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자의 형과 결혼했습니다

약혼자의 형과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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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6jay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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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함께한 약혼자의 불륜을 목격한 날, 서이현은 그가 평생 두려워하던 배다른 형 차도겸의 손을 잡았다. “저랑 결혼하실래요?” 복수로 시작한 정략결혼. 하루아침에 전 약혼자의 형수님이 된 이현 앞에서 그는 무너져가고, 냉정한 도겸은 아내에게만 숨겨온 소유욕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결혼, 정말 복수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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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침대 위의 약혼자

결혼식을 정확히 석 달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

HJ호텔 전략기획실에서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서이현의 휴대폰에 발신자 표시 제한 문자가 도착했다.

[약혼자가 지금 누구와 있는지 알고 싶으면 태성호텔 3201호로 오세요.]

한 줄뿐인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현의 시선은 한동안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3201호는 태성호텔 최상층에 마련된 로열 스위트였다.

차현욱.

태성그룹 차남이자 이현과 6년 동안 정략 약혼을 이어온 남자였다.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다. 양가의 호텔·리조트 사업을 위한 약속이었고, 이현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대신 지켜야 할 선은 있다고 믿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모욕하지 않을 것. 약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을 것.

그 정도의 예의는 현욱에게도 있을 줄 알았다.

이현은 코트를 집어 들고 곧장 태성호텔로 향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현욱에게 전화를 걸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액정에 저장된 이름을 바라보다 그대로 화면을 껐다. 사실이 아니라면 직접 확인한 뒤 사과하면 됐다. 사실이라면, 전화 한 통으로 도망칠 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32층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두꺼운 카펫이 구두 소리마저 삼켰다.

3201호 앞에 도착했을 때, 객실 문은 걸쇠에 걸린 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진한 매그놀리아 향과 익숙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욱 씨, 정말 석 달 뒤에 그 재미없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예요?”

교태 섞인 목소리 뒤로 현욱의 나른한 대답이 이어졌다.

“서이현이랑 하는 건 사업상 결혼이야. 걔는 체면이 제일 중요해서 절대 파혼 못 해. 내가 밖에서 누굴 만나든 결국 모른 척할걸.”

“나 버리면 안 돼요.”

“그럴 일 없다니까.”

시트가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웃음이 문틈을 빠져나왔다.

이현은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손끝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보다 먼저 밀려온 건, 지난 6년을 통째로 조롱당한 모욕감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어 열었다.

쾅!

침대 위에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셔츠를 벗은 현욱과 얇은 슬립 차림의 민채원이었다. 채원은 비명을 삼키며 시트를 끌어 올렸고, 현욱의 얼굴은 잠시 굳었다.

“서이현?”

이현은 침대 발치까지 걸어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 복도까지 다 들리던데, 내가 괜히 끊었네.”

현욱은 서둘러 바지를 주워 입었다. 당황은 잠깐이었다. 셔츠 단추를 채우는 얼굴 위로 익숙한 오만이 돌아왔다.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래도 굳이 이렇게 소란 피울 필요 있어?”

“소란?”

“우리 결혼이 사랑 때문에 하는 건 아니잖아. 결혼 전에 잠깐 만난 사람 가지고 파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잠깐 만난 사람이 침대에 있네.”

“말 가려서 해.”

현욱이 턱을 들었다.

“HJ 신규 리조트 대출 보증, 태성에서 서는 거 잊었어? 네 아버지가 이 결혼 깨지는 걸 두고 보실 것 같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현은 늘 그래 왔듯 가문과 체면을 위해 참을 거라고.

그 순간, 남아 있던 미련이 깨끗하게 식었다.

이현은 왼손 약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 현욱의 발치에 던졌다. 플래티넘 링이 대리석 바닥을 튕기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네가 뭘 믿고 이러는지 이제 알겠어.”

“서이현.”

“하지만 틀렸어. 우리 파혼이야.”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적어도 당신이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이현은 몸을 돌려 객실을 나왔다.

뒤에서 현욱이 이름을 불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홀 앞에는 옆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막 나온 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차콜 수트. 흐트러짐 없는 자세. 사람을 압도하는 고요한 시선.

차도겸.

