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바이킹에서 내려온 덕배는 가까운 벤치에 털썩 앉았다. “아, 씨발. 땅이 움직이는 것 같아.” 민지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들여다봤다. “형님, 괜찮으세요?” “네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냐?” “얼굴은 멀쩡한데요?” “이 미친 중전.” 민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맨 뒤 가자고 할 때 좋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높이 올라갈 줄 알았냐!” 정민이 생수병을 건넸다. “이사님, 물 좀 드세요.” 덕배는 병을 받아 들고 정민을 노려봤다. “너는 알면서 왜 말 안 했어?” “말씀드릴 틈이 없었습니다.” “아, 아주 다 한패네.” 아랑은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이사님, 아까 표정 찍혔어요!” “뭐?” 화면 속 덕배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민지는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형님, 이거 꼭 보내줘!” “야! 지워!” “싫은데요?” 아랑이 민지 뒤로 숨었다. 덕배는 일어서려다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잠깐만 쉬자.” 강수가 옆에서 짧게 웃었다. “엄살.” “형, 형까지 그러기야?” 민지는 웃다가 덕배 옆에 앉았다. “알았어요. 십 분 휴식!” “이십 분.” “십오 분!” “흥정하냐?” “형님이랑은 원래 이래야죠.” 덕배는 투덜거리면서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수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다음엔 뭐 타실 거예요?” “아직 안 정했어.” “그럼 저랑 관람차 타실래요?” 강수는 민지 쪽을 한번 봤다. “다 같이 움직여.” 사라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네. 그럼 다 같이요.” 민지는 그 말을 들었지만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사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놀이공원 한복판에서 싸울 생각도 없었다. ‘오늘은 노는 날이니까.’ 민지는 안내 지도를 펼쳤다. “자, 여러분! 다음 일정 발표합니다!” 덕배가 즉시 손을 들었다. “무서운 건 반대.” “형님, 제가 언제 무섭다고 했어요?” “방금 네
회전목마에서 내려온 민지는 휴대폰 사진을 확인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형님, 이거 봐요!” 사진 속 덕배는 커다란 흰말 위에 앉아 있었다. 두꺼운 팔로 봉을 붙잡은 채 인상을 잔뜩 구긴 모습이었다. “야, 지워.” “싫은데요? 제 인생 사진이에요.” “네 사진도 아니잖아!” 아랑은 옆에서 웃느라 허리를 숙였고, 정민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았다. 강수는 민지가 내민 화면을 한번 보더니 입가를 아주 조금 올렸다. 덕배가 발끈했다. “형까지 웃어?” “안 웃었어.” “씨발, 다 봤거든!” 민지는 사진을 저장하고 안내 지도를 펼쳤다. “자, 다음은 바이킹!” 덕배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거 별거 아니잖아.” “오, 자신 있어요?” “당연하지.” 민지는 지도 너머로 덕배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형님.” “왜.” “우리 맨 뒤 가죠?” 유난히 부드럽고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덕배는 의심도 하지 않았다. “좋지. 맨 뒤가 뭐 어때서.” “진짜요? 후회 안 하죠?” “야, 내가 그깟 배가 무섭겠냐?” “좋았으. 약속했습니다!” 민지는 냉큼 덕배의 팔을 잡고 바이킹 대기 줄로 향했다. 아랑이 정민에게 속삭였다. “실장님, 맨 끝이 제일 무서운 거 아시죠?” “네. 저도 압니다.” “근데 이사님은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정민은 덕배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곧 아시겠죠.” 사라는 강수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서희가 오늘 엄청 신났네요.” 강수는 짧게 대답했다. “어.” “회장님도 바이킹 타실 거죠?” “타야지.” 사라는 잠시 강수를 보다가 먼저 줄 안쪽으로 걸었다. 탑승 차례가 되자 민지는 덕배를 끌고 가장 끝자리로 향했다. “여기! 형님, 이쪽이요!” 덕배가 좌석을 내려다봤다. “……잠깐.” “왜요?” “여기가 진짜 맨 끝이네?” “맨 뒤 가자면서요.” “아니, 이 배는 양쪽 끝이 존나 높잖아.” 민지가 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잠깐! 이긴 사람끼리 앞자리!” 민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강수는 주먹을, 민지는 보자기를 내고 있었다. 