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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안나 스미스
48시간 동안 연구소에 보낼 메일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실수로 곧 전남편이 될 사람의 아이를 가졌습니다'와 같은 말을 연구소 소장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까?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맴돌기만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마이클에서 온 문자였다.

[보스가 정문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언제부터 오른팔을 심부름꾼으로 썼지?'

내가 정문으로 나가자 제임스는 메르세데스에 기대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제임스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매만져서인지, 나도 모르게 잠깐 숨이 막혔다.

빛이 턱선을 따라 흐르는 모양, 내가 다가서는 걸 알아보고 눈가에 잡히는 옅은 주름.

그 모든 일이 있고서도 여전히 맥박이 빨라진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불공평했다.

얼른 시선을 돌리고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세상에서 그 끈이 제일 중요한 물건인 것처럼.

결혼 4년 차인데도 내 몸은 신혼처럼 반응했다.

뺨에 오르는 열기, 그의 손길을 기억하는 피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물학적 배신이었다.

‘오래된 습관일 뿐이야.'

나는 스스로 내 마음에 단단히 못을 박았다.

‘몸에 밴 기억일 뿐, 그 이상도 아니야.’

“소피아.”

안경을 벗자 예전에는 내 무릎을 풀리게 만들던 검은 눈이 드러났다.

“내일 저녁. 단테스. 8시.”

단테스... 이름만 들어도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왔다.

결혼기념일에 6시간을 앉아 접시 위의 식어버린 음식을 한없이 노려봤던 곳.

그동안 제임스는 비키와 ‘업무 처리 중'이었다.

“알았어. 갈게.”

대답이 입에서 먼저 튀어 나갔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반사적이었다.

‘왜 이렇게 선뜻 대답이 나오지?’

‘매번 나 대신 비키를 고른 남자와 마주보고 식탁에 앉겠다고?'

하지만 망설이면 의심을 산다.

제임스는 상어가 피 냄새를 맡듯 감각적으로 약점을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면, 나는 그럴 생각이 확고했으므로, 순서를 제대로 밟아야 했다.

법적으로 완전히 끊어내지 않고 임신을 숨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제임스는 자기 손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걸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후계자라면 더더욱.

내가 후계자를 감췄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에는...

‘안 돼. 이혼이 먼저야. 깔끔하게, 법적으로, 되돌릴 수 없게.’

이 저녁 식사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우선 이혼.

그다음, 우리 사이에 바다가 놓이고 나면 아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정하면 된다.

일단 입 밖으로 꺼낸다면 말이지만.

레스토랑의 샹들리에가 흰 테이블보 위로 칼날 같은 그림자를 떨궜다.

제임스가 고른 자리는 지하의 와인바, 우리가 첫 데이트를 했던 그 방이었다.

바롤로 병을 내려놓은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4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잡은 손이었다.

“그날 일에 관해 설명할 게 있어...”

쾅!

문이 열렸다.

마이클이 달려와 귓가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돌벽으로 둘러싸인 무덤 같은 공간이었다.

‘비키’, ‘손목을 그었다’, ‘응급’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내 귀까지 기어들어 왔다.

속이 내려앉았다.

‘역시 그렇지. 마지막 저녁 식사마저 둘만의 시간이 될 수는 없는 거야.’

제임스가 손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다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뭐라고?!”

방이 빙 돌았다.

시야가 좁아지다가 결국 제임스의 등만 남았다. 그의 코트 자락이 망토처럼 펄럭였다.

문간에서 잠깐 멈춰 서서 마이클과 나를 번갈아 봤다.

아주 짧은 계산이 지나갔다.

“병원으로 데려가.”

그 말만 남기고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사이로 대화가 조각조각 떠다녔다.

“그냥 저혈당이에요...”

“오렌지 주스 좀 가져다주세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흐릿한 형체들이 보였다.

문가에서 의사가 마이클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의식이 돌아오면서 공포가 찔러 올라왔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안 돼...’

의사가 마이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환자분 상태를 고려하면 임...”

내 마른 목이 조여들었다.

‘막아야 하는데...’

지지직!

마이클의 핸드폰이 화재경보기처럼 울렸다.

주머니에서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곧추세웠다.

“네, 보스.”

잠깐 침묵.

내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마이클은 의사의 차트 위에 블랙카드를 내려쳤다.

“원하면 새해까지 입원시켜도 됩니다.”

문이 흔들리도록 닫히며 마이클이 사라졌다.

의사의 입술은 채 뱉지 못한 ‘임신'이라는 단어에 벌어진 채로 남았다.

“아, 깨셨네요.”

의사가 나를 돌아봤다. 내 심장이 얼마나 요란하게 뛰었는지는 의사가 알 리 없었다.

“대략 13주입니다. 아기는 건강한데, 쓰러지신 걸 감안하면...”

펜이 메모지 위를 긁었다.

“48시간 정도 경과 관찰하고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잠깐 망설이더니 문 쪽을 흘끗 봤다.

“아까 그... 동행분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네.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세요.”

의사가 나가고 나자 커튼 아래로 간호사들의 낮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왔다.

“모레티 씨 부부는 꼭 왕족 같더라니까요. 801호 특실을 아예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며 놨어요.”

“장미 꽃잎에 샴페인까지, 없는 게 없더라고요. 입원하고 나서는 모레티 씨가 아내 곁을 한 번도 안 떠났대요.”

