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혼이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차에 앉아 탁유미가 유치원에서 윤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경빈이 아주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으면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윤이를 데리러 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다.이경빈은 두 모자를 이렇게도 시야 안에 꽉 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그의 복수는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게다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야 했을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이경빈은 과거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언제쯤이면 이 고통이 나아질 수 있을지 그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어쩌면 이렇게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가 목숨을 거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께를 꽉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강씨 저택.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족욕을 시켜준 다음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을 유리구슬처럼 대하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아직 못 걸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도 엄청 조용하고 말이야.”이제 그녀는 어느덧 5개월을 넘기고 있어 입덧도 가라앉고 잠도 잘 왔다.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정기 검진 결과도 늘 양호한 편이었고 아이들도 아주 얌전히 잘 자라주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특히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나서는 매일매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며칠 전 임유진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강지혁이 자고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등 뒤에서 어디 가냐는 그의 말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깜짝이야! 너 안 자고 있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막 자
“이경빈 씨가요?”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10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술에 취해서?“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잠깐.”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있어.”“아니, 내가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언니 일일 테니까.”임유진의 단호함에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집사를 향해 말했다.“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여.”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외투부터 걸쳐. 그리고 슬리퍼도 신고.”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유진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신겨주었다.집사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세상에 강지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예로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극도로 비정하거나 극도로 감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강문철은 비정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녹지 않을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인 강선우는 지독한 낭만파로 사랑에 목을 맨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지혁은 두 사람 중 하필이면 강선우를 닮았고 강선우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집사는 강문철이 젊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했던 사람이라 강지혁은 강선우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임유진과 깨가 쏟아질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신겨주는 강지혁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족이 아닌 강지혁에게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임유진은 가만히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에 강지혁은 손을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을 녹일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마주하니 어쩐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강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이경빈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하지만 웃고 있다기에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부럽네. 서로 옆에 딱 붙어 있잖아. 반면에 나랑 유미는...”강지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잔뜩 취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다 다시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임유진 씨는 유미 친구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유미가 내 간 기증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받게 할 수 있는지...”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네? 언니가 수술을 안 하겠대요? 아니, 이경빈 씨한테 간 기증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이경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뭔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나랑은 엮이기 싫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죽는데도... 그래도 내 간은 싫대.”그는 탁유미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용서는 둘째치고 일단 그녀가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탁유미가 살 방법은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거절이라니...임유진은 생각도 못 한 전개에 고민에 빠졌다.“뭐라고 말 좀 해봐. 임유진 씨 똑똑하잖아. 어떻게 하면 유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임유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의 꼴이 화가 나기도 했다.“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언니를 향한 마음을 깨닫지 그랬어요. 아니면 감옥에 보낸 것으로 복수를 끝냈으면 두 번 다시 찾지 말던가 왜 다시 나타나서 또 언니한테 상처를 줘요!”“그래...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등신이라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어...”이경빈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날 증오한다고 했어... 유미가... 유미가...”이윽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안 돼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였다.지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