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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길을 달리한 우리: Chapter 1 - Chapter 10

16 Chapters

제1장

노부인 서씨가 갈수록 강해원을 차갑게 대했고, 하는 말도 점점 모질어졌다.그러나 서지헌은 매번 강경하게 소문을 잠재웠다. 사당에서 스스로 채찍 아흔아홉 대를 맞기까지 하자 노부인 서씨도 더는 강해원을 괴롭히지 못했다.아흔아홉 번째 점을 치는 날, 강해원은 기척을 감추고 사당 들보 위에 숨었다. 더는 서지헌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은침 하나를 쥐고 점괘패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길괘로 바꿀 작정이었다.향 연기가 감도는 어두운 사당 안에서 서지헌은 손을 씻고 향을 피운 뒤 선조에게 절하고 점을 쳤다. 강해원이 손을 쓰기도 전에 괘가 나왔다.하나는 앞면, 하나는 뒷면인 길괘였다.강해원은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마침내 내려놓고 은침을 거둔 채 수줍은 얼굴로 자리를 뜨려 했다.그런데 서지헌이 점괘패를 주워 다시 던졌다. 다섯 번을 연달아 던졌으나 모두 앞뒷면이 다른 길괘였다.들보 위의 강해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봤다.서지헌이 품에서 작은 초상화를 꺼냈다. 그 그림 속에는 천진난만하게 나비를 쫓는 여인이 보였다.그는 한참 그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채령아, 바깥세상을 아직도 다 구경하지 못했느냐? 오라버니가 조금도 그립지 않으냐?"그는 점괘패를 오래 바라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위를 향한 점괘패를 손으로 살짝 뒤집어 길괘를 흉괘로 바꿨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혼잣말했다."채령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다리마. 백 번째에는 반드시 해원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주겠다."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향 연기에 눈이 매웠는지 강해원의 눈에서 흐른 눈물 한 방울이 마침 서지헌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고, 밖에서 서지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얼마 전 얻은 붉은 산호를 부인에게 보내거라."곁을 지키던 시종은 잠시 침묵했지만, 이런 일이 거듭되자 부 안 사람들은 모두 또 흉괘가 나왔음을 알아차렸다."부인께서는 늘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는데, 정말 재앙을 부르는 분은 아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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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강해원이 뜰 안으로 들어섰다. 뼛속까지 스미는 빗물의 냉기가 옷 깊숙이 배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무겁게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었다..멀리서 그녀를 발견한 연화가 반가운 목소리로 안채에 알렸다."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지헌은 빠르게 걸어 나와 강해원을 와락 품에 안았다.차갑게 젖은 옷 너머로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고,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어디에 갔었소? 어쩌다 이리 젖었소? 어서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소. 감기 들겠소.”"괜찮습니다."강해원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의 품에서 천천히 물러났다."궁에 다녀왔습니다."서지헌은 다른 생각에 잠긴 듯 그녀가 궁에 간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하녀들에게 서둘러 물을 데우라 이르고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머리를 닦아 주었다.그가 젖은 옷을 벗겨 주려고 손을 내밀자 강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은 혼인한 지 오 년이 지나도록 합방하지 않았다. 서지헌은 줄곧 남녀 간의 예법을 철저히 지켰고, 가까이 닿기만 해도 강해원의 가슴은 뛰었지만 지금은 온몸이 불편했다."이런 일은 연화에게 맡기십시오."서지헌이 내민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음에 불안이 스쳤지만 여전히 온화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순순히 안채를 나갔다.자욱한 김 속에서 욕조에 기대자 지난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친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노부인 서씨의 손에서 자랐다.그 시절 서지헌은 지붕까지 올라가 기와를 들추는 장난꾸러기였다. 강해원이 아끼는 비단 꽃을 일부러 숨겨 두었다가 그녀가 울기 직전에 재주라도 부리듯 꺼내 흔들곤 했다. 글씨를 연습하는 종이에 몰래 못생긴 거북이를 그려 온 뜰을 쫓겨 다니기도 했다. 두 사람의 웃음에 나무에 앉은 새 떼가 놀라 날아갈 정도였다.그는 늘 강해원을 화나게 하고는 서툰 방식으로라도 끝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때는 장난치다 서로 몸이 닿아도 거리낌이 없을 만큼 소꿉친구 사이의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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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서지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강해원의 손을 쥔 힘에서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강해원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하나, 둘, 셋.'