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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닿지 못한 너에게

끝내 닿지 못한 너에게

By:  몽아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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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채원은 유명한 마성의 여인이었다. 붉은 입술은 늘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 끝은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한서준은 재벌가 최고의 후계자였다.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한 존재, 금욕적이고 절제된 남자였다.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극과 극인 두 사람이 깊은 밤 마이바흐 뒷좌석에서 뜨겁게 얽히고, 자선 만찬의 화장실에서 미친 듯 서로를 탐하고, 개인 와이너리의 통유리창 앞에서 부둥켜안고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의 관계가 끝난 뒤, 욕실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서채원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서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강시 그 곧 죽는다는 재벌 집 아들한테 액막이 결혼을 해줄 수는 있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감추지 못한 기쁨이 터져 나왔다. “말해! 네가 결혼만 해준다면 무슨 조건이든 아빠가 다 들어주마!”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할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서채원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켜 옷을 입으려다, 문득 한서준이 옆에 둔 노트북을 발견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가장 최근 메시지는 ‘수아’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여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서준 오빠, 천둥이 쳐서 너무 무서워...] 서채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한서준이 걸어 나왔다. 물방울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고, 셔츠 단추 두 개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금욕적인 분위기 속에 나른한 섹시함이 배어 있었다.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먼저 갈게.” 그는 외투를 집어 들며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채원이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 “회사 일이야, 아니면 첫사랑 만나러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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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한서준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서채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부드러운 카펫 위를 밟았다.

짙은 눈빛으로 서채원을 바라보던 한서준은 엄지로 빨갛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얌전히 있어. 말썽 피우지 말고.”

문이 닫히는 순간, 서채원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차를 불러 한서준의 뒤를 따라갔다.

30분 후, 차는 호텔 앞에 멈췄다. 빗속 너머로 서채원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임수아가 호텔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한서준은 빠르게 다가가 자신의 재킷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밖이 추운데 왜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온 거야?”

한서준의 행동은 수백 번 넘게 반복해 온 습관처럼 너무도 익숙했다.

차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서채원은 점차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서준이 임수아를 소중히 안아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서채원은 서경진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다. 또 한 번 서경진의 머리를 깨뜨리자, 그는 자기 딸을 친구 아들의 곁으로 보내 버렸다. 버릇없는 재벌가 아가씨 성격 좀 고쳐놓으라면서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 한서준은 한성 그룹 최상층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물론 서채원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사고를 쳤다.

첫 출근 날, 일부러 한서준의 수억 원짜리 맞춤 정장 위에 커피를 쏟아버렸다.

한서준은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캐시미어야. 비용은 서씨 가문 앞으로 청구하지.”

둘째 날, 회의 자료를 일부러 문서 세단기에 넣어버렸다.

하지만 한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즉석에서 모든 내용을 그대로 읊어내며 회의실의 임원들을 놀라게 했다.

셋째 날, 한서준의 커피에 약을 탔다. 그리고 망가진 모습을 찍어 협박하려고 카메라까지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채원 본인이 한서준의 해독제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온몸이 쑤시는 상태로 눈을 뜬 서채원은 분노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한서준은 그녀를 통유리창 앞에 눌렀다.

“원아.”

그러고는 서채원의 귓불을 깨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얌전히 있어.”

단 한 번의 그 호칭에 서채원은 완전히 무너졌다.

엄마가 죽은 뒤로, 그렇게 자신을 불러준 사람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서채원이 사고를 칠 때마다 한서준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남들은 한서준이 그녀를 혼내는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책상 위에 눕혀 벌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점점 이 관계에 중독되어 갔다.

한서준이 이 부분에서 너무 뛰어나서였을까? 아니면 서채원이 너무 외로웠던 걸까?

답을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분명한 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서준의 생일날, 서채원은 종일 별장을 꾸몄다.

장미꽃, 촛불, 음악. 심지어 청혼 반지까지 준비했다.

