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말 함부로 할 거면 입 다무는 게 낫지.’승현은 더 내려 볼 기분도 아니었다.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짧게 말했다.“유하 있는 데로 가.”“네.”...같은 시각, 유하도 온라인에서 불붙은 이야기들을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확인했다.가치가 오른다는 말은 맞았다.다만 유일본은 아니었다. 청산에게 준 그 한 벌이 더 있으니까.그래도 청산이 그 결혼 예복을 입고 공식 석상에 서기 전까지 그 예복의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왕실에 간 웨딩드레스를 유일본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아쉽다면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유하는 왕실 웨딩드레스로 이름을 알렸고, 그걸 계기로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유명 인사들이 맞춤 웨딩드레스를 의뢰하러 꾸준히 찾아왔다.유하는 전부 거절했다.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 공지까지 공개했으니, 유하의 장래 커리어가 조금 더 천천히 갈 건 분명했다.그래도 유하는 후회하지 않았다.유하는 청산에게 빚이 있었다.결혼 예복 한 벌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그래서 하나를 더 올렸다.오늘부터 유하는 어떤 웨딩 디자인도, 제작도 하지 않는다.이 길을 스스로 막아 두면, 유하 인생의 결혼 예복 관련 작업은 단 두 벌로 끝난다.하나는 영국 왕실에 소장된 웨딩드레스.하나는 청산에게 준 결혼 예복.이런 작품에는 유하만의 개인 마크가 들어간다.작품의 주인을 확정할 수 있다.여성 웨딩드레스 한 벌, 남성 결혼 예복 한 벌.양쪽 모두 단 하나뿐이다.그게 유하가 청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청산에게 ‘유일한 것’을 하나 남겨 주는 일.유하는 겁이 너무 많았다. 마음속 문턱을 끝내 넘지 못했다.그녀는 소중한 것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씩 떠나보내는 일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유하를 떠나보내는 일도 원하지 않았다.누구에게나 잔인한 일이었다.무뎌진 칼로 천천히 베는 잔인함.그래서 유하는 이렇게 생각했다.‘아프기 싫고, 잃기 싫으면... 애초에
“아내? 무슨 아내야.”청산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전남편이지. 근데 너는 이것도 확인이 필요하네. 유하가 너한테는 옷을 안 만들어 줬나 봐? 바느질 결만 봐도 유하 솜씨인데, 그것도 못 알아보냐?”승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예전에 유하가 승현에게 수트 한 벌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예복은... 산산이 찢겨서 붙일 수도 없게 된 그 옷을 떠올리자, 승현의 표정은 더 차가워졌다.그래도 어쨌든.승현에게는 한 벌, 그것도 수트가 전부였는데, 청산에게는 결혼 예복을 만들어 줬다고?결혼 예복?승현은 당장이라도 그 나무 상자째로 안의 옷까지 모조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눈앞의 청산까지 함께.“아, 갑자기 생각났네...”청산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무 상자를 이쪽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러고는 소매 단추를 풀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리면서 웃는 낯으로 차분하게 말했다.“맞다. 오승현 대표는 원래 남의 거 뺏는 데 일가견 있었지? 막무가내로 다 뺏고. 남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도 유독 열심이고.”청산은 눈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참고로 나랑 유하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야. 대학 때도 유하가 먼저 나한테 청혼했어.”“지금도 그래. 우리는 네가 ‘죽은 뒤’ 이혼 처리 끝난 다음에 정식으로 연애했고 약혼한 사이였어.”“그런데 너는 또 이런 더러운 수작으로 남의 관계에 끼어들었지. 승현아, 그렇게 남의 사이 비집고 들어가는 게 재밌냐?”‘진짜...’승현의 관자놀이 핏줄이 크게 뛰었다. 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누가 끼어든 건데?’‘정작 남의 관계에 끼어든 쪽이 누군데, 저 말이 어떻게 저 입에서 나와?’‘이걸 참으라고?’승현은 이런 모욕을 참아 본 적이 없었다....“대표님, 이 상태는...”태건이 막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통찻집에서 걸어 나오는 승현을 봤다. 승현은 한 손에는 벗어든 재킷, 셔츠 깃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손등에
