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모든 폭풍이 지나가고, 뉴욕의 저택에는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센트럴파크의 화사한 벚꽃이 도시를 물들이던 그해 봄, 루나의 삶에도 가장 큰 기적이 찾아왔다. 한국에 있던 두 아이와 마침내 다시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루나는 한국을 여러 차례 오가며 떨어져 지냈던 시간을 메웠고,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법적 절차와 생활을 준비했다. 유토는 그 모든 과정에서 결정을 대신하려 하지 않고, 엄마인 루나의 선택을 존중하며 든든하게 곁을 지켰다.그리고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어느 화창한 봄날, 뉴욕 JFK 국제공항 입국장.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두 아이가 루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엄마!”그 한마디에 루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이들이 품으로 뛰어들며 익숙한 체온과 향기가 닿는 순간,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그리움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엄마…… 보고 싶었어.”“엄마도…… 엄마도 너무 보고 싶었어. 너무 늦게 데리러 왔지, 미안해…….”딸아이가 작은 손으로 루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말라고 토닥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잠시 후, 루나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가오자 유토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안녕. 엄마한테 너희 이야기 많이 들었어. 만나서 정말 반가워.”수줍게 그를 올려다보던 아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저씨가…… 엄마 많이 도와주셨어요?”“엄마도 나를 많이 도와줬단다.”유토가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딸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이제 엄마랑 계속 같이 살 수 있어요?”“그럼. 이제 계속 엄마랑 함께 지낼 수 있어.”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날 공항을 나서는 네 사람의 머리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낯선 언어와 새로운 학교에 아이들이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루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었다. 유토 역시 바쁜 일정을 쪼개 학교
“……거기서 손 떼.” 유토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낮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 짧은 한마디가 떨어진 순간, 낡은 객실 안의 공기는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문가에 선 유토의 시선은 오직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루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번진 핏자국과 부어오른 뺨, 찢어진 드레스 아래로 가늘게 떨리는 어깨까지. 불과 몇 시간 전, 눈부신 진주빛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여자의 모습이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 광경을 눈에 담는 순간, 유토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월스트리트에서 수조 원의 자금을 움직이며 어떤 위기 앞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던 남자였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유토의 등장에 사색이 된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문 앞에 선 경찰과 경호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유토의 서늘한 눈빛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유…… 유토. 이건 오해야. 우린 원래 부부였어. 부부 사이에 잠깐 다툼이 있었던 것뿐이라고!” 비열한 변명에 유토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부부?” 그가 낮게 되물었다. “네가 지금 그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넌 그 여자를 버렸어. 그것도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유토가 한 걸음 다가서자 궁지에 몰린 다니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우리 둘 사이의 일이야! 한루나는 원래 내 여자였다고! 네가 돈 좀 많다고 남의 여자를 마음대로 빼앗아도 되는 줄 알아?” 악에 받친 고함에 유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끝내 몰랐던 게 하나 있군. 루나는 네가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어. 그리고 네가 버렸다고 해서 그 여자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닥쳐…… 닥치라고!” 이성을 잃은 다니엘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인 위스키병에 닿았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광기가 번뜩였다. 쨍그랑! 벽에 내리친 병이 산산조각
뉴욕 맨해튼 외곽의 낡은 호텔. 화려한 마천루의 불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 좁고 음침한 객실 안에는 독한 위스키 냄새와 눅눅한 담배 연기가 진하게 뒤엉켜 있었다. 얼룩진 카펫 위에는 빈 술병들이 뒹굴었고, 며칠째 치우지 않은 음식 포장지와 구겨진 독촉장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날의 치욕적인 파티가 끝난 지 닷새째. 다니엘의 인생은 무너지고 있었다. 한때 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뉴욕의 최고급 호텔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남자. 성공한 사업가라는 허울을 두르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다니엘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는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위스키병을 기울였다. 며칠째 면도하지 않은 턱에는 거뭇한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고, 핏발 선 눈 밑으로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침대 위에 던져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국 투자자의 이름이었다. 다니엘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문자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다니엘 씨. 뉴욕 파티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한국 투자 업계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주요 거래처들이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있습니다.] [투자금 사용 내역에 대한 소명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까지 답변이 없으면 사기 및 배임 혐의에 대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습니다.] [더 이상 연락을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빌어먹을……!” 다니엘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며 갈색 액체가 얼룩진 벽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업하다 보면 손해도 보는 거지!