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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만큼 고요했다. 고은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속은 어지러웠다.

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힐끗 훑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다라는 식의 대답 내가 싫어하는 거 알 텐데?”

고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가장 싫어하는 배준우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제 제가 대표님을 방까지 모신 뒤로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고은영에게는 1분이 1년과 같은 고역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걸 이겨내야 했다.

만약 배준우에게 거짓말을 들킨다면 그녀만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안지영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

겨우 강성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은영의 등 뒤가 축축해질 때쯤 배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어.”

고은영은 스르륵 눈을 감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난 건가?

“가서 해상그룹 입찰 방안 계획안 좀 가져와 봐.”

배준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은영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그 뒤로 한달 간 긴 출장이 이어지는 동안 고은영은 최대한 배준우와 단독으로 접촉하는 상황을 피했다.

한달 뒤, 긴 출장을 끝낸 그들은 강성으로 돌아왔다.

관례대로 고은영에게는 이틀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날, 배준우는 긴급회의가 있어 회사로 향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태웅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나태웅을 본 배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 비서는?”

“한달 간 출장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휴가를 줬죠. 고 비서도 연애해야죠.”

배준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태웅은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동영그룹 직원 기숙사.

안지영이 고은영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그 뒤로 대표님 아무 얘기 없었지?”

그러자 고은영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에 누가 없는지 살폈다.

“걱정하지 마. 다른 동료들은 나가고 우리뿐이야!”

고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했다.

잔뜩 화가 난 배준우의 모습이 떠오르자 고은영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대표님도 그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그리고 그게 꿈이길 바라셨을 거야.”

그냥 확인 차 최측근인 고은영을 다그쳤을 수도 있었다.

고은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안지영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된 거지. 배 대표 한번 꼬셔보겠다고 주제도 모르고 달려들던 여자들 다 결과가 참담했어. 그런 인간이랑 잠자리 같이 한 건 그냥 재앙이라고 봐야지.”

“알아.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나 은행에 다녀와야겠어.”

고은영은 그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은행 얘기가 나오자 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동생 이제 인턴으로 직장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아직도 생활비를 보내줘야 해?”

고은영은 이미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신으며 담담히 말했다.

“적응하기 힘들어서 퇴사했대. 출장 기간에도 몇 번이나 전화가 왔었어.”

고은영은 다섯 살 때 아빠를 잃었다. 그녀는 집안의 둘째였는데 위로 언니가 한 명 있고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언니는 이미 결혼해서 독립했고 남동생의 학자금은 거의 고은영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래도 졸업을 6개월 앞둔 시점이라 조금만 버티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지영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 대학 다닐 때 너희 엄마 한 푼도 지원 안 해주셨잖아. 네 동생도 그래. 인턴 생활이 힘든 건 알지만 적응 못 한다고 무작정 때려치고 나오면 어떡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고은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같이 나갈래?”

“아니, 난 됐어. 돌아올 때 먹을 거 좀 사와.”

“알았어.”

기숙사에서 나오자 따스한 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고은영은 전혀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가족의 따뜻함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핸드폰이 급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자 짜증이 치밀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고은영이 차갑게 말했다.

“나한테 전화할 시간에 이력서라도 한 장 더 제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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