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연은 기자가 내민 혼인신고서를 받지 않았다.
“어디서 입수했습니까?”
“제보받았습니다.”
“제 질문은 출처가 아니라 입수 경로예요. 원본을 봤는지, 파일로 받았는지요.”
기자는 잠깐 망설였다.
“암호화 메신저로요.”
서경민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보여주신 문서는 가족관계 관련 개인정보입니다. 미성년자 사진을 제공하겠다는 제보까지 받으셨다면 즉시 수사기관에 보존 제출을 요청하겠습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절차를 설명하는 겁니다.”
서연은 문화관 출입문을 가리켰다.
“행사 계약은 끝났지만 아직 철수 중인 사유지입니다. 취재 허가가 없으니 나가주세요.”
예행연습 날에는 비가 내렸다.유리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온실 안에서는 마이크 없이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잠깐 말이 끊기면 빗물이 빈자리를 채웠다.입구에는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난방기는 하객 손이 닿지 않는 벽으로 옮겼다.민지수는 입구 동선을 확인했고, 최은채는 의자 사이 간격을 재고 있었다.시우는 작은 반지 상자를 든 채 통로를 세 번이나 왕복했다.“천천히 걸어.”도진이 말하자 시우가 뒤를 돌아봤다.“아빠가 더 떨려?”“조금.”“나는 안 떨려.”그 말과 동시에 아이가 카펫 끝에 발이 걸려 휘청했다. 상자는 놓치지 않았지만 모두가 웃었다.서연도 따라 웃다가 통로 입구에 섰다.연습일 뿐이었다. 드레스도 입지 않았고, 하객도 없었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그런데 한 걸음을 떼는 순간, 오래된 호텔 복도의 냄새가 떠올랐다.첫 결혼식 날에도 비가 왔다.문밖에서는 사회자가 시간을 재촉했고, 차명희는 서연의 손목을 잡아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진은 경영진 전화를 받느라 대기실에 오지 못했다.‘웃어야 한다.’누군가 그렇게 말했다.서연의 발이 멈췄다.숨이 얕아지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연은 상담 때 연습한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씩 말했다. 유리문, 노란 우산, 빈 의자, 젖은 카펫. 지금 있는 장소를 확인하자 호텔 복도의 기억과 온실이 조금씩 분리됐다.민지수는 물을 가져왔지만 마시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최은채도 꽃을 치우려 하지 않았다. 원인이 무엇인지 각자 추측해 해결하는 대신, 서연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민지수가 음악을 끄려는 순간 도진이 먼저 손을 들었다.“다들 잠깐 나가주세요
결혼식 일주일 전, 하객 명단은 서른두 명에서 더 늘지 않았다.도진의 비서실에서는 마지막까지 명단을 넓히자고 요청했다.“최소한 주요 계열사 대표들만이라도 초청하셔야 합니다. 회장님 혼인인데 아무 안내도 없으면 오히려 불필요한 해석이 나옵니다.”도진은 보고서를 덮었다.“회사 해석을 막으려고 결혼하는 거 아닙니다.”“그래도 주주들에게는—”“혼인 사실은 등기와 공시가 필요한 범위에서 처리하세요. 예식은 사적인 자리입니다.”비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예전의 도진이라면 회사와 사생활을 구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이번에는 서연이 정한 선을 자신의 말로 지키고 있었다.같은 날 오후, 루미에르로 낯선 퀵서비스가 도착했다.작은 상자 안에는 고급 카메라 렌즈와 현금이 든 봉투가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결혼식 사진 몇 장이면 된다는 문구와 익명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민지수는 상자를 보자마자 손을 떼고 법무팀에 연락했다.법무팀은 배송 플랫폼에 발신자 결제기록과 픽업 장소 보존을 요청하고, 경찰 입회 아래 상자를 열었다.