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Chapter 1 - Chapter 10

12 Chapters

1화

카페 문을 닫은 건 팔 년 만에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폐업이 아니라 공사 때문이었다. “사장님, 이 벽은 다 뜯는 거 맞죠?” “네.” “아깝긴 하네. 원목인데.” “뜯어주세요.” 현장소장이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상태는 괜찮아요. 잘 손보면 살릴 수도 있는데.” “버리지는 마세요. ” “네?” “떼어낸 거요. 버리지 말고 모아두세요.” 소장이 혜진을 한번 쳐다봤다. “어디 쓰시게요?” 잠시 벽을 바라봤다. 팔 년 동안 카페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짙은 원목이었다. 군데군데 긁히고 색도 바랬지만 나무 자체는 아직 단단했다. “테이블로 만들 수 있지 않아요?” “만들 수야 있죠.”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새로 사는 게 더 깔끔할 텐데.” “알아요.” “돈도 크게 차이 안 날 거고.” “그래도요.” 소장이 웃었다. “사장님 의외시네.” “뭐가요?” “아까는 미련 없이 다 뜯으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벽으로 쓸모를 다했다면 테이블이 되면 되고, 테이블이 될 수 없다면 다른 쓸모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점심 때쯤에 다시 카페에 들어갔을 때 벽은 절반쯤 사라져 있었다. 인부들는 점심 겸 휴식시간을 가지러 다들 나가고 없었다. 그 때 안쪽에서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사각. 잠시 멈췄다가, 다시 사각. 전동공구 소리가 가득했던 오전과는 달리 아날로그적인 느린 소리였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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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날 밤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남편이 무심히 물었다.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어?” “그럭저럭.” “내가 특별히 인테리어 업체 고르고 고른 거야.” 혜진은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였다. “그러니까 특별히 비싼 거겠지.” 남편이 웃었다. “사람이 참. 좋은 데를 골라줘도 꼭 그렇게 말하지.” “비싼 거랑 좋은 건 다르잖아.” “그래서 어때. 일은 잘해?” “아직까진.”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말해. 대표한테 얘기해줄 테니까.” “됐어. 내가 알아서 해.” “그럴 줄 알았다.” 남편은 더 묻지 않고 와인잔을 들었다. 혜진은 물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낮에 보았던 손이 떠올랐다. 거칠게 굳은 손가락, 나무에 박힌 못을 빼내던 팔. 그리고, ‘계속 보셔도 되고.’ 혜진은 괜히 물잔을 내려놓았다. “왜?” 남편이 물었다. “뭐가.”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떤데?” “누가 또 성질 건드렸나 해서.” “아무도.” “현장 사람들이 벌써 사고 쳤어?” 혜진은 잠깐 대답이 늦었다. “아니.” 사고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고작 이름을 물었고, 그 이름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태오, 스물한 살. 그게 전부였다. 그게 사고인가, 아님 사건..? “그런데.” 남편이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민재는 오늘도 늦어?” “민재, 엠티갔잖아. 단톡방 공지로까지 올려놨는 걸?“ “아 맞네.“ 남편은 헛웃음을 흘렸다. 남편이 혜진을 바라봤다. 그냥 보는 눈이 아니었다. 샤워를 마친 혜진은 얇은 슬립 하나만 걸친 채 화장대 앞에 서 있었다. 매끄러운 천이 몸의 선을 따라 붙어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윤곽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남편의 시선이 그 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한 번 보고 지나치는 시선이 아니었다. 어깨에 머물렀다가,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를 지나 한참 아래에서 멎었다. 그러다 해원이 몸을 돌리자 다시 느릿하게 위로 올라왔다. 십 년 넘게 함께 산 아내를 보는 눈치고는 지나치게 끈질겼다. 거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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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음 날은 카페에 갈 일을 만들지 않았다. 공사 진행 사진은 소장이 보내줬고, 자재 확인도 전화로 끝냈다.그런데 오후 다섯 시가 넘어 거래처에서 생두 배달 완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테스트 배전이라도 해놓아야 다음 날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결국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카페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겠지.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다. 카페 안은 낮과 달리 고요했다. 혜진은 뒤편 로스팅실에 불을 켰다. 생두를 덜어 로스터에 넣었다.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열을 받은 원두 특유의 냄새가 천천히 공간을 채웠다. 그때였다. 사각. 혜진의 손이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각. 다시. 2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혜진은 로스팅실을 나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희미하게 켜진 작업등 아래 사람이 있었다. 이태오. 바닥에는 완성 직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태오는 혼자 테이블 모서리를 다듬고 있었다. “뭐 해요?”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혜진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왜 왔어요?”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태오가 손에 묻은 나무 가루를 털었다. “이거 끝내려고요.” “내일 하면 되잖아요.” 태오가 사포를 내려놓았다. “나 내일부터 안 나와요.” “……왜?” 생각보다 대답이 빨리 튀어나왔다. “다른 현장 잡혔어요.” “갑자기?” “거긴 일당 더 줘요.” 별것 아니라는 말투였다. 