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조리원을 나선 건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나오기 직전까지 직원은 단미에게 예약금을 걸고 프로그램을 확정하라고 권했다. 단미가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호건 쪽으로 눈을 돌렸다.“지금 이 프로그램이 행사 중이거든요. 오늘 예약금만 넣으시면 숙련된 관리사가 진행하는 프리미엄 관리 두 가지를 무료로 받으실 수 있어요.”“아기 수영장 1년 이용권도 드리고, 프로그램 가격도 할인해 드립니다. 아버님,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생각해 보라고?’‘뭘 생각해 보라는 거야.’단미가 예약하지 않겠다니 호건으로서는 바라던 바였다.“집에 가서 상의하고 결정하겠습니다.” 호건이 담담하게 말했다.“네, 그러셔도 되죠.”직원이 단미를 보며 마지막으로 권했다. “그럼 어머님, 카카오톡 친구 추가라도 해 두실까요? 나중에 궁금한 점 생기시면 언제든 연락 주셔도 돼요.”단미가 이번에는 정말로 발을 멈추자 호건의 눈가가 움찔했다.연락처를 주고받았다가 직원의 설득에 넘어갈까 봐 호건은 단미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직원에게는 한마디만 남겼다.“필요하면 다시 오겠습니다.”네 사람이 떠나자 직원은 큰 매출을 눈앞에서 놓친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동료 직원 하나가 다가와 멀어지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옷차림만 봐도 다들 돈 좀 있어 보이는데. 기본 프로그램도 예약 안 했어?”단미를 데리고 부지런히 멀어지는 호건을 보며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기 아빠가 짠돌이인가 봐. 아내랑 아기한테 돈 쓰는 게 그렇게 아까운가.”“아내가 계약금이라도 쓸까 봐 연락처도 못 남기게 하잖아.”동료가 혀를 찼다. “쯧쯧, 키도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던데. 사람이 그렇게 쩨쩨해?”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단미 왼쪽에 선 여린이 물었다. “여기 시설 괜찮아 보이던데. 마음에 안 들어?”“난 지난번에 봤던 데가 더 좋아.” 단미가 말했다. “거긴 건물을 따로 쓰잖아. 바람 막아 주는 유리 온실도 있고. 조리하는 동안 언제든 아기 유모차에 태
호건이 입술을 달싹였다. 단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한테 다른 사람은 없어. 내 아내는 너 하나면 돼.’그러나 밀크티 한 잔을 든 준호와 여린이 가게에서 나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건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그래, 그만두자.’애초에 이런 말은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서 진지하게 전해야 했다.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쇼핑몰에서 불쑥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이렇게 말하면 성의 없게 느껴지겠지.’단미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 여기지 않을 것 같았다.그사이 여린과 준호가 앞에 다가왔다.준호가 빨대를 꽂아 밀크티를 건네자 여린이 받아 한 모금 마셨다.“음, 이번에 새로 나온 거 괜찮네. 차 향기도 진하다. 너도 한 입 마셔 볼래?”여린이 단미 앞으로 밀크티를 내밀었다.단미는 고개를 저으며 컵을 다시 여린의 입가로 밀어주었다. “난 됐어, 너 마셔.”“가자.”단미는 웃으며 여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방금 나눈 대화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옆에 선 호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산후조리원은 쇼핑몰의 맨 위 두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규모도 상당했고 입구부터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딱 봐도 고가의 서비스를 내세우는 곳이었다.훤칠한 젊은 남녀 네 사람이 들어서자 상담 직원이 얼른 다가와 반갑게 맞았다.경험 많은 직원의 눈은 곧 넉넉한 원피스를 입은 단미와 그 곁을 줄곧 지키는 잘생긴 남자에게 향했다.“두 분이 아기 부모님이신가요?”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호건의 표정이 그 호칭 하나에 환해졌다. “네, 맞습니다.”얼마나 확실하게 대답하는지, 막 입을 열려던 단미는 할 말을 잃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직원이 네 사람을 VIP 상담실로 안내했다.자리에 앉자마자 다른 직원이 다가와 마실 것을 물었다.밀크티를 마시던 여린은 괜찮다며 사양했고, 두 남자는 커피를 주문했다. 호건은 단미 몫으로 대추차를 부탁했다.테이블에는 조리원 안내 책자가 놓여 있었다. 단미는 앉자마
