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봤다.전생, 그녀 또한 이렇게 맞아 죽었다. 드디어 반격할 기회가 생겼다. 이들 모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춘도는 그 시작이었다.그렇게 얼마 지났을까, 춘도는 완전히 숨을 멈추었다.그녀를 매질하던 하녀들이 이제는 시신을 끌고 어딘가로 가는 모습도 보였다.초 노부인은 여전히 자애로운 모습을 연기하며 초희옥을 바라봤다."그래도 한밤중에 아녀자가 밖으로 나가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초희옥이 죄송함과 순진무구함이 섞인 표정으로 답했다."저도 제가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께 얘기하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어요. 어떤 벌을 내리시던 기꺼이 받을게요. 그리고 둘째 언니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너무 간절히 부탁해서 거절할 수 없었을 거예요."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잊혀졌을지도 모를 사실, 그제야 사람들은 초약란 또한 이 소란에 가담했음을 떠올렸다."죄송해요, 할머니."초약란이 영리하게 아무런 변명도 없이 곧장 자신의 잘못을 고해왔다.그러나 초약봉은 이 상황이 내심 불만스러웠다. 초희옥을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춘도가 모든 것을 뒤집어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었다."둘의 사이가 좋은 건 알겠지만, 한 명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고, 한 명은 허락없이 밤에 외출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잖아요. 할머니, 이대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기강은 잡으셔야죠."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초 노부인이 말했다."봉이 말도 맞다. 너희 둘 다 반성하는 의미로 보름 안에 자수 한 폭씨 완성해 오도록 하거라."그러자 두 사람은 얼른 알겠다고 답했다. 겨우 자수, 초약봉은 가벼운 처벌에 심통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초 노부인의 편애에 다시 한번 질투심이 불타올랐다.이때, 진패분이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입을 열었다."이제 춘도가 없으
이때, 초약섬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자수는 내가 대신 놓아줄게."수노이는 초씨 가문 여식이라면 모두 기본 소양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서로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이 시기의 초희옥은 초 노부인의 공작으로 거의 모든 과목에 낙제생이었으면, 자수 또한 잔병치례로 수업에 잘 참가할 수 없었던 초약섬보다도 형편없었다."언니는 몸이 안 좋잖아요. 저 때문에 고생하게 할 수는 없어요. 자수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초희옥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두 사람 앞에 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초약란이었다. 초약섬은 그런 초약란을 슬쩍 쳐다보고는 곧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둘째 언니, 괜히 저 때문에 같이 벌받게 돼서 죄송해요."초희옥이 미안한 듯 살짝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그러자 초약란이 괜찮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가 무사하다면, 난 그걸로 됐어. 이 정도 벌이야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야. 자수는 예전처럼 내가 해줄게."과거 초희옥이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노부인이지만, 그 다음은 초약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초희옥이 숙제를 하기 싫어 어리광부릴 때마다 그녀가 대신 모든 것을 도맡아 해줬기 때문이다.어린 시절, 초희옥은 이것을 애정이라 믿었었다."근데 그러면 언니가 무리해야 하잖아요... 보름 안에 자수 두 폭이라니...."초희옥이 걱정 어린 목소리를 연기하며 말했다.그 모습에 초약란은 안도했다. 오늘따라 낯선 모습을 많이 본 터라, 잠시나마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나 했었다."괜찮아. 며칠만 밤 새우면 돼. 근데...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알아?"어느덧 두 사람은 초희옥의 거처인 람옥헌(揽玉轩)에 도착했다. 초희옥은 모든 하인들을 물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이런 우연도 있나 싶어요. 어제 오라버니의 친
