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테라스에서의 짧고 강렬했던 조우 후, 윤지안은 도망치듯 강은우의 곁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의 후끈한 열기가 차갑게 식었던 피부를 때렸다. 지안의 뺨은 밤공기와 알 수 없는 고양감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우는 지안이 곁에 서자마자 그 미묘한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했다. 그는 지안의 아주 작은 표정 변화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 내면의 기류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은우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천천히 돌리며,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좀 진정됐어?”
“네….”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취한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 많이.”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오직 지안만이 느낄 수 있는 은근한 탐색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지안은 은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에요. 긴장한 탓에 와인을 좀 급하게 마셨나 봐요.”
지안은 불안감을 감추려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특히 긴장하네? 무슨 일 있어?”
은우의 추궁이 이어지자 지안은 층층이 쌓아올린 가면이 균열을 일으키며 한계에 다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요… 그냥….”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대신, 지안의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아주 가볍게,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게 쓸어내렸다가 뗐다. 그것은 위로를 가장한 소유권의 확인이었다.
“아들.”
그때, 연회장 한구석에서 중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에 은우와 지안은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오셨네요.”
“오셨어요, 회장님.”
강진한 회장.
강은우의 아버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부진 체격과, 얼핏 보면 형제 사이로 착각할 만큼 풍성한 흑발,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깊고 탁한 목소리뿐이었다. 그는 예술계의 거물이자, 화연 갤러리의 실질적인 소유주였다.모두가 그의 생기와 젊음의 유지에 대해 궁금했지만 강진한은 그저 웃음으로 답할 뿐이다.
"불로영생은 누구나 원하는 거고, 기왕이면 젊게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시시콜콜한 연례행사인데,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지. 어때, <화연>의 이번 기획 전시는 잘 진행되고 있나?”
진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은우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지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 능력 있는 디렉터 덕분에 차질 없이 준비 중입니다.”
은우가 지안을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진한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지안에게 다가왔다.
“꽤 복합적으로 여기저기서 얽혀 있느라 윤 디렉터가 고생이 많겠군. 컬렉터들 등쌀에, 자기 자식들 작품 소개해달라는 청탁에… 안 그래?”
“… 그래도 좋은 작품들을 선별하느라….”
지안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끝을 흐리자, 진한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연회장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차가웠다.
“하하하하! 이 사람, 갤러리 좀 왔다갔다 하더니 거짓말이 많이 늘었군. 내가 보기엔 이번 라인업, 영 아니던데. 안 그런가?”
진한의 직설적인 비판에 지안은 입을 다물었다. 예술을 순수한 열정이 아닌, 철저한 비즈니스와 권력 놀음으로만 보는 진한의 냉철함 앞에 지안의 예술가적 양심은 무력했다.
“하하…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안이 간신히 대답하자, 진한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래, 원래 예술은 고상한 척,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것이 미덕이지. 그것이 디렉터의 능력이고. 안 그래?”
진한은 자연스럽게 지안의 허리와 엉덩이 그 경계 사이에 손을 얹었다.
“나야 예술을 몰라서, 난 오로지 포장을 벗겨내고 드러내는 것이 더 취향이던데….”
그의 손가락이 지안의 골반 뼈를 타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지안은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진한의 손을 본 은우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그는 애써 웃음을 유지하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아버지도 참. 우리 <화연>의 포장 기술은 업계 최고 아닙니까. 이번에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진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안의 엉덩이 전체를 노골적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수많은 시선 속에서 벌어지는, 오직 세 사람만이 아는 은밀하고 추악한 권력의 과시였다. 지안의 꽉 쥔 입술에 옅은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 여러 곳에서 후원해주니 그만큼 확실한 포장을 보여줘야지.”
진한의 손길에 지안의 숨소리가 점점 얕고 거칠어졌다.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혼란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그럼, 난 이만 가보지.”
진한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손을 떼고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
두 사람은 멀어지는 진한의 뒷모습에 대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름 끼치는 모멸감은 지안을 깊은 무력감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조금 피곤해 보이네. 먼저 좀 쉴까?”
은우가 지안에 대한 소유권을 눈 앞에 잃었다는 분노를 애써 삼킨 체 지안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우에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 주변의 소음을 핑계 삼아, 그의 귓가에 숨결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네, 선배. 오늘따라 피곤하네요.”
“얼른 가자.”
은우는 최대한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안을 안내했다. 그는 지안에게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하듯 앞장섰고, 지안은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연회장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갤러리 상층에 마련된 프라이빗 라운지의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것처럼, 그들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묵직한 오크 문이 그들의 뒤로 소리 없이 닫혔고, 문 너머의 모든 소리는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복도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고, 그 정적은 더 많은 상상을 자극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세현은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눈빛은 굳게 닫힌 문과, 그 문 너머에 있을 윤지안을 향해 있었다.