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고!” 아무도 듣지 않는 방 안에서 악을 써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닷새 전 파티장에서 드러난 그의 추악한 과거는 이미 한국과 뉴욕의 사업 관계자들에게 퍼져 있었다. 투자자들은 등을 돌렸고, 거래처들은 하나둘 계약을 끊었다. 자금줄이 막히면서 은행 대출마저 회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누가 그랬습니까?” 파티장의 공기를 단숨에 영하로 얼려버릴 듯한 서늘하고 위압적인 저음이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군중이 홍해처럼 양옆으로 갈라졌고, 그 기백에 눌린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구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수조 원의 자금을 움직이며, 단 한 번의 결정으로 거대 기업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사모펀드의 수장. 금융계에서 ‘월스트리트의 제왕’이라 불리는 유토였다.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는 흔적조차 사라진 채, 그의 시선이 곧장 루나에게 향했다. 붉은 와인에 처참하게 젖은 샴페인 골드빛 드레스와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뺨에 선명하게 부어오른 붉은 손자국. 그것을 확인한 순간 유토의 눈동자가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나에게 다가가 자신의 턱시도 재킷을 벗어 그녀의 떨리는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와인에 젖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괜찮아? 많이 아파?” 나직한 물음에 루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손수건이 부어오른 뺨에 스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작게 움찔했다. 유토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분노를 억눌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그 서늘한 무표정이 주변 공기를 더욱 섬뜩하게 죄어왔다. 유토가 천천히 몸을 돌려 다니엘을 직시했다. “이 사람 얼굴에 손을 댄 게, 당신입니까?” 다니엘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까지 루나에게 삿대질하며 호통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부도 위기에 처한 자신의 회사를 구원해 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수차례 미팅을 요청했지만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던 인물이, 지금 자신이 뺨을 때린 전처를 감싸 안듯 보호하고 있었다. 새하얗게 굳어 있던 다니엘은 이내 필
맨해튼의 밤은 수천 개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허드슨강 너머로 펼쳐진 마천루의 불빛이 검은 밤하늘을 수놓고, 뉴욕의 심장부에 자리한 초호화 그랜드 볼룸 앞에는 세계 각국의 VIP들을 태운 리무진들이 끝없이 줄지어 들어섰다. 오늘 밤 이곳에서는 아시아와 미국의 정재계 거물들, 글로벌 투자은행의 최고경영자들, 그리고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거대 자본의 주인들이 참석하는 특별한 투자 갈라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참석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인물은 단연 두 사람이었다. 월스트리트의 젊은 제왕이라 불리는 유토, 그리고 최근 글로벌 투자업계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투자회사 ‘스텔라’의 베일에 싸인 여성 대표. 스텔라는 불과 몇 년 사이 놀라운 투자 성과를 기록하며 월스트리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회사였다. 특히 이번 갈라에서는 스텔라의 새로운 글로벌 투자 프로젝트가 공개될 예정이었기에 세간의 이목이 더욱 쏠려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회사를 이끄는 대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공식 행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베일에 싸인 여인이 마침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같은 시각, 그랜드 볼룸 입구에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자, 먼저 차에서 내린 유토가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오늘 밤의 주인공. 도착했어.” 차 안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토, 자꾸 그렇게 말하면 괜히 부담스럽잖아.” “부담 가질 것 없어. 오늘 밤 뉴욕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인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유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린 루나의 발끝에 샴페인 골드빛 드레스 자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어제 5번가의 명품 부티크에서 픽업한,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오뜨 꾸뛰르 드레스였다. 매끄러운 실크 원단은 루나의 우아한 어깨선과 가느다란 허리
같은 시각, 맨해튼 중심가의 한 호텔 객실 안은 팽팽한 긴장감과 짜증 섞인 고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 내일 그 중요한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랑 가방 하나 새로 사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먼 뉴욕까지 따라왔는데!"화장대 앞에 앉은 수지가 신경질적으로 브러시를 집어 던지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몸에는 화려한 명품 로고가 박힌 옷과 장신구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창가에서 초조하게 서류를 넘기던 다니엘은 미간을 구기며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수지야, 제발 철 좀 들어라! 지금 네 명품 백 타령할 때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번 미국 출장에 회사 명운이 걸려 있는 거 몰라?"과거 억울한 스캔들을 뒤집어씌워 루나를 빈털터리로 내쫓은 뒤, 다니엘은 루나에게서 빼앗은 막대한 위자료와 재산으로 야심 차게 화장품 유통 회사 'D&S 코스메틱'을 설립했다. 처음 몇 년은 루나가 남겨둔 자금 덕분에 제법 굴러가는 듯했다. 수지 역시 본처를 몰아내고 안방마님 자리를 차지한 승리감에 취해 매일같이 백화점 VIP 라운지를 드나들며 흥청망청 돈을 뿌려댔다. 하지만 실력도, 화장품에 대한 철학도 없이 오직 허세로만 운영되던 회사가 오래 버틸 리 없었다. 트렌드를 읽지 못한 신제품들은 연달아 참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수지의 끝없는 사치와 다니엘의 무모한 북미 시장 확장 시도가 겹치면서 회사는 순식간에 심각한 자금난과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한국의 투자자들로부터 당장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다니엘에게 남은 유일한 동아줄은 단 하나뿐이었다. 현재 미국 뷰티 업계를 통째로 뒤흔들고 있는 글로벌 뷰티 테크 기업 '스텔라(Stella)'와의 AI 기술 제휴를 성사시키는 것. 다니엘은 한 달 넘게 스텔라 본사에 대표와의 독대를 요청하며 매달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고, 결국 회사에 남은 마지막 자금까지 박박 긁어모아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서야 내일 밤 열리는 맨해튼 VIP 투자 갈라 파티의 초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