다른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장님이랑 제가 이겼으니까 앞자리예요!” 덕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야, 아까는 진 사람이 앞이라며?” “형님이 정했잖아요. 저는 동의한 적 없는데?” “아, 씨발. 말은 잘해.” 민지는 강수 옆으로 냉큼 붙었다. “회장님, 우리 앞이에요.” “그래.” “무섭다고 제 팔 잡으시면 안 됩니다?” 강수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네가 잡겠지.” “와, 자신감!” 아랑이 손뼉을 쳤다. “그럼 우리 넷이 다시 하자!” 정민이 넥타이도 매지 않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꼭 다시 해야 합니까?” “당연하죠! 이긴 두 명은 중간, 나머지는 뒤!” 사라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빨리 정하자.” “가위, 바위, 보!” 첫 판은 무승부였다. 덕배가 투덜거렸다. “이거 언제 끝나냐?” “형님, 가위바위보도 못 해요?” “너 조용히 해!” 두 번째 판에서 아랑과 정민이 이겼다. “와! 실장님, 우리 중간!” 아랑이 신나서 정민의 팔을 잡았다. 정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맨 앞은 아니라 다행이네요.” 덕배가 사라를 돌아봤다. “그럼 우리 뒤네.” 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어디든 괜찮아요.” 마침내 탑승 차례가 왔다. 안전요원이 안내하자 민지는 맨 앞 좌석에 앉았다. 강수가 옆에 앉아 안전바를 내렸다. 강수는 민지의 안전바를 한번 확인했다. “너나 잘 잡아.” “저 놀이기구 잘 타거든요.” 뒤에서 덕배가 외쳤다. “중전! 출발하면 울지 마라!” 민지가 뒤돌아 소리쳤다. “형님이나 비명 지르지 마세요!” 덜컹. 열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오오, 간다!” 민지는 고개를 들어 높아지는 레일을 바라봤다. “회장님, 저기 봐요! 엄청 높아!” “보여.” “떨어질 때 소리 지르셔도 돼요.” “너나 질러.” “아, 씨
토요일 오전. 놀이공원 입구에 선 민지는 눈앞의 인파를 바라보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씨부랄탱. 이거 누구 계획이야?” 옆에서 아랑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나~!” “야, 김아랑! 너 나한테는 둘이 놀러 간다며!” “둘이 놀다가 다 같이 놀면 더 재밌잖아!” 민지는 뒤를 돌아봤다. 검은 티셔츠에 무표정한 차강수.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친 배덕배. 일정표라도 챙겨온 듯 단정한 한정민. 그리고 화사한 옷차림의 민사라까지. “와. 회장님에 이사님에 실장님까지. 이게 무슨 회사 야유회 2차냐?” 덕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중전. 나도 아침에 끌려왔어.” 정민이 덧붙였다. “아랑 씨가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더군요.” “실장님도 들어가셨어요?” “초대받았으니까요.” 민지는 강수를 봤다. “회장님은요? 이런 데 싫어하시잖아요.” “네가 온다며.” “……네?” 강수는 대답 대신 매표소를 가리켰다. “표부터.” 덕배가 민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들었냐, 중전?” “아, 형님. 조용히 좀 해요!” 아랑은 벌써 신이 나서 안내 지도를 펼쳤다. “우리 첫 번째로 롤러코스터 타자!” 민지의 눈이 반짝였다. “오! 좋지!” 정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부터요?” “실장님, 설마 무서우세요?” “무섭다기보다 마음의 준비가…….” 덕배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 “야, 정민아. 오늘은 일 생각하지 마.” “이사님이 제일 크게 소리 지르실 것 같은데요.” “뭐, 인마?” 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그때 사라가 강수 옆으로 다가갔다. “회장님, 저랑 같이 타실래요?” 강수는 그녀를 한번 봤다. “자리 보고.” “전 높은 데 안 무서워요.” “그래.” 사라는 웃으며 먼저 걸었다. 민지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랑의 팔짱을 꼈다. “야, 우리 앞자리 타자.” “완전 좋아!” 입장하자마자 솜사탕 냄새와 음악이 뒤섞여 흘러왔다.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뛰어다녔고, 머리 위로는 열차가 굉
