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
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
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
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
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
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
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
"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
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
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옥연은 부엌 구석에 나뒹구는 썩은 부지깽이를 집어 들고 아궁이 안의 검은 재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아궁이 바로 옆 구석에는 찌그러진 무쇠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두꺼운 솥뚜껑 위에는 검붉은 녹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옥연은 앞치마 대신 둘러낸 치맛자락을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잡아당기며 솥 표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깊은 칼자국과 옛 화상 흔적에 아프게 스쳤다.
그때, 부엌 천장 구석의 녹슨 쇠고리에 걸려 있는 물건 하나가 옥연의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먼지와 먼지벌레 껍질로 범벅이 되어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할 낡은 등불이었다.
유리창은 한쪽이 크게 깨져 있었고, 그 안의 초는 형태도 없이 녹아내려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옥연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삐걱거리는 쇠고리에서 등불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곳을 지키던 분이 계셨다면... 제발 오늘 하루만 몸을 누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매 끝을 내어 등불의 먼지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가문이 망하고 부모를 여의었어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배운 정례와 마음가짐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를 대신했던 주머니 속을 가만히 뒤졌다.
경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다시피 얻어낸 쌀 한 홉이 헝겊 조각에 싸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터져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옥연은 망설임 없이 우물가로 다가가 쌀을 씻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글 때마다,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옥연의 손길은 조금도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쌀알 하나하나를 부서지지 않게 정성스레 헹궈내고, 부엌 아궁이 안으로 말린 짚단을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부지깽이 끝으로 작은 불씨를 살려내자, 노란 불꽃이 아궁이 속에서 작게 피어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부엌 안을 가득 채우며 옥연의 눈시울을 붉게 적셨다.
콜록거리며 매운 연기를 참아낸 옥연은 솥에 깨끗한 물을 채우고 뚜껑을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캄캄한 부엌 안으로 아주 천천히 퍼져 나갔다.
옥연은 제일 먼저 지어낸 가장 맑고 뜨거운 밥 한 숟갈을 작은 옹기 그릇에 정성껏 담아냈다.
그리고 그 밥그릇을 먼지를 닦아낸 낡은 등불 바로 앞에 바짝 올렸다.
"비록 보잘것없는 쌀밥 한 그릇이나... 제 정성입니다."
옥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아궁이 그을음과 핏방울이 옹기 그릇 가장자리에 조그만 자국을 남겼다.
"이 터의 주인이 계신다면,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십시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옥연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산천을 흔드는 듯한 거친 충격음이 삼강주막의 마당 전체를 사정없이 울렸다.
옥연의 작은 몸이 펄쩍 뛸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유옥연이!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나오지 못해!"
걸쾌한 사내의 고함이 차가운 강바람을 타고 부엌 안까지 사정없이 쳐들어왔다.
옥연의 심장이 바닥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최 참판의 수하들이었다.
경성에서부터 쥐잡듯 뒤쫓아오던 그 악마 같은 자들이 결국 이 외딴 나루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쾅! 쾅!
"이 년이 감히 참판 댁 어른의 수청을 거절하고 도망을 쳐?"
"문 안 열어? 썩어 문드러진 초가집 따위 당장 불태워 버리기 전에 나와라!"
대문 틀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짚가루와 흙 먼지가 사방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옥연은 숨을 죽인 채 등불 앞에 바짝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이빨이 다닥다닥 부딪힐 정도로 지독한 오한이 온몸을 덮쳐왔다.
여기서 잡히면 늙은 가와구치의 부속품으로 팔려 가거나, 최 참판의 매질에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느님이시여... 조상님이시여..."
옥연의 눈에서 떨어진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옹기 그릇에 담긴 뜨거운 밥 위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지이잉.
부엌 안의 공기가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궁이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노란 불꽃이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등불 안, 먼지투성이였던 잔해 위에서 푸르스름한 불씨 하나가 팍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옥연은 커다랗게 확대된 눈으로 등불의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씨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이하게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은은한 푸른빛이 등불의 깨진 유리창을 뚫고 나와 부엌 전체를 감쌌다.