태성홀딩스 부회장이자 현욱의 배다른 형. 현욱이 평생 넘지 못한 태성그룹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뒤늦게 복도로 뛰쳐나온 현욱이 도겸을 발견하고 굳었다.

“혀, 형이 왜 여기…….”

도겸은 동생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직 이현만 보고 있었다.

놀라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이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듯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침착함이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이현의 머릿속에 가장 위험하고 확실한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현욱이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선택.

그가 평생 두려워한 남자의 편에 서는 것.

이현은 도겸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복도에서 맞닿은 손바닥만 뜨거웠다.

현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에서 터진 고함에도 이현은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옭아매던 두 집안의 이해관계와 6년이라는 시간이, 이 한 번의 선택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도겸의 시선이 맞잡힌 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이현에게 돌아왔다.

“부회장님.”

“말씀하십시오.”

이현은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랑 결혼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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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침대 위의 약혼자
결혼식을 정확히 석 달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HJ호텔 전략기획실에서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서이현의 휴대폰에 발신자 표시 제한 문자가 도착했다.[약혼자가 지금 누구와 있는지 알고 싶으면 태성호텔 3201호로 오세요.]한 줄뿐인 문장이었다.그러나 이현의 시선은 한동안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3201호는 태성호텔 최상층에 마련된 로열 스위트였다.차현욱.태성그룹 차남이자 이현과 6년 동안 정략 약혼을 이어온 남자였다.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다. 양가의 호텔·리조트 사업을 위한 약속이었고, 이현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대신 지켜야 할 선은 있다고 믿었다.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모욕하지 않을 것. 약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을 것.그 정도의 예의는 현욱에게도 있을 줄 알았다.이현은 코트를 집어 들고 곧장 태성호텔로 향했다.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현욱에게 전화를 걸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액정에 저장된 이름을 바라보다 그대로 화면을 껐다. 사실이 아니라면 직접 확인한 뒤 사과하면 됐다. 사실이라면, 전화 한 통으로 도망칠 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32층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두꺼운 카펫이 구두 소리마저 삼켰다.3201호 앞에 도착했을 때, 객실 문은 걸쇠에 걸린 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진한 매그놀리아 향과 익숙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현욱 씨, 정말 석 달 뒤에 그 재미없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예요?”교태 섞인 목소리 뒤로 현욱의 나른한 대답이 이어졌다.“서이현이랑 하는 건 사업상 결혼이야. 걔는 체면이 제일 중요해서 절대 파혼 못 해. 내가 밖에서 누굴 만나든 결국 모른 척할걸.”“나 버리면 안 돼요.”“그럴 일 없다니까.”시트가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웃음이 문틈을 빠져나왔다.이현은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손끝은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보다 먼저 밀려온 건, 지난 6년을 통째로 조롱당한 모욕감이었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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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좋습니다
호텔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도겸의 손을 붙잡은 이현은 뒤늦게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충동이었다.복수심도 섞여 있었다.하지만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뒤에 서 있던 현욱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서이현, 무슨 헛소리야? 형, 신경 쓰지 마요. 방금 나랑 파a혼해서 제정신이 아닌—”“좋습니다.”도겸의 대답이 현욱의 말을 끊었다.망설임도 질문도 없었다.오히려 이현이 숨을 멈췄다.현욱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형, 미쳤어요? 서이현은 내 약혼녀였다고요. 6년이나 내 여자였어!”도겸이 그제야 동생을 바라보았다.“약혼녀였다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현욱의 입술이 굳었다.“네 입으로 과거형을 썼군.”“그건…….”“네가 다른 여자를 침대에 들인 순간 끝난 관계다.”