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연히 마주친 옆집 그녀....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View More1화 — 다시 보게 된 여자
내 이름은 박동진.
스물아홉.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이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을 다녔다.
월급도 제때 들어왔고, 회사 명함을 내밀 때만큼은 그래도 남들 앞에서 기죽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웃기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순식간이었다.
회사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고.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모든 책임이 내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퇴사.
그리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신세다.
“참 부질없다…….”
나는 창문 너머로 빼곡하게 붙어 있는 낡은 주택들을 바라보며 맥주캔을 땄다.
칙.
오늘도 저녁은 맥주 한 캔에 마른오징어.
퇴사 초기에는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했다.
자격증 책도 샀고, 운동도 시작했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다.
딱 한 달이었다.
두 달째부터는 늦잠을 자기 시작했고,
세 달째부터는 요일도 헷갈렸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하나였다.
오늘은 뭘 하지?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생각이 따라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 이 동네도 지긋지긋하네.”
내가 사는 곳은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다.
집은 4층짜리 낡은 주택.
골목은 좁고, 전봇대마다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창문을 열면 맞은편 집 벽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웠다.
잘해야 2미터.
어렸을 때야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런데 스물아홉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끔 상상했다.
좋은 차.
넓은 아파트.
그리고 조수석에는 예쁜 여자친구.
주말이면 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을 먹고,
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삶.
그런데 현실은?
낡은 방.
구겨진 티셔츠.
편의점 맥주.
그리고 오징어.
“내 인생 참…….”
피식 웃으며 오징어 다리를 뜯었다.
그때였다.
맞은편 집 창문 하나가 열렸다.
드르륵.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깐 멈췄다.
“어?”
여자였다.
처음에는 그냥 이 동네에 저런 사람이 살았나 싶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창문 가까이 서 있는 여자.
집에서 편하게 입은 차림이었다.
키는 한 166 정도 되려나.
마른 편이지만 전체적인 선이 예뻤다.
얼굴도 엄청 화려한 미인이라기보다는 묘하게 눈길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살짝 올라간 눈매.
고양이 같은 인상.
어딘가 귀여운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 보는 얼굴 같지가 않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려다 말고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디서 봤지?’
몇 초쯤 지나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고등학교 때.
정확히는 내가 고2였던 시절이었다.
등교할 때 몇 번 같은 버스를 타던 여자애가 있었다.
나와 같은 학교는 아니었다.
교복도 달랐다.
그런데 얼굴이 눈에 잘 띄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처럼 고양이 같은 눈매 때문이었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교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다니는 게 보였다.
그때 별생각 없이 추측했었다.
‘졸업했나?’
내가 고2였으니 아마 나보다 한 살 정도 많았던 것 같다.
당시 고3이었다가 졸업한 거라면 얼추 맞았다.
물론 말을 걸어본 적은 없다.
이름도 몰랐다.
그냥 가끔 같은 버스에서 보던 누나.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십 년도 넘은 지금,
그 얼굴을 다시 본 것이다.
“맞는 것 같은데?”
시간이 꽤 흘렀지만 특유의 눈매가 비슷했다.
‘와…… 저 누나 아직 여기 살고 있었네.’
생각해보니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 집 창문에서 밖을 보고 있을 때 맞은편 주택 창가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게 저 누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왠지 그녀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집과 저 집은 가까웠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정도는 보이는 거리.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여자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냥 열어둔 채 방 안을 오갔다.
“저렇게 열어두네.”
별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다.
그런데 눈은 계속 그쪽으로 갔다.
잠깐 보다가 TV를 켰다.
다시 보았다.
휴대전화를 만지다가 또 보았다.
잠시 후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괜히 창문 쪽을 한 번 더 봤다.
없었다.
“뭐야.”
왜 아쉬운 거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박동진, 진짜 할 일 없구나.”
맥주를 다 마신 나는 빈 캔 하나를 더 들고 방을 나왔다.
그냥 바람이나 쐴 생각이었다.
우리 집은 4층이었고 그 위로 작은 옥상이 있었다.
철문을 열자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옥상에서는 동네가 조금 더 잘 보였다.
낡은 지붕.
주차된 차들.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맞은편 집.
아까 그 창문도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무심코 난간 근처로 걸어갔다.
그때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까 그 누나였다.
고2 때 버스에서 몇 번 보았던 사람.
십 년도 더 지나서,
고작 2미터 남짓 떨어진 맞은편 집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냥 궁금해서 보는 거지.’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도 몰랐다.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날의 나는 알지 못했다.
