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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결혼의 다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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بواسطة:  안나 스미스مكتمل
لغة: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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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4년. 나를 놓아준 건 그 사람이 직접 남긴 서명 한 줄이었다. 정작 본인은 자기가 무엇에 서명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소피아 모레티.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가문의 후계자, 제임스 모레티의 아내였다.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내. 제임스의 어린 시절 첫사랑이자, 눈부시고 가진 것 많은 비키가 돌아왔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비키의 부재를 채우는 존재였다는 걸. 그래서 마지막 수를 뒀다. 대학 서류인 척 위장한 이혼 서류를 책상 위로 밀어 넣었다. 제임스는 한 번 더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서류에 서명했다. 우리 결혼 서약을 대하던 그 태도 그대로, 그의 만년필이 종이를 무심하게 긁고 지나갔다. 자기 손으로 결혼을 끝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하지만 내가 모레티 집안에서 들고 나온 건 자유만이 아니었다. 코트 안쪽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그 사람의 후계자가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는 날, 제임스를 무너뜨릴 비밀이. 이제, 나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던 남자가 나를 찾겠다며 온 세상을 뒤지고 있다. 펜트하우스에서 뒷골목 시궁창까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샅샅이 살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잡히기를 기다리며 두려워 떠는 먹잇감이 아니다. 나는 제임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자리를 정했다. ‘모레티’라는 이름으로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이제 나는 제임스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반대로 제임스가 내 사랑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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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제1화

나는 이혼 서류를 손에 들고 변호사 사무실 문을 밀었다.

4년,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가문의 후계자, 제임스 모레티의 아내로 산 4년이었다.

오늘, 그 4년이 끝난다.

변호사는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이혼 신청하러 왔어요.”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제야 시선이 올라왔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 색이 빠진 청바지, 한쪽 어깨에 걸린 배낭.

변호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학생, 이혼이라는 게 기분 내키는 대로 접수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지금 내 모습은 결혼 4년 차 여자라기보다는 사무실을 잘못 찾아 들어온 대학생 쪽에 훨씬 가까워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

“도장만 찍어주세요.”

목소리가 차분하게 나왔다.

“남편 서명은 제가 받아 오겠습니다.”

모레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정문의 경비들은 내가 지나가는데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제임스의 세계 속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한 붙박이 가구에 가까운 존재였다.

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트러플.

제임스는 집 안에 냄새 배는 걸 질색한다고 늘 말했다.

마늘도, 생선도, 뒤에 남는 건 뭐든 안 된다고.

그런데 지금 서재 공기에는 값비싼 화이트 트러플 향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향이.

문을 밀었다.

제임스 모레티, 내 남편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와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나른한 표정과 자세로.

옆에는 비키 로시가 있었다.

제임스의 어린 시절 단짝이자, 이른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올해 이 도시로 돌아온 여자.

비키는 트러플을 얹은 빵 조각을 제임스 입에 넣어주는 중이었다. 손가락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렀다.

제임스가 나를 봤다. 웃음기가 걷혔다.

“소피아.”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는데.”

비키가 몸을 돌렸다. 완벽하게 칠한 붉은 입술이 곱게 휘었다.

“어머, 소피아! 우리 간단히 요기 중이었어. 두 사람 몫밖에 없긴 한데, 그래도 같이 먹자. 나눠 먹으면...”

“괜찮아.”

말을 자르고 앞으로 나섰다.

윤이 나는 마호가니 책상 위로 서류를 밀어 넣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제임스는 위스키 잔이 입술로 올라가다 멈췄다. 그의 눈이 살짝 좁아졌다.

“이게 뭐지?”

“학교에서 안전 책임 동의서에 서명받아 오래.”

서명란이 나오도록 서류를 펼쳤다.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침을 삼켰다.

“이제 나한테 가족이라고는 당신뿐이니까.”

그 말이 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석연찮은 교통사고였고, 그 사고가 나를 제임스의 세계로 처음 밀어 넣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혼자인지, 이 사람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임스가 미간을 좁혔다.

“좀 보자.”

신경이 피아노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사람은 뭘 읽어보겠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 서류를 내밀면 늘 눈길 한번 안 주고 사인했다.

‘왜 하필 오늘? 왜 지금?'

