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2화

작가: 서한월
차는 한 빌라 단지 내, 3층짜리 마당 딸린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차 키를 가사도우미에게 건넨 유하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퍼져오는 온기에 꽁꽁 언 몸이 살짝 녹아내렸다.

자신을 반겨주는 도우미를 무시한 채 유하는 곧장 위층 침실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남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연우와 다시 연락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과 그 여자를 만나게 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유하는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나 한순간도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챙길 물건은 꽤 많았다. 고작 속옷 몇 벌과 겨울옷 몇 벌, 그리고 귀중한 장신구만 챙겼는데도 캐리어가 꽉 들어찼다.

침대 머릿장을 정리할 때, 서랍장 안에서 있는 카드 한 장이 유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카드는 승현의 명의로 된 카드다.

웃어른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한 탓이었을까? 승현은 유하에게 늘 모질었고, 뭐든 경계했으며, 생활비 한 번을 준 적이 없다.

심지어 어린 아들도 있는 본인 명의의 카드를 유하는 갖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는 거라곤 오직 남편 명의로 된 카드뿐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을 적에 유하는 승현이 자기한테 본인 카드를 준 건 사랑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야 그게 모두 자신을 경계하려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출만 했다 하면 매번 승현의 번호로 메시지가 가곤 했으니까.

다만 유하는 카드를 사용한 적이 드물었다. 사용한다 해도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하는 뭐든 자기 월급으로 해결했다.

유하의 일자리 역시 그녀가 직접 찾은 것이다.

처음에 승현과 더 가까이 지내려고 MB그룹 IT팀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공학박사라는 학력과 풍부한 커리어임에도, 면접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고 서류에서 떨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모두 남편 승현의 명령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오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고 싶으면, 집에서 얌전히 사모님 노릇이나 해. 회사 일에 끼어들지 말고.”

지금 되새겨 보면 7년 동안 승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가슴 미어지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이 부부로 지냈던 적이 있나 싶어질 정도다.

유하는 카드에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귀중품만 챙겼다. 더 이상 꼼꼼히 물건을 정리할 기분도 사라져 잡히는 대로 물건을 대충 집어넣고 캐리어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랫동안 이 집 가사도우미로 일한 윤해월은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주방에서 나와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가 유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쫓아갔다.

“사모님,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출장 잡혔어요.”

유하는 설명하기 귀찮아 대충 대답했다.

승현과 결혼해서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꽤 되는지라, 유하는 그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승현은 잔인하고 당한 건 뭐든 갚아주는 데다 뒤끝 있는 사람이다. 사업 수단을 차치하더라도 결혼한 사람을 7년 동안 냉대한 것만 봐도 얼마나 인정 없는지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내일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어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 유하는 자신의 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돈이라도 따져야지.’

‘내가 7년 동안 두 부자를 얼마나 떠받들었는데...’

‘그 사람의 경계가 너무 심해 재산 분할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보상은 받아야 할 거 아니야.’

...

별장에서 나온 유하는 직접 운전해 회사 근처로 향했다.

오는 길에 그녀는 이미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고, 바로 입주할 수 있는 큰 아파트 한 채를 임대했다. 물론 이곳에서 오래 머물 계획은 없었다.

유하는 현재 한 은행의 IT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3년 동안 일반 프로그래머에서 IT팀 팀장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유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한 것도 이 업계가 돈 벌기 쉽고, 그때 마침 돈이 필요해서였다.

솔직히 컴퓨터공학과는 고리대학교 학사 과정만 밟으면 그만두려고 했다.

돈을 충분히 벌면 다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승현이 컴퓨터와 AI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안 뒤로, 유하는 승현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대화 주제라도 만들어 보려고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억누르며 계속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공부했다.

그렇게 유하는 컴퓨터공학부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일로 인해, 국내 최고의 전통 의상 연구자이자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모할머니 소성란과는 벌써 7년째 냉전 중이다.

소성란은 유하가 재능을 썩혔다며 그녀가 결혼한 뒤로 더 이상 왕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유하는 오승현과 대화 주제가 생긴 것도, 더 가까워진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소원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유하는 문뜩 자신의 일방적인 구애가 승현 눈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혼하기로 했으니 유하는 이제 IT 업계에서 손을 뗄 때가 되었다.