형부의 감옥.초희옥은 초혁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두운 형부의 감옥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엔 두 사람보다 더 빠른 방문객이 있었다. 바로 육희지였다.그리고 그 맞은편엔 죄수복을 입고 있는 초최한 모습의 초연이 앉아 있었다. 초연은 오래 면도도 하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해 꾀죄죄 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반듯한 눈썹과 느름한 기개만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라버니!"하지만 초희옥은 그 모습을 본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져 나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초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초희옥과 초혁이 걸어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아이고, 우리 꼬마 아가씨, 울지 마. 오라버니 아직 안 죽었어. 괜찮아, 괜찮아..."초연이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리자 철커덩하고 족쇄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초희옥은 더 서러운 듯 눈물을 터트렸다.'이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단 말이에요...'그녀는 초연 없이 1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다. 후회와 그리움으로 가득 찼던 악몽 같은 10년이었다. 무수한 밤을 통곡했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그를 만날 수 있길 기도했다."그만 울어, 희옥아. 달래줬더니, 어째 더 울어. 너 설마 내가 혼낼까 봐 그래? 희지가 다 얘기해줬어. 너 정말 대담하다 못해 너무 무모했어... 아, 아니야! 안 혼낼 게! 맹세해! 정말 안 혼낼게! 우리 동생, 그만 울어... 응? 이 오라비가 이렇게 빈다."상황을 알지 못했던 초연은 자신이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늘어나는 눈물에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래도 멈추치 않자, 이제 거의 애원하다시피 쩔쩔매기 시작했다.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손짓, 어릴 적부터 초희옥이 부모님을 찾아 울어댈 때마다 느꼈던 온기였다. 초연은 늘 어린 동생의 눈물에 약했다. 이 익숙한 상황에 초희옥은 자기도 모르게 울었다가 웃었다가 반복했다."몇 년이 지나도, 오라버니는 여전하네요.""그럼 내가 어디 가겠어?"초연이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
"그게 아니라면... 설마 혁이가 어리숙하다고 싫으신 건 아니죠?"초희옥이 이렇게 물어오자, 육희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진짜... 나라도 괜찮다면, 열심히 가르쳐볼 게.""그렇다면 오라버니, 조금 무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부탁 하나 드릴게요. 혁이와 함께 진현(津县)으로 가주세요."갑작스러운 부탁에 육희지는 잠시 멍해졌지만, 곧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초씨 가문은 더 이상 안전한 데가 아니었다. 그녀는 초혁의 안전을 위해 밖으로 빼내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연과 육희지처럼 거리상 먼, 성 외곽에 있는 학당에 다니는 경우가 아니라면, 스승이 집에 와서 가르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게다가 진현은 성경 직할 여섯 군 중 하나인 위군(卫郡)에 속했다. 성경과 엄청 먼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왕복하면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즉, 육희자가 진현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면 초혁은 자연스레 공부를 빌미로 거처를 옮길 수 있게 된다. "알겠어. 당장 집 팔아서 진현으로 옮길게. 혁이도 데려가고. 그러면 되지?""아니에요. 오라버니께 그런 폐까지 끼칠 순 없죠. 집과 살림 살이는 제가 마련할게요."초희옥이 뒤에 숨어 있던 초혁을 앞으로 등떠밀며 말했다."혁아, 누나가 널 진현으로 보내려는 건, 그곳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야. 거기서라면 호화롭진 못해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래야 누나도 안심하고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누나 반드시 오라버니와 함께 널 데리러 갈게. 그때되면 우리 다 같이 전처럼 살 수 있을 거야, 알겠지?"하지만 초혁은 불안한지 육희지를 잠시 쳐다보다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싫어... 누나, 나 누나랑... 떨어지기, 싫... 어...""누나도 여기에 안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긴 너랑 같이 갈 수 없는 곳이야... 자주 만나러 갈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초혁은 내키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앙다문 채 고개를
"희옥아... 그게 무슨 소리니?"초연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초희옥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뜻을 알렸다."음... 그래. 학문에 뜻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희지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야겠네."초연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결과가 뭐가 중요하겠니, 중요한 건 경험이지.""아니에요. 이미 희지 오라버니껜 충분히 폐를 끼졌어요. 나머지는 제가 스스로 할게요."최희옥이 맑갛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충분이 자신의 오라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갔다. 