“어머, 제임스.”

비키가 웃으며 팔에 손을 얹었다.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그냥 단순한 서류잖아. 지난달 자선 행사 때 우리가 사인한 서류가 몇 장이었는지 기억 안 나?”

로시 엔터프라이즈의 상속녀인 비키는 모레티 가문의 가장 중요한 사업 파트너 집안 출신의 사람이었다.

제임스의 곁으로 돌아온 뒤로 제임스의 세계를 물 흐르듯 드나들었다.

요즘은 둘이 늘 붙어 다녔다. 자선 행사에서도, 경매장에서도, 거래가 오가는 담배 연기 자욱한 밀실 포커판에서도.

제임스가 가는 곳마다 비키가 제임스의 팔꿈치 옆에 나타났다. 디자이너 드레스와 맞춤 정장이 처음부터 한 세트로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제임스가 잠깐 망설이다 만년필을 집었다. 손목을 한 번 튕기듯 서명이 그어졌다.

사형 선고서에 사인할 때나 사업 계약서에 사인할 때나 다르지 않은 손놀림이었다.

첫 장 상단에 굵게 박힌 '이혼 청구서' 글자를 보기 전에 서류를 도로 챙겼다.

비키가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제임스, 소피아를 아내라기보다 여동생 대하듯 하잖아.”

제임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비키의 말에 조용히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나는 손이 떨리는 걸 들키기 전에 몸을 돌려 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난 이제 자유야.

대리석 복도를 걸으며 서명이 끝난 이혼 서류를 손에 꽉 쥐었다.

서류 속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지만, 이 결혼은 오늘보다 이미 한참 전에 끝나 있었다.

예전의 제임스는 이렇지 않았다.

내가 잠든 줄 알고 등을 따라 쓸어내리던 따뜻한 손.

가족 모임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던 그 집요한 손길, 뜨겁게 눌러오던 입술.

지금은 나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내가 16살 때였다.

당시 모레티 패밀리를 이끌던 돈 모레티가 나를 거뒀다.

아버지에 대한 예우였다.

아버지는 돈 모레티의 운전기사였고, 보스를 대신해 총알을 맞았다.

그렇게 나는 제임스 모레티와 한 지붕 아래 살게 됐다.

제임스는 내가 원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이었다. 차갑고, 위험하고, 잔인했다.

25살에 이미 아버지 사업의 절반을 넘겨받았다. 신문은 그를 ‘젊은 사업가'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거리에서는 다들 진실을 알았다.

나는 처음에는 제임스와 거리를 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지냈다.

4년 전 그날 밤 전까지는...

그날 제임스는 남의 피를 뒤집어쓴 채 집에 들어왔다.

부엌에서 혼자 칼에 베인 상처를 꿰매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보스가 데려온 자선 케이스쯤이야 쉬운 먹잇감이라고 생각한 아버지 부하 하나가 남긴 선물이었다.

제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내 손에서 붕대를 가져가 직접 상처를 닦아냈다.

그의 엄지가 허벅지 안쪽을 스쳤을 때 밀어내야 했다.

나는 오히려 제임스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우리는 3주 뒤 결혼했다.

제임스는 그걸 사업적 합의라고 불렀다. 이 결혼을 통해 나는 보호, 자기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비키 로시가 이 도시로 돌아오고 밤늦은 미팅이 두 배로 늘어나기 전까지는.

비키, 로시 가문의 상속녀.

로시 가문의 건설 제국은 모레티 패밀리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프랑스인 남편이 이혼 소송을 걸어서 이혼한 비키가 돌아온 뒤로, 그 여자는 나와 제임스의 관계에서 상수가 됐다.

제임스의 회의에, 차에, 삶에 스며들었다.

지난달이 결정타였다.

결혼기념일 저녁, 나는 단테스에서 6시간을 기다렸다. 그곳은 제임스가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소유한 레스토랑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나타난 사람은 제임스가 아닌 그의 오른팔 마이클이었다.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업상 문제가 생겼다'라는 변명을 들고서.

다음 날 아침, 나는 신문 가십난에서 사진을 봤다.

오페라 극장의 제임스와 비키.

비키의 손가락이 제임스의 턱시도 주머니에 걸려 있었다.

