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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달콤열매
특실 병동의 최고급 병실.

혜미는 침대에 기댄 채 동찬이 따라 준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마셨다.

“서방님, 집에서 들었는데... 동서가 아침에 최고급 세단을 타고 돌아왔다면서요. 어젯밤엔 아예 안 들어왔고... 화가 난다고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없어요.”

동찬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사과 껍질을 깎았다.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다.

“유희는 저한테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에요. 오늘도 저랑 혼인신고 하려고 했고요.”

“둘이 혼인신고 하려고 했어요?”

혜미는 놀란 척했지만 눈 안쪽에는 지독한 질투가 번졌다.

‘내 남편은 죽었고 이제 동찬이 내 아이 아빠인데...’

‘송유희는 왜 자꾸 내 걸 빼앗으려는 거야?’

‘그냥 깨끗하게 최동찬을 나한테 넘기면 안 돼?’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동찬이 전화를 받자 유정란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동찬아! 유희 쟤 지금 무슨 짓이야? 캐리어까지 끌고 나갔잖아! 유희가 없으면 집안일은 누가 하고 혜미 보양식은 누가 챙겨?]

“유희가 나갔다고요?”

사과를 깎던 동찬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혼인신고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유희가 또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서는 왜 저렇게 성질이 센 걸까요? 서방님은 혼인신고까지 해 준다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에요?”

“서방님한테 그렇게 사랑받으면 행복해야죠... 저는 남편도... 이제 없는데...”

혜미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서방님, 얼른 가서 동서를 달래 줘요. 전 아프면 간호사 부르면 돼요. 간호사분들도 많이 바쁘시겠지만... 어떻게든 저는 혼자서 견딜 수 있을 거예요.”

애써 약한 모습을 감추며 양보하는 혜미를 보다가 며칠째 소란을 피운다고 여긴 유희를 떠올리자, 동찬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 내가 유희를 너무 받아 줬어.’

혜미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유희는 이해하고 챙겨 주기는커녕 이런 때까지 질투하고 제멋대로 집을 나갔다. 동찬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동찬은 굳은 표정으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희가 쓰는 카드 전부 정지해. 돈이 없으면 오늘 밤에는 얌전히 돌아올 거야.”

...

수액 다섯 팩을 다 맞고 나서야 유희는 겨우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간병인 김숙자가 카드를 들고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유희 씨, 방금 수납하려고 했는데 결제가 안 돼요. 카드가 정지된 것 같아요.”

‘카드가 정지됐다고?’

멍하던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머리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생각은 선명해졌다.

결혼식을 올린 뒤, 유희는 동찬을 위해 여러 곳에서 받은 최고 수준의 입사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동찬의 FS그룹에 들어갔다.

‘대표의 아내’라는 위치에서 프로젝트를 맡고 회사 운영까지 도왔다.

급여는 일반 직원 시스템을 통해 받지 않았다. 동찬이 회사의 주요 자금 집행을 유희에게 맡기는 한편 한도 없는 블랙카드도 건넸기 때문이다.

자금 관리 권한도, 블랙카드도 사랑의 증표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동찬은 그 돈을 무기로 유희를 통제하려고 했다.

‘정말 우습네.’

‘좋을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처럼 떠받들더니...’

‘마음이 돌아서자마자 이런 비열한 짓까지 서슴지 않는구나.’

“퇴원하시려면 병원비부터 정산하셔야 해요. 제 간병비도 있고요... 유희 씨, 부모님께 한번 전화해 보는 건 어때요?”

부모님은 멀리 북천시에 있었고 두 분 다 몸이 좋지 않았다. 딸이 치료비조차 낼 돈이 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동찬은 유희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연락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다만 하나는 몰랐다. 이번에는 화가 나서 버티는 것도 아니고, 동찬이 달래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유희는 정말 동찬을 버렸다.

길에서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모님.”

유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부르면서, 약지에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뺐다.

“죄송하지만 근처 명품 중고 매장에 가셔서 이거 좀 팔아주세요.”

짐을 정리하며 집 안에 있던 물건을 버리는 데만 신경 쓰느라 손에 낀 반지를 잊고 있었다.

‘잘됐네. 팔아서 돈으로 바꾸면 이 형편없는 관계도 마지막으로 쓸모는 하겠지.’

유희는 이어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결심은 확고했다.

“변호사님, 노동청에 체불임금 진정 넣어 주세요.”

