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나를 망친 남자의 형 침대에서, 나는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전 연인 태겸에게 원고와 이름, 삶까지 빼앗긴 작가 윤하진. 다시 시작된 협박 끝에 그는 태겸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 강서우의 펜트하우스로 숨어든다. 차갑고 위험한 재벌가의 실세 서우는 하진을 숨겨주지만, 결코 대가로 삼지 않는다. 단 하나의 조건은 하진이 원할 때만 다가오는 것. 닫힌 문, 젖은 셔츠, 새벽의 악몽 속에서 피난처는 금지된 욕망으로 변하고, 태겸의 질투와 재벌가 스캔들은 두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하진은 더 이상 빼앗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서우의 품을 선택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추문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유일한 계약이 된다. 둘은 세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더 보기“강서우 씨, 저를 숨겨주세요. 강태겸이 찾기 전에.”
“늦었군.”
문이 열리자마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하진은 숨을 삼켰다.
처음 찾아온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마치 서우가 오늘 밤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 순간 복도 끝 전용 엘리베이터가 울렸다.
태겸은 한 층 아래까지 와 있었다.
빗물이 하진의 코트 끝에서 떨어졌다.
젖은 대리석 위로 검은 얼룩이 번졌다.
하진은 가방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붉게 멍든 손목이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
서우의 시선이 그 자국에 닿았다.
“내 동생이 한 짓인가.”
“대답하면 들여보내 줄 건가요?”
“아니. 네가 들어올지부터 정해.”
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정까지 돌아와.]
[안 오면 네 원고도, 네 이름도 끝이야.]오후 11시 43분.
17분 뒤면 태겸은 하진의 마지막 원고를 자기 이름으로 넘긴다.
계약서도, 작가 계정도, 출판사 연락망도 이미 빼앗겼다.
가방 속 초고마저 잃으면 윤하진이라는 작가는 완전히 사라진다.
“태겸 씨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왔어요.”
“그래서 내가 안전해 보였나.”
“아니요.”
하진이 서우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이 더 위험해 보여요. 그래서 고른 거예요.”
엘리베이터 숫자가 30층으로 바뀌려다 멈췄다.
서우가 문에서 비켜섰다.
“들어와. 지금부터는 네 선택이다.”
하진은 문턱을 넘었다.
철문이 닫히자 잠금장치 세 개가 차례로 걸렸다.
곧바로 보안 패널이 붉게 점멸했다.
[강태겸 님이 접근을 요청했습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스물한 번째 전화였다.
서우가 말했다.
“받아.”
“싫어요.”
“도망친 걸 숨기지 마.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윤하진. 문 열어.
태겸의 목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내 거 들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서우가 휴대폰을 가져갔다.
“여기까지.”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형?
“돌아가.”
―그 새끼가 내 원고를 훔쳤어.
서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네 원고라면 첫 문장부터 말해봐.”
태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네가 쓴 글인데 기억이 안 나나?”
욕설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하진은 서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원고를 들고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저렇게 안고 있으니까.”
“그럼 첫 문장은 왜 물었죠?”
서우는 답하지 않았다.
태겸의 협박보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하진은 소파 끝에 앉았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산산이 부쉈다.
서우는 담요를 집었지만 직접 덮어주지 않았다.
하진이 손을 뻗어야 닿는 곳에 내밀었다.
“조건 없이 숨겨주진 않아.”
“대가가 뭔데요.”
“내 보호를 받는 동안 네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네가 대가가 되는 계약은 하지 않는다.”
서우가 하진을 똑바로 보았다.
“숨겨줄 수는 있어도 사지는 않아.”
“제가 가진 게 저밖에 없으면요.”
“그 말부터 틀렸어.”
서우의 시선이 가방으로 내려갔다.
“빼앗기기 싫어서 여기까지 들고 온 게 있잖아.”
“이것까지 잃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그래.”
“태겸 씨가요.”
“그럼 내일 그 말부터 돌려주지.”
“뭘 어떻게요?”
“네 이름으로.”
“나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오늘은 대답하지 않는다.”
서우가 복도 끝 객실을 가리켰다.
“네 방은 안에서만 잠긴다. 내가 원해도 못 열어.”
“제가 나가겠다고 하면요?”
“열어준다.”
“밖에 태겸이 있어도요?”
“네가 고른 문이라면.”
“당신 방은요?”
“잠그지 않아.”
“왜요?”
“밤중에 무서워졌을 때 다시 허락을 구하지 않게.”
“하지만 나는 네 문을 열지 않아. 네가 먼저 열기 전에는.”
오후 11시 58분.
하진이 객실 문을 잠그자 인터폰에서 태겸의 목소리가 터졌다.
―형, 대체 그 새끼한테 뭘 들었어?
서우는 닫힌 객실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그런데 왜 믿어?