하지만 구태여 여기서 더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환생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 설명하고자 해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라리 진짜 합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조황서원 시험 과목은 총 열가지로 나뉘었다. 학과 영역 네 개, 덕(德), 예(礼), 문(文), 산(算) 그리고 기예 부분 여섯 개, 금(琴), 기(棋), 서(書), 화(画), 홍(红), 선(膳).전생, 이 시기의 초희옥은 이 중에 그 어느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글씨체, 그럭저럭 깔끔한 정도였다.만약 초연이 녹명서원으로 들어가 집에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이 마저도 못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3일에 한번 집으로 편지를 보내오는 오라비 덕에 답장을 쓰느라 겨우 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후작부에서 쫓겨난 뒤, 살아남기 위해 육희지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넉넉치 않는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그림이나 붓글씨를 대신 쓰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갑자기 입이 두개 늘어난 바람에, 새로운 수단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고서 필사와 해석이었다. 예를 들어 시경(周礼)이나 주례(周礼) 같은 어려운 문서를 초학자도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하고, 고사나 유래가 나오면 개인적인 깨달음도 덧붙여 설명했다. 육희지의 명성이 나쁘다 보니, 고위 가문 자제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람옥헌으로 돌아온 초희옥은 군것질을 좀 챙겨달라는 핑계로 하련을 주방으로 보낸 뒤, 은밀히 석무(石武)를 불러들였다.나이는 서른 좌우, 그을린 피부에 매우 몸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그는 원래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사하자 자연스레 초연의 곁을 지키면서 안전을 책임이제 된다. 그만큼 충성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머리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전생, 그는 초연이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려 잡혀가던 날, 하련에게 잠시 한 눈 팔려 자리를 비웠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초연이 사형당하던 날,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로 초씨 가문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건 명백한 숙청이었다. 큰집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초희옥이 환생한 지금, 절대도 벌어지게 두지 않을 일이었다. “아무 아재, 육 오라버니께 이 60냥을 전달해주세요. 삼일 뒤 혁이를 진현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이걸로 집 얻으라고 전해주세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돼요."초희옥이 나지막이 말했다. 초씨 가문 사람들에겐 육희지가 그저 성경에 발붙이고 있기 힘들어 진현으로 돌아가는 거로 되어 있었다. 즉, 아직까진 그가 진현에 아무런 연고도 집도 없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집을 마련해야 했다. 이 정도 은자면 아마 꽤 괜찮은 조건의 집을 구매할 수 있을 터였다. "예, 아가씨. 맡겨만 주십시오!"석무가 가슴팍을 툭툭치며 말했다. "지금 바로 떠나곘습니다!"석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련이 돌아왔다. 그녀의 손엔 밤으로 만들어진 다고 한 접시가 들려 있었는데, 무언가 불만인지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니, 부엌에 갔더니 셋째 아가씨 쪽에서 또 약을 달이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약을?'안 그래도 오늘 초약섬이 문안 인사 때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긴 했었다. 하지만 바로 전날에 만났을 때 멀쩡했기에, 다른 사정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후작부, 품하헌(品荷轩).초약란은 책상에 앉아 정성을 다해 서예 필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하녀 둘이 수틀을 든 채 한참 자수에 매진 중이었다. "아가씨, 다섯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문 밖에 있던 하녀가 다급히 알렸다.그러자 초약란은 서둘러 붓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수틀을 들며 의자에 앉았다. 마치 자신도 지금까지 자수를 놓고 있는 듯이 위장한 것이다. "어머, 어쩐 일이야? 어서 와서 앉아."초약란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초희옥은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공기중에 은은히 베어 있는 먹냄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둘째 언니, 요즘 제 자수까지 놓느라 고생이 많아요. 그런데 어쩌죠... 또 부탁할 일이 생겼는데. 제가 요즘 이래저래 챙길게 많아가지고 은자가 바닥났네요. 그래서... 좀 빌려주실 수 있죠?""...어?"