“아이 낳고 조리원에 들어가려고?”“그럼 어떻게 하겠어?” 단미가 의아한 눈으로 호건을 바라보았다.함께 살기로 한 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였다. 출산하고 나면 단미는 호건의 집을 떠나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 생각이었다.첫 출산이라 아는 것도 없고, 곁에서 조언하며 돌봐 줄 친정 엄마도 없었다. 여러모로 따져 봐도 단미와 아기 모두를 위해 조리원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었다.호건이 아이 문제에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단미는 모처럼 차근차근 설명했다. “걱정 마. 요즘 조리원 서비스가 다 잘돼 있어. 특히 아기에게 필요한 걸 빠짐없이 챙겨 주고, 전문 신생아 관리사랑 간호사까지 있어서 실시간으로 아기를 돌봐 준대. 아기는 잘 보살펴 줄 거야.”아이를 위해 이미 이것저것 꼼꼼히 알아본 단미의 말을 듣자 호건은 마음이 더 쓰였다.“그런 일까지 네가 다 알아보고 애쓸 필요 없어. 아빠로서 내가 할 일이잖아.”호건이 한 걸음 다가가 단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사실 병원도 산부인과 선생님도 가장 좋은 곳으로 알아 둔 지 오래야. 출산하고 네 몸 회복하는 것까지 전문 의료진이 맡아 줄 거고, 아기도 마찬가지야.”“그러니까 걱정할 것도, 신경 쓸 것도 없어. 넌 몸 잘 챙기면서 편하게 출산 준비만 하면 돼.”단미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호건은 필요한 준비를 빠짐없이 해 두었다. 다만 아직 임신 초기라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너무 일찍 출산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혹시 내가 알아본 게 마음에 안 들면 네 생각을 말해 줘. 네가 좋다는 곳으로, 원하는 방식대로 다시 준비할게. 그러면 될까?”호건의 붉어진 눈을 마주한 단미는 가슴 한구석이 말로 설명하기 어렵게 답답해졌다.단미는 붙잡힌 손을 빼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담긴 호건의 감정을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당신... 또 선 넘네.”“나한테 그렇게까지 잘해 줄 필요 없다고 했잖아.”단미는 호건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더구나 출산 직후에는 몸과 마음이 가
여린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제 지호건은 단미를 졸졸 따라다니는 신세잖아. 둘 중 누가 더 아쉬운지는 뻔해, 당연히 지호건이지.”단미는 가까이 오기도 전에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여린과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 앞에 다가선 단미가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준호가 대답했다. “아니, 우리도 방금 왔어.”여린의 시선이 호건에게로 옮겨 갔다. “웬일이세요? 지 대표처럼 바쁘신 분이 쇼핑도 다 나오시고...”비꼬는 말인 줄 알면서도 호건은 여린에게 예의를 갖춘 미소로 답했다. “마침 오늘은 시간이 나서요.”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원치 않았던 단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여기 새로 산후조리원 생겼다고 했지? 거기부터 둘러보고 쇼핑할까?”‘산후조리원?’호건은 가슴이 철렁해 단미를 돌아보았다.“가자.”여린이 단미의 팔짱을 끼며 앞장섰다. “미리 좀 알아봤는데 시설이 꽤 괜찮대. 안내 책자도 봤거든? 지난번에 갔던 데보다 좋아 보이더라...”‘지난번에 갔던 데라니?’‘벌써 아이 낳고 들어갈 조리원을 알아보고 있었어?’정작 호건에게는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였다.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호건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지는 단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가슴 안쪽부터 아픔이 번져 왔다.준호가 호건을 한번 보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시죠, 지 대표.”단미가 막 호건과 결혼했을 무렵만 해도 준호는 호건에게 꽤 살가웠다. 처음 정식으로 인사하던 날부터 한 식구처럼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했었다. “앞으로 그냥 준호라고 불러요. 단미도 그렇게 부르니까.”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둘 다 사업을 하는 데다 단미라는 공통분모도 있어 대화가 끊길 일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여린처럼 대놓고 호건을 밀어내지는 않아도 준호 역시 예전 같은 친근함은 보이지 않았다.소중한 친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호건이 아무리 강울시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인물이라 해도 준호가 호건의