오후 11시 59분.
서우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첫 문장을 아니까.”
객실 안에서 하진의 손이 문고리 위에 멈췄다.
“비가 오면, 버려진 이름들은 가장 먼저 젖는다.”
태겸이 빼앗은 최종 원고에도 없는 문장이었다.
열아홉 살의 하진이 썼다가 지운 최초 초고.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읽지 못했어야 할 첫 문장.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태겸이 정한 시간은 끝났다.
하지만 하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도망쳐 들어온 곳은 은신처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지운 윤하진의 첫 문장을 가진 남자의 집이었다.
“문 열어주세요.”새집 현관 앞에서 서우가 말했다.하진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처음 서우의 문 앞에 섰던 밤에는 숨겨달라고 부탁했다.오늘은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았고, 돌아가야 할 곳도 남에게 빌린 방도 아니었다.문패에는 두 이름이 같은 크기로 새겨져 있었다.강서우 · 윤하진.“당신 열쇠도 있잖아요.”“네가 먼저 열고 싶어 했으니까.”하진은 열쇠를 돌렸다.“이번에는 제가 열게요.”두 사람은 아직 상자도 풀지 않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거실 한쪽에는 하진의 책상과 서우가 고른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십 분이었다.오늘은 《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의 마지막 회차가 공개되는 날이었다.하진은 노트북을 켜고 최종 원고를 열었다.마지막 문장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나는 그 남자의 형에게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내가 돌아갈 사람을 직접 골랐을 뿐이었다.서우는 화면 뒤에 서 있었지만 문장에는 손대지 않았다.“고칠 데 있어 보여요?”“내가 고칠 수 있는 글이 아니다.”“첫 독자잖아요.”“그래서 끝까지 읽었고, 네가 쓴 그대로 남기고 싶다.”하진은 공개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이 글 때문에 당신이 다시 욕을 먹을 수도 있어요.”“네가 숨지 않는 대가를 나만 피할 생각은 없다.”“사랑한다고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알아.”“그래도 같이 공개돼도 괜찮아요?”서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하진의 선택을 대신 확정하지 않으려는 침묵이었다.“네가 원하는 방식이라면.”자정이 되었다.하진은 자기 손으로 마지막 회차를 공개했다.완결 표시가 작품 제목 옆에 붙었다.작가 윤하진.그 아래 독자들의 문장이 빠르게 쌓였다.돌아온 이름을 축하한다는 말.끝까지 자기 문장으로 살아남아줘서 고맙다는 말.누구의 동생도, 누구의 연인도 아닌 작가 윤하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다는 말.그때 이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완결 축하해.이번에는 누구 이름도 빌리지 않고 끝까지 왔네.정민을 비롯한 피해
“그럼 이제 우리는 무슨 사이죠?”하진이 종료된 보호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우는 반으로 접힌 종이를 바라보다가 하진에게 시선을 옮겼다.“네가 정하고 싶은 사이.”“또 나한테만 고르라고 하네요.”“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해도 되나?”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보호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살고 싶은 사람.”하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보호라는 말이 사라진 자리가 허전하면서도 가벼웠다.이제 서우의 집에 머물 이유도, 떠나야 할 의무도 계약서에는 없었다.“같이 산다는 말부터 다시 정해요.”“어떻게?”“당신 집에 내가 들어가는 건 싫어요.”서우의 얼굴이 굳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내가 또 숨겨지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그럼 새로 구하자.”“당신 명의 말고요.”“공동 명의로.”“비용도 같이 내요.”“그래.”서우는 하나도 빼앗지 않고 대답했다.하진은 그제야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일주일 뒤, 두 사람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작은 집 앞에 섰다.회사 본관도, 강씨 일가의 저택도 보이지 않는 동네였다.이층에는 하진의 작업실로 쓸 방이 있었고, 일층 끝에는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중개인이 설명을 마치고 열쇠 두 개를 내밀었다.서우는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하진이 두 개를 받아 하나를 그의 손바닥에 올렸다.“이건 당신 거예요.”“네가 보관해도 된다.”“내가 왜요?”“예전에는 내가 네 문을 지키고 싶어 했으니까.”“이제는 각자 열고 들어오면 돼요.”하진은 자기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나가고 싶을 때도 각자 나갈 수 있고요.”“그 말까지 해야 안심돼?”“네.”“그럼 기억하겠다.”두 사람은 집 안을 다시 돌았다.하진은 작업실 문 안쪽의 잠금장치를 직접 확인했다.“이 방도 안에서 잠겨요.”“내가 열 수 없는 방이 필요해?”“필요하면 잠글 수 있는 방이 필요한 거예요.”“그 열쇠는 네가 가져.”“대신 들어오고 싶으면 물어봐요.”“매번 묻겠다.”“그러면 열어줄지는 제가