그 말에 초약란은 순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자존심 높은 초약란이 자신한테 은자를 빌리러 오는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나도 가진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무슨 일로 은자가 필요한데?"초약란이 친철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내가 아는 전당을 소개해줄 게. 거기서 바꿔보는 건 어떠니?"하지만 초희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껏 억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요즘 옥 팔찌 하나 사려면 스무 냥을 줘야 하더라고요. 언니, 제가 그동안 언니한테 준 옥팔찌만 해도 열개는 넘지 않아요? 그것도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좀 빌려달라는데...."그 말에 초약란의 얼굴이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옥 팔찌조차 초희옥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그럼, 그럼. 네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못해줄까? 내가 비록 한 달에 예은(例银)으로 다섯 냥 밖에 못 받긴 하지만, 20냥 정도라면 모아둔 것
진현은 산과 물이 가까운 경치 좋은 도시지만, 동시에 성경과 가깝기도 해서 늘 활기차고 번화했다.육희지는 서쪽 끝 한 어귀에 넓고 한적한 집 한 채를 빌렸다. 이미 가구와 집기들이 모두 갖추어진 곳이었기에 연세에 50냥을 쓰고도 10관이 남았다. 사실 혼자였다면 초가집 하나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혁도 함께 살 집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판단해 결정한 장소였다. 초희옥은 넓은 안채과 별당, 그리고 정원 가득 자란 대나무들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이번만큼은 반드시 초혁과 육희지가 넉넉한 삶을 살게 해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육 오라버니, 저 잠깐 나갔다가 올 일이 있어서 혁이 좀 부탁드릴게요. 혹시 누가 물으면 그냥 시내 구경 갔다고 둘러대 주시고요."하녀들이 분주히 집안 곳곳을 채워 넣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초희옥이 말했다. 곧바로 알아들은 육희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초혁의 옆을 지켰다. 그렇게 초희옥은 석무 한 명만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얼마 지났을까, 그녀의 눈에 익숙한 길이 나왔다. 남쪽 큰길 어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니 간판에 전(钱)자가 붙은 큰 저택이 나왔다. "전씨 집안 팔자도 참... 어쩌다가 조상이 쌓은 복은 다 날리고, 저런 자식이 남았을까...""그래 말이야, 학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집이 어쩌다가 저런 도박꾼이 나왔는지..."이때, 남자 몇명이 혀를 차며 도자기, 옥석 등 값비싼 물건들을 저택에서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곧이어 초희옥도 저택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운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왔다."뭐, 물건이라도 사러 오셨어?"그는 진현에서 소문난 망나니, 도박에 미쳐 아버지가 돌아신 뒤 하루가 멀다고 집안 재산을 팔아 치웠다.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초희옥은 몇년 뒤에 되서야 이 집에서 헐값으로 나온 고서들을 뒤지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 마저도 거의 곰팡이가 쓸
“소공야, 저희 왕야께서는 지금 차를 음미 중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은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무천보는 은월을 보자마자 괜히 기분이 상했다.자신이 데려온 여인도 기예공이긴 했지만, 은월만큼 이름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괜히 불쾌했다.같은 한량이건만, 군야신은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고 풍류 방면에서도 자타공인 실력자였다!열일곱에 이미 경성 제일의 한량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니, 무천보는 이를 질투해 죽을 지경이었다.그 후로도 수년간 먹고 마시고 유흥에 매달렸건만, 여전히 군야신을 뛰어넘지 못했다.그래서 그를 보면 꼭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씨 집안의 권세 덕분에 아직까지 군야신에게 다리를 꺾이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차는 무슨 차야! 빨리 내가 가져온 명필이나 봐라! 이 소공야 작품이 일등이 아닐 수가 없다!”무천보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군야신은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가볍게 넘기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집 지붕이라도 들썩이게 만들 놈이었다.군야신의 시선이 무천보가 가져온 명필 위에 멈췄고, 가볍게 한 장을 넘겨보았다.그 명필은 서성 왕희지의 가서였다.이는 진품 서예 중에서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드물기에 귀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듣자 하니 무 노공는 젊은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이 한 점을 손에 넣었고, 곧장 보물함에 넣어 가보처럼 간직했다고 한다.글씨며 인장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하지만...군야신은 그중 한 글자를 보고 눈빛이 번뜩였다.마치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바로 그때,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이 갑자기 쨍 하고 터졌다. 깨진 잔 조각과 뜨거운 차가 고스란히 명필 위로 쏟아졌다.…초희옥은 하나하나 진열된 보물들을 살펴보다가 물었다.“무 소공야가 왕희지의 진본을 들고 왔다고 들었는데, 왜 안 보이죠?”장회는 즉시 대답했다.“아씨, 소식이 참 빠르시네요. 지금 그 명필은 각 방마다 돌며 감정 중입니다. 곧 이곳에도