“안 곤란해. 조금도.”다급하게 다시 희고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걱정 마. 어머니도 할머니도 다신 안 오실 거야. 억지로 맞출 필요 없어. 앞으로 집에서는 네 뜻대로 할게.”“이혼한 건 알리지 말자. 너도 나갈 생각은 하지 마.”검은 눈에 긴장과 애원이 담겼다. 호건은 눈앞에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 듯 단미의 손을 꽉 잡았다.“알았어. 당신 좋을 대로 해.”그때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단미는 그 틈에 손을 빼고 핸드폰을 꺼냈다.“여린아, 나 시간 돼... 새로 생겼다고?”“좋아. 준호도 시간 있어?”“응, 그럼 이따 쇼핑몰에서 봐.”친구와 이야기하는 단미의 눈과 얼굴이 생기 있게 변했다. 자신에게는 무심하면서 친구에게는 다정한 모습을 본 호건은 쓸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지금 나가려고?”“응.”단미가 핸드폰을 넣으며 말했다.“여린이랑 준호가 쇼핑하자고 해서.”‘쇼핑?’“나도 갈게.”거의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단미가 놀라 올려다보았다.‘이 사람이... 왜?’잘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했다.“여린이랑 준호하고 쇼핑하러 간다고.”지 대표의 사전에는 쇼핑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단미가 바로 물었다.“대낮인데 일 안 해도 돼?”“오늘 오후에는 시간 있어.”호건이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다정함이 묻었다.“너랑 같이 갈 수 있어.”“아기랑도...”거절할까 봐 급히 아이를 구실로 더했다.“당신이 그러지...”“지난번에 윤민재한테 해코지당할 뻔한 뒤로 작은아버님이 전화해서 당부하셨어.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하니, 네가 나갈 때 되도록 같이 있으라고.”단미가 의심스레 보았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호건이 눈썹을 들었다.“못 믿겠어? 직접 전화해서 여쭤봐. 거짓말인지.”단미는 말이 막혔다. 자기 작은아버지 성격에 물어보면, 전에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어도 지금은 호건과 가라고 하실 것
세 사람을 배웅하며 단미는 평소 흠잡고 말이 많던 김혜정이 지금은 조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트집도 잡지 않았다.호건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얌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앞에서는 이영숙과 호건이 그룹 내부의 일을 이야기하며 걸었다.이영숙은 회사 일에서 물러났지만, 호건은 가끔 업무상 문제에 의견을 구하거나 조언을 청하곤 했다.뒤에서 윤희가 단미의 팔을 살짝 당겼다. 귓가에 작게 물었다.“새언니, 궁금한 게 있어요.”“뭔데요?”윤희가 앞에서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호건을 보았다.“오빠가 만든 음식... 먹을 만해요?”호기심 어린 눈을 보자 단미는 문득 호건의 말을 떠올렸다.단미한테만 요리해 준다는 말.대답이 없자 윤희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할 말도 없을 만큼 맛없어요?”멍하니 있던 단미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요리 잘해요.”“에이, 거짓말. 못 믿겠어요.”분명 먹기 힘든 음식일 거라는 표정이었다.단미가 그 모습에 웃었다.“안 믿어요? 다음에 만들어달라고 해요. 먹어보면 알죠.”차 앞에 도착해 단미가 이영숙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뒤에서 윤희가 호건의 어깨에 가볍게 부딪쳤다.“오빠, 언제 본가에 와서 솜씨 보여줄 거야? 우리도 먹어보자.”호건은 앞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인사하는 단미를 보았다. 마음이 가라앉았다.이제 단미는 만들어줘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새언니가 먹겠다고만 하면 언제든 해.”윤희가 의아해했다.“역시 거짓말이네. 새언니도 안 먹겠다는 건 맛없다는 뜻이잖아.”호건이 서늘하게 보았다.“하하, 나 갈게.”눈빛을 알아본 윤희가 급히 김혜정의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단미는 이영숙이 차에 타는 것을 도왔다. 그 뒤 호건과 나란히 서서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시야에서 차가 사라지자 단미의 표정이 차분하게 식었다.돌아서서 들어가려는 단미의 손을 호건이 본능적으로 잡았다.단미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왜?”잔잔한 눈을 보니 예전에 자신을 볼 때면 반짝이던 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