혜진은 완성되어가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래서 이걸 오늘 끝내려고?” “내가 시작했으니까.” “다른 사람이 해도 되잖아.” “싫어서.” “뭐가?” 태오가 손바닥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한번 쓸었다. “내가 하던 걸 다른 사람이 마무리하는 거.”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하게 그다운 대답이었다. “몇 시까지 하려고 했는데?” “끝날 때까지.” “돈 더 주는 것도 아니잖아.”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에요.” 태오가 다시 사포를 들었다. 사각, 사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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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등 뒤로 단단한 것이 닿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바라보고 있던 테이블이었다. 혜진의 손바닥이 상판을 짚었다. “이거…….” 숨이 흐트러진 채 혜진이 중얼거렸다. 태오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오늘 완성한 거잖아.” “그러니까요.”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태오가 웃었다. “안 망가져요.” 그의 손바닥이 상판을 짚었다. “내가 만들었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태오가 혜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순간 몸이 들리며 혜진이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이태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경고인지, 허락인지, “내일이면 끝이야.” 혜진이 말했다. “알아요.” “다시는 안 보는 거야.” “네.” “그러니까 오늘 일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입술이 다시 겹쳤다. 혜진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태오는 혜진을 테이블 위로 눕혔다. 치맛자락이 흐트러졌다. 거친 손이 매끄러운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순간 혜진의 몸이 잠깐 움찔했다. 멈출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혜진은 태오의 두 팔을 붙잡았다.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태오는 한동안 혜진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채 올라오지 않았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혜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태오가 혜진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까지 자신을 밀어넣었다. 강렬한 자극에 혜진이 몸부림쳤다. 손바닥 아래로 매끄럽게 갈린 나뭇결이 느껴졌다. 이제 더이상 벽이 아닌 테이블. 혜진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 나무와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번 자리를 벗어난 것은, 아무리 원래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어도 다시 그 자리에 꼭 맞게 돌아갈 수 없었다. --------------------오전 여덟 시 십 분. 정우가 회의실에 들어오자 먼저 와 있던 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재킷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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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네. 반가워요.” 하필이면 태오의 맞은편이었다. 직원이 들어와 준비된 와인을 따랐다. “내가 전에 얘기했었나?” “당신이 후원하는 곳 얘기는 들었어.” “거기서 알게 됐어. 벌써 몇 년 됐지?” 정우가 태오에게 물었다. “한 오 년 됐습니다.” “그렇게 됐나.” 정우는 새삼스럽다는 듯 웃었다. “시간 빠르네.” 혜진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태오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것도. 남편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것도. “그럼 두 사람 꽤 오래 알았네.” 혜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렇죠.” 태오가 대답했다. 눈이 마주쳤다. 혜진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직원이 고기를 가져왔다.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가고 조용한 룸 안에 지글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당신은 안심이지?” “응.” “태오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게 제일 편해.” 정우가 웃으며 고기를 뒤집었다. 너무 평범한 저녁이었다. “카페는 어때?” 정우가 혜진의 접시에 고기를 놓아주며 물었다. “정신없지.” “공사는 마음에 들고?” “응. 생각보다 잘 나왔어.” “내가 업체 잘 골랐지?” 정우가 웃었다. 혜진은 젓가락을 들다가 멈칫했다. 태오는 태연하게 고기를 집어 먹었다. 혜진은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런데.” 정우가 물었다. “둘이 현장에서 본 적은 없어?” 혜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짧은 침묵. 그때 태오가 말했다. “몇 번 뵀습니다.” 혜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우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네. 공사 확인하러 자주 오셨으니까요.” 깔끔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럼 아예 초면은 아니었네.” 정우가 웃었다. “그러게.” 그리고 와인을 마셨다. 태오가 맞은편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제대로 인사드리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다시 평범한 식사가 시작됐다. 자신과 태오 사이에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밤 하나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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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정우는 앞만 보고 있었다. “뭐라고?” “태오. 