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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last update 게시일: 2026-10-26 09:15:09

“태오! 와인 상자는 총 세 개야.”

“알아요.”

“라벨 꼭 확인하고.”

“걱정 마세요.”

태오는 와인 직수입업체에 도착하자마자 납품 명세서와 상자에 부착된 라벨을 대조했다. 수량과 품종은 물론 빈티지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새로 계약한 거래처인 만큼 처음 몇 번은 직접 가서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는 태오의 말에, 레스토랑 사장은 유난히 기특해했다. 정작 태오에게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남의 손을 거쳤다가 문제가 생기느니 처음부터 제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속 편했으니까.

건물 지하주차장에는 와인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실린 운송용 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태오는 직원과 함께 상자를 차량에 옮겨 실었다.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는 직원과 인사를 나눴다.

이제 가게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하면 긴 하루도 끝이 난다.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짧은 전자음과 함께 자동차의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낯익은 검은색 세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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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8회

    지유는 태준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서재에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 책장까지 온통 나무로 마감된 공간이었다. 제법 넓은 방이었지만 차갑거나 휑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목재 특유의 색감과 은은한 향 덕분에 아늑했다. 간간이 다이닝룸 쪽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마저 지유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지유는 의자를 뒤로 돌려 책장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경제서와 역사서, 두꺼운 외국어 원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사이에서 유독 낡은 양장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등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 무슨 책이지? 호기심에 책을 꺼내 펼쳤다. 그 순간, 책장 사이에서 편지와 쪽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어?” 지유가 놀라 몸을 숙였다. — 뭐야. 학창 시절에 주고받은 연애편지라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누렇게 바랜 편지 봉투, 반으로 접힌 메모지, 모서리가 닳은 작은 종이들. 그사이에 사진 한 장이 섞여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지유는 무심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찍은 듯했다. 두 사람의 뒤로 테이블과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진 속 여자는 꽤 어려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앳된 얼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웃음이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사진을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 정도였다. 그 옆에는 태준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입가와 눈매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지유는 사진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나. 사진 아래쪽의 흰 여백에는 작고 동그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준 오빠,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한 장뿐인 이 사진은 오빠가 간직해.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7회

    “이건요?” 지유가 장식장 위의 작은 물건을 가리켰다. 태준은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그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의 질문에는 단순히 물건의 이름을 묻는 것 이상의 호기심이 있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왜 이런 것을 샀는지, 어째서 여기에 두었는지. 그러고 보면 태준 자신도 이유를 잊어버린 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필요해서 샀던 것인지,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것인지조차 가물가물한 것들. 지유가 묻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두었을 것이다. “왜요? 기억 안 나요?” “그러게. 이걸 왜 샀더라.” 태준이 웃자 지유도 따라 웃었다. “집에 있는 물건인데도 몰라요?” “오래 살다 보면 그래.”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요?” “십 년은 넘었지?” “와.” 지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통창 너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키가 제법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원 한편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낮은 담장이 이어졌다.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단독주택이었다. 아마도 넷, 아니 그 이상의 가족 구성원을 염두에 두고 구입한 집이리라. 5개의 방과 4개의 욕실은 좀 오버야. “안 무서워요?” “뭐가?”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는 않았지만, 가끔 지나치게 조용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라면 맨날 거실에만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방은 들어갈 일도 없겠는데요?” “나도 그래.” “그럼 나머지 방은 왜 있어요?” 태준은 웃으며 거실 통창 앞에 서있는 지유의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정원에서 스며든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가장자리에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태준은 느릿하게 웃었다. “잘 어울려서. 우리 집이랑.” 지유는 입술을 샐쭉 내밀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6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우는 셔츠를 벗어 던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오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목걸이와 혜진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붉은 흔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혜진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는 뒷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익숙했다. 정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오 집에는 가끔 가?” “응?”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태오의 아슬아슬한 질문이 못내 화가 났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일까. 정우가 조금만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어디까지 허용하고, 언제 끝낼 것인지. 이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했다. 자신은 결국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오랫동안 일구어 온 생활이 있는 세계. 잠시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거의 안 가지. 그건 왜?” “아니, 뭐. 태오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민재도 없고, 나도 거의 일에 매여 있고.” 정우는 주방 조리대에 한 손을 짚었다. “당신은 카페 오가는 길에 가끔 들러 주면 좋을 것 같아서.” 말투도, 내용도 한없이 다정했다. 그러나 혜진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달랐다.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혜진은 티백을 꺼내 찻잔에 넣느라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보았더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정우가 걱정하는 것은 태오의 외로움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혜진 자신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태오가 아니라는 것을. 정우가 조리대를 돌아 혜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붉은 흔적은 티셔츠의 목선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화장이 거의 지워진 탓에 오히려 아까보다 선명했다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5화