‘이번에는 무씨 집안이 다시는 섭정왕부를 포위하게 두지 않겠어!’...불음관 2층, 가장 크고 화려한 누각 안.군야신은 눈처럼 하얀 담비 가죽이 깔린 나전으로 장식된 단단한 나무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마치 신이 정성 들여 조각한 듯 냉철하고 아름다웠다.그 앞엔 줄무늬가 선명한 호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졸고 있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코끝을 꿈틀이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군야신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문밖을 연신 향해 고개를 들썩였다.밖에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가거라.”군야신은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사람을 보내 몰래 따라붙게 하라. 또 주방 가서 음식을 훔쳐 먹으면 돈을 제대로 치르라고 해라.”“예.”시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대귤이가 쏜살같이 나가자, 누각 안에는 차를 끓이던 은월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조황대선에서 왕야께서 몸소 주관을 맡으신다 하여, 밖에서는 왕야께서 미색에 눈이 멀어 여인 하나를 어찌하려는 거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그들은 모르겠지. 이번 대선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이번이 바로 새 황제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조황대선이다. 그간 황정은 줄곧 태후가 틀어쥐고 있었고, 고위직에 있는 여관들은 중립이거나 태후 쪽 인물들뿐이니,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지 않는 한 판도는 절대 바뀌지 않겠지.”“하지만 이 무리의 규수들이 서원을 졸업하려면 아직도 일년은 더 남았는데, 왕야께서 이렇게 미리 대비하시고 지금부터 수를 놓기 시작하신 것을 보니… 은월은 감탄할 따름입니다.”군야신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타인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았다.과거, 그는 성경 제일의 망나니로 이름 높았다.누구도 그가 뭘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섭정왕 자리를 얻은 것조차 황후가 된 여동생 덕분이라 믿었을 뿐.하지만 바로 그가 선황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흔들어, 영왕 대신 지금의 황제가 황좌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 여인이 이 말을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초희옥을 비스듬히 쏘아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가소롭기도 하지. 네가 뭐 황실 공주라도 되기라도 해? 운진이 초대장을 줬다고? 네깟 게 감히?”그 여인은 겨우 열넷이나 열다섯쯤 되어 보였고, 금빛 긴 치마를 입었으며 얼굴은 눈에 띄게 고왔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비녀와 장신구가 반짝이며 넘실거렸다.눈빛부터 몸짓까지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었다.“태안공주전하를 뵙습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이 소녀가 바로 태안공주 무용현이다.태후의 적녀이자 영왕의 친아우.또한 지금 황제의 이복 여동생.그리고...무천보의 약혼녀였다.무천보는 그녀를 보자 즉시 얼굴이 굳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고, 흥미 따위 접고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피했다.초희옥은 비록 전생에서 태안공주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수없이 들은 바 있었다.그녀의 혼사는 선황이 생전에 영왕이 무씨 집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해둔 약속이었다.하지만 무천보는 매일같이 주색에 빠져 살고, 무용현은 한결같이 운진을 연모했다.그들은 서로를 보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혼인을 질질 끌다, 결국 억지로 혼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천보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공주 전하께서 운진과 함께하기 위해 지아비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때 무용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너 누구냐! 당장 면사 벗어라! 어느 집 요망한 계집이 이토록 뻔뻔하게 운진을 사칭하느냐,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다!”이때, 장회가 부리나케 달려와 중재에 나섰다.“공주 전하! 이곳에 어찌… 운진께서 직접 차를 우리고 계십니다. 지금 가시면 막 우린 한 잔을 드실 수 있을 겁니다.”무용현은 초희옥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이 계집년이 운진에게 초대장을 받았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당장 붙잡아라!”장회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얼버무
