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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겠습니다, 세자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Author: 칠공주

제1화 이제는 떠나야 할 때

Author: 칠공주
송완영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끌고 겨우 수렵장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수렵장에 관람을 온 귀족 여식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거 들었어? 국공부 둘째 도령이 이번 수렵대회에서 우승을 했는데 폐하께서 무슨 포상을 바라느냐고 물으셨더니 유경년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청했다는 거야. 폐하는 또 그걸 허락하셨고!”

“그럼 유혜안도 아버지 따라 경성으로 복귀하겠네? 양 도령은 참으로 순애보시구나.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소꿉친구를 잊지 못하고 계셨다니!”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꼭 붙어다니면서 자랐잖아. 송완영이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벌써 혼인하고 아이까지 보셨을 텐데.”

“유혜안이 돌아오면 바로 혼례를 올리겠지. 그때가 되면 송완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첩의 자리로 밀려나게 되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송완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슴이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녀의 부군 양기주는 뭇 세가들이 참여하는 수렵대회에서 불곰을 사냥하여 우승을 하고 폐하의 포상을 받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다.

양국공부 세자 자리를 두고 양기주는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양기주가 양국공의 적자이긴 하지만 유일한 적자는 아니었다.

그의 위로는 큰형인 양기천이 있었는데 양국공이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양기주의 모친 가화군주는 양국공의 후처였다.

양기주는 줄곧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해왔기에 이번 기회에 폐하의 앞에 눈도장을 찍는다면 앞으로 경쟁에서 크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양기주를 뼛속 깊이 연모하는 송완영은 그가 불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주저없이 말을 타고 수렵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불곰을 유인했고 그로 인해 숨돌릴 틈을 확보한 양기주는 회심의 일격으로 불곰의 목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그녀의 잔등은 예리한 곰 발톱에 긁혀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고 극심한 통증에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반면 그녀가 7년을 연모하고 모든 걸 다 걸고 3년이나 시중을 든 사내는, 그녀가 목숨 걸고 바꿔온 우승을 첫사랑 아버지를 위해 써버렸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충격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녀는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송완영의 시종 남주가 안쓰러운 얼굴로 울먹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씨, 또 둘째 도령을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신 겁니까? 하지만… 하지만 도령은 정말 너무하세요!”

송완영은 모든 걸 다 잃은 얼굴로 멍하니 상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약이 상처에 닿아 몹시 쓰릴 텐데도 그녀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수 출신이지만 한낱 육품 참장에 불과했다. 그녀가 가진 조건으로는 국공부의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3년 전, 평사관 전장에서 아버지는 양국공을 호위하다가 적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송완영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였기에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한 노부인은 송 참장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양기주와 맺어주겠다고 공표했다.

가장 반대가 심했던 사람은 양기주의 모친 가화군주였다.

그녀는 미천한 집안 출신인 송완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상인 출신인 송완영 어머니의 신분을 꼬집으며 자신의 조카딸인 유혜안을 양기주와 맺어주고 싶다고 주장했다.

가문의 실권을 쥔 두 여인의 팽팽한 냉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냉전은 황제가 송완영을 양국공부 측실로 들이라는 첩지가 내려지면서 일단락되었다.

노부인은 송완영에게 집안 관리권을 주었고 비록 첩이지만 정실과 대우를 같이한다고 선포했다.

순진한 송완영은 자신이 진심을 다해 잘하면 양기주도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양기주에게 그녀는 황명을 앞세워 강제로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이었다.

신혼 첫날밤에도 노부인이 황명을 내세워 그를 강제로 신방에 밀어넣은 거였다.

자신이 원하는 신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싫은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데 그가 기분이 좋았을 리 없었다.

송완영이 회상에 잠겨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양기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건장한 체구에 타고난 위압감을 풀풀 풍기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오늘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송완영은 이불을 바짝 끌어당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방금 사람들이 한 말이 사실인가요?”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더니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앉았다.

“어머니께서 혜안이가 너무 보고 싶다 하셔서 경성으로 오라 하였다. 앞으로는 국공부에서 장기 거주할 예정이니 그 아이를 찾아가서 시비를 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의 말투에서는 경고의 의미가 물씬 풍겼다.

송완영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하...”

