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채원이 순종하는 법을 배운 건 감금된 지 27일째 되는 날이었다.더는 반항하지 않았다.단식도 그만뒀고, 가끔은 한서준에게 웃어주기까지 했다.처음엔 한서준도 경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정말 체념했다고 믿기 시작했다.“오늘은 뭐 먹고 싶어?”어느 아침, 넥타이를 매던 한서준이 침대 옆에서 물었다.서채원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있었다. 긴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서준 씨가 만든 거.”한서준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미소로 바뀌었다.“좋아.”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듯한 뒷모습이었다.서채원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이불을 걷어냈다.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 숨겨둔 초소형 컴퓨터를 꺼냈다.지난주 한서준의 서재에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빠르게 코드를 입력한 뒤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들겼다.섬의 보안 시스템이 조용히 해킹되고, 암호화된 구조 요청 신호가 외부로 전송됐다.사흘 뒤, 깊은 밤.서채원은 절벽 끝에 서 있었다.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거칠게 흔들었다.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심태현이 사람들을 데리고 도착한 것이다.“누나!”창백한 얼굴로 서채원에게 달려왔다.“나랑 같이 가!”뒤쫓아오는 경호원들을 힐끗 바라본 서채원은 말없이 웃었다.“태현아, 너 고소공포증 있어?”심태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서채원은 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아래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절벽 벽면에는 그녀가 미리 확인해둔 발 디딜 곳이 있었다.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파도가 바위에 세차게 부딪혔다.온몸이 흠뻑 젖은 서채원과 심태현은 힘겹게 해안 위로 기어 올라왔다.“빨리 가자!”심태현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보트 쪽으로 달리려는 순간, 강렬한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한서준이 해안가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수십 명의 경호원이 늘어서
한성 그룹 업무가 너무 많이 밀린 탓에 한서준은 결국 직접 돌아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개인 섬의 황혼, 한서준이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서채원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수평선 너머 마지막 햇빛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내려놓았다.“사모님, 조금이라도 드세요.”서채원은 움직이지 않은 채 물었다.“그 사람 언제 돌아온대요?”“한 대표님께서 회사 일 처리 끝나면 바로...”쨍그랑!유리컵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우유가 바닥에 쏟아져 카펫에 흰 얼룩이 졌다.“전 사모님이 아니에요.”서채원이 차갑게 웃었다.“나가요.”가정부는 겁에 질려 황급히 물러났다.서채원은 몸을 숙여 가장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같은 시간.북강시, 한성 그룹 본사.회의실에서 한서준은 상석에 앉아 임원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하지만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화면에는 어젯밤 받은 CCTV 화면 캡처가 떠 있었다.서채원이 해변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바닷바람에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한 대표님? 이 인수합병 건은...”“연기해.”한마디 한 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차 준비해. 공항으로 갈 거야.”비서가 당황했다.“하지만 이사회가...”“어서.”헬기장.한서준은 전용기가 막 착륙하자마자 곧장 계단을 내려왔다.사흘 동안 못 본 탓에 서채원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한 대표님, 선물 전부 준비됐습니다.”뒤따라오던 비서가 정교한 선물 상자들을 들고 말했다.“말씀하신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랑,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채원이는?”한서준이 말을 끊었다.“안, 안방에 계십니다...”가정부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한서준은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러더니 곧장 별장 안으로 달려갔다.안방.쾅!문이 거칠게 열렸다.서채원은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손목에는 선명한 상처가 나 있었
개인 섬, 새벽.헬리콥터가 섬 중앙 헬기장에 착륙했다.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이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만 남았다.서채원은 한서준의 품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를 세게 밀어냈다.“이건 불법 감금이야.”경멸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바닷바람에 웨딩드레스 자락이 거세게 흔들렸다.“한 대표도 이런 치졸한 짓을 할 줄은 몰랐네.”하지만 한서준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었다.“그래서?”손을 들어 서채원의 뺨을 쓸었다.손끝은 차가웠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올랐다.“채원아, 넌 내 거야. 이번 생엔 절대 다른 남자한테 시집 못 가.”별장 안, 한서준이 그녀를 데리고 섬 전체를 보여줬다.“여기 있는 모든 게 다 네 거야.”통유리창을 열자 짠 바다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다.“정원도, 수영장도, 도서관도... 심지어 저 바다까지.”하지만 서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돌아갈래.”“채원아, 이전 일들은 다 잊어.”한서준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댄 채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돌아선 서채원은 차갑게 웃었다.“한서준, 정신 좀 차려! 스스로에게 좀 솔직해지란 말이야!”순간 온몸이 굳은 한서준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채원아... 모든 걸 예전으로 돌려놓을 거야. 우리 사이도, 너도.”그 뒤로 한서준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잘했다.맨발로 해변을 걸었더니 다음 날 북유럽에서 공수한 부드러운 백사장이 해안 전체에 깔렸다.한밤중 잠에서 깨자 침대 머리맡에는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이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지키고 있는 한서준은 눈가에 아직도 핏발이 서 있었다.무심코 망고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다음 날 망고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섬으로 옮겨와 정원에 심어졌다.서채원도 이런 한서준의 모습을 처음 봤다.다정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며 끝없이 그녀를 감쌌다.그래서 아주 잠깐 흔들렸다.만약 한서준이 예전에