“네. 최동찬을 상대로요. 근로계약서도 없이 3년 내내 일했고, 급여도 제대로 받은 적 없어요.”

...

병원을 나온 유희는 택시를 타고 ‘스카이힐’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산 중턱을 차지한 거대한 저택은 어스름 속에서 웅크린 짐승처럼 보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압박감이 정면에서 밀려왔다.

일부러 잊고 도망쳐 왔던 지난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막다른 길까지 몰리지 않았다면, 유희는 평생 최세호와 다시 얽힐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동찬은 돈도 권력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유희를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굴복시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도 많았다. 멀리 있는 부모님에게까지 손을 뻗을 가능성도 있었다.

동찬을 완전히 끊어 내고 아무 피해 없이 빠져나가려면, 동찬보다 더 강하고 동찬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최세호이었다.

세호는 최씨 집안이 인정하는 진짜 후계자였다. 동찬의 친사촌 형이자 능력과 수완 모두 압도적이었다. 집안의 경영권을 둘러싼 경쟁에서도 동찬보다 훨씬 유력한 차기 수장이었다.

동찬도 세호 앞에서는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춰야 했다.

울남시에서 동찬의 여자를 빼앗을 엄두를 낼 사람은 없었다. 세호만 빼고.

유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몇 분이나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가슴속에 뒤엉킨 불안과 씁쓸함을 가까스로 눌렀다.

주먹을 꽉 쥔 유희는 모든 것을 끊어 낼 각오로 저택 정문을 향해 걸었다.

결국 세호와 마주해야 했다.

“사모님, 돌아오셨군요.”

쉰을 넘긴 집사 오성재가 빠르게 마중 나왔다. 흐트러짐 없이 맞춘 짙은 정장 차림에 온화하고 공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회장님께 급한 일이 생겨 해외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며칠 동안은 집에 들어오시기 어려울 듯합니다.”

‘집에 없다고? 그럼 오히려 잘됐네.’

목까지 치솟아 있던 긴장감이 눈 녹듯 풀렸다.

오성재는 유희가 안도하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눈가에 알 듯 말 듯한 웃음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없이 예를 갖추면서 화려한 본채로 안내했다.

“사모님, 이쪽이 사모님 방입니다. 생활용품, 갈아입으실 옷, 액세서리와 보석까지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언제든 전부 교체하겠습니다.”

“일상적으로 쓰실 비용도 마련했습니다. 한도 없는 블랙카드 하나, 현금 10억 원과 200억 원짜리 수표 한 장입니다. 편하신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쪽은 사모님을 모실 직원들입니다. 모두 108명이며 세 교대로 근무합니다. 어느 때든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바로 응대할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유희는 줄지어 선 수많은 직원들을 보고 정말로 놀랐다.

“이건 너무 많지 않아요?”

동찬의 집과 비교하면 규모부터 씀씀이까지 열 배는 더 화려했다.

오성재는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의 남편은 이제 저희 회장님이십니다. 최동찬 대표 쪽은... 그 집 사정은 굳이 입에 올릴 필요도 없겠지요.”

“최동찬 대표가 드리지 못했던 것, 감당하지 못했던 것들도 저희 회장님한테는 그저 기본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사모님께서 입고, 쓰고, 즐기시는 모든 것은 최고 수준으로 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편하게 지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찬의 집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호사스러운 대접에 유희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유희는 문득 세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감정이 깊어졌을 때 낮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는 이상할 만큼 사람을 흔들었다. 정신을 놓고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던 목소리였다.

유희는 아직도 땀에 젖은 쇄골 아래의 작은 점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필 지금 그런 생각을...’

유희는 황급히 떠오른 기억을 잘라 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집사님, 최세호 회장님이 돌아오기 전에 저한테 미리 알려주세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성재가 공손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회장님과 사모님의 결혼식은 이달 28일로 잡혀 있습니다.”

“준비는 최고 수준의 전문팀이 맡을 예정입니다만, 예식 형식과 장소 분위기, 웨딩드레스 디자인은 사모님께서 직접 골라 주셔야 합니다. 언제가 편하실까요?”

“그런 건 다 알아서 정해주세요.”

“아이고, 사모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결혼식에서는 신부님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도 사모님 뜻대로 준비하고 취향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내 취향...’

가슴 한가운데를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동찬과 치렀던 예식은 규모도 작았다.

