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의 눈빛엔 깊은 절망과 체념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마... 이건 하늘이 정한 운명일지도 몰라. 이 타이밍에 사고가 난 것도... 어쩌면 이 기회를 빌려 아이를 지우라는 계시 일지도...’어쩌면 이 아이가 그녀 곁을 떠나는 게 더 나은 결말일지도 모른다.이렇게 아이를 보내주고... 백연신과의 인연도 이제는 완전히 끝낼 수 있을 테니까.잠시 뒤,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연우진은 한지영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는 의료진에게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말했다.“지금 임신 중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뱃속의 아이, 꼭 지켜주세요!”의료진은 즉시 한지영을 이동형 침대에 눕히고, 응급구조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연우진은 응급실 밖 대기 의자에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사실 사고 직후, 그는 바로 한지영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넣으려 했지만...한지영이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단호하게 말하며 그를 말렸다.‘그럼 백연신한테 연락해야 할까...?’하지만 한지영은 백연신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연우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백연신에게 연락만 하면 분명 더 나은 의료진과 시설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병원에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땐 분명 자신이 연락하지 않은 걸 후회할 테니...그렇게 망설이고 있던 그때, 한지영의 가방 속에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연우진은 차에서 그녀를 옮길 때, 조수석에 있던 가방도 같이 챙긴 터였다.그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발신자 이름은 없었고, 숫자만 떠 있는 상태... 아마 저장되지 않은 번호일 것이다.잠시 망설인 끝에 연우진은 전화를 받았다.“지영아... 지금 어디야?”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 낮고 허스키하게 쉰, 원래대로라면 청아했을 백연신의 목소리였다.연우진은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응답했다.“백연신 씨죠? 저는 연우진입니다. 지영 씨는 지금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받고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한지영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하지만... 그렇게도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밤새 억눌렀던 감정이 터지듯,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스스로 아직 감정을 다 쏟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걸까?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 그건 단순한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지영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너뿐이야. 믿을 수 있어?”“조금만 시간을 줘.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한지영, 내가 어떻게 책임질까?”“지영아... 지영아...”백연신의 목소리가, 그가 남겼던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말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한지영은 눈을 질끈 감고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차를 돌려 천천히 별장을 떠나갔다....한지영은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오늘은 휴일이 아닌 평일이고,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고.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눈물을 닦아내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운전 중에 울기 시작하면 앞이 안 보이니까.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그런데 그때였다.갑자기 한 대의 전동 스쿠터가 차 앞으로 튀어나왔다. 차선 사이를 가로지르며 무리하게 끼어드는 모습이었다.평소의 한지영이었다면 빠르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멍하니 2초를 허비했고, 그 사이 차를 세우는 걸 잊어버렸다.급히 핸들을 돌린 그녀의 차량은 곁의 녹지대 쪽으로 세차게 튕겨 나가며...쾅!큰 충격음과 함께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순간, 그녀의 시야가 새하얘지고 차 안의 에어백이 부풀어 오르며 그녀를 감싸안았다.사고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 황급히 운전석 문을 열었다.“지영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그 익숙한 목소리... 힘겹게 눈을 뜬 그녀가 바라본 건, 놀란 표정의 연우진이었다.“우... 우진 씨... 어떻게... 여길...”“마침 지나
고은채는 백연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는 이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고, 고씨 가문 역시 끝없이 추락했다.그런데도... 이토록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연신을 보며 그녀는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씁쓸하고 공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이 남자가 이 모든 고통을 견디는 이유가, 단 하나. 바로 한지영 때문이라니...그의 몸에 있는 혈충은 단 한 사람, 한지영에게만 작용하는 저주였다.백연신이 세상의 그 어떤 여자라도 택했다면 이런 끔찍한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며, 끝내 한지영을 선택했다.고은채는 그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수년간의 집착과 기다림은 결국... 한 줌의 허무함으로 돌아온 셈이다.‘도대체 한지영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고, 백연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 적도 없는데...’‘그런데 왜? 도대체 왜!’“백연신. 고작 한지영 하나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감수하는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고은채는 백연신 앞에 다가와 앉으며 독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이 고통, 정작 한지영은 알지도 못해. 만약 당신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면...그 여자가 당신을 위해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아니, 한지영에게 당신은 결국 자신을 버린 배신자일 뿐이야.”그녀는 이런 식으로라도 백연신을 찌르며 자신의 무너진 감정을 겨우 붙들고 싶었다.몸부림치던 백연신이 겨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이미 그의 눈동자는 흐려져 있었고, 피부는 식은땀에 젖어 창백했지만, 그는 마지막 기운을 다 짜내듯 거칠게 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죽는다면… 당신... 고씨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내가 지영이 위해 겪는 고통은... 네가 평가할 필요 없어...”그에게 한지영은 전부였다.그녀를 위한 고통이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그 입 좀 다물어요. 