정자와 누각이 정원을 따라 줄지어 있고, 꽃을 마주하며 물을 비추는 자리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있었다.마치 산속의 맑은 샘물처럼, 속세와는 다른 고즈넉함이 느껴졌다.하지만 동가 일대는 땅 한 평이 금 한 냥이라 할 만큼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었다.겉보기엔 담백하고 소박한 이 불음관도, 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액이 들여진 호화 찻집이었다.그 시각, 불음관 입구에는 이미 온갖 권귀 세가의 마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각기 다른 집안의 성씨들이 화려하게 적힌 패가 마차마다 높이 걸려 있었다. 초희옥은 눈썰미 좋게도 그중 가장 화려한 마차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 마차에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글자 하나가 걸려있었다.군.섭정왕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그가 아니었다면, 초희옥은 애초에 이런 권세가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부와 체면을 과시하는 자리에 올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말없이 초대장 한 장을 내밀었다.입구에 서 있던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서 오다니? 이 아가씨는 도대체…’‘초대장이 가짜는 아닐까?’의심의 눈초리가 번졌다.예전에도 작은 가문 출신의 규수들이 권귀가에 엮이려 무리하게 감보회에 숨어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어느 귀한 분의 눈에 들기만 하면 단번에 신분이 뛰어오르리라 기대하며 몰래 들어오는 것이다.지난번에도 한 명이 그렇게 들키고 쫓겨났다. “실례지만 어느 댁 규수신지요?”수석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초희옥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감보회는 초대장으로 입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출신까지 심문하게 됐죠?”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그러나 여전히 초대장을 뒤집었다가 폈다가 하며 한참을 살폈다. 쉽게 들여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안으로 사람을 보내 알릴 수밖에 없었다.그때, 뒤에서 성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거기 앞에. 비켜! 길을 막고 있잖아!”진한 솔잎빛에 복숭아꽃 문양이 수놓인 촉주 비단 예복을 입은 남자가 화려한
초희옥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조 부인이 언니를 좋은 데 시집보내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달라. 할머니가 그 혼처를 허락한 건 그 남자가 형부 주사이기 때문이야. 할머니에게는 그 사람의 나이도 생김새도 인품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집안이 앞으로 초씨 집안과 혼맥으로 엮인다는 것이지.”초희옥이 훨훨 날아오르면 초 노부인은 반드시 끌어내릴 것이었다.하지만 초약섬은 다르다. 그녀는 초 노부인의 친손녀였다.쓸모가 커질수록 초 노부인은 쉽게 그녀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초희옥은 초약섬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언니에게 더 나은 혼처도 가능하다는 걸 할머니가 알게 되면, 결코 언니를 그렇게 쉽게 내버리진 않을 거야.”“내가 이미 할머니께 말씀드렸어. 초씨 집안 규수들 전부 나와 함께 조황대선에 응시하기로 말이야. 언니가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해.”초약섬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섯째야… 너가 아니었으면, 나 정말… 정말 이렇게 죽는 줄만 알았어… 네가 날 살렸어!”초희옥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붙는다면 그건 언니의 실력이야. 나는 그저 언니가 걸을 수 있는 길을 하나 보여줬을 뿐이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언니한테 달린 거고.”초약섬은 고개를 떨구고 이를 악물었다.“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아무리 물러서고 참고 지내도 조 부인에게는 끝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차라리 이 한 몸 부딪혀볼래. 어차피 이 열다섯 해 동안 난 단 하루도 평온하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그녀는 굳게 주먹을 쥐고, 초희옥을 향해 다시 한 번 깊이 허리 숙여 말했다.“다섯째야,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초희옥은 그녀를 잡아끌며 말한다.“같이 점심이나 먹자. 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고 생각해야지. 크고 어려운 일일수록 배부터 든든히 채우고, 한 걸음씩 천천히 가는 거야.”