서연은 이 사실을 하객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사진 매수 시도가 있었고, 촬영 규칙을 지켜달라는 안내를 초대자 전원에게 보냈다. 불안하면 참석을 취소해도 된다는 문장도 넣었다.“직원 매수네요.”서연은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증거용 비닐에 넣었다.“배송 기사 동선부터 확보해. 직원들한테는 사진 한 장도 개인 휴대전화로 찍지 말라고 다시 공지하고.”“휴대전화 봉인 파우치 준비할까요?”“강제로 걷지는 마. 동의받고, 싫으면 예식장 밖 보관함을 쓰게 해.”시우가 있는 공간에는 사진 담당자 한 명만 카메라를 들기로 했다. 하객이 자기 가족을 찍고 싶을 때는 온실 밖 지정
꽃 회의는 시우의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잡혔다.루미에르 샘플룸 바닥에는 튤립, 라넌큘러스, 장미, 프리지어가 낮은 통마다 나뉘어 있었다. 시우는 신발을 벗자마자 꽃 사이를 돌아다녔다.서연은 샘플보드보다 싫은 색과 알레르기만 적었다. 최종 구성은 루미에르 플로리스트에게 맡기기로 했다.“만지기 전에 물어봐.”서연이 말하자 아이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냄새만 맡을게.”플로리스트가 웃으며 노란 프리지어 한 줄기를 건넸다.“이건 괜찮아요.”시우는 꽃을 코끝에 대더니 곧장 엄마에게 가져갔다.“이걸로 해.”“왜?”“엄마 이거 보면 웃었어.”서연은 자신도 몰랐다. 꽃을 보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던 모양이었다.“노란색이면 너무 봄 같지 않을까요?”최은채가 물었다.예식은 늦가을이었다. 처음 준비한 보드는 흰 장미와 짙은 초록 잎으로 차분하게 맞춰져 있었다.도진은 보드보다 서연을 봤다.“네가 좋으면 쓰자.”“모든 꽃을 노란색으로 하자는 건 아니잖아요.”“그럼 시우가 들 꽃만 프리지어로 해.”시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내 거 말고 엄마 거.”서연은 꽃 한 줄기를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돌렸다.“부케에 조금 넣어주세요.”플로리스트는 늦가을에 프리지어 수급이 불안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색의 계절 꽃으로 바뀔 수 있고, 전날까지 확정하지 못하면 부케 전체를 다시 구성해야 했다.시우는 프리지어가 아니면 싫다고 했지만 서연은 약속할 수 없는 꽃이라고 설명했다.“꽃도 그날 아플 수 있어?”“멀리서 오다가 상하거나 못 올 수도 있어.”“그럼 비슷한 거 줘.”아
루미에르 회의실 화면에는 서울 시내 최고급 예식장 열두 곳이 떠 있었다.태강호텔 그랜드볼룸, 라온호텔 스카이라운지, 한강 위에 지은 수상 연회장까지.민지수가 첫 번째 사진을 넘겼다.“수용 인원은 천이백 명이고, 천장 높이는 열다섯 미터입니다. 플라워 설치만 사흘 가능하고요.”서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하객 서른 명인데 천이백 명 자리가 왜 필요해?”“회장님 쪽에서 참석하고 싶다는 분만 추려도 서른 명은 넘을 텐데요.”도진이 회의 테이블 끝에서 말했다.“초대하지 않을 거야.”직원들의 시선이 모였다.“이번 결혼식을 인사 자리로 만들 생각 없어. 업무상 축하해야 하는 사람은 회사로 보내면 돼.”민지수는 태강호텔 사진을 닫고 다음 장소를 띄웠다.“그럼 여기는요? 한강 야경이 좋고, 전체 대관도 가능해요.”“배 타야 돼?”시우가 물었다.“아니. 물 위에 떠 있는 건물이야.”“나는 멀미해.”두 번째 장소도 탈락했다.열두 곳을 다 보고도 결정하지 못하자 최은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규모가 작아도 괜찮으면 제가 아는 곳이 하나 있어요.”화면에 오래된 유리 온실이 나타났다.도심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강변 식물원 안, 기부금으로 보수한 작은 온실이었다. 한쪽 벽은 담쟁이가 감싸고 있었고, 안에는 긴 테이블 네 개가 전부였다.“모연온실이라고 해요. 원래 시민 정원이었는데 주말에만 소규모 예식을 받아요. 최대 마흔 명이고, 음식은 외부 케이터링을 써야 합니다.”은채는 대관료와 취소 규정, 접근성 자료까지 함께 띄웠다. 온실 입구에는 낮은 경사로가 있었지만 화장실까지 가는 길 일부가 자갈이었다. 하객 중 지팡이를 쓰는 사람이 있어 이동판을 빌려야