우리 아들로 들이고 싶다고.” 이번에는 아예 몸을 일으켰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잡아당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쟤 성인이잖아.” “알아.” “스물한 살이야.” “성인 입양도 있어. 어린아이만 입양하는 건 아니야.” “말도 안 돼.” 혜진은 다시 좌석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취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 복도에서 자신에게 당신을 원한다고 말했던 남자였다. 그 남자를, 남편이 아들로 들이겠다고 했다. 신호에 차가 멈췄다. 혜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퇴근하는 사람, 휴대폰을 보는 여자,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 모두 평범한 저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만 이상한 곳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야.” “그럼 언제부터 생각했는데?” “꽤 됐어.” 혜진이 다시 정우를 바라봤다. “꽤?” “응.” “그런데 나한테는 오늘 말해?” “나도 결정한 건 얼마 안 됐으니까.”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움직였다. “태오는 알아?” “아직.” “본인한테도 말 안 했다고?” “당연하지. 당신하고 먼저 얘기해야지.” 집에 도착해서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혜진은 귀걸이를 빼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민재는?” 정우가 넥타이를 풀다가 돌아봤다. “뭐가.” “민재 생각은 해봤어?” “당연히 해봤지.” “갑자기 형이 생기는 거잖아.” “갑자기는 아니지. 먼저 얘기할 거야.” 정우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민재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혜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정우가 손을 멈췄다. “혜진아.” “왜.” “당신 취했어.” “안 취했어.” “취했어.” “지금 술이 문제야?” 정우가 잠시 혜진을 바라봤다. “알았어. 그럼 얘기해.” 그가 침대 끝에 앉았다. “뭐가 제일 걸려?” “전부.” “전부 말고.” “……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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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여기 한일병원 응급의료센터인데요. 이태오 님 비상연락처 2번에 등록되어 있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제가요?”—네.“그런데 무슨 일이죠?”—이태오 님이 공사 현장에서 추락 사고를 당하셨어요.순간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띵. 문이 열렸지만 혜진은 타지 않았다.—지금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 준비하고 있고요. 보호자분께 설명드리고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많이 다쳤어요?”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빨라졌다.—의료진이 오시면 자세히 설명드릴 겁니다.“의식은요?”—현재는…….“의식 있냐고요.”잠깐의 침묵.—오실 수 있으실까요?그 한마디에 혜진은 알아들었다.“네.”대답이 먼저 나왔다.“지금 갈게요.”—보호자분 성함 확인할게요.“윤혜진이요.”—이태오 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혜진의 입이 멈췄다.“…….”카페 사장과 전직 현장 인부, 남편이 오래전부터 돌봐온 아이의 아내, 혹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 식당 복도에서 다시 입 맞춘 남자.“제가…….”목이 막혔다.“보호자예요.”—네,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오세요.혜진은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미치겠네.”차에 올라타자마자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제발 좀 받아.”여러번 전화를 걸어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혜진은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던졌다. 해외에 있으니 회의 중일 수도 있었다. 시차도 있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이 보호자라며.”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자 혜진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당신이 가족 해주고 싶다며.”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이었다.태오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추락하면서 왼쪽 갈비뼈 여러 대가 부러졌다. 그중 하나는 폐 바로 가까이까지 밀려 들어가 있었다. 흉부 손상이 심했고 머리도 강하게 부딪쳤다고 했다.“의식은요?”혜진이 물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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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다음 날 아침, 정우는 귀국했다.공항에서 곧장 병원으로 왔는지 캐리어도 비서에게 맡긴 채였다. 혜진을 마주했을 때는 이미 담당의에게 설명까지 들은 뒤였다.“수술 경과는 좋습니다. 머리 쪽도 현재까지 특별한 이상은 없고요. 늑골 골절은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회복도 빠를 겁니다.”그제야 정우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혜진은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내가 아팠어도 이렇게 빨리 왔을까?”정우가 혜진을 돌아본다. “당연하지. 당신이 수고 많았어.”“내가 뭘.”병실 문이 열렸다. 혜진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안 들어가?”“카페 가야 돼.”“얼굴은 보고 가지.”“어제 봤잖아.”정우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은 가방을 고쳐 들었다.“간병인 오늘부터 오는 거지?”“응. 사람 구했어.”“그럼 됐네.”혜진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그날 이후 혜진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침에는 원두를 확인하고, 점심에는 거래처 전화를 받고, 오후에는 새로 들어온 직원을 가르쳤다.