“당연하죠. 로비에서 아내를 안고 들어오는 거 봤어요?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던데.”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10년을 같이 살고도 아직 새신부 대하듯 하잖아요. 우리 남편은 벌써 결혼기념일도 다 까먹는데...”

그 말들이 어떤 칼보다 깊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너무 분명했다. 제임스와 비키였다.

“애지중지할 만하죠. 드디어 후계자를 안겨주는 건데. 모레티 씨는 사모님이 한숨만 쉬어도 전문의를 수도 없이 불러들인대요.”

제임스는 비키를 여왕처럼 대했다.

빳빳한 병원 시트 위에 놓인 내 손톱의 벗겨진 매니큐어가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아무도 챙겨줄 생각을 하지 않는... 유일한 모레티의 아내.

이틀 동안 경과를 지켜본 뒤 별다른 이상이 없자 나는 퇴원했다.

병원 자동문을 나서자 엠마가 인도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를 받아 들고 곧장 법원으로 가서 이혼 판결문을 수령했다.

제임스에게 갈 사본은 일부러 사흘 늦춰 발송되도록 접수했다.

서류를 넘기고 나자 가슴 한쪽이 조용히 개운해졌다.

‘이 서류가 책상에 도착할 때쯤이면, 나는 취리히에 있겠지.'

직원이 소인을 찍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제임스가 온 세상을 뒤진다고 해도 소용없어.’

‘제임스의 힘으로도 닿지 않는 곳은 있으니까.’

‘이제 내가 바로 그런 존재가 됐어.’

서류봉투가 우편함 안으로 툭 떨어졌다.

4년간의 사랑과 거짓말, 외로움이 이제 종이 한 장에 남았다.

며칠 뒤면 그 서류도 바다 건너 사라진 나를 대신해 제임스에게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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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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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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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7화

    제임스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끝은 이혼 서류에 찍힌 양각 도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비키의 손이 제임스의 어깨에 올라왔다. “제임스, 그냥 나이가 어린 여자애가 떼쓰는 거야. 조금 지나면 알아서 기어 돌아올...”“나한테는 아내가 있어.” 총성이 터지듯 제임스의 말이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그리고 비키를 거칠게 밀어냈다. 비키가 부딪쳐 떨어진 크리스털 화병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대리석 위를 미끄러졌다. 깨져 버린 결혼처럼.제임스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메르세데스의 엔진이 거칠게 울었고, 하얗게 질린 손으로 붙잡은 운전대가 미세하게 떨렸다.대학의 정문이 앞을 막아섰다. 제임스는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두툼한 수업 교재와 미래로 채운 묵직한 가방들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제야 속이 뒤집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소피아의 실험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지도교수의 이름도 몰랐다. 소피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생물학 실험실이요?” 경비원은 흐트러진 제임스의 정장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대학원생들은 지난주에 다 나갔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경비원이 덧붙였다. “가족이라면 아셨을 텐데요.”그 말이 갈비뼈 사이에 칼처럼 박혔다해가 기울며 캠퍼스가 멍든 듯 어두운 빛으로 물들 때, 파란색으로 머리 일부를 염색한 자그마한 여학생이 필사적으로 사람을 붙잡는 제임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소피아 언니의 오빠예요?”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2주 전에 언니가 쓰러졌을 때는 왜 안 왔어요?”제임스의 세상이 다시 흔들렸다. 병원에서 마주쳤던 일, 메스꺼워하던 소피아, 배를 감싸듯 손을 얹던 모습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뒤이은 말이 제임스의 가슴안에서 폭발하듯 울렸다.“지난주에는 아기까지 잃을 뻔했어요. 언니가 입원했을 때 대체 어디 있었는데요?”

  • 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제6화

    메르세데스가 크게 휘청이며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직전에 순식간에 비켜 나갔다. 닫힌 창을 뚫고 라이더의 욕설이 들어왔지만 제임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가죽이 삐걱거렸다.“제임스!” 비키가 잘 관리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다이아몬드 팔찌가 대시보드에 부딪혀 짤랑거렸다. “요즘 왜 이래? 영화 보기로 한 것도 까먹더니, 이제는 우리 둘 다 죽일 셈이야?”비키의 항의에도 제임스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피곤해서 그래. 친구들이랑 봐.”말투는 감정도 없고 기계적이었다. 머릿속 생각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약 한 달 전에 소피아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실험실 일이 늦어져. 기다리지 말고.]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전화도, 메시지도.비키가 콧방귀를 뀌며 손거울을 열고 입술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소피아가 그 잘난 연구소로 가버린 뒤로 계속 이렇잖아. 솔직히 나랑 시간 보낸다고 삐친 거겠지.”제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안 됐다. 소피아는 떠날 때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언제나 그랬듯 철문으로 둘러싸인 모레티 저택의 입구의 위압적인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었고, 집 안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그때 제임스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가죽 표지 앨범 하나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약간 우그러져 있었다. 가정부가 손을 비비며 옆에 서 있었다.“쓰레기통에서 나온 겁니다. 안에 든 게 그래서... 혹시나 필요하실까 싶어서 꺼내뒀습니다.”제임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표지가 차가웠다. 첫 장을 넘겼다. 결혼사진이었다.곧이어 숨이 턱 막혔다.그날의 소피아는 눈부셨다. 그 눈부신 웃음이 목에 걸린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이길 만큼 환하게 빛났다. 그 옆의 자신은? 무표정한 석상처럼 서 있었다. 신부가 기쁨으로 빛나는데도 표정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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