅은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더더욱 불안했다.지금 동안은 어수선하지만 강성 쪽이라고 상황이 나을 것도 없었다.진이훈은 나태현이 아예 나씨 가문과 절연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전에 강성에 있을 때는 분명 고은지한테 잘해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안열은 보화사에서 나오던 길이었다.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문득 익숙한 그림자가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처음은 얼떨떨했지만 곧 자세히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남자의 등판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여자의 뒷모습만 보였다.디예가 이미 차 문을 열어주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