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진은 윤태호를 발견하고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승준아, 소개하지. 이분은 내가 특별히 초빙한 신의, 명 대사님이셔.”“명 대사님, 반갑습니다!”박승준은 재빨리 노인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하지만 명 대사는 냉담한 표정으로 박승준을 힐끗 쳐다볼 뿐 손을 내밀지 않았다.박승준은 멋쩍게 손을 거두었지만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했다.그는 실력 있는 의사일수록 성격이 괴팍하다는 속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천우진은 설명했다.“승준아, 화내지 마. 명 대사님은 누구에게나 저러시니까.”“명 대사께서는 천 리를 멀다 않고 미주까지 오셔서 할아버지 병을 고쳐주려고 하시는데 감히 불만을 가질 수 있겠어?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박승준은 역시 재벌가의 도련님답게 상황에 맞는 말을 능숙하게 했다.“어머, 황 부시장님 아니십니까?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요?”천우진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박 회장님 병을 진찰하기 위해 윤 선생을 데리고 왔어요.”황찬호가 말했다.“그래요?”천우진은 그제야 윤태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윤 선생, 우린 정말 인연이 깊은가 봐. 어디를 가든 만나게 되니 말이야.”윤태호는 말했다.“그러게. 나도 궁금해. 어쩌면 가는 곳마다 개똥을 만나게 되는 건지.”천우진은 윤태호가 자신을 빗대어 욕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 네놈이야말로 개똥이다!’“너 박 회장님 병을 진찰하러 왔다고?”“네 알 바 아니잖아!”‘젠장, 저 망할 놈은 왜 선인장처럼 온몸에 가시가 돋쳐 있는 거야? 나는 그냥 뭘 하러 왔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왜 욕하고 난리냐고.’천우진은 속으로 분통이 터졌지만 감히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칫 윤태호를 자극하면 또다시 주먹을 휘두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틀만 참자, 그때가 네놈의 제삿날이니까.’천우진은 말을 이었다.“윤태호, 박 회장님 병을 보러 온 거라면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은데.”“왜?”
청년은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윤태호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대련을 제가 썼다고 생각하는 거죠?”“아까 이 대련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글자 간 간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글쓴이가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하죠.”윤태호는 청년을 바라보며 웃었다.“그리고 당신은 완벽주의자시죠.”“저를 처음 보면서 완벽주의자라고 단정 짓는 이유는 뭐죠?”청년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러자 윤태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는 청년을 매우 답답하게 만들었다.완벽주의자로서 그는 무슨 일이든 명확하게 알고 넘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그는 평생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을 제일 혐오했다.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는 사람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세상 모든 어중간한 놈들은 다 고자나 돼라!’청년은 속으로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 맞아요. 대련은 제가 썼습니다. 저는 당신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고 싶군요.”윤태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냥 찍어본 겁니다.”‘젠장!’청년의 얼굴은 화가 나서 파랗게 질렸다.그는 윤태호가 뭔가 뛰어난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전부 추측에 의존한 거였다니, 진작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윤태호와 헛소리를 주고받지 않았을 것이다.“부시장님, 저희 집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청년은 정중하게 물었다.“나는 오늘 박 회장님의 병을 진찰하기 위해 윤 선생을 모시고 왔어요.”황찬호가 말했다.“윤 선생?”청년의 시선이 윤태호의 얼굴에 닿으며 물었다.“당신을 말하는 건가요?”“접니다.”윤태호는 웃으며 말했다.“제 이름은 윤태호입니다.”‘윤태호?’청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낯익은 이름이었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다.“저는 박승준이라고 합니다.”청년이 말하지 않아도 윤태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윤태호는 웃으며
사내의 운동은 침상 위와 침상 아래, 딱 두 가지로 나뉜다 했다.이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이었다.밤새 격렬한 운동을 마친 윤태호는 다음 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오전 9시.황찬호가 직접 윤태호를 데리러 왔다.차는 시내를 40분 가까이 달려, 마침내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윤 선생, 다 왔어.”황찬호가 말했다. 윤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대문 양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석상이었다. 그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역시 재벌은 다르구먼.”윤태호는 감탄하며 별장 정문 위에 걸린 커다란 동판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박가(朴家)라는 두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대문 좌우에는 나무로 만든 현판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한 쌍의 대련이 새겨져 있었다.윗구절: [금산, 은산, 산마다 끝없이 이어지고]아랫구절: [큰 창고, 작은 창고,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찼도다]의미는 단순하고 소박해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게다가 박씨 가문은 상업을 하는 집안이니 이러한 대련은 그들의 가풍에 매우 어울렸다.하지만 윤태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대련에 적힌 글씨체였다.용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봉황이 날갯짓하는 듯 힘 있는 필체가 막힘없이 이어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더 놀라운 점은 글자 사이사이에 숨겨진 날카로운 기운이었다.물론 서예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황찬호는 윤태호가 계속 대련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혹시 이 대련에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윤태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대련을 쓴 사람이 더 궁금합니다.”“오?”황찬호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부시장님께서는 이 글씨체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윤태호가 넌지시 물었다.서예에 조예가 깊은 황찬호는 대련을 한참 동안 유심히 살펴보더니 감탄했다.“필력이 웅장하고