흠….
세현은 방금 전 본 세 사람의 기묘한 역학 관계을 목격했다.
지배와 피지배, 소유와 집착, 그리고 모멸과 무력감.세현의 입가에 옅은, 그러나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저 포장을 벗겨내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현의 손에 살짝 힘이 가해지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깨져나갔다. 사방으로 튀는 투명한 파편들. 예리한 유리 조각들이 그의 창백한 손등과 손바닥에 박혀들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묘한 감각만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박힌 유리 조각 주변으로 선홍빛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얀 피부 위로 번지는 붉은 피는, 마치 하얀 캔버스 위에 떨어뜨린 물감처럼 선명하고 이질적이었다.
세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피에 젖어 붉게 물든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조명의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던 유리 조각들은 이제 그의 피를 머금고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깊고 탁하게 가라앉았다. 유리 조각에 맺힌 제 피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예언을 읽어내려는 듯 집요하고 기괴했다.
'…찾았다.'
지난밤의 농밀했던 공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며칠 뒤, 윤지안은 자신의 갤러리 의 회의실에서 다음 기획전 "경계의 미학: 혼돈 속의 질서"에 대한 막바지 점검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평소 딱 떨어지는 수트보다는 그의 자유로운 기질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선호하는 그는, 오늘도 몸의 선이 유려하게 드러나는 살구색 실크 셔츠에 슬림한 파란 슬랙스를 매치했다. 셔츠 단추는 두어 개쯤 풀어헤쳐 그의 긴 목선과 쇄골을 은근히 드러냈고, 움직일 때마다 탄탄한 몸의 실루엣이 매혹적으로 드러났다.회의용 테이블 위에는 작가들의 도록과 작품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었고, 맞은편 스크린에는 오늘 논의의 중심이 될 작품, 살바도르 달리의 가 커다랗게 투사되어 있었다. 지안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고, 그의 지시를 받은 수석 큐레이터가 작품에 대한 브리핑을 이어가고 있었다."…이처럼 는 달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강박, 특히 성적 불안과 거세 콤플렉스, 그리고 그의 뮤즈였던 갈라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매우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메뚜기와 개미 등의 상징들은 그의 공포와 혐오감을, 여성의 얼굴과 관능적인 요소들은 그의 억압된 리비도와 욕망을…"수석 큐레이터의 분석적인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지안의 시선은 오롯이 스크린 속 그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괴하게 늘어진 옆얼굴 형상, 그 위에 펼쳐지는 도착적인 이미지들의 향연. 노골적이고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한 상징들.하지만 이상하게도 지안은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이 작품의 선정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우려를 표하거나 예술사적 의의를 논하는 동안, 지안은 그림이 뿜어내는 날것 그대로의 혼돈 속에서 기묘한 동질감, 혹은 일종의 위안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뒤틀린 욕망, 숨겨진 불안, 금기에 대한 갈망들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불쾌하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해서, 역설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지안의 풀린 눈빛이 은우를 보곤 순간, 섬뜩할 정도로 투명하게 빛났다. 아니, 은우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은우의 셔츠가 벗겨지며 드러난 가슴과 어깨, 세월에 덧입혀져 살갗과의 경계가 흐릿해진 흉터들에 고정되어 있었다.오로지 자신만이 핥아 입 맞출 수 있는, 고결하고도 음란한 제단. 자신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욕망, 지안은 홀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우에게 다가갔다. 갈구하는 눈빛에 은우는 지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그렇지… 지안아. 이 오욕의 흔적들은 다 네 거야.”헐떡이는 숨과 뎁혀질 대로 뎁혀진 땀들은 오로지 지안의 의식을 위한 흔적이었다. 지안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혹은 지안이 갈구하는 눈빛을 받기 위해 은우가 제 살점을 깎고 도려내어 새긴 뒤틀린 낙인.흉터는 불규칙하게 그어진 수십 개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떤 선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깊고 가늘었으며, 어떤 선은 무딘 도구로 긁힌 듯 도톰하고 불규칙했다. 섬세하게, 때론 거칠게 직선으로 베여진 이 모든 것들은 지안을 제 곁에 묶어두는 가장 견고하고 잔인한 사슬이었다. 혀의 감촉이 거친 캘로이드 흉터의 가생이를 느릿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핥아 올렸다. 햝으면, 햝을수록 지안은 점점 더 나락의 쾌락 그 이상을 원했다.하아...아...하....고귀한 것을 떠받들 듯, 섬세한 손길로 하나, 하나씩 더듬으며 지안의 혀가 가슴 한복판에 깊게 패인 흉터의 심연으로 파고들 때마다, 은우는 비로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아, 읏… 지안아. 오로지 나만이 널 충족할 수 있어. 나만이 원하는 걸 너에게 줄 수 있다고.지안의 혀가 제 몸 곳곳을 유린할 때마다 지독한 안도감을 느꼈다. 지안이 제 흉터를 핥을 때만, 그 텅 빈 눈동자에 오로지 자신을 향한 열망이 그는 좋았다.지안은 이내 애무를 중단하고, 은우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오로지 '상흔'에 대한 열망만이 짙게 어려 있었다. 희고 가녀린 두 손이 은우