며칠 뒤부터 내가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을 기억하게 될 거라는 걸.
어느 날은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몇 번이고 맞은편을 확인하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처음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그 여자의 일상이,
조금씩 내 하루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거라는 걸.
맥주 한 캔과 함께 시작된 아주 사소한 호기심.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 주에 고등학교 단톡방이 시끄러웠다.평소엔 몇 달씩 조용하던 방이었다. 동창회 공지나 부고 정도만 올라오던. 그런데 재홍이 신혼여행 사진을 올리면서 불이 붙었다.[재홍: 몰디브 다녀왔다 ㅋㅋ 사진 투척][사진 12장]에메랄드빛 바다. 수상 방갈로. 선글라스를 쓴 재홍과 신부.[태훈: 와 부럽다 ㅋㅋ 우리는 애 때문에 제주도도 못 감][민혁: 재홍이 성공했네][성호: 몰디브 좋지. 나도 작년에 갔는데][재홍: 민혁이 니도 이번에 팀장 됐다매 축하한다!!][민혁: ㅋㅋ 아직 대행이다][태훈: 대행이 어디냐 우리 회사는 40 넘어야 팀장인데][성호: 나 이번에 차 바꿨다 ㅋㅋ][사진 1장 — 검은색 외제 SUV][준영: 다들 잘 사네 ㅋㅋ 나도 요즘 가게 자리 잡았다. 다음에 놀러 와라]나는 알림을 끄지 않았다. 한 줄씩 올라오는 메시지를 봤다. 반지하 매트리스 위에서. 깁스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몰디브. 팀장. 외제 SUV. 가게.그리고 원주.[원주: 나도 발령받고 첫 명절 보너스 받았다 ㅋㅋ][사진 1장 — 공무원증을 목에 건 원주가 청사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재홍: 원주 드디어!! 4년 고생했다 진짜][태훈: 원주 축하한다 ㅠㅠ 진짜 대단하다][민혁: 서원주 공무원 ㅋㅋㅋ 적응 안 되네]모두가 원주를 축하했다. 원주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4년.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가던.나는 그 사진 속 원주의 얼굴을 봤다. 공무원증. 청사. 새 정장. 반듯한.그리고 한 줄이 올라왔다.[성호: 근데 동진이는 요새 뭐 하노? 대기업 그만두고 소식이 없네]단톡방이 조용해졌다.일 분. 이 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었다. 동창회에서의 일. 재홍과의 충돌. 담배를 다시 피우던 나. 소문은 돌았을 것이다. 원주를 통해서든, 누구를 통해서든.삼 분 뒤.[원주: 동진이 잘 지낸다. 요새 바쁘다]원주가 나를 덮어주고 있었다. 차단당한 채로. 단톡방에서.[성호: 오 그래? 어디 들어갔나?]
2월이 됐다.깁스는 3주째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왼손으로 휴대폰을 봤다.입력창의 한 줄은 그대로였다. 서연 씨, 저 박동진입니다. 매일 밤 대화방을 열어 그 한 줄을 확인했다. 지워지지 않았는지. 보내지지 않았는지. 장전된 총을 점검하듯이.월세 날이 지났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문을 두드렸다."총각, 이번 달 거는?""…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을 다쳐서 일을 못 해서요. 산재 나오면 바로 드릴게요."할아버지는 깁스를 보고 혀를 찼다."아이고. 알았다. 보름만 기다리꾸마."문이 닫혔다. 나는 노트북을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대기업 시절에 산. 이력서를 쓰던. 이틀 만에 팔렸다. 사십만 원.노트북이 사라진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채용 공고를 볼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더 이상 척할 필요가 없었다.*토요일 오전, 누가 문을 두드렸다.통장이었다. 26화에서 이상한 남자를 봤느냐고 묻던. 클립보드 대신 작은 봉투 뭉치를 들고 있었다."아이고, 새로 이사 온 총각이가. 반상회비 받으러 왔어요. 한 달에 오천 원."통장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깁스, 덥수룩한 수염, 푹 눌러쓴 모자. 몇 달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네, 잠깐만요."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는 동안, 통장은 현관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요 위에 간호사 아가씨 있제?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 그 아가씨 4월에 시집간다. 내가 청첩장 받았다 아이가. 봐라, 이쁘제."통장이 봉투 뭉치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베이지색 종이. 금박 테두리. 레이스 문양. 41화, 그녀의 책상 위에 있던 시안이 완성된 모습이었다.그리고 그 위에 사진. 벚꽃 아래, 하얀 드레스와 턱시도. 서로를 보며 웃는.신랑 정도윤 · 신부 한서연.4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2시.나는 오천 원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통장이 오천 원을 받아 들며 계속 말했다."그 아가씨 고생 많이 했다. 저 위