비록 그동안 많은 성과를 따내긴 했지만, 그걸 포기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기를 바랄 뿐.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 디자인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제대로 마치면, 유하는 자기가 사랑하는 디자인에 전념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한 유하는 간단히 침대를 정리한 뒤 침대에 누웠다. 워낙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닌지라 캐리어는 그대로 둔 채, 피곤한 몸을 안고 잠이 들었다.

...

오씨 저택.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승현은 준서를 데리고 돌아왔다.

준서는 연우 이모한테서 받은 게임기를 손에 꼭 쥔 채 좀처럼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승현을 향해 불쌍한 눈빛을 보냈다.

“아빠.”

‘게임기를 가지고 들어가면 엄마가 몰수할 게 뻔해.’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는 승현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게임기는 차에 둬. 엄마가 아빠 차를 마음대로 뒤지지는 않을 거야.”

“앗싸!”

승현의 약속에 준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게임기를 사물함에 넣었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릴 때 승현에게 물었다.

“아빠, 내일도 아빠 찾아가서 연우 이모랑 놀아도 돼요?”

“안돼. 바빠.”

승현은 단번에 거절했다.

“아!”

준서는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또 물었다.

“그럼 저를 할머니한테 데려다주면 안 돼요? 드디어 겨울방학인데, 집에 있으면 엄마가 또 참견한단 말이에요. 너무 짜증 나요. 방학인데 하나도 즐겁지 않잖아요.”

이번에 승현은 동의했다.

드디어 동의를 얻어낸 준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폴짝폴짝 뛰며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해월은 승현과 준서가 돌아오자 얼른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생강차를 건넸다. 이윽고 승현과 준서의 외투를 건네받았다.

외투를 벗어 건네던 승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집사람은요?”

예전에 승현이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집에 있기만 하면 유하는 늘 거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심지어 외투를 받아 옷을 정리해주는 일도 모두 그녀가 직접 했었다.

‘오늘 저녁에도 퇴근했냐고 전화했잖아?’

‘왜 거실에서 기다리지 않았지?’

사모님이 이미 대표님한테 말한 줄 알았던 윤해월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대표님, 모르셨어요? 사모님께서 출장 가셨어요.”

‘출장? 그 조금만 은행에도 출장 있나?’

승현은 살짝 의아하게 생각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물었을 뿐 유하가 집에 있든 말든 상관없었으니까.

‘없다니 오히려 잘됐네.’

준서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승현과 꼭 닮은 맑고도 예쁜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기쁜 듯 소리쳤다.

“아빠. 그럼 게임기 가져와서 놀게요.”

엄마가 없으면 일부러 할머니 집에 가서 숨을 필요도 없고.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이제 아무도 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준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준서를 보며 승현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로 돌아가 샤워를 마친 뒤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승현은 단추를 대충 풀어 헤친 채 가슴을 훤히 드러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슬쩍 드러난 매혹적인 눈매는 물기에 젖어 몽롱했다.

그때 침대 머릿장에 놓았던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폰을 들어 대충 확인했더니 연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에 답장하려고 하던 찰나, 옆을 흘끗 본 승현은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우뚝 멈췄다.

머릿장 위 한 켠이 비어 있었고, 빨간 중절모를 쓴 로봇도 사라져 있었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7화

    결국 연우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마치 하지철을 보며 자라서 배운 것처럼 연우에게는 정상적으로 살고 제대로 일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 꼭 누군가 하나를 붙잡고, 살을 뜯고 피를 빨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유하는 그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아주 오래전부터 유하는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 누구도 나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는 것.길은 걷는 것은 결국 내 힘으로 걸어야 했다.말을 마치자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유하는 더 말할 마음이 사라졌다.‘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 하겠어.’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때, 낮고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그 애, 죽었어.”유하는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누가?”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는 생기가 넘치던 눈은 이제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생아. 심부전으로 며칠 전에 병원에서 죽었어.”유하는 말문이 막혔다.‘심부전... 하지철에게 심장이 안 좋다던, 이제 겨우 네 살이었던 그 아이가... 죽었다고?’연우는 갑자기 웃었다. 웃음에는 독기가 가득했다.“아버지가 완전히 무너졌겠지? 그렇게 원하던 아들이었잖아. 그렇게 바라던 아들인데, 죽었어. 하하하하하하... 죽었다고.”연우는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번졌고, 눈물은 고여 있었다. 떨어지지 않게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이었다.연우는 유하 앞에서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조금도.연우는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억누른 채 유하를 노려봤다.“내가 왜 귀국했는지 알아? 사실은 승현이가 불러들인 거야.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유하는 미간을 찌푸렸다.“뭐가?”“거래.”연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승현이랑 나, 거래했어.”그제야 연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입꼬리는 억지로 올라가 있었고, 울면서 웃고 있었다.“우리 사이는 거래였어... 소유하.”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나... 네가 진짜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6화