제임스가 평소 총을 넣어두는 자리에.

그때부터 나는 이 집안에서 나갈 길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혼 서류는 내 마지막 시험이었다.

하지만 제임스가 읽지도 않고 바로 서명해 버렸다.

비키의 훔쳐보는 눈빛과 훔쳐가는 입맞춤에 정신이 팔린 채로.

집의 금박 현관에 서서 공증인의 양각 도장을 엄지로 더듬었다.

한 달 뒤면 이 서류는 나를 자유로 보내주는 티켓이 된다.

그러면 금칠한 새장도, 연기하는 삶도 끝이다.

제임스는 그의 제국이랑 비키를 가지면 된다.

그리고 나는 사라진 내 인생을 돌려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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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مراجعات

문명림
문명림
간만에....소설은 이런식으로 써야 읽는 동안에 기분도 좋고...해피엔딩이라서 좋고...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작가님 앞으로도 홧팅입니다
2026-08-17 06: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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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فصول
제1화
나는 이혼 서류를 손에 들고 변호사 사무실 문을 밀었다. 4년,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가문의 후계자, 제임스 모레티의 아내로 산 4년이었다.오늘, 그 4년이 끝난다.변호사는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고개도 들지 않았다.“이혼 신청하러 왔어요.”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그제야 시선이 올라왔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 색이 빠진 청바지, 한쪽 어깨에 걸린 배낭. 변호사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학생, 이혼이라는 게 기분 내키는 대로 접수하는 게 아닙니다.”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지금 내 모습은 결혼 4년 차 여자라기보다는 사무실을 잘못 찾아 들어온 대학생 쪽에 훨씬 가까워 보였을 테니까.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도장만 찍어주세요.” 목소리가 차분하게 나왔다. “남편 서명은 제가 받아 오겠습니다.”모레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정문의 경비들은 내가 지나가는데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제임스의 세계 속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한 붙박이 가구에 가까운 존재였다.곧장 서재로 향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트러플.제임스는 집 안에 냄새 배는 걸 질색한다고 늘 말했다. 마늘도, 생선도, 뒤에 남는 건 뭐든 안 된다고. 그런데 지금 서재 공기에는 값비싼 화이트 트러플 향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향이.문을 밀었다.제임스 모레티, 내 남편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와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나른한 표정과 자세로. 옆에는 비키 로시가 있었다. 제임스의 어린 시절 단짝이자, 이른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올해 이 도시로 돌아온 여자.비키는 트러플을 얹은 빵 조각을 제임스 입에 넣어주는 중이었다. 손가락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렀다.제임스가 나를 봤다. 웃음기가 걷혔다.“소피아.”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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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비키는 돌아오자마자 자기 펜트하우스에 공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핑계로 우리 집 게스트 스위트룸에 들어왔다. 물론 ‘임시’로.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제임스가 허락했다. “로시 가문은 우리 집안의 수십 년 된 사업 파트너야.” 그 한마디면 전부 설명된다는 의도였다.비키는 자기 집인 양 우리 집을 돌아다녔다. 디자이너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장 옆에 늘어져 있고, 우리 와인바에서 파티를 열고, 제임스와 내가 단둘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끼어들 구실을 찾아냈다.오늘 밤에도 서재에서 둘을 마주쳤다. 법률 서류 위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비키의 긴 손가락이 종이 위 한 줄을 훑어 내려가다 제임스의 손 가까이에서 멈췄다.“소피아!” 나를 보더니 웃었다. “우리 새 홈시어터 설계 중이야. 같이 볼래?”“실험 보고서 검토해야 해.” 잠옷 자락을 쥐며 말했다.‘우리는 이미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야.’‘제임스가 뭘 하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내 알 바 아니야.’비키의 웃음소리가 깨진 유리처럼 찰랑거렸다. “너는 늘 책에 파묻혀 있더라! 어릴 때 제임스가 내 수학 숙제 대신 해줬었는데...”“직접 가르쳐줬잖아, 제임스? 내 지금 수학 실력은 전부 제임스 덕분이야.”제임스가 낮게 웃었다. “수학이 카지노 수익 세탁보다는 쉬웠지.” 시선이 잠깐 나에게 건너왔다. 반응을 확인하는 눈이었다.표정을 비운 채 발끝만 내려다봤다.‘참 훈훈하기도 하지.’‘세월이 이만큼 흘렀는데 어린 시절에 쌓았던 정이 아직도 이렇게 끈끈하고.'