    그날 혜진이 먼저 정우에게 다가온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섹스는 없었다. 물론 수진을 만나는 간격이 유독 짧아진 탓에 정우로서는 아쉬울 겨를도, 안하게 된 기간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혜진과는 잘 맞았다. 첫 만남부터 혜진은 섹스에 있어서는 꽤 대담했고, 즐겼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는 조신하고 단정한 축에 속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확연한 여자. 정우는 그 이중적인 면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혜진 역시 정우와의 관계를 꽤 만족해했었다. 한 번으로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우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혜진은 아쉬운 듯 웃으며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곤 했다. —그런데 정우는 올리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먹어? 회사에서 뭐 먹고 왔어?” 혜진이 의아한 듯 정우의 접시를 들여다봤다. 음식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다음 메뉴가 테이블 위에 놓이고 있었다.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됐나 봐.” “뭐 먹었는데?” “삼계탕” 정우의 시선이 문득 혜진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목걸이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공허한 목덜미에서 쇄골까지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화장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붉은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다. 상대의 입술이 집요하게 머물렀을 때, 특히 피부가 연약한 여자에게 남곤 하는 흔적이었다. 정우 자신도 수없이 보아 왔고, 남기기도 했던 자국. 울혈. 정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왜?” 혜진이 그를 바라봤다. 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어디 아파?” 혜진이 물었다. 그제야 정우는 눈을 거두었다. “아니.” 그는 레몬수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올리브의 짠맛과 레몬의 신맛이 전혀 어우러지지 않은 채 입 안을 맴돌았다. “참, 다음 주에 부부 동반 모임 있는 거 알지?” 혜진은 새로 서빙된 도미 필레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껍질은 노릇하고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4화

    혜진은 휑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디 갔지?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태오의 집에 떨어뜨리고 온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잠시 망설인 끝에 도로 내려놓았다. “우리 해외 가서 살래요?” 그날 밤 태오가 했던 말이 줄곧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휴가일 뿐인데. 일상 속 카페인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하루에 잠깐의 각성을 주는, 조금은 중독적이지만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는 그런 것. —커피를 하루 종일 마실 수는 없잖아. 더구나 이 감정도 언젠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터였다. 지금은 선명하고 간절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희미해질 것이었다. 혜진은 난감함과 들뜸 사이, 그 어느 즈음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시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하고 익숙한 소음이 카페에 퍼졌다. ——----- “제가 바로 가면 되는데요.” “아니야. 어차피 전해 줄 것도 있고. 같이 가자.” 태오는 정우의 손에 들린 노트북 상자를 받아 들었다. 신입 직원들에게 지급할 노트북을 주문하면서 같은 모델로 하나 더 구입해 두었다고 했다. “강의 듣고 과제하려면 필요하잖아. 사양 좋은 걸로 써야지.” 태오가 돈을 모아 직접 샀던 것도 아직 쓸 만했다. 팬 돌아가는 소음이 제법 크고 배터리가 금세 닳기는 했지만, 앞으로 이 년쯤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전자제품이야 최신일수록 좋다지만, 멀쩡한 물건을 그리 자주 바꾸는 일은 태오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우는 거실에 들어서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가방에서 새 면도기 세트까지 꺼내 보였다. “혜진이가 두 세트 샀길래.” 혜진이. 태오는 그 이름에서 수진을 떠올렸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깊은 관계를, 대체 언제부터 이어 온 걸까.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이제 와서 그 관계를 멈추게 할 수 있을

  •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63화

    어리다고 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친구의 딸이라는 사실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태준은 지유의 몸을 거침없이 탐했다. 침대 위에서 그는 그녀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한동안 보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엔 클리토리스였다. 분명 그녀의 입 안에서 말캉하고 부드러웠던 그의 혀는 전기라도 일으키는 듯, 닿을때마다 그녀의 척추까지 찌릿하게 했다. 시트를 그러쥐고는, 얕은 신음을 내뱉을 때마다, 자극은 더 강해졌다. 이윽고 발기되어 한껏 예민해진 음핵을 공략하더니, 이내 내벽 안으로 혀가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아아….” 그의 코가 강하게 음핵을 압박하고, 내벽 바로 안쪽의 가장 민감한 곳을 휘젓자, 울컥하고 젤리가 덩어리째 나왔다. 마치 흡입기처럼 그녀 몸에서 나오는 건 다 빨아버린 그가 번들거리는 입매를 혀로 핥으면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맛있는데?” — 미쳤어. 지유는 시트를 움켜쥐었다가 이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쌌다. 천박하고 음란해. 하지만 지유는 그 낙차감에 흥분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태준도 나이 차와, 친구 딸이라는 사실은 여기서 그의 욕정을 돋구는 향신료일 뿐일 것이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한껏 벌리고 태준의 등을 그러 안았다. “넣어줘?” 지유는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이미 태준의 손가락은 그녀의 질구를 마구 문지르고 있었고, 그에 흥분한 지유의 둔부가 시트 위로 자꾸만 들렸다. “그럼 말해봐. 자지 넣어주세요라고.” —뭐야. 지유는 마음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취향이었나. 그런데, 꽤 나쁘지 않다. 이렇게 민감한 부위를 활짝 벌린 채, 눈과 혀로 맛보고 있는 남자 앞에서 느끼는 여자의 수치심이란, 수치심으로 극복해야 제 맛이라는 걸. 태준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 욕망 자체가 심연에 있는 건데, 바닥 끝까지 끌어내리는 거, 태준의 취향이 그러했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여자들도, 점차 태준에게 길들여졌었다. 먼저 자진해서 도구를 탐색하고, 그걸 착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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