유정란이 모든 것을 정해 버린 탓에 어둡고 고루한 분위기였고, 유희에게 마음에 드는지 물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찬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크고 세련된 예식을 다시 올려 주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었다.

3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그저 말로만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찬이 해주지 못한 일을 사촌 형인 세호가 대신 해주려는 것이다.

‘참 우습네.’

‘최동찬은 내 결혼식 날 이 광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유희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요즘 언제든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우선 쉬십시오.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침대 옆 호출 버튼을 누르시면 바로 집사 방으로 연결됩니다.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오성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방을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을 향해 있던 어두운 시선도 밖에 남겨졌다.

시선의 주인은 복도의 어두운 그늘 속에 서 있었다. 큰 체격은 어둠과 섞여서 경계조차 흐릿했고, 말 한마디 없이도 짓누르는 듯한 존재감이 번졌다.

남자는 닫힌 방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꺼운 원목문을 뚫고 안쪽의 유희에게까지 닿으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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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30화

    동찬이 예식장 밖으로 밀려났을 때, 마침 유정란과 혜미가 달려왔다.유정란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창백한 동찬을 보자 속이 상하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닫힌 예식장 문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송유희 저 못된 것!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어?” “네가 최세호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걸 뻔히 알면서 그 사람과 결혼해? 일부러 네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 거잖아.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독해!”혜미는 속으로는 샴페인이라도 터뜨리고 싶을 만큼 기뻤다.겉으로는 걱정과 불안을 가득 담은 표정을 만들고 동찬의 멀쩡한 쪽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진정해요.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요... 우리 쪽도 시작 시간이 다 돼 가요. 하객들도 전부 기다리고 있는데, 이대로 늦으면 아이를 두고도 뒷말이 나올 거예요.”“그러니까 일단 돌아가서 급한 일부터 마무리해요.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잖아요.”혜미는 동찬을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동찬은 팔을 거칠게 빼냈다.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혜미가, 상처받고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동찬을 바라봤다.동찬은 혜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텅 빈 눈이 혜미 품의 아이에게 내려갔다.예전의 다정함과 기대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잘못의 시작이 된 성가신 존재를 보는 듯 차갑고 낯선 눈이었다.“형수님, 제가 잘못했어요.”잔뜩 갈라진 동찬의 목소리는 후회로 거칠었다. “제가... 형수님하고 아이를 만들면 안 됐어요.”그는 이제야 유희가 아이의 존재를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혜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를 급히 품에 더 세게 안고 울먹였다.“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당신 친아들이에요!”“지금 마음이 무너진 건 알아요.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해요. 우리 아이 앞날부터 생각해야 하잖아요!”유정란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급히 거들었다. “맞아. 아이가 최씨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이고 제일 중요해. 다른 일은 다 뒤로 미뤄야지.”“송유희 때문에 정해 둔 발표 시간까지 놓쳐서, 아이한테 평생 말이 나오게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29화

    세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주변 공기를 단숨에 바꿨다.유희 앞으로 다가간 동찬이 팔을 잡으려고 했다. 흥분한 탓에 목소리까지 달라져 있었다.“장난이 너무 지나쳤어! 유희야, 이건 선을 넘었어. 당장 나랑 돌아가!”유희는 한 걸음 물러나면서 동찬의 손을 피했다. 눈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장난? 여기까지 와서도 내가 너 상대로 장난치는 것 같아?”“이게 장난이 아니면 뭔데? 결혼은 장난감이 아니야. 형도 네가 나를 자극하려고 이용할 사람이 아니고. 정신 차려.”동찬은 견디기 힘들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넌 내 아내야. 우리 이미 결혼식도 했잖아!”“법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유희는 차분하지만 잔인할 만큼 분명하게 짚었다. “그 눈 오던 밤, 네 어머니가 나를 집 밖으로 내쫓는 걸 네가 가만히 보고 있던 때부터 우리 사이는 끝났어.”“그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널 사랑해. 내 입장도 이해해 줘야 하잖아.”동찬은 다급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스스로 듣기에도 힘이 없었다.“미안하지만.”유희는 더 이상 동찬을 보지 않았다. 세호 쪽으로 몸을 돌려 팔짱을 살며시 끼었다. “나는 이미 세호 씨의 아내야.”“유희야, 여보... 그러지 마.”동찬이 또 손을 뻗었지만 최세호가 앞으로 나서며 가볍게 쳐냈다.세호의 시선이 서늘한 칼날처럼 동찬의 얼굴을 훑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동찬아. 내 결혼식에 들어와서 내 아내를 데려가겠다고? 예의가 너무 없네.”세호는 짧게 말을 멈췄다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덧붙였다. “호칭도 고쳐. 이제 유희한테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최세호!”동찬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유희가 내 아내였다는 걸 알면서 왜 결혼해? 사촌동생의 여자였던 사람을 형이 데려가 놓고 울남시 사람들이 비웃는 게 두렵지도 않아?”“사촌동생의 여자를 빼앗았다고?” 세호가 짧게 비웃었다. “그 말은 네가 할 처지가 아닌 것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28화