나는 그냥 여기 서서... 이 아름다운 재회 장면에서 빠져나갈 날짜만 세며 기다리면 됐다.자정 무렵 실험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는데 제임스가 침실로 들어왔다. 위스키 향과 비키의 들큼한 향수 냄새가 셔츠에 배어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아직도 일해?” 손가락이 어깨를 스쳤다.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그런데 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자, 나는 빵 부스러기를 받아 든 굶주린 사람처럼 그 손길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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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스위스 연구 펠로십은 4년짜리 과정이었다. 소장은 벌써 두 번이나 나에게 메일을 보내 가을 학기부터 합류해달라고 재촉했다. 4년의 해외 생활, 제임스에게서 멀리, 비키에게서 멀리...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바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지난밤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감겼다. 사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 쪽에서 먼저 제임스에게 다가가 볼까 하고. 떠나면서 가져갈 기억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제임스는 그날 저녁을 비키와 함께 보냈다. 달빛 아래서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고 있었을 거다.사랑과... 이건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무언가의 차이가 거기 있었다.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저렇게 감쪽같이 욕망을 흉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어젯밤 같은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나는 오늘 짐을 빼기로 했다. 이혼 확정까지 3주. 앞으로 3주는 최대한 이 집을 피해 다녀야 했다.내 인생의 대부분은 기숙사에 있었다. 여기 남은 건 옷 가방 하나뿐.내 개인 소지품이라고는 협탁 서랍의 사진첩 하나가 전부였다.두툼한 가죽 표지를 넘겼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나는 제임스를 사진관으로 끌고 갔다. 사진 속의 나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제임스는 석상처럼 굳은 채 카메라만 빼고 아무 데나 보고 있었다.사진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에 떨어졌다. 이렇게 얼룩진 연애사는 재활용 트럭도 싣고 가지 않을 것이다.몇 년 동안 나는 제임스 모레티라는 사람의 인생이라는 무대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이었다. 이제 막이 내렸다. 나갈 시간이었다.뒤이어 지나간 2주는 논문 수정과 실험으로 뿌옇게 흘러갔다. 제임스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금요일 연구 미팅 도중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실험실 앞이야.]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지직거렸다.‘그 사람이 언제부터 직접 운전기사 노릇을 했지?'검은 세단이 인도 옆에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가죽 시트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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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48시간 동안 연구소에 보낼 메일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실수로 곧 전남편이 될 사람의 아이를 가졌습니다'와 같은 말을 연구소 소장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까?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맴돌기만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마이클에서 온 문자였다.[보스가 정문에서 뵙자고 하십니다.]‘그 사람이 언제부터 오른팔을 심부름꾼으로 썼지?'내가 정문으로 나가자 제임스는 메르세데스에 기대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제임스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매만져서인지, 나도 모르게 잠깐 숨이 막혔다. 빛이 턱선을 따라 흐르는 모양, 내가 다가서는 걸 알아보고 눈가에 잡히는 옅은 주름. 그 모든 일이 있고서도 여전히 맥박이 빨라진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불공평했다.얼른 시선을 돌리고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세상에서 그 끈이 제일 중요한 물건인 것처럼. 결혼 4년 차인데도 내 몸은 신혼처럼 반응했다. 뺨에 오르는 열기, 그의 손길을 기억하는 피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물학적 배신이었다. ‘오래된 습관일 뿐이야.' 나는 스스로 내 마음에 단단히 못을 박았다.‘몸에 밴 기억일 뿐, 그 이상도 아니야.’“소피아.” 안경을 벗자 예전에는 내 무릎을 풀리게 만들던 검은 눈이 드러났다. “내일 저녁. 단테스. 8시.”단테스... 이름만 들어도 목구멍으로 신물이 올라왔다. 결혼기념일에 6시간을 앉아 접시 위의 식어버린 음식을 한없이 노려봤던 곳. 그동안 제임스는 비키와 ‘업무 처리 중'이었다.“알았어. 갈게.” 