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먹은 약이 얼마나 쓴지 궁금해서."강지혁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흡사 쓴맛을 음미하듯 말했다."역시 쓰네.""..."임유진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쓴맛이 궁금하다고 그걸 대뜸 마셔보는 사람은 아마 강지혁 말고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건 여자를 위한 약이다. 조금밖에 먹지 않아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지만 강지혁은 자신의 몸에 너무 무신경했다."너도 사탕 먹을래? 그럼 좀 나을 거야."임유진이 사탕을 입에 문 채로 얘기했다."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임유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너..."임유진이 막 입을 벌려 얘기하려고 할 때 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버렸다. 그의 키스는 여전히 집요했고 그녀를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또한, 쓴맛과 단맛이 섞여버려 임유진은 지금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무슨 맛인지도 몰랐다.키스가 끝난 후 임유진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고 강지혁은 그녀가 시선을 돌릴 수 없게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역시, 달아."강지혁은 예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입을 벌려 네 글자를 뱉었다. 그 모습에 임유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홀린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시간과 날짜를 잡은 후 내일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임유진의 외할머니는 현재 퇴원한 상태이다. 그녀는 임유진에게 어차피 자신은 병원에 있으나 집에 있으나 똑같다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집에서 요양하겠다고 했다.임유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이런 결정을 한 게 돈 때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병원에 있으면 그녀는 여러모로 더 좋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지만 병원에 계속 있게 되면 외삼촌들과 이모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하지만 집으로 가면 외할머니는 과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러자 임유진이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곧장 머리를 끄덕였다.임유진은 기사님에게 백화점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그녀는 먼저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를 사기 위해 지하 1층인 식품 코너를 돌았다. 그러다 어르신과 당뇨 환자들을 위한 다과 세트를 발견했다. 가격은 조금 비싸긴 해도 서은숙도 가끔 혈당이 기준을 초과할 때가 있었기에 이 간식으로 결정했다.계산한 후 그녀는 다과 세트를 손에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옷을 사기 위해 위로 이동했다. 그렇게 2층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그녀 쪽으로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때려버렸다.임유진은 갑자기 날아든 매서운 손에 하마터면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몸은 중심을 잡아 괜찮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다과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난 내가 잘못 봤나 했는데 역시 네년이 맞았네. 출소하더니 이제는 뻔뻔하게 백화점까지 돌아다녀?"임유진은 맞은 쪽 얼굴을 감싸며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잔뜩 화가 나 있는 중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당시 법정에서 임유진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뺨을 때린 여자가 바로 이 여자였다. 그것 때문에 임유진은 입술이 다 찢어지고 얼굴도 며칠 동안 퉁퉁 부어있었다.여자가 한창 날뛰고 있을 당시 경찰도 옆에 있었지만 마치 일부러 그 여자에게 분풀이할 시간을 주듯 말리지 않았다.이 여자가 바로 진애령의 어머니인 윤수경이다.상대가 진씨 가문이어서, 그에 반해 임유진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래서 심지어는 소씨 가문에게까지도 버림받은 걸까? 당시의 임유진은 진짜 절망 그 자체였다.그렇게 3년 형을 채우고 드디어 출소했지만, 윤수경은 지금 또다시 그녀를 때렸고 심지어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또 한 번 때리려고 했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윤수경의 팔을 잡았다."나 죄지은 적 없어요."임유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보며 말했다."법원에서 네가 죄가 있다고 이미 판결이 났는데 뭐가 어째? 고작 3년, 하... 내가 볼