밤새도록 한서준을 기다렸지만, 촛불이 다 타고 장미가 시들 때까지도 그는 오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휴대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재벌 회장, 한밤중 첫사랑 공항 마중.]

사진 속 한서준은 하얀 원피스 차림의 여자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은 채 차에 태우고 있었다. 다정한 그의 눈빛이 더욱 눈부셨다.

댓글 창은 이미 폭발 상태였다.

[아아아, 재벌 남주와 청순 여주 조합 미쳤다.]

[헐! 저거 한서준이랑 임수아 아니야? 예전에 학교 공식 커플이었잖아!]

[같은 학교 출신이야! 내가 증인임! 한서준은 누구한테나 차가웠는데 임수아한테만 웃었음! 임수아가 몸이 약해서 해외 요양만 안 갔어도 둘은 진작 결혼했을 듯.]

휴대폰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채원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한서준의 마음속에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면 나는 대체 뭐였을까? 필요할 때마다 불려 가는 잠자리 상대?’

떨리는 손으로 한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마디 대답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마지막 통화 연결음마저 끊긴 뒤, 서채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서준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어붙었다.

서재 안은 임수아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졸업사진, 여행 사진, 심지어 잠든 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까지 있었다.

늘 차갑고 절제되어 있던 한서준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 답을 듣는 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채원은 순간 웃음이 났다. 텅 빈 방 안에 그 웃음소리는 유난히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웃다 보니 뜨거운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 나와 그녀의 날렵한 턱선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별장 안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다음 날 돌아온 한서준은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도 그저 사람을 불러 치우라고만 할 뿐 서채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런 짓을 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서채원은 고용인들이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청혼 반지를 쓰레기처럼 쓸어 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서채원이 그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뭘 준비했는지 한서준은 전혀 몰랐다.

반지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던 순간, 서채원이 더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도 몰랐다.

“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의 목소리에 서채원은 현실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요.”

천천히 눈을 뜨며 차갑게 말했다.

“서씨 가문으로요.”

서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서경진이 곧바로 다가왔다.

“채원아, 남강시로 시집가겠다는 말 진심이냐?”

계단 위에서는 계모도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이에요.”

서채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고 했죠?”

“무슨 조건인데? 빨리 말해!”

“당신이랑...”

서채원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

“부녀 관계를 끊겠어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경진의 얼굴이 확 변했다.

“제정신이야?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서채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결혼 생활 중 바람을 피운 사람은 아빠 자격 따위 없어요. 저 여자를 곁에 두려고 우리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 잊었어요? 엄마가 뛰어내린 그날부터 저한테 아빠라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말을 마친 뒤 안색이 새파래진 서경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남강시 그 곧 죽는다는 도련님 집안에서 액막이 신부를 찾는다고요? 10조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지난 석 달 동안 계속 절 설득했잖아요. 제가 안 한다고 하면 결국 묶어서라도 보내려 했던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관계를 끊든 말든 무슨 차이가 있죠?”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 애첩 딸도 데려와서 서씨 가문 딸 자리 주면 되겠네요.”

서경진은 분에 떨며 말했다.

“좋아! 끊자, 끊어! 하지만 남강시 그 재벌 집 도련님은 이번 달도 못 넘긴다는 말이 있어. 넌 반드시 이번 달 안에 시집가야 해!”

그러고는 쌀쌀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하영의 딸은 이틀 전에 이미 귀국했어. 계속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네 자리를 내주겠다면 내일부터 바로 들어와 살게 할 거야.”

서채원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심장이 아프게 떨렸다.

“남의 딸은 애지중지하면서 자기 친딸은 사랑하지 않는 아빠라니. 정말 당신 같은 사람도 드물겠네요.”

몸을 돌리려 하자 계모 임하영이 위선적인 얼굴로 그녀를 막아섰다.

“채원아, 아무리 그래도 아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서채원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녀의 눈에는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

“왜요? 제가 시집가서 이 집을 떠나면 이제야 정실부인 행세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면서 한 걸음씩 임하영에게 다가갔다.