    동찬은 바로 고개를 세게 흔들어 터무니없는 생각을 밀어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저 사람은 지예라야.’‘오늘은 최세호와 지예라의 결혼식이잖아.’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 신부를 유희로 착각할 수 있을까?’“동찬아! 시작 시간 다 됐는데 문 앞에서 뭐 하고 있어?”유정란이 연회장 안에서 나와 못마땅하게 재촉했다. “애도 못 낳는 게 자존심 세우고 안 오겠다는데 잘됐지. 누가 그런 애한테 내 귀한 손자의 엄마 노릇 시키고 싶대? 재수 없어.”동찬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집스럽게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올 거예요.”유희는 마음이 약했다. 자신이 알던 유희이라면 정말 끝까지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아이를 안고 넋이 나간 동찬을 바라보면서 혜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아이의 여린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었다.“으앙!”아기는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놀란 유정란이 아이를 얼른 받아 안았다. “아이고, 우리 귀한 손자가 왜 이렇게 울어? 괜찮아, 괜찮아. 할머니가 여기 있잖아.”유정란이 동찬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봐, 아이도 울잖아. 정해 둔 시간에 아버지와 후계자 발표를 해야 좋은 뜻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데, 시간을 놓치면 애한테 좋을 게 뭐가 있어.”“동찬아, 유희 하나 때문에 네 아들 앞날까지 망칠 거야?”동찬은 유정란 품에서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아이와 여전히 아무 답도 없는 핸드폰을 번갈아 봤다. 마음속에서 심한 갈등이 일었다.결국 힘없이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유희야, 이번에는 네가 정말 너무했어.’동찬은 유정란에게 말했다. “가요. 들어가죠.”두 사람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시원시원한 분위기의 여자는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직 시작 안 했지? 늦은 거 아니지? 동찬아, 미란 이모, 축하해요. 조카 선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27화

    유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면서 전화를 받았다.혜미가 일부러 높인 목소리로 자랑하듯 말했다.[기사 봤어? 오늘 울남시 최고급 호텔인 리안호텔에서 우리 아들 장손 공식 발표 연회가 열려.][최동찬이 울남시에서 제일 크고 화려하게 하겠대. 이름 좀 있다는 사람은 전부 올 거야.][오늘부터 모두가 알게 되겠지. 내 아들이 최동찬의 정식 장남이고 앞으로 후계자가 될 아이라는 걸.] [나하고 최동찬 사이도 누구도 못 끊어. 우리는 앞으로도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살 거야.]혜미의 도발을 들으며 유희는 거울 속 웨딩드레스 차림의 자신을 바라봤다. 어이없을 만큼 우스웠다.“오늘 같은 날 굳이 나를 건드리고 싶은 거야?”유희의 붉은 입술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최동찬은 내가 그 연회에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지금 바로 가면 행사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혜미가 발끈했다. [네가 감히!]유희는 조용히 웃었다.“네가 불편해지는 거라면 나는 기꺼이 갈 수 있는데...”“내가 안 가길 원하면 핸드폰에 대고 세 번 크게 말해. ‘나랑 최동찬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었다.’ 충분히 크게 말하면 생각해 볼게.”[송유희, 너!]혜미의 숨이 거칠어졌다. 이를 가는 소리까지 들릴 듯했다.유희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셋 셀 동안 안 하면 바로 갈 거야. 하나, 둘, 셋...”[나랑 최동찬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었다! 나랑 최동찬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었다! 나랑 최동찬은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었다!]전화기 너머 혜미의 목소리가 거의 무너졌다. [됐지?]유희가 웃었다. “녹음했어.”[송유희!!!]유희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고 녹음 파일을 저장했다. 통쾌하고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옆에 있던 오성재가 웃으며 조용히 알렸다. “사모님, 결혼식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문이 열리고 같은 제복을 입은 직원 네 명이 공손하게 들어왔다. 무겁고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26화