"당신은 사람 눈도 많은 곳에서 꼭 이래야겠어?"진기태의 말에 윤수경이 분노하며 말했다."너무 화가 나니까 그렇죠. 당신도 아까 쟤가 하는 말 들었잖아요. 우리 애령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 거!"진기태는 임유진을 노려보며 말했다."기어이 출소했네. 아까 잘못된 판결이라고 하던데 그건 법원에서 결정한 문제지 가해자가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리고..."진기태는 벌레 보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 같은 게 내 앞에서 권리를 논할 자격은 없어."그러고는 옆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저 여자 당장 끌어내. 그리고 저 여자 사진 보안팀과 관리팀에 보내서 앞으로 백화점에 영구 출입금지시켜."그 말에 경호원은 임유진의 팔을 잡고는 그대로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잠, 잠깐만요. 내 물건이 아직..."임유진은 그제야 진씨 가문이 이 백화점 소유주거나 혹은 이 백화점 대주주 중 한 명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녀가 끌려나가면서 아까 산 다과 세트를 주우려고 하자 진기태는 얼른 다른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저 쓰레기는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해. 걸리적거리니까."그녀가 산 다과 세트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진기태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녀를 모욕했고 임유진은 치욕스러움에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는 반격할 힘조차 없었고 그저 짐짝처럼 경호원의 손에 의해 백화점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입구에 다다른 후 경호원들은 그녀를 잡던 손을 풀어주더니 경고까지 잊지 않았다."이제 당신은 이 백화점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경고를 어기고 또다시 방문할 시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임유진은 변호사였던 자신이 이제는 법으로 협박까지 당하자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백화점 안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런 일에 속상해 하거나 힘들어할 필요 없다고, 그녀가 화를 내면 진기태가 원하는 대로 될 뿐이라고 끝없이 자신을
윤수경의 말을 듣고 있던 진기태가 입을 열었다."저런 여자 다시 감옥에 보내는 거 쉬워. 내가 사람 시켜서 처리할게."진기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마치 장난감처럼 쉽게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윤수경이 이를 갈며 말을 보탰다."그럼 이번에는 아예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 놔요."그녀는 그래야만 자기 마음에 있는 울분이 조금이라도 가실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당신 말 대로 할게."진기태는 윤수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당신도 이제 애령이 생각은 그만하고 우리 세령이 생각이나 해.""이제 우리한테 남은 유일한 딸인데 당연히 그래야죠."윤수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세령이는 왜 하필 강지혁이 아닌 소씨 가문 애를 좋아해서는. 그것만 아니면 지금쯤 강지혁에게 장인 장모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윤수경의 아쉬움 가득한 말에 진기태가 말했다."애들 마음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그럼 지금 내 마음이라도 나아지게 임유진 그 여자를 빨리 감옥에 집어넣어요!"윤수경은 다시 표독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진기태를 닦달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빨리 그렇게 할게."진기태가 그녀를 달래주며 답했다...."네? 백화점에서 임유진을 봤다고요?"부모님 보러 본가로 온 진세령이 윤수경에게서 오늘 임유진을 우연히 만났다는 걸 전해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그래. 그게 글쎄 우리 백화점을 돌고 있더라니까?!"윤수경이 말했다."살 게 있어서 네 아버지와 같이 백화점에 갔다가 어쩌다 그렇게 딱 만났는지. 그러고는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며 뻔뻔하게 말하는데 내가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아주 개망신을 줘버렸어."의기양양해서 말하는 윤수경에 반해 옆에서 듣고 있던 진세령의 얼굴을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개망신을 주다니... 어떻게요?""나는 그 여자 뺨을 때렸고 너희 아버지는 경호원을 불러 그 여자를 백화점에서 쫓아내 버렸어."윤수경은 아직 진세령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는
그제야 윤수경도 진세령의 얼굴이 사색이 된 걸 발견했다."세령아,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사과라니. 그것도 그 여자한테? 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니?""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요."진세령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진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도 안 가서 핸드폰은 바로 윤수경에게 뺏겨버렸다."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해."그에 진세령이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 말했다."엄마, 지금 임유진 뒤에 있는 사람, 강지혁이에요. 임유진을 건드리면 강지혁을 건드리는 게 된다고요!"그 말에 윤수경이 멈칫하더니 곧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있어?""나도 차라리 내가 미쳐서 헛소리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진세령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전에 나한테 물었죠? 소민영 다리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고? 왜 아직도 낫지 않느냐고요."