“임하영 씨, 똑똑히 들어요. 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해도 당신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불륜녀라는 사실은 절대 안 바뀌어요! 당신 딸이 서씨 가문 딸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엄마가 상간녀였다는 오명까지 지울 순 없어요!”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린 임하영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서채원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내딛는 걸음마다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뒤, 모든 힘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무릎 사이에 깊숙이 묻었다.

다음 날 아침, 아래층에서는 시끌벅적한 짐 옮기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서채원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사람 잠도 못 자게 할 거예요?”

집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가씨... 둘째 아가씨가 들어오셔서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모습이 계단 입구에 나타났다.

임수아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연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서채원은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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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한서준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뭐라고?”“아무것도 아니야.”서채원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와 부드러운 카펫 위를 밟았다.짙은 눈빛으로 서채원을 바라보던 한서준은 엄지로 빨갛게 부은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얌전히 있어. 말썽 피우지 말고.”문이 닫히는 순간, 서채원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바로 차를 불러 한서준의 뒤를 따라갔다.30분 후, 차는 호텔 앞에 멈췄다. 빗속 너머로 서채원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임수아가 호텔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한서준은 빠르게 다가가 자신의 재킷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밖이 추운데 왜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온 거야?”한서준의 행동은 수백 번 넘게 반복해 온 습관처럼 너무도 익숙했다.차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서채원은 점차 손에 힘이 들어갔다.한서준이 임수아를 소중히 안아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그때 서채원은 서경진과의 사이가 최악이었다. 또 한 번 서경진의 머리를 깨뜨리자, 그는 자기 딸을 친구 아들의 곁으로 보내 버렸다. 버릇없는 재벌가 아가씨 성격 좀 고쳐놓으라면서 말이다.처음 만났을 때 한서준은 한성 그룹 최상층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물론 서채원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사고를 쳤다.첫 출근 날, 일부러 한서준의 수억 원짜리 맞춤 정장 위에 커피를 쏟아버렸다.한서준은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캐시미어야. 비용은 서씨 가문 앞으로 청구하지.”둘째 날, 회의 자료를 일부러 문서 세단기에 넣어버렸다.하지만 한서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즉석에서 모든 내용을 그대로 읊어내며 회의실의 임원들을 놀라게 했다.셋째 날, 한서준의 커피에 약을 탔다. 그리고 망가진 모습을 찍어 협박하려고 카메라까지 준비해 두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서채원 본인이 한서준의 해독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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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서채원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요양 중’인 계모의 딸이 한서준의 첫사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정말 하늘이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친 것만 같았다.바로 그때 임수아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언니, 미안. 시끄럽게 해서...”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채원은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서채원! 너 정말 기본적인 예의도 없냐!”밖에서 서경진이 고함쳤다.“네 방 비워! 수아가 네 방 마음에 들어 하니까 이제부터 그 방은 수아 방이야!”피식 코웃음을 친 서채원은 곧장 옷장을 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서는 간간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 언니 화난 거 아니죠?”임수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러웠다.“신경 쓰지 마. 어릴 때부터 버릇없이 자라서 그래.”“그래도...”“걱정하지 마. 곧 남강시로 시집갈 거니까. 앞으로 이 집은 너랑 네 엄마 거야.”