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틈이 생길 때마다 생각났다.—지금은 깨어 있을까, 통증은 좀 줄었을까, 밥은 먹었을까, 머리를 다쳤다던데 정말 괜찮은 걸까.생각이 거기까지 가면 혜진은 일부러 창고에 들어가 재고를 세었다.저녁이면 종종 정우에게서 병원 이야기를 들었다.“오늘은 좀 걸었대.”혜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그래?”“의사가 회복 빠르다고 하더라.”“다행이네.”“퇴원 얘기도 슬슬 하던데.”혜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혼자 집에 보내기는 좀 그렇고.”혜진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우리 집으로 데려오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간병은?”“출퇴근으로 붙일 거야. 당신한테 뭐 해달라는 거 아니야.”정우가 덧붙였다.“당신은 예전처럼 카페 일 하면 돼.”배려인 듯, 아닌 듯. 혜진은 물병을 내려놓았다.“얼마나 있을 건데?”“혼자 지낼 수 있을 때까지만.”잠깐이었다.“그래.”정우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괜찮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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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혜진이 황급히 태오에게서 떨어졌다. 태오의 손이 잠시 허공에 남았다. 현관 쪽에서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아직 안 잤어?”정우였다. 넥타이는 반쯤 풀렸고 벗은 재킷은 한 손에 구겨져 있었다. 한 걸음, 휘청. 혜진이 곧장 다가가 팔을 잡았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술 냄새가 훅 끼쳤다. 정우의 몸이 그대로 혜진에게 기울었다.“아, 오늘 퇴근하는데…… 걔 있잖아. 여보도 알지?”“누구.”“민수. 걔한테 연락이 온 거야.”정우가 말하다 딸꾹질을 했다.“십몇 년 만인가…….”“알겠어. 일단 들어가.”“나 멀쩡해.”혜진이 정우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그래. 아주 멀쩡해.”그제야 정우가 거실에 서 있는 태오를 발견했다.“어, 태오. 얼른 나아야지.”정우가 손까지 들어 보였다.“약 잘 먹고, 밥도 잘 먹고.”“네. 알겠습니다. ”혜진이 정우를 끌었다.“그만해. 가서 자.”“알았어, 알았어.”혜진이 정우를 데리고 지나갔다. 정우의 팔이 자연스럽게 혜진의 허리를 감쌌다.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정우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드르렁 소리 까지 낸다.혜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정우를 바라봤다. 술 냄새에 코 고는 소리까지.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원래 이런 날엔 그 아지트 방에서 자곤 했는데, 지금은 태오가 있다. 태오... 혜진은 이불과 베개를 들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혜진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거칠었던 손, 옷자락 아래로 느껴졌던 단단한 몸,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았던 도톰한 입술. 그리고 낮게 가라앉았던 목소리.— 그리웠다고아직 그의 손길이 남은 듯 아래가 뜨거웠다. 혜진이 그곳에 살며시 손을 얹자, 빠르게 뛰는 맥박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아…….”짧은 숨이 새었다. 미쳤다. 남편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을 채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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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쿵 혜진은 한동안 핸들을 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 뭐지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남자가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 아 혜진은 핸들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사고였다. 신호대기 중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이 풀렸고, 차가 앞으로 조금 밀렸다. 그대로 앞차의 뒤 범퍼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급히 기어를 P에 놓고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범퍼를 한번 훑어보더니 혜진을 돌아봤다. “흠집도 없네요.” 그러고도 가지 않았다. “근데 정말 괜찮으세요?” 혜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말 아닌가. “네.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나중에 뭐라도 발견하시면…….” 가방에서 명함을 찾는데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남자가 돌아갔다. 혜진은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라디오에서는 아침 진행자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를 끄고 안전벨트를 고쳐멨다. 조용해졌다. 그런데도 어젯밤 태오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혜진은 두 손으로 핸들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았다. 약속 장소는 중식당이었다. 룸 문을 열기도 전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얘는, 진짜? 정말로?” “그랬다니까. 하, 정말. 미쳤지, 나도.” 혜진이 문을 열었다. “어머, 혜진아. 왔어? 얼른 앉아.”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았다. 민영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당겨 앉았다. “내가 저번 주에 샌프란 출장 갔었잖아.” “응.” “그때 같이 갔던 표 대리 알지?” 혜진도 몇 번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부서 직원인데 곱상하게 생겨 아이돌 같다고 민영이 종종 말하던 남자였다. “저녁에 와인을 좀 마셨어. 근데 걔가 또 예쁘게 생겼잖아.” “그래서?” “서류 핑계로 내 방에 불렀지. 술김에 겸사겸사.” 꽃빵을 뜯던 미애가 코웃음을 쳤다. “술김은 무슨. 너 계획했지?” “아니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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