대표님 귀에 당신이 뒷말 퍼트린 거 들어가면 당신 자리 날아가는 건 시간문제예요.”또 다른 보안요원이 낮게 나무라자, 아까까지 한지영에게 훈계하던 그 보안요원은 입을 꾹 다물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 모두 마치 한지영이 투명 인간이기라도 한 듯 철저히 무시했다.한지영은 온몸이 점점 식어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분명 이곳에 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만나서 꼭 전하고 싶은 진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그저 하얗게 비어버린 상태였다.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차로 돌아갔지만, 시동은 걸지 못한 채 여전히 별장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어쩌면... 고은채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온 걸 수도 있어. 혹시 백선그룹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업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걸꺼야...’한지영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유를 만들어가며 고은채의 방문을 이해하려 애썼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조차 점점 힘들어졌다.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에는 ‘엄마’라는 이름이 떴고, 그 순간 눈가가 벌게지며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엄마...”한지영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들어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이해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유진이네 집에서 자고 갈게요.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싶어서요.”한지영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휴, 너도 참. 유진이가 불편하지 않겠니?”“유진이는 그런 거 안 신경 써요, 엄마. 나... 일단 끊을게요. 내일은 바로 사무실로 갈 테니까 저녁에 들어갈게요.”이대로 더 말을 이어가다가는 목소리가 흔들릴 것 같아, 그녀는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엄마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끊고 싶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한지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조심스럽게 손을 배 위에 올렸다.그리고 다시 한번, 별장이 있는
하지만 한지영은 알고 있었다.만약 이번에도 도망치듯 물러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란 걸.별장이 눈앞에 보이자, 한지영은 조심스레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릴 준비를 했다.그런데 그 순간...다른 차량 한 대가 빠르게 그녀의 차를 추월해 별장 입구에 멈춰 섰다.그리고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은... 고은채였다.한지영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고은채?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분명 연신 씨와는 끝났다고 알고 있었는데?’그러나 곧 그녀는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다.별장 입구에 있던 보안요원들이 고개를 숙여 고은채를 반겼다. 한 명은 그녀에게서 차량 키를 받아 조심스레 주차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무겁게 잠긴 철문을 열어 그녀를 들였다.그 누구도 말이 길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늘 그래왔듯 익숙한 루틴처럼.한지영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간 자기 눈이 피곤해서 잘 못 본 거라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곧 천천히 차에서 내려 보안요원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의문뿐이었다.‘고은채는 왜 들어갈 수 있는 거지?’‘그리고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익숙하게 행동하는 거야?’‘설마, 연신 씨와 고은채 사이에 아직 무슨 관계가 남아 있는 건가...?’그때, 고은채의 차량을 주차했던 보안요원이 돌아왔다.그는 한지영을 보고 잠깐 눈을 좁히더니, 곧 그녀를 알아본 듯했다. 예전에 백연신이 데려왔던 여성이라는 걸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죄송합니다. 오늘 대표님께선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누가 오든, 어떤 사정이 있든... 일절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일절 안 된다?’한지영의 심장이 움찔했다.“그런데 방금 고은채 씨는 왜 들어갔죠?”그녀가 조용히 물었다.“아, 은채 아가씨요? 은채 아가씨는 다르죠. 오늘 대표님이 하루 종일 기다리신 분이죠!”보안요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한지영의 아래
“왜 그래?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 혹시 아직도 아이 문제 때문에 고민 중이야?”임유진이 조심스레 물었다.한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걸 고민 안 할 수 있겠어? 부모님도 이젠 다 아셔. 그런데 뭐라 안 하시고 내 선택에 맡기겠대. 연신 씨는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결혼하자고 하고... 머리로는 알겠거든, 그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걸. 나 혼자 아이 낳는 것보다야 훨씬 나아. 사람들이 혼외자라고 수군대는 일도 없고, 오히려 나를 부러워하겠지. 재벌 남편에 아이까지 있으니까.”“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안 서는 거네?”임유진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나... 정말 연신 씨랑 결혼해도 될까...?”한지영이 되물었다.“아니, 지영아. 그것보다 너한테 필요한 건, ‘네가 아직도 백연신을 사랑하는가’야.”임유진의 말은 날카롭지만 따뜻했다.‘아직 사랑하냐고...?’한지영은 단단히 입술을 깨물었다.만약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면... 수술대 위에 오르는 일쯤은 이미 끝냈을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고 마음을 쥐어짜며 고민하지도 않았겠지.임유진은 그녀가 굳이 답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이 널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는 나도 잘 알아. 그래서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다 응원할 거야. 다만 부탁 하나만 하자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가 남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솔직해졌으면 해.”“그 사람, 그러더라.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말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서.그런데 오늘이 딱 일주일째인데... 아무 연락도 없어. 찾아오지도 않았고. 중요한 얘기 하겠다는 말도 끝내 없었고...”한지영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네가 직접 찾아가. 예전의 너라면 분명히 그랬을 텐데. 확실히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잖아? 애매한 거 질색하는 사람 아닌가?”임유진은 웃으며 물컵을 밀어줬다.한지영도 피식 웃었다.“그러게, 예전엔 정말 그랬지.”그녀는 컵을 들고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