    연우에게는 더 이상 갈 길이 없었다.없어졌다.정말로... 끝난 걸까?‘하연우. 너... 원래 좋은 패를 쥐고 있었어.’가장 듣기 싫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 예고 없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연우는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고, 유리 너머의 유하를 바라봤다.“그때 네가 했던 말, 무슨 뜻이야?”“뭐가?”유하는 고개를 갸웃했다.“그날 병실에서. 내가 찾아갔을 때, 네가 말했잖아. 내가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고.”연우의 목소리는 거칠었다.“그게 무슨 말이었어?”‘아, 그 얘기.’연우가 아직도 그 말을 붙잡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유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하연우, 너는 말이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지원이라는 걸 충분히 받으면서 컸어. 배운 것도 많고, 스스로 쌓은 것도 있고. 예술 쪽도, 비즈니스 쪽도.”유하는 예전에 한 번 연회장에서 연우가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어도, 유하도 그 실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우는 기본이 단단했고, 노력의 흔적도 분명했다.해외 유학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적인 명문대에서의 수학은 돈만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고, 연우의 지도교수 역시 국내외 기업과 연결된 인맥을 다수 가진 인물이었다.그건 유하도 알고 있었다.“네 아버지가 어떤 인간이든, 널 어떻게 이용하려 했든, 어쨌든 너는 실력을 갖추게 됐어.”“유학 마치고 돌아와서, 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그 일들에 손대지 않았더라면, 일찍 빠져나왔더라면 말이야. 나중에 집안일이 터져서 연루됐어도, 몇 년 살다 나오면 끝이었어. 키워준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겠지.”“근데 넌 그러지 않았어.”유하의 시선은 담담하게 연우에게 닿아 있었다.“넌 가진 걸 다 가지고도, 네 손으로 자기 길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어.”평생을 감옥 안에서 보내야 하는 삶.철창 안에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5화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투명한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교도소 면회실.유하는 한쪽에 앉아 유리 너머의 연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꽤 시간이 흘렀다.연우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눈에 띄게 마른 몸이 얇은 파란 수형복을 걸치고 있었고, 볼과 턱선은 각이 도드라졌고 거칠었다. 갈색 웨이브 머리는 한 번 정리한 흔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다.이곳에서의 시간이 편치 않았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고, 너 지금 기분 좋지?”연우는 유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말했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에는 식은 증오가 고여 있었다.유하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미안한데, 네가 이렇게 된 건 네가 만든 결과야. 나 때문도 아니고, 내가 없었어도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어. 나는 그냥 참지 못해서 조금 빨리 불을 붙였을 뿐이야.”자업자득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게 없었다.유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가능했다면 난 너나 네 주변과 엮이고 싶지도 않았어. 너희가 죽든 살든, 그게 우리 고모할머니가 잃은 걸 돌려주지는 못하잖아.”소성란의 점점 약해진 몸, 회복할 수 없게 사라진 시간과 건강.그건 어떤 보상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너희가 저지른 일의 끝이 이런 거야. 남 탓할 일 아니지.”유하는 연우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러고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난 그게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네가 남의 가정에 끼어들었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악의로 똘똘 뭉쳐 있었어? 나 하나로도 모자라서, 내 가족까지 건드렸지?”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집착이었다.아니면, 하지철과 하연우는 자체가 애초에 그렇게 살아가는 법밖에 모르는 걸까?면회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유리 너머에서 연우는 맞은편의 유하를 바라봤다.잘 차려입은 옷, 단정한 자세, 말투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닥에서 구르며 살았다는 출신이 무색하게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4화