짐을 싸던 손이 살짝 멈칫한 서채원은 이내 더 차갑게 비웃었다.그러고는 월말 남강시행 비행기 표를 재빨리 예약한 뒤 계속 짐을 정리했다.30분 후,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왔다.거실에는 서경진, 임하영, 임수아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과일과 디저트를 가득 놓은 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목한 가족 같았다.하지만 서채원은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밖으로 향했다.“거기 서!”서경진이 날카롭게 외쳤다.“또 무슨 짓이냐? 네가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걱정하지 마세요. 약속한 건 지킬 테니까.”서채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다만 앞으로 보름 동안은 역겨워서 여기 못 있겠어요.”곧장 도시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가 스위트룸을 잡았다.그 후 서채원은 미친 듯 쇼핑을 시작했다.가장 비싼 웨딩드레스를 사고, 경매장에서 거액으로 골동 보석을 낙찰받아 혼수로 준비했다.비록 액막이 결혼이라 해도, 누구보다 화려하게 시집가고 싶었다.가방 속 휴대폰이 계속 진동했지만, 쥬얼리 샵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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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 말에 서채원의 코끝이 시큰해졌다.예전에도 서경진과 싸우고 집을 뛰쳐나오면, 한서준은 늘 차를 몰고 도시 전체를 뒤져 그녀를 찾곤 했다.그러고는 그녀를 업고 돌아갔다.“또 왜 이러는 거야?”한서준은 그때도 늘 이렇게 말했다.등에 업힌 서채원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차가운 삼나무 향을 맡으며 순진한 생각에 빠졌다.어쩌면 이 남자도 자신을 조금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지금 생각해 보면 한서준보다 더 나쁜 남자는 없었다.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와 관계를 이어갔고, 심지어 끝난 뒤에는 서재로 돌아가 임수아의 사진을 바라보며 애틋해 했으니 말이다.사실 서채원은 자신이 대체 어디서 임수아에게 밀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집안, 외모, 몸매,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그 많은 사람 중 왜 하필 임수아였을까... 왜 꼭 그 여자였을까...’“놔!”눈시울이 붉어진 서채원은 한서준의 손을 세게 물어버렸다.그러나 한서준은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별장으로 향했다.별장에 도착한 후에는 그녀의 캐리어를 직접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예전처럼 해.”소매 단추를 풀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말투에는 반항 따위 절대 허락하지 않을 듯한 기세가 다분했다.“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다시 들 때까지 여기 있어.”서채원은 현관에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보름만 있을 거야. 보름 후엔 여기 떠날 거고, 집세도 줄게. 더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마.”“더는 귀찮게 안 한다고?”한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네가 그럴 수 있겠어?”그 말은 예리한 칼처럼 가슴에 박혀 서채원의 심장을 찔렀다.사실 한서준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처음에 그렇게나 으르렁대던 서채원이, 이제는 한서준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한서준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걸...그렇다면 한서준은?마음속에 첫사랑을 품은 채, 서채원이 자기에게 빠져드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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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룸 안은 술잔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서채원은 구석에 앉아 사람들이 한서준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서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수아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좇고 있었다.임수아가 음료를 집으려 하면 먼저 병뚜껑을 열어주고, 치맛자락에 술이 살짝 튀면 바로 손수건을 건넸으며, 작게 기침만 해도 다른 사람 상관하지 않고 에어컨 온도를 높였다.그런 세심한 다정함은 서채원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술잔만 비웠다.무딘 칼이 심장을 천천히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프고 온몸이 떨렸다.지난 1년 동안 그녀와 한서준은 침대 위의 파트너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가장 달콤했던 시절조차 한서준의 얼굴에서 단 한 번도 감정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병 돌리기 걸렸네! 한 대표 차례야!”갑자기 누군가가 떠들며 분위기를 띄웠다.사람들이 웃으며 태블릿을 내밀었다.“한 대표가 업계 최고 금욕남이라는 소문이 있으니까 우리도 너무 어렵게는 안 할게. 밸런스 게임 한 번 하자. 빠른 속도로 설레게 하는 사람 고르기!”첫 번째 사진은 톱 여배우와 임수아였다.힐끗 본 한서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수아.”순간 룸 안이 환호성으로 들끓었다.