하지만…이것만으로도 이미 경성 전체에 얼굴을 못 들 일이 아닌가?초희옥의 명예는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지고, 오히려 초씨 집안은 너그러이 품은 집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전생의 초희옥이었다면 이런 덫에 걸려도 오히려 조모가 자신을 위해 준 자비라 여겼겠지.같은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초 노부인의 수단은 초약봉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무려 열여덟 골목은 앞서 있었다.노련함이란, 역시 세월이 쌓여야 나오는 법인가 보다.초약봉은 그 속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할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건 그냥 말장난일 뿐이지요. 하지만 제가 시험을 보겠다고 말을 해 놓았으니, 저는 응시할 것입니다. 다만… 두 언니랑 같이 시험을 본다고요…”초희옥은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무언가 좋은 꾀라도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초연아도 시험 봐야죠! 아, 맞다. 셋째 언니도요! 우리 초씨 집안 규수들은 전부 응시 해야죠?”초약봉은 눈을 홱 굴리며 비꼬듯 말했다.“너 지금 우리 셋이 같이 시험 보면 너만 떨어져서 망신당할까 봐 그런 거지? 그래서 사람들 끌어모아서 같이 치게 만들면, 나중에 떨어져도 혼자만 욕먹는 게 아니라서 덜 창피하겠다는 그런 생각이지?” “봉아,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조 부인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초 노부인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예전에도 네가 글 배우겠다 하여 내가 규학을 세운 것 아니더냐. 그 아이들도 다 너를 따라 함께 공부한 셈이지. 이번엔 대선도 같이 보는 거다. 좋아, 아주 좋아.”그녀에게는 초희옥이 떨어지는 것, 그 하나면 충분했다.다른 애들이야 숫자나 채우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강간범으로 몰린 오라비에, 민적에 바보 소리까지 듣는 규수. 이 두 낙인이 함께 찍힌다면 초희옥의 인생은 그 순간으로 완전히 끝장날 터였다. 초 노부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렇게만 흘러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자안당을 나선 초
초 노부인은 집안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황대선 시험을 두고 내기까지 벌어졌다는 소식은, 첫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 귀에 들어갔다.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사람을 보내 초희옥과 초약봉을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게 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유모는 한쪽에 있던 초약섬을 힐끔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셋째 소저, 초노부인께서 주신 상이 이미 아가씨의 뜰에 도착해 있습니다. 나중에 잊지 말고 인사 드리십시오.”“무슨 상이요?”초희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초 노부인은 평소에 초약섬을 곱게 보지 않았다.“조 부인께서 셋째 소저를 위해 좋은 혼처를 하나 알아오셨답니다. 노부인께서도 오늘 아침에 승낙하셨고요. 벌써 혼수도 다 준비됐어요. 새해가 지나면 바로 출가하게 될 거예요.”혼처? 출가?초약섬의 얼굴이 눈처럼 하얗게 질렸다.바로 그때, 조씨의 유모가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며 그녀를 불렀다.초약섬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졌다.초희옥은 그녀의 처연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눈빛을 가라앉혔다.조씨는 초 노부인의 총애를 등에 업고, 평소 초씨 집안의 셋째 도련님 자식들을 천대했다. 특히 정실부인의 소생인 초약섬을 자주 괴롭혔다.그런 이가 데려온 혼처가, 과연 좋을 리가 있을까?‘아, 맞다...’초희옥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약섬은 오품 형부 주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 주사는 재혼이었다.또한 그 주사의 나이는 초약섬의 할아버지뻘이었다.당시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위’보다 오히려 더 젊었을 것이다.혼인한 지 채 2년도 안 되어 그 노인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뒤, 두 아들이 유산을 두고 서로를 탓하고 헐뜯으며 다투었다.그중 한 명은 계모와 부적절한 사이였다고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다.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고, 온 경성이 들끓었다.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했던가.모든 손가락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결국 초약섬은 그 모