    “또 뭐가 있어?”주연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자, 유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소...”주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민은... 잘 지내고 있나요?”유하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유하는 그동안, 주연이 W시에 왔던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유민을 이용해 접근했고, 결국 자신과 승현을 상대로 논을 노린 거라고 여겼다.‘그게 전부는 아니었나?’‘정말로 유민이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유하는 미묘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곧 담담하게 답했다.“고향 쪽은 오래 연락 안 했어. 나도 지금은 유민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몰라.”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었다.승현의 위장 사망 이후로 유하는 고향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친부모도, 친동생 유민도 마찬가지였다.상대 쪽에서도 유하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걸 알았는지, 다시 연락해 오지 않았다.그래서 정말로 아무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주연의 질문이 오히려 낯설었다.“혹시... 보고 싶어?”유하의 물음에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어차피 저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요. 만나고 말고 할 이유도 없고요.”그러더니 주연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채, 갑자기 허리를 깊이 숙였다.“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 전부 다요.”유하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됐어. 가. 앞으로는 잘 살아. 이제는 진짜 사람답게.”“네.”주연은 눈가가 붉어진 채로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고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사람 하나와 휠체어 하나.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공항을 나서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시야에 들어왔다.유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을 느꼈다.‘집에 가고 싶다. 고모할머니를 너무 보고 싶어.’유하는 몸 상태도 거의 다 회복됐고, 이제 겉으로는 다친 흔적도 보이지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3화

    ‘한가한 것도 아니고, 또 이런 일에 끼어들다니.’청산은 속으로 생각했다.유하는 솔직히 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준혁과 이솔이 결혼할 때도 유하는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정략결혼이라는 것만 들었고, 당연히 친구인 이솔 편에 선 것이 전부였다.준혁에 대해서는 조금 전 법정에서 어쨌든 같은 증인으로 함께 앉아 있었던 인연 때문인지, 유하는 출입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힘내세요.”이솔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풀 사람이 아니었다.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다들 참...’준혁은 속으로 씁쓸하게 정리했다.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청산에게 메시지를 연달아 보냈다. 전부 불평하는 내용이었다. 결혼하고 나더니 사람 달라졌다는 소리, 아내만 챙기고 주변은 안 보는 인간이라는 소리, 예전에 괜히 유하와 얽힌 일에 신경 썼다는 투정까지.돌아온 답장은 단 하나였다.웃는 얼굴 이모티콘 하나....큰 일 하나가 정리됐다.그 후에 유하도 병원에서 잠시 경과를 지켜본 뒤, 더 이상 문제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남은 상처들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라 집에서 쉬면 충분했다.퇴원하는 날.유하는 집으로 가지 않고 공항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리자, 길가에 한 젊은 여자가 휠체어를 밀고 서 있었다. 휠체어에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고,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연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젊은 여자는 허리를 굽혀 휠체어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멀리서도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였다.유하가 다가가며 불렀다.“진주연 씨.”그 말을 듣고 젊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유하를 보자 눈이 밝아졌다.“소유하 씨, 정말 오셨네요.”“응. 배웅하러 왔어.”유하는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자를 한 번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어머니는...?”“많이 좋아지셨어요.”주연은 웃으며 말했다.“소유하 씨가 의사 연결해 주시고, 치료비도 도와주셔서요.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것만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32화

    증거는 충분했고, 판결은 법정에서 바로 내려졌다.핵심 인물인 하지철과 하연우는 사건에 깊숙이 연루돼 있었다. 다수의 계획적인 범행, 각종 경제 범죄,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러난 국가 반역 혐의까지.주범 하지철은 사형 집행 유예.종범 연우는 비교적 가담 정도가 낮다고 판단돼 무기징역이 선고됐다.반역 혐의는 공개할 수 없는 사안이라 공식 발표에서는 완곡하게 처리됐지만, 하지철과 관련된 나머지 범죄 사실들은 즉시 공시됐다. 온라인과 업계는 순식간에 들끓었다.그런 외부의 소란을 유하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선고가 끝났다.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을 빠져나갔다.유하는 증인석에 그대로 앉아, 흩어지는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 듯했다. 원한이 풀렸다면 기뻐해야 할 텐데, 마음이 이상하게 복잡했다.‘이게 끝이구나.’유하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그때, 옆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유하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청산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뭐 그렇게 멍해 있어? 아까부터 불렀는데.”“아...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했어.”유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청산은 잠시 유하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여 유하의 입가에 가볍게 키스했다.“집에 가자.”유하는 얼굴이 뜨거워져 급히 그를 밀어냈다.“여기 법정이야.”그러다 문득 시선이 멈췄다.유하는 옆으로 몸을 틀어 청산 너머를 바라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승현이 서 있었다. 승현이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위압적인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체적인 분위기도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유하의 시선을 알아챈 승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법정 밖으로 향했다.“왜 그래?”유하가 또 멍해진 걸 본 청산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양팔로 좌석 양쪽을 짚으며 유하를 가두듯 서더니,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보이는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