다음 날 저녁, 식탁 위에는 계약서 대신 노란 메모지가 놓였다.차도진은 펜을 들고 진지한 얼굴로 제목부터 적었다.‘결혼식 조건.’결혼 자체의 조건은 전날 이미 각자 적어왔다. 재산은 원칙적으로 분리하고, 양육비와 생활비는 현재 합의를 유지하며, 혼인신고 뒤에도 루미에르 지분과 경영에 태강이 관여하지 않는다. 도진의 태강 지분이 시우에게 자동으로 이어지는 구조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두 사람은 법률상담을 받아 혼전계약 초안을 만들 예정이었다. 사랑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돈과 권한이 감정을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경계를 보이는 일이었다.오늘 메모지는 그보다 작은, 그래서 두 사람에게 더 낯선 결혼식의 조건이었다.한서연이 맞은편에 앉으며 눈썹을 올렸다.“정말 적게요?”“빠뜨리면 안 되잖아.”“이사회 회의도 아니고.”“그래서 더 중요해.”시우는 두 사람 사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방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서연이 첫 번째 손가락을 폈다.“회사 홍보에 이용하지 않기.”도진이 적었다.“기사 배포도 없고, 독점 사진도 없어요.”“알겠어.”“태강호텔 패키지 상품으로 만들 생각도 하지 말고요.”“그건 생각도 안 했어.”“예전의 당신이라면 했을 것 같아서.”도진은 변명하지 않고 다음 줄을 비웠다.“두 번째는?”“양가 어른이 주인공인 결혼식은 싫어요. 누가 어느 자리에 앉고, 어느 집안이 먼저 입장하는지 따지는 것도.”“그럼 가족석을 없애자.”시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나는 가족석 앉을 건데.”서연이 웃으며 아이의 손을 내렸다.“시우 자리는 제일 먼
“대표님 결혼식은 누가 맡았어요?”한서연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다 말고 맞은편 신부를 바라봤다.막 최종 시식을 끝낸 고객은 케이크 시트보다 그 질문에 더 관심이 많은 얼굴이었다. 옆에 앉은 예비 신랑도 슬쩍 몸을 기울였다.“제가 맡았죠.”“직접요?”“그때는 제가 플래너였으니까요.”서연은 웃으며 메뉴표를 넘겼다.“오늘은 두 분 결혼식 얘기부터 마저 하죠. 부모님용 한식 코스는 버섯 알레르기만 다시 확인하면 될 것 같아요.”고객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회의를 끝내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민지수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그럼 두 번째는요?”“뭐가?”“대표님 두 번째 결혼식이요.”서연이 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췄다.“일이 없니?”“지금 퇴근 중인데요.”“그럼 퇴근에 집중해.”문이 열리자 민지수는 피식 웃으며 먼저 내렸다.“회장님은 집중하고 계시던데.”“뭘.”“반지 매장 홈페이지요. 지난주부터 브라우저 맨 위에 고정돼 있어요.”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수와 헤어진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도 그 말이 귓가에 남았다.차도진은 약속한 대로 회사 앞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주차구역 끝, 방문 차량 칸에 세워둔 차 옆에서 시우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트렁크를 열어놓고 납작한 상자와 씨름하는 중이었다.“이쪽이 위라니까.”“아빠가 아까도 위라고 한 데가 밑이었잖아.”“설명서 그림이 반대로 인쇄된 거야.”“설명서 탓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어.”서연이 다가서자 시우가 먼저 발견하고 달려왔다.“엄마, 우리 책장 샀어.”“내가 산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