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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안나 스미스
스위스 연구 펠로십은 4년짜리 과정이었다.

소장은 벌써 두 번이나 나에게 메일을 보내 가을 학기부터 합류해달라고 재촉했다.

4년의 해외 생활, 제임스에게서 멀리, 비키에게서 멀리...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바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지난밤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감겼다.

사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 쪽에서 먼저 제임스에게 다가가 볼까 하고.

떠나면서 가져갈 기억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제임스는 그날 저녁을 비키와 함께 보냈다.

달빛 아래서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고 있었을 거다.

사랑과... 이건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무언가의 차이가 거기 있었다.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저렇게 감쪽같이 욕망을 흉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어젯밤 같은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나는 오늘 짐을 빼기로 했다.

이혼 확정까지 3주.

앞으로 3주는 최대한 이 집을 피해 다녀야 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은 기숙사에 있었다.

여기 남은 건 옷 가방 하나뿐.

내 개인 소지품이라고는 협탁 서랍의 사진첩 하나가 전부였다.

두툼한 가죽 표지를 넘겼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나는 제임스를 사진관으로 끌고 갔다.

사진 속의 나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제임스는 석상처럼 굳은 채 카메라만 빼고 아무 데나 보고 있었다.

사진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에 떨어졌다.

이렇게 얼룩진 연애사는 재활용 트럭도 싣고 가지 않을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제임스 모레티라는 사람의 인생이라는 무대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이었다.

이제 막이 내렸다. 나갈 시간이었다.

뒤이어 지나간 2주는 논문 수정과 실험으로 뿌옇게 흘러갔다.

제임스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금요일 연구 미팅 도중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실험실 앞이야.]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지직거렸다.

‘그 사람이 언제부터 직접 운전기사 노릇을 했지?'

검은 세단이 인도 옆에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가죽 시트에 앉자 익숙한 향수 냄새와 총기 기름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너 어제 집에 안 들어왔더라.”

시선은 도로에 고정돼 있었다.

“실험실이 바빠서.”

“잘됐네.”

제임스의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비키는 네가 자기를 피하는 줄 알더라. 다음 달에 나간대. 이제는 여기 있는 게 ‘적절하지 않다’라는 느낌이 드나 봐.”

나는 따분해서 하품이 나왔다.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 나는 상관없어.”

핸들을 쥔 제임스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고 관절이 하얗게 튀어나왔다.

그리고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내가 눈을 감고 있는 걸 보고 삼켰다. 아마 ‘성숙하다'라고 칭찬이라도 하려던 모양이었다.

대화를 피하려고 자는 척했지만 피곤은 진짜였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날 밤 꿈에는 제임스가 나오지 않았다.

...

스위스로 떠나기까지 열흘 남았다.

나는 마트 진열대 앞에서 말린 산사 열매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어릴 때 이후로 먹어본 적 없는 건데, 요즘은 다른 게 다 속에 안 받았다. 생리도 늦어지고 있었다.

임신 테스트기는 내 불안의 이유를 증명했다.

“임신 12주 됐네요.”

의사는 밝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12주... 그날이 제임스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밤이었다는 뜻이다.

비키가 돌아오기 직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에 저장된 제임스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24살에 이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익숙한 벨 소리가 복도 저쪽에서 울렸다.

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제임스가 서 있었다.

검은 코트를 비키의 어깨에 걸쳐준 채였고, 비키가 뭔가 속삭이자 제임스가 웃었다.

전화를 끊고 계단실로 몸을 숨겼다.

“무리한 활동은 피하시고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의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부 관계도 앞으로 두 달간은 안 됩니다.”

비키도 임신이었다.

“제가 쉬게 하겠습니다.”

제임스가 말했다.

나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한 어조였다.

계단실에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하필 진료 기록을 들고 오던 간호사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서류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소리가 복도 저쪽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임스가 진료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흩어진 서류를 주워 담고 있었다. 태연해 보이려 애쓰느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피아?”

미간을 좁히며 다가왔다.

“여기 왜 있어?”

“속이 좀 안 좋아서.”

주머니 안에 든 손으로 초음파 확인증을 구겨 쥐었다.

비키가 옆에 나타났다. 자기 초음파 사진을 꼭 쥔 채였다.

“제임스한테 들었어. 너 끼니 자주 거른다며.”

제임스의 팔을 토닥였다.

“생강차라도 좀 사다 주자.”

비키의 손에 들린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거친 흑백 화면이 병원의 날카로운 조명 아래서 맥박처럼 뛰는 것 같았다.

제임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소피아, 설명하게 해줘...”

“제임스!”

비키의 손가락이 발톱처럼 소매를 파고들었다. 목소리에는 진정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다정함이 뚝뚝 흘렀다.