도겸은 이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넓은 어깨가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그리고 서이현 씨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야. 다시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현욱은 이를 악물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도겸은 이현에게 고개를 돌렸다.“가시죠.”도겸이 이현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현욱이 다시 외쳤다.“서이현! 네가 형을 얼마나 안다고 이래!”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닫히는 문 사이로 보인 현욱의 얼굴은 분노보다 공포에 가까웠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정확한 곳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도겸의 전용 세단이 호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짙게 틴팅된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길게 번졌다. 차 안에는 시더우드 향과 엔진의 낮은 진동만 남아 있었다.이현은 안전벨트를 맨 채 손끝을 내려다봤다.방금 전까지 도겸의 손을 잡고 있던 감각이 선명했다.옆자리의 도겸은 태블릿을 확인하다가 화면을 껐다.“지금이라도 내릴 수 있습니다.”이현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죠?”“복도에서 한 말이 충동이었다면 여기서 끝내도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현욱에게는 따로 경고하겠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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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 태성과 HJ 양가에 두 통의 통보가 동시에 전달됐다.차현욱과 서이현의 파혼.그리고 차도겸과 서이현의 결혼.차중만 회장은 태성 본사 집무실에서 찻잔을 내던졌고, 현욱의 어머니 한명숙은 가족회의를 소집하라며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도겸은 태성홀딩스 최대주주였다. 그의 사생활에 반대할 수는 있어도 결정을 뒤집을 사람은 없었다.HJ 쪽도 처음에는 술렁였다.이현의 아버지 서정호 회장은 대출 보증과 합작 리조트 일정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이현이 들려준 녹음과 호텔 출입 기록을 끝까지 확인한 뒤 표정이 달라졌다.태성 측이 먼저 파혼 책임을 이현에게 돌릴 경우에 대비해 법무팀이 녹음 파일과 호텔 출입 기록을 보존하기로 했다.“그 집에 다시 보낼 생각은 없다.”짧은 결론이었다.현욱이 가장 견디지 못한 건 양가의 반대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도겸이 대신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이었다.***오후 두 시, HJ호텔 프라이빗 라운지. 이현은 창가에 앉아 리조트 브랜딩 기획안을 검토하고 있었다.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현욱이 들어왔다. 반듯하던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고 눈은 잠을 설친 사람처럼 충혈돼 있었다.“너 진짜 형이랑 결혼할 거야?”이현은 펜을 내려놓았다.“이미 양가에 통보했어.”“그건 나 겁주려고 벌이는 쇼잖아.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해. 적당히 화 풀고 돌아와.”사과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그는 여전히 이현이 자신을 질투시키려고 형을 끌어들였다고 믿고 있었다.“착각하지 마, 차현욱.”“내가 무릎이라도 꿇으면 돼?”“네가 뭘 해도 안 돌아가.”현욱의 표정이 비틀렸다.“형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고.”“당신보다는 낫겠지.”“서이현!”“그리고 목소리 낮춰. 여긴 내 호텔이야.”그때 라운지 입구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도겸이었다.그는 예정된 법무팀 미팅에 참석하러 온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로 걸어와 이현 옆에 섰다.“내 아내가 감당할 일을 왜 네가 걱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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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결혼했습니다
3주는 폭풍처럼 지나갔다.구청 민원실에서 혼인신고서가 접수된 순간, 서이현과 차도겸은 법적으로 부부가 됐다.결혼식은 태성그룹 영빈관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언론과 외부 하객은 배제하고 양가 직계 가족과 최소한의 임원만 초대했다.신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이현은 미카도 실크 드레스의 허리선을 정돈했다.지난 6년 동안 막연히 상상했던 신랑은 차현욱이었다.오늘 그녀와 버진 로드를 걸을 사람은 그 남자의 형이었다.묘한 기분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밖에서는 예식 진행을 알리는 잔잔한 현악 연주가 들렸다. 이현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복수를 위해 선택한 결혼인데도, 막상 문 앞에 서자 손끝에 긴장이 맺혔다.문이 열리고 다크 네이비 턱시도를 입은 도겸이 들어왔다.그의 시선이 이현에게 닿은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왜 그렇게 보세요?”도겸이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생각보다 더 아름다워서요.”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이현이 눈을 깜빡였다.도겸은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팔을 내밀었다.“준비됐습니까?”“네, 부회장님.”그가 이현의 귓가로 몸을 낮췄다.“오늘부터는 부회장이 아니라 남편입니다.”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쳤다.이현은 그의 팔 안쪽에 손을 얹었다.