“태호야, 이강윤이 쏜다고 하지 않았어? 아까 왜 네가 계산한 거야?”진도훈은 의아한 듯 물었다.2천2백2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윤태호는 웃으며 말했다.“제일 비싼 요리 몇 개는 내가 시켰잖아. 내가 계산 안 하면 이강윤을 엿 먹이는 거지. 다 동창인데 그럴 필요 없어.”“넌 진짜 스케일이 남다르네. 나도 좀 배워야겠다.”진도훈은 웃으며 말했다.문예리가 말했다.“나를 가장 실망시킨 사람은 장여울이야. 돈 때문에 저렇게까지 추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믿을 수 없었을 거야.”진도훈 또한 혀를 끌끌 차며 동조했다.“네가 장여울이랑 일찍 헤어진 게 천만다행이야. 너는 못 봤겠지만 장여울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천우진에게 아양을 떨더라. 이강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그 사람들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맛있는 바비큐 집으로 데려갈게.”윤태호가 말했다.“태호야, 이거 네가 가져.”진도훈은 천우진이 준 수표를 윤태호에게 건넸다.“이건 네 치료비로 받은 건데 왜 나 주는 거야?”윤태호가 되물었다.“사실 나는 겉에만 조금 다쳤을 뿐이라서 치료비가 그렇게 많이 필요 없어. 네가 가져.”진도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만약 오늘 윤태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천우진은 치료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예리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도훈아, 원래 널 주려던 거니까 받아둬. 게다가 나중에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하고 돈 쓸데가 많잖아.”“여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결혼이야.”“곧 생길 거야.”윤태호가 웃으며 말했다.“무슨 뜻이야?”진도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윤태호는 의미심장하게 문예리를 쳐다봤고 문예리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기다려, 차 가져올게.”윤태호가 가자 그 자리에는 진도훈과 문예리만 남았다.문예리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진도훈이 물었다.“예리야,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어디 아파?”“눈치 없기는!”문예리는 진도훈을 흘겨보았다....윤태호가 임다은의 집에
윤태호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이건 노래가 아니라 완전 꼬시는 거잖아!’“누나, 노래는 그만 불러요. 지금 친구들이랑 밖에서 모임 중이라서요.”윤태호는 다급하게 말했다.“내 노래 괜찮았어요?”임다은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네.”윤태호는 속으로 말했다.‘잘 부른 정도가 아니라 나 지금 흥분했어요.’“그럼 오늘 밤에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내가 불러줄게요.”이 말을 듣고 윤태호는 그녀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그는 기꺼이 승낙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 저녁에 찾아갈게요.”“사랑해요. 뽀뽀.”임다은은 전화를 끊었다.윤태호는 그제야 진도훈에게 말했다.“도훈아, 가자.”진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디가? 나도 끼워주면 안돼?”문예리가 갑자기 말했다.윤태호는 약간 의아해했다.그는 문예리가 진도훈을 보는 눈빛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웃으며 말했다.“야식 먹으러 갈 건데, 괜찮다면 같이 가자.”“그래!”문예리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이때, 이강윤이 윤태호 앞으로 걸어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태호야, 미안하다. 모두 장여울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너에게...”“지나간 건 다 잊어버려. 나 이만 갈게.”윤태호는 말을 마치고 진도훈과 문예리를 데리고 룸을 떠났다.그가 나가자 룸 안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진짜 몰라봤네,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태호가 저렇게 승승장구할 줄이야.”“이경진이랑 황찬호 같은 대단한 분들과 친분도 있고 우진 도련님도 맘대로 짓밟을 정도라니.”“지금의 윤태호는 예전 학교 다닐 때의 윤태호가 아니야. 앞으로 그를 만나면 다들 예의를 갖춰야 할 거야.”“저렇게 잘나갈 줄 알았으면 아까 술이라도 몇 잔 따라줄 걸 그랬어.”“다 우리가 눈이 멀었던 탓이지. 태호를 아직도 예전의 가난한 학생으로 생각했으니.”“사실 우리 탓만 할 수는 없어. 장여울 탓이지. 천우진에게 잘 보이려고 과대표까지 차버리다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어.”“어
윤태호는 그제야 발을 뗐다.주진성은 천우진을 일으켜 세우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우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괜찮아요,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천우진은 얼굴을 훔쳤는데 손에 온통 피가 묻어났다.그의 얼굴도 피범벅이 된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우진 도련님, 괜찮으세요?”장여울이 다가와 천우진에게 수건을 건넸다.천우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낸 뒤, 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 몇 글자를 갈겨쓰듯 적어 진도훈에게 내밀었다.“미안해. 윤태호의 친구인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찌검은 안 했을 텐데. 이건 약간의 치료비이니 적다고 생각 말고 받아줘.”“이건...”진도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윤태호를 쳐다봤다.“받아.”윤태호가 말했다.진도훈은 그제야 수표를 받아 들고 말했다.“감사합니다, 우진 도련님. 방금 태호가 무례하게 굴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괜찮아.”천우진은 웃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깍듯하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괜한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그러고 나서 윤태호에게 물었다.“이제 됐지?”“꺼져!”윤태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이만.”천우진은 경호원들을 이끌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룸 문을 나서는 순간, 천우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고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돌변했다.아까 윤태호에게 얼굴을 짓밟혔을 때, 그는 당장에라도 반격해서 경호원들을 시켜 윤태호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윤태호의 눈빛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그때 천우진은 문득 깨달았다. 윤태호가 일부러 돈을 뜯어내고 그의 얼굴을 짓밟은 것은 그를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을 말이다.그 목적은 단 하나...기회를 틈타 그를 제거하려 것이었다.윤태호는 작은 의사일 뿐이지만 뒤에는 임다은이 있다. 만약 자신이 분노하여 반격이라도 한다면, 윤태호는 그 틈을 타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임다은이 손을 써서 정당방위라는 핑계를 만들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