셋을 세는 순간 서지헌은 손이 놓더니 몹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해원, 갑자기 처리해야 할 긴급한 공무가 생겼소. 일을 마치면 곧바로 어머니 처소로 데리러 가겠소."그는 강해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황급히 국사부 밖으로 향했다.눈앞에 엷은 안개가 낀 듯 서지헌의 뒷모습이 점점 흐려졌다.노부인의 뜰에 도착한 강해원은 바로 작은 불당으로 끌려갔다. 서지헌이 그녀한테 무례를 범한 노부인의 유일한 친정 조카를 참수한 뒤로는 노부인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두꺼운 경전과 종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강해원은 익숙하게 무릎을 꿇고 경전을 베껴 쓰려다 먹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어멈 김씨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노부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흔아홉 번이나 흉괘가 나온 건 부인께서 너무 많은 살인을 한 탓이니, 평범하게 경전을 베껴 써서는 죄업을 씻을 수 없다고 피로 써야 정성이 드러날 것이라 하셨습니다."날카로운 칼끝이 손가락 끝을 찌르자 붉은 피가 순식간에 새하얀 종이 위를 붉게 물들였다.강해원은 계속 번져 가는 붉은 자국을 바라보다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처음 월경을 했을 때 다정히 가르쳐 주던 모습, 출정 전 눈이 붓도록 울던 모습, 강해원에게 길괘가 나오기를 빌며 구백구십구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 퉁퉁 부어오른 노부인의 무릎이 떠올랐다.한때 강해원을 애지중지했던 노부인 서씨는 거듭된 흉괘와 자신을 감싸며 번번이 맞서는 서지헌, 서씨 가문이 구 대째 독자라는 압박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열 손가락이 피범벅이 되어서야 경전을 모두 베껴 쓸 수 있었다.손가락 끝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한꺼번에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퉁퉁 부은 무릎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밖에서는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고,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역시 사현적은 오지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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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다음 날 아침, 국사부.식탁 위에는 정성스레 차려진 아침 음식이 놓여 있었다. 서지헌은 야채를 집어 윤채령의 그릇에 놓아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더 먹으라 권했다.윤채령은 귀엽게 입을 삐죽이더니 맞은편에서 줄곧 고개를 숙인 채 흰죽을 먹는 강해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새언니, 부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는 저를 돌보는 데 익숙해서 아직도 철없는 아이로 여깁니다. 오라버니도 참, 저만 챙기지 말고 새언니께도 반찬을 집어 주십시오."서지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익숙한 손길로 윤채령의 코를 쓸었다."네 새언니는 전쟁터를 누빈 장군이다. 홀로도 굳세게 잘 살아가는데 내 보살핌이 필요하겠느냐. 오히려 너야말로 여러 해 바깥을 떠돌아 야위었구나. 분명 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겠지."그 말은 독침처럼 강해원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사기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싱거운 흰죽을 바라보자 어린 시절 연무장 곁에 서 있던 서지헌의 안타까운 눈빛이 떠올랐다."강해원, 잘 들어라. 네가 훗날 천하에 위명을 떨치는 여장군이 되더라도 내게는 언제나 애지중지해야 할 보물이다."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느닷없이 떨어져 죽 위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고 비친 그녀의 모습도 산산이 흩어졌다."내가 너희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모양이구나."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노부인의 희끗해진 귀밑머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랜만에 본 노부인 서씨는 몰라볼 만큼 늙어 있었다. 그 모습에 저절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아 등이 살짝 굽었고, 한 손으로는 어멈 김씨를 꼭 붙든 채 다른 손에는 묵직한 자단목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노부인, 채령이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노부인 서씨는 자애롭게 윤채령의 손등을 두드렸다."돌아왔으면 됐다. 잘 돌아왔구나."노부인의 시선이 굳어 있는 강해원을 무심히 훑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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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연못가에 먹이를 뿌리자 비단잉어들이 앞다퉈 수면 위로 뛰어올라 소란이 일었다."새언니는 참 여유로우십니다."