하고 싶은 말은 많고도 많은데 결국 허무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양기주에게 그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이거늘, 어찌 그에게 자신의 헌신을 봐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양기주와 유혜안의 연정은 한때 경성의 미담으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 사이에 낀 미운 새끼오리에 지나지 않았다.

3년 전, 혼례식에서 양기주는 유혜안의 아버지가 죄를 짓고 유배를 떠난다는 말을 듣고 혼례복을 입은 채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친정에 인사드리러 가는 날에도, 유씨 가문이 유배를 떠난다는 소리에 송완영을 길에 버려두고 유혜안을 배웅하러 갔던 사람이었다.

다방의 이야기꾼들은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지게 구사했다. 국공부의 둘째 도령이 눈물을 머금고 마음에 품은 여인을 배웅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감동적인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었다.

반면 송완영은 은혜를 빌미로 타인의 정혼자를 가로챈 파렴치한 여인으로 알려졌다.

극심한 통증에 그녀는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구나.’

양기주는 먼 곳에 있는 정인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중상을 입은 그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 뭘 더 기대할 수 있을까!

“혜안 아씨가 돌아오시면 두 분 사이에 방해가 되지 않게 소첩이 떠날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뒤돌아선 양기주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비꼬듯 말했다.

“그 난리를 피우고 국공부에 들어온 네가 제 발로 떠난다고? 그걸 누가 믿지?”

경멸에 찬 어투에 송완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3년 전 그녀가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황제를 찾아가서 국공부에 시집갈 수 있게 첩지를 내려달라 간청했다고 알고 있었다.

양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를 신분상승과 부귀영화를 위해 양심까지 팔아먹은 악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혐오했고 냉대했으며, 증오했다. 유혜안 아버지가 유배를 떠난 일도 송완영의 탓으로 돌렸다.

유경년은 공부상서로 있는 동안 제방 수리 자금 10만냥을 횡령한 죄로 유배령이 떨어졌다. 그를 적발한 사람은 공부의 칠품 관원이었는데 하필 그가 송완영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다.

오랜 시간 쌓아둔 상처가 다시 찢겨져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혜안이와 너는 결이 다른 사람이야. 그 아이가 너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어!”

말을 마친 양기주는 매몰차게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마치 그녀와 말 한마디 더 나누기도 싫다는 듯이 떠났다.

송완영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힘껏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단호해졌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대주는 여인에게 유난히 각박한 관습이 있었다. 혼례를 올린 여인은 죽어서 시댁을 떠나는 한이 있어도 출처(出妻)나 이부(離夫)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는 양기주의 정실도 아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마지막 대비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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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안의 목소리는 깊은 공포에 떨리고 있었다.양기주의 눈가에서 욕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동굴 밖, 유혜안은 넋이 나간 얼굴로 바위 뒤에 기대고 있다가 양기주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다가왔다.“무슨 일이니?”유혜안은 양기주 등 뒤의 송완영을 보더니 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양기주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울지 말고 천천히 해. 내가 있으니 겁먹지 말고.”그러자 유혜안은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그녀의 시종인 채은이 씩씩거리며 양기주에게 말했다.“도련님, 방금 아씨께서 송 이랑의 시종 둘과 마주쳤는데 소월이라는 시종이 저희 아씨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도련님의 정실은 송 이랑뿐이라고, 아씨께 국공부에서 당장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몇 마디 반박했더니 소월은 무공 좀 할 줄 안다고 저희 아씨를 호수에 밀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더라고요!”채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혜안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오라버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제가 곁에 있는 걸 송 이랑이 못마땅해하는 건 알고 있지만… 시종까지 그런 말을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송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혜안을 바라보았다.소월이 성질이 좀 불 같기는 해도 선은 지킬 줄 아는 아이였다. 절대 이 시기에 유혜안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그녀가 뭐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싸늘한 눈빛이 매섭게 그녀를 향했다.“시종 관리 똑바로 해!”거침없는 비난이 송완영의 고막을 뒤흔들었다.그는 역시나 채은의 말을 그대로 믿고 쉽게 그녀를 단죄했다.이미 양기주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말과 단호한 태도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괜찮아… 어차피 한 번도 나를 향한 적 없는 마음이니….’그는 유혜안이 그녀의 목숨을 취하려 한 배후의 흑막인 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에게 해명을 한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소첩, 도련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겠습니다.”송완영은 담담하게 예를 행했다. 그녀는 마치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4화 태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장공주 전하, 소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양기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장공주에게 예를 행했다.그의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그나마 덜어주었다.“소인 부인 송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장공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송완영을 계속 자리에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얘기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날 일은 절대 기주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송완영은 비웃음을 머금었다.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양기주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위압감 넘치는 눈으로 자신의 뒤통수만 노려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였을 리 없었다.그녀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갖은 수모를 당할 때는 침묵을 지키더니 아끼는 사촌 여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가화군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양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혜안뿐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고 이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장공주 화원의 뒷산, 그들은 산 정상의 좁은 동굴로 들어갔다.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자 둘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양기주의 시선이 송완영에게 고정되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부드러운 흑발과 붉은 입술이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병에 시달려 시들어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여장군처럼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연회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송완영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망신을 주고 은근히 유혜안을 조롱하기까지 했다.‘내 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당당해졌지?’송완영은 조용히 양기주의 질책을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열자마자 뜻밖의 질문을 했다.“왜 거짓말을 했지?”만약 이 자리에서 그녀의 거짓을 간파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양기주뿐이었다.무릎의 흉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능통한 의술 실력을 가진 심여옥이 주고 간 옥용고를 발랐더니 보름도 되지 않아 흉터는 천천히 사라졌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 상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3화 더 이상 못 참아