“맞아, 내가 했어.”청산의 질문에 승현은 아주 단호하게 인정했고, 굳이 숨길 일도 아니라고 판단했다.원래 승현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소성란에게서 전화받은 때부터 승현은 청산에게도 연락이 갈 수 있다고 짐작했다. 마침 승현에게는 그걸 막을 능력도, 방법도 있었다.게다가 승현은 코시오 건의 총괄 책임자였다.그는 의심할 만한 지점 하나만 던져도, 말 한마디만 보태도 청산을 충분히 묶어 둘 수 있었다. 출국은 물론이고 W시를 벗어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승현의 시선이 찻상 위로 떨어졌다.약혼반지가 들어 있던 게 분명한 비단 상자.무표정하던 승현의 얼굴 위로, 마침내 옅은 웃음이 올라왔다.“결과는 나쁘지 않네.”유하는 파혼했다.결과만 좋으면 됐다.승현은 유하가 다른 남자 때문에 울었던 일도, 감히 다른 남자에게 입을 맞춘 일도 당분간은 눈감아 줄 생각이었다.괜찮았다.길을 잠깐 잘못 든 것뿐이었다.딱 한 번 이렇게 빗나간 거라고, 승현은 그렇게 생각했다.앞으로는 승현이 유하를 붙들어 둘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승현의 입가에 걸렸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옆으로 늘어뜨린 손이 단단히 쥐어졌다.“네가 그렇게 하면 유하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알아? 넌 늘 그런 식으로 유하를 몰아붙이고 상처 입혀.”청산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청산은 감히 다 상상하지도 못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하가 그때 얼마나 무너졌는지, 얼마나 누군가의 곁이 필요했는지.그런데 청산은 W시에 묶여 꼼짝도 못 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었고, 유하 곁으로도 갈 수 없었다.청산은 승현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묶어 두고, 빈틈으로 파고들려는 계산이었다.그런데 청산이 더 분명히 아는 것도 있었다.“그때 유하가 보고 싶었던 사람, 곁에 있기를 바랐던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청산은 승현을 똑바로 보며 승현이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찔렀다.“유하는
“미안해.”유하는 청산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흐리게 말했다.“미안해.”‘미안해.’그제야 청산이 정신을 붙잡았다.하지만 청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유하의 가는 허리를 감아 끌어안고 몸을 더 밀착시킨 채, 키스를 깊게 이어 갔다.서로는 입술과 이가 맞물렸다.청산은 마음속으로 빌었다.‘시간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끝까지, 아주 오래...’그런데 청산의 마음은 끝없는 황량함으로 번지는 슬픔에 잠겨 들었다. 눈물이 시야를 흐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는 겨우 입술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온기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그때 창밖으로 주홍빛 노을이 스며들었다.부드럽고 환한 빛이었다.그래도 전통찻집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유하와 청산보다 선명하지는 않았다....그때, 전통찻집 문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아무 대답도 없었다.곧이어 더 무겁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그제야 안에 있던 유하와 청산이 정신을 차리고 떨어졌다. 유하는 얼굴 가득 번진 눈물을 황급히 닦으며, 살짝 아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무 의자에 기댄 청산 쪽은 감히 보지 못했다.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점점 커졌다.“나... 내가 문 열게.”유하는 허둥지둥 돌아서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밖 사람과 눈이 마주친 채 그대로 굳었다.승현이었다.승현은 울어서 붓고 붉어진 유하의 눈, 그리고 깨문 자국 때문에 약간 부어오른 붉은 입술을 훑어봤다. 무표정으로 싸늘한 눈빛이 유하를 넘어 전통찻집 안쪽으로 향했다.그때 전통찻집 안에서는 청산이 막 수건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얼굴의 눈물 흔적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청산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선명하게 울었던 흔적이 남은 붉은 눈가만이 승현과 멀리서 마주쳤다.서로는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주변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유하는 이유 없이 사위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꺼내려던
