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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서한월
차는 한 빌라 단지 내, 3층짜리 마당 딸린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차 키를 가사도우미에게 건넨 유하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퍼져오는 온기에 꽁꽁 언 몸이 살짝 녹아내렸다.

자신을 반겨주는 도우미를 무시한 채 유하는 곧장 위층 침실로 올라가 짐을 정리했다.

남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연우와 다시 연락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과 그 여자를 만나게 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유하는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나 한순간도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챙길 물건은 꽤 많았다. 고작 속옷 몇 벌과 겨울옷 몇 벌, 그리고 귀중한 장신구만 챙겼는데도 캐리어가 꽉 들어찼다.

침대 머릿장을 정리할 때, 서랍장 안에서 있는 카드 한 장이 유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카드는 승현의 명의로 된 카드다.

웃어른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한 탓이었을까? 승현은 유하에게 늘 모질었고, 뭐든 경계했으며, 생활비 한 번을 준 적이 없다.

심지어 어린 아들도 있는 본인 명의의 카드를 유하는 갖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는 거라곤 오직 남편 명의로 된 카드뿐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었을 적에 유하는 승현이 자기한테 본인 카드를 준 건 사랑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야 그게 모두 자신을 경계하려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출만 했다 하면 매번 승현의 번호로 메시지가 가곤 했으니까.

다만 유하는 카드를 사용한 적이 드물었다. 사용한다 해도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하는 뭐든 자기 월급으로 해결했다.

유하의 일자리 역시 그녀가 직접 찾은 것이다.

처음에 승현과 더 가까이 지내려고 MB그룹 IT팀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공학박사라는 학력과 풍부한 커리어임에도, 면접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고 서류에서 떨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건 모두 남편 승현의 명령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오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고 싶으면, 집에서 얌전히 사모님 노릇이나 해. 회사 일에 끼어들지 말고.”

지금 되새겨 보면 7년 동안 승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가슴 미어지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이 부부로 지냈던 적이 있나 싶어질 정도다.

유하는 카드에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귀중품만 챙겼다. 더 이상 꼼꼼히 물건을 정리할 기분도 사라져 잡히는 대로 물건을 대충 집어넣고 캐리어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랫동안 이 집 가사도우미로 일한 윤해월은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주방에서 나와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가 유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쫓아갔다.

“사모님,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출장 잡혔어요.”

유하는 설명하기 귀찮아 대충 대답했다.

승현과 결혼해서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꽤 되는지라, 유하는 그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승현은 잔인하고 당한 건 뭐든 갚아주는 데다 뒤끝 있는 사람이다. 사업 수단을 차치하더라도 결혼한 사람을 7년 동안 냉대한 것만 봐도 얼마나 인정 없는지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내일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어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에 유하는 자신의 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돈이라도 따져야지.’

‘내가 7년 동안 두 부자를 얼마나 떠받들었는데...’

‘그 사람의 경계가 너무 심해 재산 분할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보상은 받아야 할 거 아니야.’

...

별장에서 나온 유하는 직접 운전해 회사 근처로 향했다.

오는 길에 그녀는 이미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고, 바로 입주할 수 있는 큰 아파트 한 채를 임대했다. 물론 이곳에서 오래 머물 계획은 없었다.

유하는 현재 한 은행의 IT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3년 동안 일반 프로그래머에서 IT팀 팀장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유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한 것도 이 업계가 돈 벌기 쉽고, 그때 마침 돈이 필요해서였다.

솔직히 컴퓨터공학과는 고리대학교 학사 과정만 밟으면 그만두려고 했다.

돈을 충분히 벌면 다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승현이 컴퓨터와 AI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안 뒤로, 유하는 승현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대화 주제라도 만들어 보려고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억누르며 계속 고리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공부했다.

그렇게 유하는 컴퓨터공학부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 일로 인해, 국내 최고의 전통 의상 연구자이자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모할머니 소성란과는 벌써 7년째 냉전 중이다.

소성란은 유하가 재능을 썩혔다며 그녀가 결혼한 뒤로 더 이상 왕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유하는 오승현과 대화 주제가 생긴 것도, 더 가까워진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소원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유하는 문뜩 자신의 일방적인 구애가 승현 눈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혼하기로 했으니 유하는 이제 IT 업계에서 손을 뗄 때가 되었다.

비록 그동안 많은 성과를 따내긴 했지만, 그걸 포기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기를 바랄 뿐.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 디자인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제대로 마치면, 유하는 자기가 사랑하는 디자인에 전념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한 유하는 간단히 침대를 정리한 뒤 침대에 누웠다. 워낙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닌지라 캐리어는 그대로 둔 채, 피곤한 몸을 안고 잠이 들었다.

...

오씨 저택.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승현은 준서를 데리고 돌아왔다.

준서는 연우 이모한테서 받은 게임기를 손에 꼭 쥔 채 좀처럼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승현을 향해 불쌍한 눈빛을 보냈다.

“아빠.”

‘게임기를 가지고 들어가면 엄마가 몰수할 게 뻔해.’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는 승현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게임기는 차에 둬. 엄마가 아빠 차를 마음대로 뒤지지는 않을 거야.”

“앗싸!”

승현의 약속에 준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게임기를 사물함에 넣었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릴 때 승현에게 물었다.

“아빠, 내일도 아빠 찾아가서 연우 이모랑 놀아도 돼요?”

“안돼. 바빠.”

승현은 단번에 거절했다.

“아!”

준서는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또 물었다.