임수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입꼬리는 어느새 귀에 걸렸다.서채원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사진은 계속 바뀌었지만, 한서준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임수아를 선택했다.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서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몇 걸음 걷기도 전에 뒤에서 더 큰 함성이 터졌다.뒤돌아보자 태블릿 화면에는 그녀와 임수아의 사진이 나란히 떠 있었다.“와!”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이번 건 재밌네! 서채원은 업계 최고 미녀잖아. 웬만한 여배우들도 비교가 안 되는데 한 대표가 또 임수아를 고르면 그건 진짜 다른 뜻이 있는 거잖아...”모든 시선이 한서준에게 쏠렸다.그런데 이번엔 드물게도 한서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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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서채원은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한서준이 임수아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처음 만났을 때, 금테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서로 날을 세우던 시절, 한서준의 커피에 소금을 타 넣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 마셔버렸다.책상 위, 한서준의 몸에 처음으로 눌렸을 때, 너무 아파서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그런 날들 속에서 점점 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생일날 별장 전체를 꾸몄지만 돌아온 건 그와 임수아의 열애설이었다...또 한 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혼자 5킬로미터를 걸어 엄마 묘지에 갔었다.하이힐에 발뒤꿈치가 다 까져 피 물집이 가득한 것도 모른 채 엄마 곁에 가만히 서 있다. 그런데 한서준이 결국 그녀를 찾아냈다.말없이 그녀의 하이힐을 벗겨 손에 들었다. 한 손엔 신발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날 한서준의 등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엄마가 떠난 뒤, 드디어 또다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주는 사람이 생겼다고.하지만 한서준이 임수아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에 기억 속 모든 장면이 파편처럼 흩어져 버렸다....삐... 삐... 삐...의료 장비의 기계 소리가 서채원을 현실로 끌어당겼다.천천히 눈을 떴을 때 옆 병실에서 임수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내 잘못이야. 길에서 언니랑 싸우지만 않았어도... 난 그냥 언니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던 건데... 서준 오빠, 왜 날 먼저 구했어? 언니가 알면 분명 화낼 텐데...”한서준은 손을 들어 임수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네 잘못이 아니야.”한서준의 목소리는 너무도 다정했다.서채원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투였다.“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널 먼저 구했을 거야.”그러고는 조용히 한마디 했다.“넌 몸이 약하니까 더 다치면 안 되잖아.”잠시 후 한참 침묵하다가 덧붙였다.“게다가, 걔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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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채원은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왜 아무도 안 지키고 있어요? 피가 역류했잖아요! 큰일 날 뻔했다고요!”서채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그제야 손등이 심하게 부어오른 걸 발견했다.휴대폰을 확인하니 벌써 7시간이 지나 있었다.그런데도 한서준은 돌아오지 않았다.“아가씨, 그 엄청 잘생긴 남자친구분은 어디 가셨어요?”간호사가 약을 갈며 물었다.“링거 맞을 때는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해요. 아까 정말 위험했는데.”서채원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말했다.“그 사람... 제 남자친구 아니에요.”혼자 벽을 짚고 병실을 걸어 나갔다.하지만 복도에서 들려오는 대화들이 바늘처럼 고막을 찔렀다.“임수아 씨 진짜 너무 행복하지 않아요? 의붓아빠도 저렇게 잘해주는데 남자친구까지 미친 듯 잘생겼잖아요!”“듣자 하니까 그 남자친구가 VIP 병동 한 층을 통째로 빌렸대요. 해외 전문의까지 불러서 회진하게 하고. 종일 곁에서 한 발짝도 안 떨어졌다던데요? 의붓아빠랑 남자친구 둘 다 완전 공주처럼 떠받드는 거죠. 임수아 씨는 전생에 나라, 아니 지구를 구했나 봐요...”서채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 병실 앞까지 걸어갔다.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한서준이 몸을 숙여 임수아의 수액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이 보였다.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조절기를 부드럽게 돌리고 있었다.서경진은 침대 옆에 앉아 임수아를 위해 사과를 깎고 있었다.길게 이어진 사과 껍질을 버리고 곱게 자른 사과 조각을 직접 하나씩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그 모습에 숨이 턱 막힌 서채원은 눈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흘러내렸다.