“노력해 볼게요. 남편.”도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가 이현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그 호칭은 생각보다 위험하군요.”“왜요?”“오늘 해야 할 일을 잊게 만드니까.”***메인 홀에는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다.차중만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단상 옆에 앉아 있었고, 한명숙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하객석 맨 앞줄에는 현욱이 앉아 있었다.가족 자격으로 참석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웨딩 마치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수십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중 가장 날카로운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찾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도겸과 이현이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도겸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현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조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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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이틀 뒤, 성북동 태성가 본가에서 첫 가족 만찬이 열렸다.긴 마호가니 식탁의 상석에는 차중만 회장이 앉았다. 오른쪽에는 도겸, 그 옆에는 태성가의 큰며느리가 된 이현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현욱은 식탁 반대편 끝에 앉았다.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현은 그의 약혼녀 자격으로 말석에 가까운 자리를 지켰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필요할 때만 미소 짓고, 현욱이 자리를 비워도 혼자 남아 예의를 다했다.오늘은 달랐다.도겸이 직접 의자를 빼 주자 이현은 그의 오른편에 앉았다. 직원은 차중만 다음으로 두 사람의 잔을 채웠고, 집안 고문들은 도겸에 이어 이현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자리 하나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제 이현은 초대받은 약혼녀가 아니라 이 집안의 일원이었다.그 변화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현욱의 어머니 한명숙이었다.한명숙이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동생과 6년을 약혼한 여자가 며칠 만에 형과 결혼해 이 자리에 앉다니.”식탁 위의 대화가 끊겼다.“사업상 정략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체면이 있는 법이야. 이현아, 정말 밥이 넘어가니?”이현은 수저를 내려놓고 한명숙을 바라봤다.대답하기 전에 도겸이 먼저 잔을 놓았다.크리스털과 받침이 부딪치는 낮은 소리가 방 안을 정리했다.“제 아내에게 예의를 지키십시오.”한명숙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도겸아, 지금 어른한테—”“현욱이 약혼 중 다른 여자를 만난 일은 문제 삼지 않으시면서, 그 관계를 끝낸 이현 씨에게만 체면을 요구하시는군요.”도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그래서 더 반박하기 어려웠다.“이 결혼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불만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제 아내의 자격을 입에 올리는 건 허용하지 않겠습니다.”“네가 아무리 최대주주라고 해도 이 집안에는 법도가 있어!”“법도는 약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닙니다.”한명숙이 말을 잇지 못했다. 현욱은 물잔만 노려볼 뿐 어머니를 말리지도, 이현에게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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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도겸의 손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신혼생활은 예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두 사람은 중앙 복도를 사이에 둔 각자의 스위트룸을 사용했다. 도겸은 이현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않았고, 이현의 업무 일정에도 간섭하지 않았다.그런데도 그의 존재는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다.이현이 리조트 기획안 때문에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거실 조명은 늘 켜져 있었다. 도겸은 소파에서 결재 문서를 보고 있었고, 아일랜드 식탁에는 데운 수프나 샌드위치가 놓였다.“기다리셨어요?”“일이 남았습니다.”매번 같은 대답이었다.하지만 이현이 식사를 시작하면 도겸도 그제야 태블릿을 덮었다.어느 날은 이현이 커피만 마시고 출근하려 하자 그가 토스트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빈속에 커피부터 마시면 오후에 위가 아픕니다.”“그것도 비서에게 들으셨어요?”“지난주에 약을 드시는 걸 봤습니다.”무심한 얼굴로 건네는 말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계약결혼이란 서로 필요한 것만 주고받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도겸이 주는 건 이름과 권력뿐일 줄 알았다.그런데 그는 이현이 스스로도 놓치는 사소한 것까지 보고 있었다.한 번은 이현이 새벽 회의를 앞두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고, 노트북 옆에 수정된 재무 모델이 놓여 있었다.도겸은 틀린 숫자 세 곳에만 표시를 남겼다. 본문에는 손대지 않았다.[결정은 당신이 하십시오.]