대답이 입에서 먼저 튀어 나갔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반사적이었다. ‘왜 이렇게 선뜻 대답이 나오지?’‘매번 나 대신 비키를 고른 남자와 마주보고 식탁에 앉겠다고?'하지만 망설이면 의심을 산다. 제임스는 상어가 피 냄새를 맡듯 감각적으로 약점을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면, 나는 그럴 생각이 확고했으므로, 순서를 제대로 밟아야 했다.법적으로 완전히 끊어내지 않고 임신을 숨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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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는 보낸 메일함을 들여다봤다. 스위스 연구소에 임신 사실을 고백한 메일이었다. 이제 조용히 답장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배에 손을 얹었다. 우리 둘 다 괜찮다고 확인시켜 주듯이.몇 시간 만에 소장의 답장이 왔다.[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신 것 축하드립니다! 연구실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가족용 숙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로랑 박사의 부인이 저희 산부인과 과장인데, 산전 진료 예약을 직접 다 잡아두었습니다.][특히 공항 도착부터 새 집 현관까지 팀원 한 명이 동행할 예정입니다. 짐 드실 일도, 줄 서실 일도, 신경 쓰실 일도 전혀 없습니다!]나는 화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연구소의 동료 연구원은 망설임도, 편견도 없었고 한없는 배려와 지지뿐이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내용을 확인한 뒤 나도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희망 같은 것이었다.[제 지금 상황 너머의 저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그렇게 답장을 썼다....출국하는 날.나는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서 연구소 담당자를 찾았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소피아?”돌아보니 호리호리한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오고 있었다. 눈매가 순했다. 명찰에는 에릭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도 상대방의 따뜻한 인사 덕분에 긴장이 금세 풀렸다.내 캐리어 하나를 마치 희귀 유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들었다. “우선 탑승 준비 다 해뒀습니다.” 웃으며 말했다. “소장님이 저희 간판 연구자한테는 VIP 대접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에릭이 내 쪽으로 몸을 트는 바람에 그의 어깨가 VIP 라운지 근처에서 일어난 소란을 잠깐 가렸다. 거기에 제임스가 있었다. 비키가 팔에 매달린 채, 두 사람 다 등을 돌리고 중동에서 온 사업가 무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바로 그때 제임스의 몸이 굳었다.“방금 누가 소피아라고 부르지 않았나?”비키의 유리알 같은 웃음소리가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제임스. 소피아는 지금 실험실에 파묻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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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메르세데스가 크게 휘청이며 오토바이와 부딪히기 직전에 순식간에 비켜 나갔다. 닫힌 창을 뚫고 라이더의 욕설이 들어왔지만 제임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가죽이 삐걱거렸다.“제임스!” 비키가 잘 관리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다이아몬드 팔찌가 대시보드에 부딪혀 짤랑거렸다. “요즘 왜 이래? 영화 보기로 한 것도 까먹더니, 이제는 우리 둘 다 죽일 셈이야?”비키의 항의에도 제임스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피곤해서 그래. 친구들이랑 봐.”말투는 감정도 없고 기계적이었다. 머릿속 생각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약 한 달 전에 소피아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실험실 일이 늦어져. 기다리지 말고.]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전화도, 메시지도.비키가 콧방귀를 뀌며 손거울을 열고 입술을 보며 립스틱을 덧발랐다. “소피아가 그 잘난 연구소로 가버린 뒤로 계속 이렇잖아. 솔직히 나랑 시간 보낸다고 삐친 거겠지.”제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말이 안 됐다. 소피아는 떠날 때 상당히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언제나 그랬듯 철문으로 둘러싸인 모레티 저택의 입구의 위압적인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었고, 집 안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그때 제임스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가죽 표지 앨범 하나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모서리가 약간 우그러져 있었다. 가정부가 손을 비비며 옆에 서 있었다.“쓰레기통에서 나온 겁니다. 안에 든 게 그래서... 혹시나 필요하실까 싶어서 꺼내뒀습니다.”제임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표지가 차가웠다. 첫 장을 넘겼다. 결혼사진이었다.