    말을 마치자 동찬의 핸드폰이 연달아 진동했다.친한 지인들이 모인 단톡방이었다.[동찬아, 큰 소식! 최세호가 그렇게 못 잊던 첫사랑 지예라가 돌아왔대!][내가 뭐랬어. 예전에 최세호가 지예라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을 뻔했잖아.] [지예라가 떠난 뒤에는 여자라면 근처에 오는 것도 싫어하더니,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면 신부는 뻔하지. 내가 장담하는데 지예라가 맞아.][오히려 잘됐네. 최세호는 몇 년 동안 약점 하나 없이 너를 누르고 최씨 집안에서 영향력도 계속 키웠잖아.] [이제 유일한 약점이 돌아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기회 잡아.]동찬은 화면의 글자를 하나하나 뚫어지게 읽었다. 잔뜩 당겨 놓은 고무줄 같던 긴장감이 툭 끊어지듯 풀렸다.‘지예라였구나.’‘그래. 그 일을 왜 잊고 있었지.’‘최세호처럼 냉정한 사람이 결혼까지 받아들일 상대라면 지예라 말고 누가 있겠어?’‘유희는 역시 지예라 대신 드레스를 입어 본 것뿐이야.’동찬은 자신이 너무 흥분해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고 여겼다.길게 숨을 내쉬자 안도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비서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대표님, 그럼 조사 건은...”“됐어.” 동찬이 손을 내저었다. 목소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오해한 거야. 더 알아볼 필요 없어.”혜미는 갑자기 편안해진 동찬을 보자, 속에서 질투가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아이까지 낳았는데도 동찬은 여전히 유희에게 이렇게 흔들렸다. 이대로 두면 아들까지 동찬을 붙잡아 두지 못할 것 같았다.혜미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자기 문제를 치워 줄 사람은 김민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번에도 들려온 것은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적인 안내음이었다.“젠장.”혜미는 낮게 욕하며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쥐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독사처럼 마음을 휘감았다....결혼식 당일.리안호텔 신부 대기실.커다란 통유리를 지난 햇빛이 방 안을 따뜻하고 환하게 채웠다.유희

  • 끝난 사랑의 다음 페이지   제25화

    “너... 어떻게 내 다친 팔을...” 동찬의 목소리가 떨렸다.유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만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내가 최세호와 결혼한다는 걸 못 믿겠어? 그럼 직접 물어봐.”동찬의 팔은 여전히 뼛속까지 쑤셨고 피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눈앞의 유희는 동찬이 알던 사람과 너무 달라져 있었다. 혼란과 상처가 뒤엉킨 채 동찬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네가 대체 왜 이렇게 변했어? 형수가 내 아이 하나 낳아 준 게 전부잖아. 왜 끝도 없이 일을 키우는 거야?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자기 말만 옳다고 믿는 동찬을 보고 있으니 유희는 지긋지긋했다.세호 쪽을 바라보니 통화가 끝난 듯 핸드폰을 내리고 있었다.‘잘됐네.’세호가 직접 말해 준다면 동찬도 더는 자기 멋대로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끝낼 수 있었다.따르릉-그때 동찬의 전화가 다급하게 울렸다.화면도 보지 않고 끊었지만 벨소리가 다시 이어졌다.동찬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뭔데?”혜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이상해요. 설사하고 토하고 열이 41도까지 올랐어요! 왜 병원에 없는 거예요? 빨리 와요!]혜미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떨리고 있었다.“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동찬은 습관처럼 유희에게 손을 뻗었다. “너도 일단 나랑 병원 가.”유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손을 대면, 이번에는 그 팔 진짜 다시 부러뜨려 줄 테니까.”동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깁스 안쪽의 통증이 유희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줬다.동찬은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유희를 바라보다 결국 이를 악물었다.“유희야, 너 정말 너무 제멋대로야.”그 말을 남기고 동찬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병원으로 가기 위해 빠르게 매장을 떠났다.유희는 다급하게 멀어지는 동찬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바로 전까지 세호가 자신에게 화풀이할까 걱정된다고 떠들더니,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 한마디에 유희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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