메모 한 줄이 그다운 배려였다.***토요일 저녁, 한미 비즈니스 포럼 갈라 디너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렸다.국내 주요 기업과 해외 투자사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도겸은 블랙 턱시도를 입고 이현을 에스코트했다. 딥 에메랄드 드레스를 고른 이현은 그의 옆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오가며 해외 파트너들과 대화를 이어갔다.“사모님이 HJ 복합 리조트 전략을 직접 맡고 계신다 들었습니다.”“아직 검토 단계입니다. 투자 조건이 맞는다면 태성과 함께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이현은 도겸의 장식물이 아니었다.그녀가 사업 조건을 설명할 때 도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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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 디너가 끝나갈 무렵, 이현은 파우더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대리석 기둥을 돌아서는 순간 현욱이 앞을 막았다. 위스키 냄새가 먼저 닿았다.“잠깐 얘기해.”“할 말 없어.”이현이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현욱이 다시 길을 막았다.“이제 완전히 형 아내 행세에 취했나 봐.”“행세가 아니라 법적으로 아내야.”“착각하지 마. 형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야. 널 원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라고.”현욱은 목소리를 낮췄다.“내 후계 자리를 빼앗고 HJ까지 손에 넣으려고 널 옆에 세운 거야. 쓸모가 끝나면 버릴걸.”이현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6년 동안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봐온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낯설고 초라했다.“적어도 도겸 씨는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워 내 얘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는 않아.”현욱의 얼굴이 굳었다.“네가 형을 얼마나 안다고—”“당신보다는 많이 알게 됐어.”“한 달도 안 됐잖아.”“그 짧은 동안 당신이 6년간 보여준 것보다 많은 걸 봤어.”현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형이 널 지켜주는 척하는 게 좋나 봐? 네가 원래 그렇게 권력에 약했어?”“권력에 기대는 것과 존중받는 걸 구분 못 하는 건 당신이겠지.”“서이현.”“그리고 호칭부터 고쳐.”이현이 또렷하게 말했다.“난 이제 네 형수야.”그 말이 현욱의 자존심을 정확히 베었다.그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으려던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여기 있었군요.”도겸이었다.그는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이현의 어깨를 감쌌다. 현욱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찾았습니다.”“죄송해요. 잠깐 붙잡혀서요.”“붙잡혔습니까?”그제야 도겸이 동생을 바라봤다.짧은 시선만으로 현욱의 얼굴이 굳었다.“다음부터 내 아내의 길을 막지 마.”현욱이 비웃듯 말했다.“형은 지금 저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형한테 붙었는지 모르죠? 날 약 올리려고 그러는 거라고.”도겸은 이현의 어깨에 두른 손을 거두지 않았다.“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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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큰며느리
태성그룹 창립 45주년 기념 리셉션은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열렸다.정재계 인사와 해외 파트너, 언론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그룹의 가장 큰 연례행사였다.그날은 이현이 ‘차도겸 부회장의 아내’이자 태성가의 큰며느리로 공식 석상에 처음 서는 자리이기도 했다.양개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입장하자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블랙 벨벳 드레스를 입은 이현은 도겸의 팔에 손을 얹고 흔들림 없이 걸었다. 도겸은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긴장됩니까?”“조금요.”“그럴 필요 없습니다.”“왜죠?”“이 자리에서 당신보다 준비된 사람은 없으니까.”이현은 그 말을 듣고 어깨의 힘을 뺐다.행사가 시작되자 그녀는 그룹 원로와 해외 인사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고, HJ와 태성의 합작 사업에 관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했다.차중만과 한명숙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녀를 큰며느리로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한 달 전까지 현욱의 약혼녀로 불리던 이현의 자리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그 변화는 단순히 도겸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현은 그룹 행사 운영 자료를 미리 검토했고, 해외 손님들의 이해관계를 파악해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했다.행사 실무진이 준비한 순서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이현이 먼저 대안을 제시했다. 도겸은 그녀의 판단을 곧바로 승인했다.대화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이현에게로 옮겨갔다.***행사 중반, 도겸이 해외 파트너와 비공개 환담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이현은 잠시 테라스로 나가 밤바람을 쐈다.