“나를 사랑해?”유하는 울먹이며 대답하려 했다.그런데 심장이 물속에 가라앉은 돌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유하는 떨리는 손으로 청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 여자의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유하는 청산의 안경을 벗겼다.찻상 위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손끝으로 청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리고 청산의 이마를 스치고, 눈썹뼈와 눈가와 콧대를 아주 천천히 따라갔다.다정하고 느린 손길이었다.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지금 이때에는 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다 전해지고 있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즈음, 먼저 침묵을 깬 건 유하였고, 손끝은 여전히 청산의 얼굴 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유하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지만, 목소리는 울음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겨우 숨을 고른 듯, 이제는 소리가 나왔다.유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그냥... 낮게 불렀다.“선배.”“선배.”“청산 선배.”“오빠.”“청산 오빠.”유하는 여러 번 불렀고, 분명 웃고 있었는데, 눈물은 계속 떨어졌다.청산도 웃었다.웃고 울고 있는 유하를 바라보던 청산은 대학 시절 유하와 다시 만났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끝내 기억은 더 앞선 처음의 장면에 멈췄다.나무 아래에서 드래곤볼 흉내를 내며 폴짝거리던, 청산을 웃게 만들던 그 바보 같은 여자아이.“바보.”청산이 웃으며, 울먹이며 말했다.“바보.”청산도 손을 들어 유하의 얼굴을 가볍게 따라갔다.사랑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기억에, 영혼에, 몸의 본능에 깊이 새기려는 것처럼.그러면서도 끝내 접지 못한 마음으로 물었다.“날 거절한 거, 오승현 때문이야?”“아니.”유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건... 선배랑 내 일이야.”“선배랑 나.”청산은 작게 웃었다.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참아 내며 청산이 말했다.“우리...”청산은 ‘우리 앞으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라고 묻고 싶었다.그런데 차마
‘너는 나를 사랑한 적 있어? 유하야...’청산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붉게 충혈된 청산의 눈을 마주한 유하는 심장이 세게 조여 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끝내 말없이 닫았고, 마지막에는 시선을 비켜 냈다.“선배, 나는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선배도 선배 일을 포기하길 바라지 않아. 근데 우리가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또 생겨. 그때는...”유하는 거기서 멈췄다. 더 말하지 않아도 청산이 뜻을 알아들을 거라는 걸 유하도 알고 있었다.앞으로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유하와 청산이 어느 날 갑자기 각자에게 일이 닥쳤는데 서로 다른 곳에 떨어져 있어서 제때 달려가 서로를 지켜 주지 못하면...한 번은 버틸 수 있어도 그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정말 끝까지 아무 원망 없이 갈 수 있을까?정말 마음에 아무 걸림 없이 살 수 있을까?그럴 수 없었다.유하는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예전에 유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둘이 계속 갈 수 있고, 다만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 적을 뿐이라고. 그 정도는 괜찮고, 유하는 배려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청산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소성란이 세상을 떠난 뒤, 유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제대로 알게 됐다.남녀관계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유하가 바라는 삶도 아니었다.그리고 지금의 유하는 거기에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소성란이 남긴 것들을 지키고, 유하가 할 수 있는 만큼 정리하고 돌보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건 이제 접어 두고 싶었다. 유하에게는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지금 유하의 몸 상태로는 결혼해도 청산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러니 더 왜 그래야 하는지 유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짧게 아픈 편이 오래 아픈 것보다 낫다.그래야 짧아도 좋게 기억할 수 있다.청산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자 유하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중에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게 되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아. 선배는... 선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