진세령의 진지한 얼굴에 윤수경은 마치 들으면 안 되는 얘기를 곧 듣게 될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 나기 시작했다."그거 강지혁이 그런 거예요. 소민영이 임유진을 건드린 걸 알고 대신 갚아준 거라고요. 그것도 몇십 배로요!"강지혁의 이름이 나왔을 때 윤수경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강지혁... 임유진의 뒤에 강지혁이 있다고?진애령이 살아있을 당시 윤수경은 곧 강지혁의 장모가 될 생각에 매일매일 들떠있었다. 강지혁을 사위로 두면 S 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녀의 발아래 두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진애령이 죽어버림으로써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게 됐다."강지혁이 왜 임유진의 뒤를 봐줘? 걔 설마 애령이를 죽인 사람이 그 여자라는 걸 몰라?"윤수경은 흥분하며 화를 냈고 진세령은 얼른 그녀를 진정시켰다."당연히 알죠.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강지혁이 임유진이 좋다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하겠어요."윤수경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지만 진세령의 말대로 그녀가 뭘 어떻
강지혁은 임유진이라는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곧 고이준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후 영상을 클릭했다. 얼마 안 가 그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강지혁이 뿜어내는 분노에 고이준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걸 아는데도 몸을 흠칫 떨었다.강지혁을 화나게 하면 S 시 전체가 들썩이게 된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오늘 하필 강지혁이 제일 아끼는 임유진에게 손을 댄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치욕감까지 안겨주었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온 임유진이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 강지혁이 화를 내지 않을 리가 없다."이 영상 인터넷에서 다시는 퍼지지 않게 싹 다 삭제해. 그리고 이 영상 찍은 사람 찾아내서 원본도 지워버려.""네, 알겠습니다."강지혁은 수중에 있던 핸드폰을 고이준에게 던져버린 후 옆에 걸려 있던 외투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고이준이 물을 필요도 없이 강지혁은 임유진을 찾으러 갔을 것이다.오랜 시간 동안 강지혁을 옆에서 보필해왔던 고이준은 단연컨대 자신의 대표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임유진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 누가 강지혁이 임유진을 좋아하게 될 줄 알았을까.진씨 가문도 물론 몰랐을 것이다. 알았더라면 임유진에게 그런 짓을 하지는 못했을 테니까.강지혁은 다급하게 회사를 나와 차에 몸을 실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임유진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조급해진 그는 강씨 저택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임유진의 상태를 물었다."임유진 씨는 오전에 나가셔서 점심쯤에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돌아오고 나서 점심을 안 드시겠다고 하더니 방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쭉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집사가 답했다."집사가 올라가서 상태 좀 체크해 줘!"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고는 풀 액셀을 밟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린 후 현관에서부터 임유진의 방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사용인들은 처음 보는 강지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다급한 모습은 물론이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강지혁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가더니 두 방을 연결해주는 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이 커튼도 치고 불도 켜지 않는 바람에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간신히 커튼을 뚫고 온 빛이 주위를 조금 밝혀주었다. 강지혁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빠르게 그녀를 찾았다. 임유진은 한쪽 벽 구석에서 양팔로 무릎을 감싸고는 얼굴을 파묻은 채 마치 공처럼 자신의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그는 전에도 이렇게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강지혁은 마치 심장을 누가 찌르는 듯 가슴이 아파 났고 아까 봤던 영상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영상 속에서 그녀는 윤수경에게 뺨을 맞은 후 진기태에 의해 백화점에서 쫓겨났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진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는 지금 비단 진씨 집안 사람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강지혁이 진작 진씨 가문에 경고했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임유진도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누나..."강지혁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임유진은 마치 그 상태로 얼어버린 사람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누나..."