결혼식 전날, 심씨 가문의 개인 저택.서채원은 신부 대기실 화장대 앞에 앉아 웨딩드레스 위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뜻한 창밖 햇살을 맞으며 저택 안에서는 고용인들이 내일 있을 결혼식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그때 누군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누나?”심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한 손에는 따뜻한 장미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를 들고 있었다.몸에 딱 맞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셔츠 깃이 살짝 풀려 있어 우아하면서도 캐주얼한 느낌이 잔뜩 풍겼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아침 거의 안 먹었지?”심태현은 따뜻한 홍차를 그녀 손 옆에 내려놓으며 살짝 난처한 듯 말했다.“주방에서 그러는데 우유도 반 컵밖에 안 마셨다고?”서채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심 대표, 설마 나 혼내려고 온 거야?”“그럴 리가.”심태현이 몸을 숙여 벨벳 상자를 서채원에게 건넸다.“그냥 누나 배고플까 봐.”상자를 열자 안에 정교한 초콜릿 몇 개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예전에 누나가 이 가게 초콜릿 좋아했다는 얘길 들었어.”심태현이 조용히 말했다.“스위스에서 직접 공수했어.”서채원은 잠시 멍해졌다.이런 사소한 취향까지 알아봤을 줄은 몰랐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저택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야?”심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즉시 이어폰을 눌렀다.“보안팀, 무슨 상황이야?”이어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 대표님! 시스템이 해킹당했습니다! 모든 감시 카메라랑 출입 통제가 전부 먹통입니다!”얼굴이 순식간에 굳은 심태현은 돌아서서 서채원에게 말했다.“누나, 여기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빠른 속도로 방을 나간 뒤 복도에서는 심태현의 차가운 명령이 들려왔다.“출구 전부 봉쇄해!”하지만 서채원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스위트룸
“남강시 심씨 가문이랑 북강시 한씨 가문은 원래 서로 왕래도 안 하는데... 저 사람 설마 한 대표 아니야? 왜 온 거지?”하객들의 수군거림이 연회장 안에 퍼졌다.모든 시선이 문 앞에 선 길고 늘씬한 남자에게 쏠렸다.한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슈트는 완벽했지만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서채원과 심태현이 깍지 낀 손에 꽂힌 그의 뜨거운 시선은 마치 두 사람 손을 당장이라도 불태워 버릴 듯했다.“한 대표 눈빛 봐. 서채원 씨만 뚫어져라 보는데, 설마 진짜 신부 뺏으러 온 거야?”심태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서채원을 품 안으로 감쌌다.팔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자 마치 보이지 않는 보호벽이 생긴 듯했다.하지만 서채원은 의외로 평온한 얼굴로 한서준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한 대표가 여긴 웬일이야? 신혼 선물이라도 주러 온 건가?”그 말은 칼처럼 한서준의 가슴을 찔렀다.턱선이 굳어지고 팔의 핏줄이 도드라지더니 쉰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채원아, 나랑 돌아가자.”서채원이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돌아가서 뭐 하게? 계속 임수아 사랑하는 모습 옆에서 구경하라고?”“난 임수아 안 좋아해!”한서준은 거의 으르렁거리듯 외쳤다.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를 울려 퍼지자 장내가 순식간에 뒤집혔다.“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하객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금세 폭발적으로 커졌다.“진짜 신부 뺏으러 온 거였네!”“한 대표, 원래 여자한테 관심도 없다고 했는데, 진짜로 사랑에 빠진 거야? 그런데 하필 심씨 가문 도련님이랑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와, 이거 진짜 피 터지는 삼각관계다...”한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장소 옮겨서 이야기하자.”심태현이 차갑게 웃었다.“한 대표님, 여긴 한 대표님을 환영하지 않아요.”그러자 서채원이 심태현의 손을 가볍게 눌렀다.“괜찮아. 내가 직접 정리할게.”눈살을 찌푸린 심태현은 얼굴에 걱정이 역력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 북강시 요트 파티에서... 누굴 구해줬는지 잊었어?”순간 멈칫한 서채원은 기억이 갑자기 10년 전으로 되돌아갔다.그날 파티에 참석한 서채원은 갑판 끝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물에 빠졌다.주변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서채원은 이미 바다로 뛰어들었다.바닷물은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아이에게 헤엄쳐 간 서채원은 물을 몇 번이나 들이마신 끝에 겨우 육지로 아이를 끌어올렸다.“괜찮아?”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응급처치했다.물을 몇 번 토해낸 뒤 눈을 뜬 소년의 속눈썹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외투를 벗어 떨고 있는 아이 몸에 둘러주며 말했다.“꼬맹이, 다음부터 조심해. 갑판 쪽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서채원의 옷자락을 꽉 붙잡은 소년은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문득 정신을 차린 서채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심태현을 바라봤다.“그때 물에 빠졌던 꼬맹이가... 너였어?”심태현은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그거 알아? 나, 널 10년 동안 찾아다녔어.”서채원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그때 넌 겨우 열두 살이었고, 난 열여섯이었잖아. 나 너보다 네 살 많아.”그러면서 눈썹을 치켜들었다.“난 그때 연애가 뭔지, 어떤 감정인지도 몰랐는데, 넌 첫눈에 나한테 반한 거야?”심태현이 진지하면서도 맑은 눈빛으로 서채원을 바라봤다.“누나, 솔직히 말해도 돼?”“말해봐.”“누나가 너무 눈부셨거든.”심태현은 목소리까지도 아주 진지했다.“태양 같았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서채원은 순간 멍해졌다.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하지만 심태현이 그렇게 말하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어쩌면 심태현의 눈이 너무 맑아서일지도 모른다.불순물 하나 없이, 마치 자신의 마음 전부를 서채원 앞에 내놓는 사람 같았다.“누나.”심태현이 갑자기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