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지며 눈시울이 따갑게 아팠다.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서채원.”텅 빈 복도를 향해 스스로에게 말했다.“누구 보여주려고 우는 건데? 널 안쓰러워해 줄 사람? 아무도 없어. 울지 마.”허리를 곧게 편 뒤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씩씩하게 걸어갔다.너무 힘을 줘 움켜쥔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그 후 며칠 동안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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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은 서채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면의 경매대를 바라봤다.경매가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한참 후 경매사가 벨벳 트레이 위 붉은 천을 걷어내자 서채원이 그토록 찾던 진주 목걸이가 스포트라이트 아래 은은한 빛을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동공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눈빛이 흔들렸다.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서채원의 엄마는 늘 그 목걸이를 하고 연회에 참석하곤 했다.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은 진주가 우아한 걸음에 따라 살짝살짝 흔들리던 모습... 마치 부드러운 달빛 같았다.“그렇게 좋아?”한서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서채원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패들을 들었다.“100억.”“120억.”달콤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임수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도 저 목걸이 정말 마음에 들어. 경매는 원래 최고가 낸 사람이 가져가는 거잖아? 괜찮지?”서채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160억.”“200억.”“400억.”“600억.”...가격은 금방 천억까지 치솟았다.서채원이 혼수품을 처분해 마련한 돈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임수아는 여전히 여유롭게 패들을 들며 얼굴에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천억, 한 번.”경매사가 서채원을 바라봤다.“서채원 씨, 더 부르시겠습니까?”서채원은 목이 꽉 막혔다.살면서 단 한 번도, 목걸이 하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고개 숙일 날이 올 줄은 몰랐다.“네.”힘겹게 한 글자를 내뱉고는 몸을 돌려 한서준의 소매를 붙잡았다.“서준 씨, 돈 좀 빌려줘...”목소리마저 떨렸다.“저건 우리 엄마 유품이야. 꼭 가져야 해.”한서준은 분명히 놀란 듯했다.늘 자존심 강하고 화려하던 서채원이 이렇게까지 비굴해진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부탁이야.”서채원은 눈시울을 붉힌 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서준의 손이 양복 안주머니로 향했다.“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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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처절한 비명이 연회장 전체에 울렸다.임수아의 손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온 피가 서채원의 새하얀 치맛자락에 튀자 마치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하지만 서채원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차가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안 좋은 모습 보여드렸네요. 우리 엄마 일찍 돌아가셔서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원한이 생기면...”칼을 뽑자 피가 얼굴 위로 튀었다.“그 자리에서 바로 갚아요.”임수아의 울음소리가 경매장 전체를 뒤덮었지만, 서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내던진 뒤 돌아섰다.문 앞까지 갔을 때 한서준이 갑자기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듯, 손에는 담요와 핫팩, 흑설탕 음료가 들려 있었다.서채원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수아를 위해 이런 간식거리들을 사러 갔던 거였다.“제정신이야?”한서준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고작 목걸이 하나 때문에 사람을 찔러? 마음에 안 드는 짓 더 하면 죽이기라도 할 거야?”손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하지만 서채원은 고통을 참으며 핏발이 선 눈으로 한서준을 바라봤다.“그 여자가 무슨 짓 했는지는 안 물어봐? 걔가 우리 엄마 목걸이를...”“그 목걸이를 개 먹이로 줬다고 해도 사람을 찌르면 안 되는 거야!”한서준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그 말은 칼처럼 서채원의 심장을 꿰뚫었다.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그래서? 이미 찔렀는데 어떡하지? 한 대표, 이번엔 어떻게 할 건데? 나야말로 궁금하네.”“이젠 내가 널 어떻게 할 수가 없어.”한서준이 냉랭하게 말했다.“경찰서로 보내. 고의 상해죄로 며칠 구치소에 있어.”그 말에 서채원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 말이 한서준의 입에서 나왔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임수아 때문에 나를 감옥에 넣겠다고?’