그는 이번에 목소리를 좀 더 높여 그녀를 불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난 누나 옆에 있을 거야."그러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있었고 입술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 자신의 입술을 힘껏 깨문 것 같았다."울었어?"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매만져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내가 왜 울어... 그냥, 그냥 피곤해서 이렇게 잠이 든 것뿐이야."그녀는 본인의 연기가 얼마나 서투른지 알까? 강지혁은 억지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미친 듯이 아파 났다."나 다 알아."강지혁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걱정 마, 내가 영상 다 지우라고 했어. 그 영상 올라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앞으로 더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을 거야.”강지혁은 말하면서 또다시 그녀의 붉게 물든 얼굴에 손이 닿았다.임유진은 가볍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그의 눈빛이 더 냉랭해졌다.“이따가 의사 모셔올게. 너 한 번 보여야겠어.”“아니야. 얼음팩 찾아서 찜질 좀 하면 돼.”그녀가 말했다.“내가 마음이 안 놓여. 의사한테 보여야 시름 놓을 것 같아. 이 일은 이렇게 정하고 몸에는 또 더 다친 데 없어? 백화점 경호원들이 누나 다치게 하진 않았어?”“괜찮아. 몸엔 상처 안 입었어.”그녀는 강지혁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아 참, 나... 나 내일 외할머니 보러 가야 해. 원래 오늘 물건들 좀 사서 내일 할머니 댁에 가져가려 했는데 아무것도 못 샀네. 이따가 저녁 먹고 나랑 함께 물건 사러 가줄래?”그녀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강지혁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알겠다며 대답했다.바로 이때 또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강지혁은 안으로 잠근 문을 열고 집사를 바라봤다.“도련님, 진씨 일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집사가 말했다.강지혁은 두 눈을 번쩍이며 되물었다.“진씨 일가?”한편 임유진은 ‘진씨 일가’라는 말에 몸이 굳어지고 낯빛이 창백해졌다.“네, 진 회장님 부부와 진세령 씨도 왔어요.”집사가 말했다.“꼭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그럼 한번 봐야지.”강지혁이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집사는 말을 마친 후 바로 자리를 떠났다.강지혁은 임유진 곁으로 돌아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내가 가서 한번 만나고 올 테니 누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그녀는 여전히 몸이 굳은 채로 멍하니 강지혁을 쳐다봤다. 눈빛 속엔 의아함이 살짝 스쳤다.강지혁은 손으로 가볍게 그녀 얼굴의 다친 곳을 어루만졌다.“어떤 일은 반드시 누날 위해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말을 마친 강지혁은 방에서 나갔다.임유진
당시의 강지혁 역시 소민준처럼 수수방관하며 강씨 가문의 이익만 챙겼으니까.‘소민준한테는 이렇게도 가차 없으면서 왜... 왜 나는 용서해줬어? 아니, 애초에 정말 용서한 게 맞기는 하나...? 사실은 용서한 적이 없는데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용서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강지혁은 이를 꽉 깨물며 강제로 생각을 멈췄다.그때 임유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소민준한테 마땅한 보상도 할 거야. 하지만 그게 다야. 만약 소민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날 구했어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그럼 나는? 나는 안 불쌍해...? 네가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도 포함이 돼?”강지혁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질문이야. 나는 널 좋아하는 건 물론이고 사랑해, 혁아. 그리고 내가 왜 널 불쌍하게 여겨? 혹시 소민준 때문에 그래?”그녀는 말을 하며 두 손으로 강지혁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소민준이 내 마음에 다시 들어오는 일은 영원히 없어.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이미 끝난 사이라고. 혁이 너랑은 달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강지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강지혁에게 마르지 않는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더는 5년 전처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뇌리에 각인이 되게 알려주고 싶었다.“혁아, 사랑해. 나는 앞으로도 너만 사랑할 거야. 이미 그렇게 정했어.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평생 내 곁에만 있어.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해줘...”...며칠 후, 임유진은 검찰 측의 연락을 받고 검사실에 도착했다. 검사의 질문에 그녀는 회피하는 답변 없이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 거짓말을 할 것도 없었으니까.그런데 조사를 거의 다 마쳤을 무렵 한 여성 검사가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듣기로 근 2년간 라온시의 변호사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하던데 그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