다른 간호사가 왔다. 오십 대. 수간호사 같은 얼굴. 무표정하게 라인을 잡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 설명도 없었다. 진통제가 들어갔다."깁스는 정형외과 선생님 오시면 할 거예요. 기다리세요."그녀는 그 말만 하고 커튼을 쳤다. 세게. 커튼 고리가 레일에서 쨍하고 울렸다.진통제가 퍼지기 시작했다. 손의 통증이 멀어졌다. 대신 귀가 밝아졌다.커튼 너머 스테이션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간호사들. 낮게, 그러나 들리게."…그 사람이야? 서연 쌤 말한 그?""응. 창문에 돌 던지고, 새벽에 전화하고. 경찰서까지 갔었대.""미친. 근데 왜 여기 와.""공사장에서 다쳤대. 일용직 한대.""서연 쌤 불쌍해 죽겠네. 결혼 앞두고 이게 뭐야. 요즘 겨우 좀 살 만하다더니.""수간 쌤이 7번 볼 때 두 명씩 들어가래. 혹시 모르니까."혹시 모르니까.나는 들것 위에서 그 말들을 들었다.스토커. 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모든 문장 사이에 있었다. 그 사람. 창문에 돌. 새벽에 전화. 경찰서. 혹시 모르니까.나는 이 병원에서, 그녀의 동료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진통제 때문인지 분노가 늦게 왔다. 한참 뒤에야, 천천히, 뜨겁게.그녀가 말했다.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병원 전체가 나를 알고 있었다.나는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다.내 입장을. 내 마음을. 83번 버스를. 강릉을. 두부를. 캔커피를.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오래.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만 듣는다. 경찰도, 어머니들도, 원주도, 이 간호사들도. 아무도 내 이야기를 묻지 않는다.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단 한 번만.*깁스를 한 채 새벽 두 시에 반지하로 돌아왔다.택시비 이만 원. 응급실 비용은 산재 처리한다고 반장이 말했다. 한 달은 일을 못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한 달이면 월세를 못 낸다.매트리스에 누웠다.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천장을 봤다.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돈. 손. 일. 그리고 3월 초, 그녀의 신혼집 입주
1월 둘째 주. 현장은 신축 오피스텔 공사장이었다.오후 세 시, 3층 슬라브에서 거푸집 자재를 나르던 중이었다. 잠을 못 잔 지 사흘째였다. 제야 이후로, 눈을 감으면 스파클러 불꽃이 보였다. 불꽃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발이 꼬였다. 자재 더미가 무너졌다. 나는 오른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그 위로 합판 모서리가 떨어졌다.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둔하고 짧았다.그다음은 소리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커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 꺼졌다.*현장 반장이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구급대원이 물었다."가까운 데 삼성병원 응급실 갑니다. 괜찮으시죠?"삼성병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데는 안 됩니까.""손 상태 보면 빨리 가야 돼요. 거기가 제일 가깝습니다."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렸다. 나는 들것 위에서 천장을 봤다. 오른손이 붓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그녀는 병동 간호사다. 응급실이 아니다. 3화에서 건강검진 때 봤을 때도, 12화에서 간 수치 상담 때 봤을 때도, 그녀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 있었다.응급실에는 없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응급실은 시끄러웠다. 커튼으로 나뉜 베드들. 모니터 소리. 의사를 부르는 방송. 누군가의 신음.나는 7번 베드에 눕혀졌다. 젊은 의사가 와서 손을 봤다. 엑스레이. 골절. 두 군데. 수술은 필요 없고 정복 후 깁스. 진통제부터."간호사 선생님, 7번 베드 진통제 라인 좀 잡아주세요."커튼 너머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얀 크록스. 빠르고 가벼운.커튼이 걷혔다."박동진 님, 팔 좀 이쪽으로…"그녀였다.하늘색 간호복. 마스크. 그 위로 고양이 같은 눈매. 손에 수액 세트와 주사 바늘을 든 채.그녀가 나를 봤다. 차트의 이름을 다시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그녀의 손에서 수액 세트가 떨어졌다. 바닥에. 투명한 튜브가 풀리며 뱀처럼 굴렀다.*우리는 서로를 봤다. 삼 초. 오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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