“이름 몇 개를 돌려놓는다고 끝날 것 같니?”오혜련은 조사실에서도 등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압수된 지시서와 복구된 녹음이 탁자 위에 놓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하진에게만 머물렀다.“작품은 팔렸고, 회사는 살아남았어.”“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하진은 증거 봉투 안의 첫 원고를 꺼내지 않았다.“당신들한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훔치기 쉬웠겠죠.”“나는 글을 살린 거다.”“아니요.”“사람을 지우고 글만 남긴 거예요.”조사관이 복구된 결재 문서를 화면에 띄웠다.스물아홉 작품의 원저자 목록.하진의 스물여덟 작품에 적용된 우선권 계약.오혜련이 승인하고 태겸이 실행한 명의 변경 내역까지 한 줄로 이어졌다.“강태겸 씨는 지시에 따랐다고 진술했습니다.”오혜련이 비웃었다.“살려고 어미를 파는구나.”“당신도 회사를 살린다는 말로 작가들을 팔았잖아요.”하진의 말에 그녀의 입가가 굳었다.“네 이름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읽지 않았을 글들이야.”조사실 뒤편에서 서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자신의 작품 표지를 화면에 띄웠다.오래도록 윤하진의 이름 아래 묶여 있던 소설이었다.“읽히지 않아도 제 글입니다.”다른 작가들도 차례로 원고와 작성 기록을 제출했다.이름을 빼앗긴 사람은 스물아홉 명이었지만, 증언은 하나처럼 이어졌다.작품을 돌려달라는 말보다 먼저 나온 것은 이름을 돌려달라는 말이었다.하진은 오혜련 앞에 공동 요구서를 내려놓았다.“작품 판매 재개보다 원저자 표시를 먼저 정정해 주세요.”“정산금과 손해배상은 그다음입니다.”“내 스물여덟 작품도 같은 순서로 처리하고요.”오혜련이 하진을 올려다봤다.“네 글까지 묶어두겠다고?”“제 이름만 먼저 살겠다고 하면, 당신이랑 다를 게 없잖아요.”며칠 뒤 특별조사위원회의 최종 발표가 열렸다.스물아홉 작품의 원저자가 공식 확인됐다.기존 표지와 판매 페이지에는 원저자 이름이 먼저 복원됐고, 잘못 지급된 수익은 별도 정산 절차로 넘어갔다.첫 번째로 바뀐 표지에는 서정민의 이름이 올라갔다.
“이 파일, 태겸 혼자 만든 게 아닙니다.”디지털 증거 분석관이 복구 화면을 회의실 벽에 띄웠다.윤하진_작가활동종료계획.문서의 마지막 수정자는 태겸이었지만, 최초 생성 위치는 한성그룹 법무 서버가 아니었다.오혜련의 개인 비서실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폐쇄망이었다.“작성 시점은 육 년 전입니다.”“강태겸 씨가 윤하진 씨의 첫 원고를 가져가기 열흘 전이고요.”하진은 화면에 적힌 날짜를 바라봤다.태겸이 자신의 글을 탐내기 전에 누군가는 이미 작가 윤하진을 없앨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태겸 씨가 처음부터 시킨 대로 움직였다는 뜻인가요?”“초기 문서는 그렇습니다.”분석관이 변경 이력을 넘겼다.원고 접근 권한 확보.작가 명의 이전.사생활 자료 수집.정신적 불안정을 근거로 한 계약 판단 능력 부정.마지막 항목은 붉은 글씨로 남아 있었다.윤하진 명의의 원본 전량 폐기.서우의 손이 탁자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하진은 그의 손등 위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대신 서우가 스스로 힘을 풀 때까지 바라봤다.“괜찮아요?”“안 괜찮다.”“그래도 멈출 수 있어요?”서우는 손을 탁자에서 떼었다.“네가 원한다면.”“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선택해서 멈춰요.”서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그러겠다.”조사실 반대편에 앉은 태겸이 웃었다.압수된 휴대전화와 노트북은 투명 봉투 안에 들어가 있었다.“형은 여전히 하진이가 시키는 말만 듣네.”하진이 태겸을 봤다.“당신은 한 번도 들은 적 없잖아요.”“뭘?”“내가 싫다고 한 말.”태겸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수사관이 태겸의 진술을 바탕으로 확보한 장소 사진을 내밀었다.한성그룹의 폐쇄된 출판 계열사 지하 보관실이었다.태겸은 그곳에 하진의 첫 원고와 오혜련의 원본 지시서가 있다고 진술했다.다만 보관함의 잠금 번호는 말하지 않았다.“윤하진 씨가 직접 와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진은 가지 않습니다.”“제가 정해요.”하진의 말에 서우가 멈췄다.“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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