곧이어 숨이 턱 막혔다.그날의 소피아는 눈부셨다. 그 눈부신 웃음이 목에 걸린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이길 만큼 환하게 빛났다. 그 옆의 자신은? 무표정한 석상처럼 서 있었다. 신부가 기쁨으로 빛나는데도 표정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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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제임스의 손가락이 떨렸다. 손끝은 이혼 서류에 찍힌 양각 도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비키의 손이 제임스의 어깨에 올라왔다. “제임스, 그냥 나이가 어린 여자애가 떼쓰는 거야. 조금 지나면 알아서 기어 돌아올...”“나한테는 아내가 있어.” 총성이 터지듯 제임스의 말이 목구멍을 찢고 나왔다. 그리고 비키를 거칠게 밀어냈다. 비키가 부딪쳐 떨어진 크리스털 화병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이 대리석 위를 미끄러졌다. 깨져 버린 결혼처럼.제임스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후려쳤다. 메르세데스의 엔진이 거칠게 울었고, 하얗게 질린 손으로 붙잡은 운전대가 미세하게 떨렸다.대학의 정문이 앞을 막아섰다. 제임스는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 무리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두툼한 수업 교재와 미래로 채운 묵직한 가방들이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제야 속이 뒤집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는 소피아의 실험실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지도교수의 이름도 몰랐다. 소피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생물학 실험실이요?” 경비원은 흐트러진 제임스의 정장을 못마땅하게 훑었다. “대학원생들은 지난주에 다 나갔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경비원이 덧붙였다. “가족이라면 아셨을 텐데요.”그 말이 갈비뼈 사이에 칼처럼 박혔다해가 기울며 캠퍼스가 멍든 듯 어두운 빛으로 물들 때, 파란색으로 머리 일부를 염색한 자그마한 여학생이 필사적으로 사람을 붙잡는 제임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소피아 언니의 오빠예요?”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2주 전에 언니가 쓰러졌을 때는 왜 안 왔어요?”제임스의 세상이 다시 흔들렸다. 병원에서 마주쳤던 일, 메스꺼워하던 소피아, 배를 감싸듯 손을 얹던 모습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하나로 길게 이어졌다.뒤이은 말이 제임스의 가슴안에서 폭발하듯 울렸다.“지난주에는 아기까지 잃을 뻔했어요. 언니가 입원했을 때 대체 어디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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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여학생의 말에 제임스의 온몸이 굳어버렸다.“아기를... 잃을 뻔했다고?” 제임스의 입안에서 깨진 유리를 씹는 것 같은 맛이 났다.파란 머리의 여학생이 교재를 더 세게 끌어안고 제임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떤 나쁜 놈이 언니를 임신시켜 놓고 사라졌어요. 언니가 쓰러졌는데도 코빼기도 안 비쳤다고요.” 조용한 캠퍼스에 울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총알처럼 제임스의 가슴을 때렸다.소피아가 자기 아이를 품고 있었다.머릿속이 병원으로 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창백하던 소피아의 얼굴, 주먹 안에 구겨져 있던 종이. 그때 제임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빌어먹을 신사라도 된 것처럼 비키의 산전 진료를 챙기고 있었다.“소피아는 지금 어디 있지?”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나왔다.여학생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갔어요. 지난주에 스위스로 떠났어요.”‘스위스...’제임스도 갑자기 뭔가가 생각이 났다.자신이 비웃었던 지원 서류. 소피아가 싫어할 거라고 멋대로 단정했던 눈.무심하게 던졌던 말 하나하나가 이제 배 속에서 칼을 돌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다가왔다.자정이 되었을 때 제임스는 펜트하우스의 사무실에서 전화로 모든 절차와 규정을 짓밟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되기 전, 연구소장은 전용기에 태워져 제임스의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연구 프로그램에 100만 유로.” 제임스가 수표를 책상에 내리꽂으며 으르렁거렸다. “소피아가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깡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소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피아 씨는 발레주에 계십니다. 하지만 회장님...”“200만.” 수표 위에서 펜이 멈췄다. “소장님은 직접 나를 소피아에게로 데려다주고.”소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 차분함이 제임스의 분노를 더 긁었다. “이 계절에 산길은 아주 위험합니다. 조금 기다리시는 편이...”“300만. 제네바에 헬기 대기시켜 놓죠.”헬기 창밖으로 스위스 알프스가 거대한 벽처럼 솟아 있었다. 