강해원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발소리만 듣고도 윤채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윤채령은 승리자처럼 느긋하게 다가와 강해원의 곁에 서더니, 달콤하면서도 독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역시 전쟁터에 나갔던 여장군답습니다. 그런 진실을 알고도 이렇게 태연히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시다니."강해원은 고개를 들어 평온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윤채령은 이미 자신이 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윤채령의 더욱 환하게 웃었지만 표정은 한층 차가워졌다."본디 새언니의 것이 아니었던 자리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십시오. 그해 제가 화가 나서 떠나지만 않았다면 국사 부인이라는 자리가 어찌 의지할 곳 없는 고아에게 돌아갔겠습니까?"고아라는 두 글자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강해원의 가장 깊은 상처를 찔렀다. 언젠가 어린 서지헌은 아버지의 영전 앞에서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약속했다."해원아, 무서워하지 마. 이제부터는 내가 있잖아."이제 그 사내가 그녀의 가장 아픈 상처를 잔인하게 헤집어 마음에 둔 여인의 우월감을 채워 주었다.강해원의 눈에 남은 마지막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강해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채령은 한 걸음 다가와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오늘 완전히 단념하게 해 드리겠습니다."바로 그 순간이었다.윤채령의 독기가 찬 눈빛으로 갑자기 강해원의 손목을 잡고 몸을 뒤로 젖혔다. 두 사람은 함께 차가운 연못물에 빠졌다."채령아!"거의 동시에 멀리 있던 서지헌이 달려와 차가운 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보물처럼 아끼는 여인을 향해 있는 힘껏 헤엄치면서 강해원의 곁을 지나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서지헌은 흠뻑 젖은 채 계속 기침하는 윤채령을 안고 물 밖으로 나가더니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더없이 차가운 말만 남겼다."강해원, 채령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강해원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애초에 선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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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이튿날, 국사부의 안살림을 맡을 권한이 윤채령에게 넘어갔다. 서지헌과 윤채령은 남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사부에서 늘 붙어 다니며 다정하게 굴었다.강해원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소문도 갈수록 퍼져 나갔다. 강해원은 서지헌이 자신을 굴복시키려고 일부러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연화는 분한 나머지 눈까지 새빨개졌지만, 강해원은 놀라울 만큼 차분한 얼굴로 말없이 늘 지니던 검을 닦았다. 어차피 며칠 뒤면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러던 중 강씨 가문의 옛 저택을 지키던 늙은 하인이 급하게 뛰어들어와 눈물을 쏟았다."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 노장군님의 묘를..."강해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곧장 말을 몰고 성 밖으로 내달렸다.빗물과 진흙 속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아버지의 비석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더러운 검은 개의 피가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험한 사내 몇 명은 낄낄거리며 개의 피에 적신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진창에 흩어진 아버지의 유골을 채찍질하고 발로 짓밟으면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쳐! 아주 호되게 치란 말이다! 그런 재앙 덩어리를 키웠으니 죽어서도 편할 줄 아느냐?"그 순간 강해원의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끊어졌다.그녀는 한 사내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아 사무친 증오와 절망을 모조리 쏟아 내듯 그들을 내리쳤다."악!"처음에는 사내들도 욕설을 퍼부었다."재앙 덩어리가 사람을 죽인다!"하지만 욕설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고, 끝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빗물이 피와 진흙으로 뒤범벅된 땅을 씻어 내렸다. 기력이 다한 강해원은 아버지의 부서진 유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맨손으로 뼛조각을 하나씩 품에 모아 담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온전한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끝내 무너진 강해원은 고개를 젖히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울음소리는 거센 빗줄기를 뚫고 텅 빈 묘지에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소식을 듣고 달려온 서지헌이 본 것은 바로 그런 광경이었다.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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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내일은 강해원이 떠나는 날이자, 서지헌이 둘째 부인을 들이는 날이었다.