    장공주는 송완영에게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상인의 딸 따위가 장공주의 정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한바탕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하필이면 태자가 나타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의 집사에게 곤장을 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태자가 한때 송완영의 집을 찾아가 혼사를 제안한 사실을 고모인 장공주는 알고 있었다.양기주에게 시집을 간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태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장공주 입장에서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너처럼 출신이 비천한 여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도 첩실의 자리에 마땅하나, 폐하께서는 너희 송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측실의 자리를 윤허했다. 네가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폐하께 과분한 자리라고 간청하고 본분에 맞게 첩실의 자리로 만족해야 하겠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혜안이가 착해서 그나마 널 봐준 것이지 다른 여인이었으면 택도 없어.”양기주는 송완영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공주가 두 번이나 유혜안과 그의 혼인을 언급했음에도 송완영은 한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치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연회는 장공주와 가화군주가 송완영을 모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송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저는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폐하를 찾아가 국공부와 혼인시켜달라고 폐하께 간청을 올린 적 없습니다. 그건 장공주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갑작스러운 반박에 장공주마저 당황했다.연회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귀부인과 귀족 여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장공주가 버럭 화를 냈다.“무엄하다! 감히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송완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당당히 장공주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 전 5월 초, 장공주께서는 청색 두루마리를 입은 어린 태감을 저희 집으로 보내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니 아버지의 위패를 안고 입궁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저는 그 태감을 따라 집을 나왔고 그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2화 이제 정실을 들여야지 않겠니?

    4년 전,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혼담을 건네던 때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그때 송완영은 어쩌다가 태자의 눈에 들었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의아하기만 했다.그녀처럼 집안이 탄탄치 않은 출신이 태자의 첩실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였으나, 태자는 무려 그녀에게 측비의 자리를 제안했다.갑작스럽게 찾아온 부귀영화에 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간곡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태자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집을 빠져나갔고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황실 체면도 지키면서 그녀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았다.송완영은 그런 태자가 존경스럽고 감사했다.하지만 소리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장공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장공주의 지위가 있으니 아무도 감히 연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의 동복 누이로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평소 미남을 좋아하는 그녀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스무 명 넘은 남첩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경성의 세가들은 대부분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연회 분위기는 장공주의 싸늘한 표정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바위를 사이에 둔 남자 구역은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태자가 상석에 앉고 양기주는 그의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영평 후작의 적자 도영이 도착했다. 그는 대범하게 태자께 늦었다며 사죄를 드렸다.태자도 그의 죄를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며 농을 걸었다.“너는 벌써 온 정신이 옆 여객들 구역에 팔려 있으니 이 정도면 늦은 편도 아니지.”도영은 미인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묘한 발언을 했다.“뭐 볼 게 있겠습니까? 경성의 귀족가 여식들 중에 송완영의 미모를 따라갈 자가 있어야지요. 시집을 잘못 간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술잔을 든 양기주는 오늘따라 술맛이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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