새벽하늘 아래의 봉우리는 들쭉날쭉한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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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눈사태가 지나간 고개에는 눈과 뒤틀린 금속으로 뒤덮인 공동묘지 같았다. 제임스는 구조 전문가들과 함께 바닥에 쏟아진 얼음을 찍어 냈다. 장갑을 낀 손에는 물집이 잡혔다. 제임스의 세계는 도끼를 들어 올리고, 내리치고, 얼음을 파내는 단순한 리듬으로 좁아졌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신이 치러야 할 벌처럼 느껴졌다.도끼를 휘두르는 사이사이 저 너머의 기억이 엄습했다. 버몬트 여행에서 내리는 눈 속에서 들리던 소피아의 웃음. 연구를 설명해 주겠다며 제임스의 손바닥 위에 방정식을 그리던 손끝. 제임스가 비키와 함께 있던 병원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얼굴.구조대원 한 명이 피로 젖은 장갑을 가리키며 독일어로 소리쳤다. 제임스는 듣지 않았다. 손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장을 죄어 오는 공포에 비하면... 이 산이 소피아를 묻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먼저 소피아를 삶 속에 묻어 버렸다는 두려움에 비하면...해가 지고 밤이 깊어졌다. 탈진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의료진이 억지로 감아 놓은 붕대 속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근처에서 소란이 일어났지만 제임스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이 흐려진 가운데 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부상자를 중증도에 따라 분류하세요. 3단계 저체온증 환자는 B구역으로 보내요!”소피아.20피트쯤 떨어진 곳에 소피아가 서 있었다. 파카 후드에는 눈이 내려앉아 있었고, 유창한 독일어로 환자 분류를 지휘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소피아가 살아 있었다.제임스는 비틀거리며 소피아에게 다가갔다. 귀 안에서 맥박 소리가 폭발하듯 울렸다. 그때 키가 큰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스칸디나비아 억양이 묻어나는 연구원이었다. “소피아 선생님은 업무 중입니다.” 남자가 제임스의 팔을 붙잡았다. “신원을 밝히세요.”제임스는 팔을 거칠게 빼냈지만 그 움직임에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소피아!”소피아가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운 현장 너머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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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제임스는 헬기 안에서도, 눈사태 속에 파묻혔을지도 모르는 소피아를 찾아 미친 듯이 눈을 파헤치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도 수없이 할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눈사태가 휩쓸고 간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소피아와 마주 서자 준비했던 말은 뜨거운 피부에 닿은 눈처럼 전부 사라졌다. 끝내 거칠고 망가진 사과의 말이 입 밖에 나왔다.“소피아.” 추위와 피로에 깎여 나간 듯한 목소리였다. “네가 겪은 일... 알아. 네가 임신한 것도... 이제 알아.”“그만!”소피아가 제임스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빙하처럼 날카로웠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섞인 메마른 미소가 걸렸다.“예전에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비웃으려고 지구 반대편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거잖아.” 몇 달 동안 혼자 견뎌 온 결심과 고통으로 벼려진 소피아의 말이 수술칼처럼 정확하게 제임스를 베었다.제임스가 움찔했다. 비난이 뼛속까지 박혔다. “아니야! 맹세코 아니야. 나도... 내가 널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알아. 내가 잘못했어. 정말 많이.” 30시간 넘게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소피아를 붙잡듯 바라봤다.“제발. 이혼으로 우리 사이를 끝내지 말자. 돌아와 줘.”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멀리서 스노모빌 엔진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소피아의 입에서 낮고 비웃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에는 좋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정말 오만하기 이를 데 없어.”소피아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차분했다.“싸구려 사과 한마디 던지면 내가 감지덕지해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돌아갈 줄 알아? 몇 년 동안 내가 당한 무시와 비키 때문에 겪은 굴욕이 그냥 사라지기라도 하나?”소피아는 지친 기색 속에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스스로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를 그만두기 전까지 당신 눈에는 내가 없었어. 그 이혼 서류에 서명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은 이미 나를 버렸고!”“소피아, 내 말 좀...”“그러니까... 무슨 말을 또 하려고?” 오랫동안 쌓인 상처가 검은 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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