잠시 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민채원이 다가왔다.“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공식 석상에서는 그렇게 해.”채원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현욱 씨가 그러던데요. 팀장님은 침대에서도 차갑고 재미없는 여자라고. 도겸 부회장님도 곧 질릴 텐데,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가신 건 아닌지 걱정돼서요.”이현은 샴페인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태성문화재단 큐레이터가 그룹 공식 행사에서 남의 사생활을 떠드는 게 본인 경력에 도움이 될까?”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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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남편이니까
리셉션장은 현욱이 끌려나간 뒤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기자들은 방금 벌어진 일을 확인하려 했고, 임원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몇몇 휴대폰 화면에는 ‘태성가 형제 충돌’이라는 속보 알림이 떠 있었다.이현은 자칫 자신이 행사의 중심을 망쳤다는 자책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손목에 남은 통증이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문제를 만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도겸은 홍보팀장에게 짧게 지시했다.“행사 방해에 관한 공식 입장만 내십시오. 이현 씨 이름은 언급하지 말고.”그는 이현의 붉어진 손목을 자신의 손수건으로 감싼 뒤 곧바로 행사장을 나왔다.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이현은 숫자가 내려가는 표시등을 보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괜찮은 손목은 이렇게 붉어지지 않습니다.”“그보다 오늘 일 때문에 부회장님이 공격받을 거예요.”“나중에 이야기하죠.”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짧았다.이현은 그가 화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말을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손을 감싼 손가락은 거칠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도 먼저 주변을 살폈다.분노한 사람의 행동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 도겸은 구급함과 얼음 팩을 가져왔다.이현을 소파에 앉힌 뒤 직접 손목을 살폈다. 손끝은 조심스러웠지만 굳은 턱선에는 아직 분노가 남아 있었다.“뼈에는 이상 없어 보입니다. 통증이 계속되면 병원에 가죠.”“이 정도로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필요 여부는 내일 멍이 든 뒤 판단하겠습니다.”도겸은 손목 위에 천으로 감싼 얼음 팩을 올렸다. 차가운 기운이 번지자 이현이 미세하게 몸을 움츠렸다.그는 곧 압력을 줄이고 손바닥으로 이현의 손가락 끝을 감쌌다.“아프면 말하십시오. 참지 말고.”그 말이 손목이 아니라 다른 상처까지 향하는 것처럼 들렸다.이현은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공개석상에서 현욱 씨를 그렇게 제압하시면 그룹 안에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차 회장님도 가만있지 않을 테고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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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전 약혼자의 비밀
그날 이후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달라졌다.도겸은 여전히 각자의 방을 지켰다. 다만 식탁 건너편에서 마주치는 시선이 이전보다 오래 머물렀고, 이현도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괜히 호흡을 의식했다.소매를 붙잡았던 자신의 손이 밤마다 떠올랐다.그러나 이현은 감정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HJ와 태성의 복합 리조트 합작 법인은 본계약 전 재무 실사를 진행 중이었다. 이현은 전략기획실 팀장 자격으로 태성 측이 제공한 계열사 거래 내역을 검토했다.수백 건의 계약 가운데 유난히 비슷한 이름이 반복됐다.엠씨아트어드바이저리.지난해와 올해만 열세 차례 계약이 체결돼 있었다. 금액은 매번 이사회 보고 기준 바로 아래에서 잘게 나뉘었다. 감사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쪼갠 흔적이었다.태성유통과 태성문화재단에서 ‘공간 브랜딩 자문’과 ‘해외 작가 섭외’ 명목으로 2년간 수십억 원을 지급한 업체였다.문제는 결과물이 없다는 점이었다.보고서는 몇 장짜리 이미지 파일이 전부였고, 세금계산서 발행일과 계약 체결일도 맞지 않았다. 모든 지출 결재선의 마지막에는 차현욱의 전자서명이 있었다.이현은 HJ 준법지원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외부 업체 실재 여부와 특수관계인을 확인해 주세요. 태성 쪽 자료라 접근 범위는 넘지 말고, 공개 등기와 우리 측 거래 자료만 보세요.”한 시간 뒤, 준법지원팀 직원이 회의실로 올라왔다. 그는 출력한 등기부와 거래처 등록 서류를 펼쳤다.“대표는 김수정이라는 사람인데, 태성문화재단에서 민채원 큐레이터와 함께 근무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업체 설립 직후부터 태성 계열 계약만 수주했습니다.”두 시간 뒤 완성된 1차 보고서에는 더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법인 주소는 공유오피스였고 상근 직원도 없었다. 대표자는 민채원과 같은 대학원을 나온 뒤 태성문화재단에서 그녀의 보조 큐레이터로 일했던 인물이었다.설립된 지 두 달 만에 태성 계열사 계약만 연달아 따낸 회사였다.단순한 부실 계약으로 보기 어려웠다.이현은 화면을 확대해 결재 시각까지 확인했다.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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