“우리 이야기 끝났잖아.”

제임스의 표정에서 갈등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근육이 굳고, 손이 한 번 움찔하다 주먹으로 말려 들어갔다.

비키가 어깨에 뺨을 기대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제임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팔이 죽은 것처럼 옆으로 떨어졌다.

표정이 무너지는 걸 보이기 전에 몸을 돌렸다. 뒤에서 제임스가 반걸음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

비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약속했잖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 여자 사이에 얼어붙은 내 남편의 모습이었다.

나를 붙잡은 제임스의 눈에는 후회에 가까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밖으로 나서자 겨울 공기가 뺨을 후려쳤다.

연구소 합격 통지서는 배낭 바닥에 깔려 있었다.

4년.

획기적인 연구.

이 난장판에서 멀리 떠나서 살아갈 삶.

이제 거기에 아이까지.

나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평평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인도는 양쪽으로 끝없이 뻗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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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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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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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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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7화

    제임스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끝은 이혼 서류에 찍힌 양각 도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비키의 손이 제임스의 어깨에 올라왔다. “제임스, 그냥 나이가 어린 여자애가 떼쓰는 거야. 조금 지나면 알아서 기어 돌아올...”“나한테는 아내가 있어.” 총성이 터지듯 제임스의 말이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그리고 비키를 거칠게 밀어냈다. 비키가 부딪쳐 떨어진 크리스털 화병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대리석 위를 미끄러졌다. 깨져 버린 결혼처럼.제임스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메르세데스의 엔진이 거칠게 울었고, 하얗게 질린 손으로 붙잡은 운전대가 미세하게 떨렸다.대학의 정문이 앞을 막아섰다. 제임스는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두툼한 수업 교재와 미래로 채운 묵직한 가방들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제야 속이 뒤집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소피아의 실험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지도교수의 이름도 몰랐다. 소피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생물학 실험실이요?” 경비원은 흐트러진 제임스의 정장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대학원생들은 지난주에 다 나갔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경비원이 덧붙였다. “가족이라면 아셨을 텐데요.”그 말이 갈비뼈 사이에 칼처럼 박혔다해가 기울며 캠퍼스가 멍든 듯 어두운 빛으로 물들 때, 파란색으로 머리 일부를 염색한 자그마한 여학생이 필사적으로 사람을 붙잡는 제임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소피아 언니의 오빠예요?”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2주 전에 언니가 쓰러졌을 때는 왜 안 왔어요?”제임스의 세상이 다시 흔들렸다. 병원에서 마주쳤던 일, 메스꺼워하던 소피아, 배를 감싸듯 손을 얹던 모습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뒤이은 말이 제임스의 가슴안에서 폭발하듯 울렸다.“지난주에는 아기까지 잃을 뻔했어요. 언니가 입원했을 때 대체 어디 있었는데요?”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6화

    메르세데스가 크게 휘청이며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직전에 순식간에 비켜 나갔다. 닫힌 창을 뚫고 라이더의 욕설이 들어왔지만 제임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가죽이 삐걱거렸다.“제임스!” 비키가 잘 관리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다이아몬드 팔찌가 대시보드에 부딪혀 짤랑거렸다. “요즘 왜 이래? 영화 보기로 한 것도 까먹더니, 이제는 우리 둘 다 죽일 셈이야?”비키의 항의에도 제임스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피곤해서 그래. 친구들이랑 봐.”말투는 감정도 없고 기계적이었다. 머릿속 생각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약 한 달 전에 소피아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실험실 일이 늦어져. 기다리지 말고.]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전화도, 메시지도.비키가 콧방귀를 뀌며 손거울을 열고 입술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소피아가 그 잘난 연구소로 가버린 뒤로 계속 이렇잖아. 솔직히 나랑 시간 보낸다고 삐친 거겠지.”제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안 됐다. 소피아는 떠날 때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언제나 그랬듯 철문으로 둘러싸인 모레티 저택의 입구의 위압적인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었고, 집 안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그때 제임스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가죽 표지 앨범 하나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약간 우그러져 있었다. 가정부가 손을 비비며 옆에 서 있었다.“쓰레기통에서 나온 겁니다. 안에 든 게 그래서... 혹시나 필요하실까 싶어서 꺼내뒀습니다.”제임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표지가 차가웠다. 첫 장을 넘겼다. 결혼사진이었다.곧이어 숨이 턱 막혔다.그날의 소피아는 눈부셨다. 그 눈부신 웃음이 목에 걸린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이길 만큼 환하게 빛났다. 그 옆의 자신은? 무표정한 석상처럼 서 있었다. 신부가 기쁨으로 빛나는데도 표정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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