강해원은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앞에는 커다란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그동안 서지헌에게 받은 선물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어린 시절 받았던 볼품없는 딸랑이, 성년식 때 받은 비녀, 출정 전 건네받은 단검, 혼인 뒤 받은 연지와 장신구까지.강해원이 선물들을 하나씩 화로에 던지자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손에는 정교한 자단목 상자 하나만 남았다.그 안에는 오 년 동안 서지헌이 변방으로 보내온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처음에는 날마다 오던 편지가 시간이 흐르자 몇 달에 한 번, 그것도 몇 마디만 적혀 있었다.강해원은 편지를 한 통씩 화로에 던졌다.바람이 재를 일으켜 사방으로 흩날렸다."무엇을 태우는 거요?"혼례를 앞둔 서지헌이 어느새 문 앞에 서 있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들일 뿐입니다."강해원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서지헌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혼례복을 입은 윤채령이 눈앞에 있는데도 머릿속에는 자꾸만 강해원의 모습이 떠올랐다.강해원과 혼인할 당시에는 갑자기 나타난 윤채령에게만 정신이 팔려 정작 신부였던 강해원을 제대로 바라본 적조차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는 강해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해원아, 길괘가 나왔소."강해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지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보시오. 채령이와 혼인하려 하자마자 길괘가 나오지 않았소. 하늘도 채령이가 우리를 갈라놓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함께할 운명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오. 내일 채령이와 첫날밤을 보낸 뒤 우리도 좋은 날을 잡읍시다. 내 평생 부인은 그대와 채령이 둘뿐이오. 채령이는 아직 어리니 조금만 양보해 주시오. 우리 셋이 잘 살아 봅시다."강해원은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가 막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처소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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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대청에는 붉은 비단이 드리워졌고,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서지헌은 윤채령의 손을 잡고 붉은 비단 위를 걸어 들어왔고, 양옆에 늘어선 시녀들은 두 사람을 향해 연신 꽃잎을 뿌렸다."두 분이 손을 맞잡고, 백년해로하시길 기원합니다!"진행자가 우렁차게 축하하자 대청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윤채령의 두 뺨은 붉게 물들었고,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강해원이 여장군이면 뭐 해? 결국 얌전히 내가 들어오는 걸 받아들였잖아. 국사부의 안주인은 이제 나뿐이다.'눈썰미 좋은 손님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혼례는 성대하지만 노부인도, 국사 부인도 보이지 않으니 영락없이 첩을 들이는 혼례 같군."부모에게 절을 올릴 차례가 되자 손님들도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윤채령은 표정을 굳어지더니 면사포를 홱 벗어 던지고 날카롭게 명했다."어서 노부인을 모셔 오너라!"그제야 서지헌도 어머니와 강해원이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국사 서지헌은 조서를 받으시오!"조서를 전하는 관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그러자 윤채령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서지헌은 전부터 자신을 위해 작호를 청해 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황제가 마침 혼례날 조서를 내릴 줄은 몰랐다. 이제 황성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알게 될 것이고, 강해원보다 더 큰 주목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다."국사 서지헌과 부인 강해원은 혼인한 지 오 년이 되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였다. 서지헌에게 마음에 둔 여인이 있으므로, 강해원이 스스로 혼인 관계를 끝내기를 청하였다. 짐은 그간의 공을 헤아려 이를 허락하고 두 사람의 혼인을 해소하여 각자의 길을 걷게 한다. 강해원은 다시 장군의 직을 회복하여 북적을 수호하라."조서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뒤늦게 깨달은 그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순식간에 대청이 술렁였고, 손님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지헌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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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서지헌은 궁으로 이어지는 차가운 청석길 위에 사흘째 무릎을 꿇고 있었다.오가는 궁인들은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국사가 윤채령을 둘째 부인으로 들이겠다며 강해원 장군을 떠나게 해 놓고, 이제 와 폐하께 혼인 해소를 허락한 조서를 거둬 달라고 청한다더군.