새벽 세 시. 민지는 거실 바닥에 앉아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빈 커피 캔 두 개와 구겨진 메모지가 널려 있었다. “아, 씨부랄탱!” 펜을 내려놓았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처음 왔던 날부터 다시 생각해보라고? 그날 자신이 뭘 했더라.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와서…….” 민지는 눈을 감았다. 현실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익숙한 자기 집이었다. 자동차 정비 일을 마치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런데 그다음이 흐릿했다. “분명 소설을…….” 《불온한 정착》. 차강수와 김서희, 민사라가 등장하는 자신이 쓴 이야기. 민지는 벌떡 고개를 들었다. “잠깐. 완결한 것 같은데?” 마지막 원고를 수정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분명 끝까지 썼다. 그런데 완결 버튼을 눌렀던가?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잠들었던가? “씨부랄탱. 왜 그게 기억이 안 나!” 민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김서희의 휴대폰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현실에서 작성한 원고는 없었다. “아, 답답해!” 다시 수첩을 펼쳤다. [현실 마지막 기억] [회사 퇴근] [집] [소설 작업] [완결?] 마지막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완결이랑 무슨 상관이지?” 김서희가 일부러 그날을 떠올리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정말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민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서희야, 힌트를 줄 거면 제대로 주지.” 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네 시가 넘었다. “……망했다.” 두 시간만 자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자꾸 마지막 원고가 떠올랐다. 차강수. 민사라. 김서희. 자신이 정해놓았던 결말. 그리고 지금 완전히 달라져버린 이야기. 민지는 결국 잠을 포기했다. “좋아. 오늘은 밤샘이다.” 아침 일곱 시. 민지는 욕실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눈 밑이 거뭇했다. “와, 씨부랄탱.” 세수를 하고
민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민사라] 네가 정말 그걸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김서희. 자기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던 여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민지는 망설이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김서희] 지금 볼래? 잠시 후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민사라] 지금? [김서희] 응. 너랑 나랑 할 얘기 많잖아. [민사라] 어디서? [김서희] 우리 집으로 와. [민사라] 알겠어. 민지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집에 들어가자마자 거실부터 정리했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수첩과 책을 치우고 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씨부랄탱. 손님맞이도 아니고.” 자기 몸의 원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여자를. 삼십 분쯤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민사라의 얼굴을 한 김서희가 서 있었다. “들어와.” “생각보다 빨리 보자고 하네?” “할 말 있으면 미루는 성격이 아니라서.” 사라는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거실에 마주 앉았다. 민지는 생수병 하나를 건넸다. “마셔.” “고마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민지였다. “서희야.” “왜.” “너 돌아갈 방법 알아?” 사라는 생수병 뚜껑을 돌렸다. “그게 제일 궁금해?” “당연하지.” “차강수보다?” 민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그 얘기냐?” 사라는 웃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남자잖아.” “그래. 좋아해.” 민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근데 그거랑 우리가 돌아가는 건 별개야.” “별개라고?” “어.” 민지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너는 네 몸으로, 나는 내 몸으로 돌아가야지.” 사라의 웃음이 사라졌다. “돌아가면 뭐가 달라져?” “적어도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할 수 있잖아.” “내 인생?” 사라가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