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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Author: 달팽이 질주
서지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강해원의 손을 쥔 힘에서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해원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셋을 세는 순간 서지헌은 손이 놓더니 몹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해원, 갑자기 처리해야 할 긴급한 공무가 생겼소. 일을 마치면 곧바로 어머니 처소로 데리러 가겠소."

그는 강해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황급히 국사부 밖으로 향했다.

눈앞에 엷은 안개가 낀 듯 서지헌의 뒷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노부인의 뜰에 도착한 강해원은 바로 작은 불당으로 끌려갔다. 서지헌이 그녀한테 무례를 범한 노부인의 유일한 친정 조카를 참수한 뒤로는 노부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두꺼운 경전과 종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강해원은 익숙하게 무릎을 꿇고 경전을 베껴 쓰려다 먹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멈 김씨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흔아홉 번이나 흉괘가 나온 건 부인께서 너무 많은 살인을 한 탓이니, 평범하게 경전을 베껴 써서는 죄업을 씻을 수 없다고 피로 써야 정성이 드러날 것이라 하셨습니다."

날카로운 칼끝이 손가락 끝을 찌르자 붉은 피가 순식간에 새하얀 종이 위를 붉게 물들였다.

강해원은 계속 번져 가는 붉은 자국을 바라보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 월경을 했을 때 다정히 가르쳐 주던 모습, 출정 전 눈이 붓도록 울던 모습, 강해원에게 길괘가 나오기를 빌며 구백구십구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 퉁퉁 부어오른 노부인의 무릎이 떠올랐다.

한때 강해원을 애지중지했던 노부인 서씨는 거듭된 흉괘와 자신을 감싸며 번번이 맞서는 서지헌, 서씨 가문이 구 대째 독자라는 압박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열 손가락이 피범벅이 되어서야 경전을 모두 베껴 쓸 수 있었다.

손가락 끝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한꺼번에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퉁퉁 부은 무릎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밖에서는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고,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역시 사현적은 오지 않았다.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흔들리면서도 끝내 꺼지지 않았다. 강해원은 거의 감각을 잃은 다리를 끌고 절뚝거리며 그의 뜰로 갔다.

아직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맑은 웃음소리가 밤을 가르며 귓가에 닿았다.

문 앞에 선 강해원은 평소 누구보다 절제하며 예법을 지키던 서지헌이 한쪽 무릎을 꿇고 따뜻한 수건으로 맞은편 여인의 고운 발을 닦아 주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긴 손가락이 흰 발목을 감싼 채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움직였다. 거리낌 하나 없었고 오히려 푹 빠진 표정이었다.

문틀을 짚은 강해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여인은 부끄러운 듯 발을 빼냈다.

"오라버니, 저는 괜찮습니다. 오는 내내 안고 오셔서 물 한 방울도 밟지 않았습니다."

서지헌은 강력하게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내가 붙잡지 않았다면 객잔에 묵었을 것 아니냐. 채령아, 나를 애태워 죽일 셈이냐?"

"오라버니께서 혼인했다는 말을 들어서..."

윤채령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너는 영원히 국사부의 주인이다. 내가 했던 약속을 잊었느냐?"

서지헌은 옆에 놓인 비단 양말을 들어 윤채령에게 신기려 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해원이 말없이 문가에 서 있었다. 마치 소리 없는 유령처럼,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 남아 있던 다정한 미소는 순식간에 굳었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해원!"

그는 순간 벌떡 일어나 빠르게 문가로 다가왔다.

강해원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서지헌은 다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아 살피려 했지만 손에는 아직 윤채령의 양말이 들려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해원은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공무는 모두 끝났습니까?"

서지헌은 멈칫하더니 죄책감을 억누르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다 처리했소."

그는 비단 양말을 쟁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미안하오. 비 때문에 채령이 성 밖에 갇혀 데리러 갔다가 늦었소.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시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강해원이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서지헌의 팔짱을 끼며 놀란 듯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분이 새언니입니까? 저와 정말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녀가 노골적으로 도발했지만 서지헌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채령을 번쩍 안아 의자에 앉혔다.

"또 맨발로 돌아다니는구나. 몸이 차가워지면 다시 배가 아프면 어쩌려고..."

그는 양말과 신을 집어 그녀에게 신겼다.

"다시는 너와 해원이 닮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마. 또 사흘 동안 굶으면 내가 마음 아파 견디겠느냐."

윤채령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승리자처럼 문 앞에 굳어 선 강해원을 바라봤다.

다정한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벽이 세워진 듯했다. 강해원은 더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욱신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뜰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연화는 마침내 강해원이 나타나자 얼른 달려갔다. 손에 닿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데다 처참하게 망가진 두 손을 발견하자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연화는 눈물을 참으며 강해원을 방으로 부축해 약을 꺼낸 뒤 조심스레 상처를 씻고 붕대를 감았다. 하지만 갈라져 뒤집힌 살을 보자 끝내 굵은 눈물을 흘렸다.

"아가씨..."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강해원은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온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을 챙기거라. 닷새 뒤에 황성을 떠난다."

백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눈을 반짝였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걱정이 가득한 빛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법도에 따르면 아가씨께서는 국사 부인이시니 평생..."

"서지헌과 부부의 연을 끊을 것이다."

연화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커다란 기쁨과 안도감에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했다.

“정말입니까? 너무 잘됐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답답한 안채에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국사님께서는 진작 어린 시절과는 달라지셨습니다. 어차피 합방도 하지 않으셨으니 아무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습니다!”

'그래, 연화조차 알아볼 만큼 서지헌은 이미 기억 속의 진솔한 소년이 아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강해원뿐이었다.

'서지헌,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혼인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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