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군."귓가를 파고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뒤엉켜 있던 감정은 결국 후회로 변했다.그때 황제의 측근 내시 박씨가 우산을 들고 다가오자 서지헌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박씨, 폐하를 한 번만 뵙게 해 주게."빗물이 우산 끝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폐하께서 국사께 한 가지 물어 대답하실 수 있다면 알현을 허락하시겠답니다. 강해원 장군과 혼인하게 해 달라고 청하며 폐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아직 기억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서지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성대한 혼례를 열어 윤채령을 불러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나타나는지만 살폈을 뿐,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내시는 망연한 얼굴로 굳어 있는 서지헌을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빗속에 홀로 남은 서지헌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지만,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결국 들것에 실려 국사부로 돌아온 서지헌은 강해원을 구하려 피를 뽑은 뒤부터 앓아 오던 기침병이 더욱 심해졌다. 비까지 흠뻑 맞은 탓에 고열까지 겹쳤다.약을 아무리 마셔도 나아지지 않자 어의가 직접 약 달이는 과정을 살폈고, 그제야 윤채령이 처방대로 약을 달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하지만 윤채령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이 처방은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려고 만든 것 아닙니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정확히 지켜야 하잖아요. 날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한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말라니,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기가 막힌 어의가 눈을 부릅떴다."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할 것이지, 어찌 내 처방을 탓하시오? 전 국사 부인께서는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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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서지헌의 처소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본 노부인 서씨는 아들이 걱정돼 황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문 앞에 이르자마자 차마 믿기 힘든 진실을 듣고 말았다.노부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몸을 떨며 서지헌 앞으로 다가갔다."노부인,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윤채령이 황급히 노부인을 막아서려 했지만, 노부인은 지팡이를 휘둘러 그녀를 밀어냈다.노부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서지헌을 노려봤다."방금 저 아이가 한 말이 사실이냐?"서지헌은 차마 어머니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예. 사실입니다."짝!거센 손바닥이 서지헌의 뺨을 후려쳤다."서지헌! 어찌 그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느냐? 해원이는 대하의 영웅이다. 그런데 네가 아흔아홉 번이나 흉괘를 꾸며 그 아이를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재앙 덩어리로 몰아세웠구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생이자, 목숨을 걸고 너를 구한 은인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지만, 서지헌의 얼굴은 오히려 더욱 창백해졌다.짝!또 한 번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이번에는 노부인이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뺨을 내리쳤다."나는... 나는 어찌 그 아이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 굳어 버렸고 서지헌은 다급히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어머니! 화가 나시면 저를 때리십시오. 부디 스스로를 해치지는 마십시오."노부인은 그를 밀쳐 내고 떨리는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어릴 적부터 사랑으로 키운 착한 아이였다. 내가 약을 먹으면 사탕을 건네고, 피곤하면 작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 주던 아이였다. 겨우 열네 살에 말보다도 작은 몸으로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전장까지 나갔다."노부인의 목소리는 점점 떨렸다."그런 아이에게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너는 괴롭히고 속이고 모욕했고, 나는 미워하고 원망하며 때리기까지 했다."노부인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서지헌의 어깨를 거세게 내리쳤다."우리 모자는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노부인은 이를 악문 채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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