“그럼 저를 할머니한테 데려다주면 안 돼요? 드디어 겨울방학인데, 집에 있으면 엄마가 또 참견한단 말이에요. 너무 짜증 나요. 방학인데 하나도 즐겁지 않잖아요.”

이번에 승현은 동의했다.

드디어 동의를 얻어낸 준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폴짝폴짝 뛰며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해월은 승현과 준서가 돌아오자 얼른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생강차를 건넸다. 이윽고 승현과 준서의 외투를 건네받았다.

외투를 벗어 건네던 승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집사람은요?”

예전에 승현이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집에 있기만 하면 유하는 늘 거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심지어 외투를 받아 옷을 정리해주는 일도 모두 그녀가 직접 했었다.

‘오늘 저녁에도 퇴근했냐고 전화했잖아?’

‘왜 거실에서 기다리지 않았지?’

사모님이 이미 대표님한테 말한 줄 알았던 윤해월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대표님, 모르셨어요? 사모님께서 출장 가셨어요.”

‘출장? 그 조금만 은행에도 출장 있나?’

승현은 살짝 의아하게 생각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물었을 뿐 유하가 집에 있든 말든 상관없었으니까.

‘없다니 오히려 잘됐네.’

준서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승현과 꼭 닮은 맑고도 예쁜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기쁜 듯 소리쳤다.

“아빠. 그럼 게임기 가져와서 놀게요.”

엄마가 없으면 일부러 할머니 집에 가서 숨을 필요도 없고.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이제 아무도 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준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준서를 보며 승현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로 돌아가 샤워를 마친 뒤 부드러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승현은 단추를 대충 풀어 헤친 채 가슴을 훤히 드러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슬쩍 드러난 매혹적인 눈매는 물기에 젖어 몽롱했다.

그때 침대 머릿장에 놓았던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폰을 들어 대충 확인했더니 연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에 답장하려고 하던 찰나, 옆을 흘끗 본 승현은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우뚝 멈췄다.

머릿장 위 한 켠이 비어 있었고, 빨간 중절모를 쓴 로봇도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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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5화

    오늘 회의에서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다.이용석이 FK테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그는 심지어 9500억 원 규모의 신규 프로젝트 예산 승인까지 제안했다.회의실은 일순 조용해졌고, 모두가 눈치만 보며 상석에 앉은 유하를 힐끗거렸다.이용석이 프로젝트 계획서를 스크린에 띄웠다.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AI 자동화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MB그룹의 산업 구조상, 자동화 기술은 효율을 높이고, 안정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었다.그는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이 프로젝트는 사실 전 대표이사님이 생전에 구상하셨던 일입니다. 어찌 보면 유언과도 같습니다.”잠시 숨을 고르고, 정면의 유하를 바라봤다.“대표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기술이 완성되면 대형 산업 설비를 지능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기계 고장을 예측하고, 에너지 낭비를 줄이며 위험 요소를 사전에 파악해 안전성을 크게 높일 수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이익만 있는’ 프로젝트입니다.”이용석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물론 외부 기술력을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만, 자체 연구진만큼 신뢰할 만한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그러니... 대표님께서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은 명백히 ‘의도된 자극’이었다.순간, 유하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개인적인 이유요?”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흘렀다.“이사님께서 제 사정을 그렇게 잘 아시는지 몰랐습니다. 어떤 ‘개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시는데요?”그녀의 시선이 살짝 올려졌다.“괜찮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회의실 온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이용석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그는 유하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거론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용석의 의문이 완전히 억측은 아니었다.FK테크 관련 안건은 1년 동안 단 한 번도 원안 그대로 통과된 적이 없었다.심지어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안건조차도 유하가 모두 보류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454화

    MB그룹 하나만으로도 벅찼지만, 유하가 하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이제는 소성란에게 지도를 받으며 Splendid의 경영권까지 천천히 넘겨받고 있었다.압박감은 컸다.하루하루가 버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그래도 다행이었다.유하는 혼자가 아니었다....전화가 연결됐다.그 순간, 차가웠던 유하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목소리도 한결 낮고 온화했다.“고모할머니, 저 도착했습니다.”[그래.]짧은 대답.소성란의 어조는 그리 좋지 않았다.[언제 돌아올 거야?]소성란은 여전히 오씨 가문을 싫어했다.그리고 그 가문과 유하가 엮이는 것도 못마땅했다.유하가 그런 소성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만약 승현이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거액의 유산이라도 소성란은 유하가 그것을 물려받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소성란은 그에 버금가는 재산과 지위를 유하에게 직접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승현이 남긴 유산은 오히려 ‘짐’이었다.적어도 소성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그녀는 아직도 유하가 겪었던 고통을 잊지 못했다.하지만 승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끝나자 소성란은 더 이상 유하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사람이 죽으면, 남는 건 추억뿐이지.’“금방이에요. 예전처럼, 일주일쯤이면 돌아갈 것 같아요.”유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성란의 마음속 상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MB그룹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저 빠르게 돌아가겠다고만 했다.짧게 안부를 전한 뒤, 통화를 끊었다....차는 어느새 나무들이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섰다.붉은 벽돌 빛 6층짜리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엔 유리 외벽이 반짝이는 본관 빌딩이 서 있었다.이 일대 전부가 MB그룹 본사였다.주변의 6층 건물들은 각 부서를 위한 별관들이었고, 용도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1년 전만 해도 이곳은 유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했다.차에서 내린 유하는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가락을 대자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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