묵직한 오크 문이 닫히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갤러리 상층에 마련된 이 프라이빗 라운지는 연회장의 소란을 완벽하게 차단한, 오직 은우만을 위한 은밀한 성소였다. 짙은 네이비 톤의 벽지와 가죽 소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비현실적인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은우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던지며,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윤지안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치심과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지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은우의 가슴 속에서는 가학적인 충동이 들끓었다.셔츠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부드러운 백옥 같은 살결은, 그 자체로 은우의 숨을 멎게 하는 완벽한 예술품이었다.오늘 밤, 이 아름다운 조각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낙인을 새기고 싶다는 절박함이 그의 전신을 휩싸였다.마침내 지안의 셔츠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어두운 간접 조명 아래 윤지안의 상반신이 그 관능적인 자태를 온전히 드러냈다. 수년간 극한의 발레 훈련으로 빚어진 몸은,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의 결이 살아있는 헬레니즘 조각상 그 자체였다.은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경탄과 욕망이 뒤섞인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뒤이어 분노가 치밀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지안을 바라보던 그 남자의 집요한 시선, 그리고 지안의 흔들리던 눈동자, 그리고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존재의 그 더러운 손길.눈 앞에서 빼앗긴 지안의 주도권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동시에, 더욱더 지안에 대한 애증만 쌓여 갔다. 은우는 지안의 뒤에 바짝 밀착했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마치 제단을 어루만지듯, 지안의 목선에서부터 어깨, 유려한 쇄골을 지나 탄탄한 가슴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은우의 손길이 가슴팍에 닿는 순간, 지안의 몸이 움찔하고 강하게 떨렸다"선배…"지안은 잠시 놀란 듯 숨을 들이쉬었지만,
테라스에서의 짧고 강렬했던 조우 후, 윤지안은 도망치듯 강은우의 곁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의 후끈한 열기가 차갑게 식었던 피부를 때렸다. 지안의 뺨은 밤공기와 알 수 없는 고양감으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은우는 지안이 곁에 서자마자 그 미묘한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했다. 그는 지안의 아주 작은 표정 변화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 내면의 기류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은우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천천히 돌리며, 주변의 소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좀 진정됐어?”“네….”“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취한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 많이.”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오직 지안만이 느낄 수 있는 은근한 탐색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지안은 은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긴장한 탓에 와인을 좀 급하게 마셨나 봐요.”지안은 불안감을 감추려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갤러리 K’의 VIP 개관 연회장. 내로라하는 예술계 인사들과 재력가들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은 우아한 재즈 선율과 샴페인 잔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그 중심에는 스튜디오 J의 대표이자 한때 발레계의 유망주이자 샛별로 불렸던 강은우가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수트 핏과 완벽한 매너, 기품 있는 미소. 그의 주변에는 선망과 존경, 그리고 은밀한 열망이 뒤섞인 시선들이 끊임없이 맴돌았지만, 은우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차분하게 화답했다.그의 곁에는 스튜디오 J의 디렉터, 윤지안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은우의 가장 신뢰받는 파트너이자 유능한 디렉터인 지안은 과거 은우와 마찬가지로 발레로 다져진 유려한 선과 백옥처럼 투명한 피부, 지적인 분위기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청자 무늬가 그려진 백자라 칭송했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은연중에 배어나는 수줍음과 기품은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은우와 지안,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완벽한 한 쌍이었다.하지만 지안의 내면은 달랐다. 빳빳하게 날이 선 긴장감 속에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여야만 한다는 강박. 오로지 정적을 깨기 위해 서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소곳한 미소를 짓는 가식적인 순간들. 이런 일이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건만, 오늘 밤 지안은 연회장 한복판에 마치 벌거벗은 조각상처럼 서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깊은 한숨을 삼키며 애써 피로를 억누르던 순간, 지안의 시선이 한곳에 멈칫했다.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는 내심 시선을 돌리려 해도 자꾸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흡입력이 있었다. ㅇ그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뒤돌아볼 정도로, 어딘가 신비롭고 고풍스러운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였다.평소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지안은 새로운 걸작을 발견한 듯,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