“훌륭하구나, 훌륭해. 넷째 아가씨는 박학다식하니 이번 조황대선에서도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두겠구나.”노부자는 황급히 칭찬을 늘어놓으며 슬쩍 초희옥 쪽으로 곁눈질을 보내고는 혐오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어느 누구와 같지 않으니 다행이지. 쯧쯧…”예전 같았으면 초희옥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초희옥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초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부자님 말씀 맞아. 어느 누구라는 게 누구겠어? 너는 균전령 내용도 못 외우고 있잖아. 조황대선 같은 데는 끼지도 마. 어차피 떨어질 텐데.”초연아는 창피하고 분해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초약봉은 초희옥이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다섯째야, 너는 균전령을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여섯째를 흉보냐? 마치 네가 시험에 붙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조황대선 나간다 한들, 거기서도 그냥 숫자나 채우겠지!”초희옥은 그 말에 마치 급소를 찔린 듯,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뭐라고? 숫자 채우는 건 네 쪽이거든!”“하하하, 내가 숫자 채우러 간다고? 웃기시네!”초약봉은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고, 눈동자를 스윽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 둘 다 같이 시험 보자. 떨어지는 사람이 성문 앞에 나가서 ‘나는 머저리다!’ 라고 세 번 외치는 거야. 어때? 감당이 되겠어? 누가 숫자를 채우는 건지 두고 보자고.”됐다!이 말만 기다리고 있었지.초약봉은 정말이지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다.“한 집안의 자매끼리 왜 이렇게 싸우니? 그럴 필요 없잖아.”초약란은 눈빛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겉으로는 착한 사람인 척하며 가식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넷째야, 넌 다섯째가 너만 못하다는 거 알잖니. 배운 거 많다고 그걸 내세워서 다섯째를 괴롭히면 안 되지.”초약란이 그럴싸하게 타일렀다.“나도 이런 머저리랑 일일이 따지고 싶진 않아요. 지가 괜히 시비 걸었을
초씨 집안의 규학은 뒷뜰의 푸르게 자란 대나무 숲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정원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름은 문진당이라고 불렸다.이때는 아침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초희옥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교실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학당 안에는 열댓 명쯤 되는 열네 다섯 살 무렵의 규수들이 앉아 있었다.직계 자매들 뿐 아니라, 본가의 먼 친척들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초희옥은 자리를 대강 둘러보다가 초약섬 옆자리에 빈자리가 있는 걸 보고 조용히 앉았다.“셋째 언니, 병은 좀 나았어요?” 초희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초약섬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응. 보내준 인삼 고마워.”주변에서는 벌써 수군대고 있었다.“수업을 빠진지 반 년은 넘었잖아? 갑자기 왜 나왔대…”“오라버니 사건이 연기돼서 여기저기 쫓아다닐 일 없으니까 수업 들으러 온 거라던데…”“흥, 그건 뻔한 핑계지! 조정 형사 건인데, 쟤가 뭘 어떻게 관여한단 거야?”강단 위에 있던 노부자가 책상을 툭 치며 소리쳤다.“조용!”그는 학식 깊고 이름 높은 유학자였고, 초씨 집안에서 직접 모셔온 인물이었다.초씨 집안 주모와 조씨가 몰래 은전을 많이 쥐어준 탓에, 그는 초약란과 초약봉에게는 유난히 열심히 가르쳤다.다른 규수들에게는......그저 적당히 가르쳤다.몇 마디라도 알아듣는다면, 그건 그들의 실력이었다.그리고 초희옥에 대해서는......어디선가 암묵적 지시를 받았는지, 딱히 가르칠 필요 없다는 듯 대충 가르쳤다.명문가의 속사정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지위를 믿고 초희옥을 억누르고 조롱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그녀가 몇 달간 수업에 나타나지 않아 속이 후련했는데, 오늘 다시 나타나자마자 눈엣가시처럼 느껴진 것이다.그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사건은 요즘 시끄럽게 회자되는 선천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성국 법전 중 한 조항과 관련이 깊지. 대성율은 조황대선 문과 필수 과목이다. 올해는 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