입안에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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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채원은 말없이 천장만 바라봤다.그 모습에 한서준의 가슴속에서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간호사가 급히 들어왔다.“한 대표님, 임수아 씨가 또 아프다고 하세요...”“혼자 잘 생각해 봐.”한서준은 몸을 돌려 나갔다.“다시는 사고 치지 말고.”그 후 서채원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임수아는 매일 한서준이 자신을 돌봐주는 사진을 보내왔지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퇴원하는 날, 임수아가 직접 병실로 찾아왔다.“언니는 3일 만에 퇴원하네?”그러면서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흔들었다.“언니 칼 한 번에 내가 얼마나 오래 입원해야 하는지 알아? 서준 오빠가 해외 전문가들까지 거액 들여 부르지 않았으면 내 손 진작 망가졌을 거야.”“넌 당해도 싸.”서채원이 차갑게 말하자 임수아가 갑자기 웃었다.“서채원,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해? 그렇게 좋아하는 서준 오빠가 직접 구치소까지 보내줬는데 기분이 어때?”그러더니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죽고 싶을 만큼 괴롭지?”서채원은 그제야 임수아에게 눈길을 돌렸다.“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별건 아니고, 그냥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주려고.”임수아가 침대 옆에 앉았다.“그거 모르지? 나랑 서준 오빠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어. 그때 학교 여자애들 전부 오빠 좋아했는데, 서준 오빠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붕대를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나만 빼고. 내가 커피에 설탕 안 넣는 것도 기억했고, 비 오는 날엔 항상 우산 하나 더 챙겼고, 학생회 행사 때도 내가 건네는 물만 받았어. 전교생 앞에서 발표할 때도 늘 내가 앉은 방향만 봤고. 여자애들이 질투해서 미칠 정도였는데, 오빠는 나한테만 웃었어.”“우리가 이제 막 서로 마음 확인하려던 때, 내가 오빠를 구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그래서 해외로 요양 가야 했고. 그래도 그동안 계속 연락은 하고 있었어.”서채원은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다 내가 서준 오빠한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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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서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서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다신 연락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서경진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부녀 관계 단절 합의서는 이미 보냈다. 이제 곧 월말이니까 오늘이든 내일이든 꼭 남강시로 가야 해!”“하나만 물어볼게요.”서채원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처음에 절 한서준한테 맡긴 거, 아빠였어요? 아니면 그 사람이 먼저 원한 거예요?”“그걸 왜 물어?”“말해요!”서경진은 잠시 침묵했다.“한서준이었어. 성남 프로젝트랑 바꿨지. 어차피 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는데 서로 좋았잖아.”그 순간 서채원은 손에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휴대폰 화면도 그녀의 마음처럼 산산이 조각났다.갑자기 큰 소리로 웃자 텅 빈 별장 안에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가슴이 찢어질 듯 웃었지만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한서준... 진짜 대단하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채원은 눈물을 닦아낸 뒤 방으로 들어가 이미 정리해 둔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현관으로 향했다.걸음마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팠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춘 뒤 주머니 속 라이터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한서준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라이터 표면에는 그가 직접 새긴 문구가 있었다.[채원에게.]피식 웃은 뒤 망설임 없이 라이터 불을 켜 커튼 쪽으로 던졌다.훅!불길이 순식간에 치솟으며 거실 전체를 집어삼켰다.서채원은 별장 밖에 서서 조용히 불길을 바라봤다.두 사람이 서로 얽혀 누웠던 소파, 입 맞췄던 식탁, 그리고...한때 순진하게도, 이 남자 역시 잠시나마 자신에게 마음이 흔들렸다고 믿었던 그 순간이 깃든 침대까지 모든 것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한서준이 돌아온 건 한 시간 뒤였다.검은 승용차가 별장 앞에 급정거하자 타이어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렸다.차 문을 연 그의 눈에 하늘까지 치솟는 화염과, 캐리어 위에 앉아 있는 서채원의 모습이 보였다.서채원은 타오르는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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