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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이미 그 신뢰를 이용하고 있었다

Author: 혜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2 13:21:25

019화. 이미 그 신뢰를 이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재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파일을 다시 열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이안에게 거리를 주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과거의 나와 반대로 하고 싶어서.

싫다는 말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였나.

기다리는 건 내 습관이었다.

사람이 자기 입으로 말할 때까지.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내가 손대지 않아도 결국 내 쪽으로 오게 될 때까지.

휴대폰이 울렸다.

업무용 메신저가 아니라 개인 메시지였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이안.

저장된 이름 두 글자.

메시지는 짧았다.

[밴드 갈았어.]

나는 몇 초 동안 그 문장을 봤다.

어젯밤 내가 남긴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답장을 썼다.

[잘했네.]

보내기 직전에 멈췄다.

너무 이상했다.

지웠다.

[손은 괜찮아?]

이번에는 보냈다.

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

답은 늦었다.

한참 뒤 한 줄이 왔다.

[멀쩡해.]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는 바로 표정을 지웠다.

옆자리 재희가 봤는지 물었다.

“뭐야.”

“뭐가요.”

“방금 웃었잖아.”

“안 웃었습니다.”

“웃었어.”

“자료 보세요.”

재희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요즘 누구 만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만난다.

그건 맞았다.

며칠째 거의 매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면 설명할 말이 없었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동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게 끼어 있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게 가장 정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도 지금은 부족했다.

“아니면 됐고.”

재희가 돌아섰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봤다.

새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

[오늘은 오냐.]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처음이었다.

내가 먼저 오늘 갈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이안이 먼저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아니었다.

이안은 내가 오느냐고 묻고 있었을 뿐이다.

먼저 만나자고 한 건 아니다.

그래도 달랐다.

어제까지는 내가 가면 받아줬다.

오늘은 내가 오기 전에 확인했다.

나는 답장을 천천히 썼다.

[가도 돼?]

읽음.

이번에는 답이 더 늦었다.

삼십 초.

일 분.

이 분.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재희가 옆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화면이 켜졌다.

[맘대로 해.]

그 문장을 보고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굳이 숨기지 못했다.

“봐, 웃네.”

재희가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일하세요.”

“진짜 누구 있구나.”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퇴근 시간을 확인했다.

* * *

성당에 도착했을 때 이안은 마당에서 빨래를 걷고 있었다.

햇빛이 거의 사라진 시간이었다.

검은 작업복 위로 묶은 머리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왔냐.”

“응.”

짧은 대답 뒤에 나는 빨랫줄 쪽으로 걸어갔다.

“도와줄까?”

“됐어. 거의 다 했어.”

이안은 수건을 바구니에 넣었다.

손바닥에 새 밴드가 붙어 있었다.

내가 두고 간 것.

시선이 거기에 머물렀다가 올라갔다.

“갈았네.”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줄까?”

“확인했으니까 됐어.”

“누가 확인시켜 달랬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을 숨기지는 않았다.

나는 수건 바구니 손잡이를 봤다.

“그건 내가 들게.”

“싫어.”

“그럼 네가 들어.”

바로 물러서자 이안이 나를 쳐다봤다.

“진짜 안 들어?”

“싫다며.”

“……됐어.”

이안이 바구니를 들었다.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무거워?”

“아니.”

“그럼 왜.”

“그냥 네가 들어.”

나는 웃지 않았다.

바구니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도 그의 손에 닿지는 않았다.

이안이 먼저 손을 놓은 다음 들었다.

“이런 건 잘도 시키네.”

“봉사하러 왔다며.”

“내가?”

“어제 네가 그랬잖아. 지금부터 하면 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바구니를 들고 부속동으로 걸었다.

이안이 옆으로 따라왔다.

어제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팔이 닿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반 걸음 앞서지도 않았다.

“어제.”

이안이 말했다.

“응.”

“나 자고 있을 때 뭐 했어.”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죽 치우고.”

“그거 말고.”

“메모 남기고.”

“또.”

나는 이안을 봤다.

그는 앞만 보고 있었다.

“뭘 궁금해하는데.”

“내가 잤잖아.”

“알아.”

“그동안 뭐 했냐고.”

질문의 뜻을 이제 알 것 같았다.

나는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안 했어.”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나도 멈췄다.

“진짜?”

“응.”

짧게 대답한 뒤 그대로 두지 않았다.

“네 머리끈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주워서 책상에 올려놓은 게 전부야.”

이안은 나를 가만히 봤다.

“안 건드렸어?”

“안 건드렸어.”

“왜.”

그 질문이 뜻밖이었다.

“자고 있었으니까.”

“그게 이유야?”

“그거면 충분하지.”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먼저 걸었다.

몇 걸음 뒤에 발소리가 따라왔다.

부속동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안이 다시 불렀다.

“한태겸.”

돌아봤다.

그가 손바닥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새 밴드가 구겨졌다가 다시 펴졌다.

“나.”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나는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이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어제 내가 잔 거.”

“응.”

“다른 데 가서 말하지 마.”

처음에는 웃길 뻔했다.

그런데 얼굴을 보고 그만뒀다.

농담할 일이 아니었다.

“안 해.”

“미정 이모한테도.”

“알겠어.”

“누구한테도.”

“말 안 해.”

그제야 이안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나는 그걸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숨겨?”

묻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이안의 눈이 굳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는 먼저 덧붙였다.

한참 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자는 건.”

목소리가 낮았다.

“남 앞에서 하는 거 아니야.”

그 말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이안이 따라왔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알았다.

서이안이 내 앞에서 잠들었다는 건,

피곤해서 생긴 실수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

나는 그 신뢰를 이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미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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