"이... 무슨..."
차가운 기운이 부엌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강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강바닥 수심 속에서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싸늘함이었다.
푸른 불꽃은 이내 격렬하게 타오르며 검붉은 빛을 띠고 넘실거렸다.
옹기 그릇에 담긴 밥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김이 푸른 불꽃 속으로 모조리 흡수되어 사라졌다.
콰앙!
결국 삼강주막의 허술한 대문이 완전히 박살 나며 마당 바닥으로 쓰러졌다.
몽둥이와 쇠사슬을 든 사내 세 명이 거친 발걸음으로 마당의 흙을 짓밟으며 들어섰다.
"허, 이 년이 부엌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구나!"
대장 격인 거구의 사내가 침을 퉤 뱉으며 부엌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사내의 거친 손이 옥연의 뒷덜미를 낚아채려 부엌 안쪽으로 사정없이 뻗어 왔다.
옥연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이악물고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서 지저분한 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부엌 안을 꽉 채웠다.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강바닥에서 직접 울려 나오는 듯한, 뼛속까지 오한을 부르는 음성이었다.
"감히 내 제물에 흙먼지를 튀기는 미물이 있구나."
부엌 안으로 뻗어 나오던 사내의 손이 공중에서 딱 멈춰 섰다.
사내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다.
옥연 역시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등불 앞에서 일어난 푸른 연기가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연기는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며 한 사내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신이 벼려낸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고 수려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그림으로조차 감히 그려내지 못할 비현실적인 미모에, 옥연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칼날처럼 또렷하고 곧게 솟은 콧날과 단정하게 굳게 닫힌 붉은 입매, 차갑게 내리뻗은 턱선이 지독하리만치 수려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짙은 속눈썹 그늘 아래 깔린 그 눈빛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과 위압감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어깨를 넘어 길게 늘어진 푸른빛의 짙은 흑발은 바람이 없는데도 미세하게 불어오는 기운에 나부끼고 있었다.
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를 걸친 사내가 옥연과 추격자들 사이에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도포 자락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찰랑거리듯 기이하게 빛났다.
"너, 너 뭐냐! 어떤 놈인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사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몽둥이를 고쳐 겨눴다.
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찌그러진 솥과, 자신이 방금 기운을 흡수한 밥그릇을 무심하게 쏘아보았을 뿐이다.
"상한 쌀에 물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군."
남자가 수려한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입맛만 베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같이 때려잡아!"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공중으로 내리쳤다.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매를 가볍게 한 번 휘둘렀다.
쿠웅!
무거운 압력과 함께 강렬한 돌풍이 부엌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던 사내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크악!"
비명과 함께 사내 세 명이 마당 한가운데로 지푸라기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흙담장 벽에 세게 부딪힌 사내들은 비명조차 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옥연은 숨을 멈춘 채 바닥에 바짝 굳어 있었다.
장정 세 명을 손짓 하나로 날려버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색 눈동자가 옥연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닿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숨이 막힐 듯한 기운과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물이끼와 고요한 깊은 강물의 향이 풍겨 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어떠한 흠집도 허용하지 않는 수려하고 완벽한 이목구비가 옥연의 시야를 온통 가득 채웠다.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옥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롭고 잘생긴 눈매가 불쾌함으로 가늘어졌다.
"네가 나를 깨운 하인이냐."
"저... 저는..."
옥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남자는 옥연의 찌들어버린 치맛자락과 피 묻은 손가락을 차갑게 훑어내렸다.
"터무니없이 약하고 볼품없는 인간이로군."
남자가 고풍스러운 어조로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세로로 찢어진 청색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팍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수백 년 만에 깨어나 방금 과도하게 신력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남자의 투명하던 피부가 순식간에 반투명하게 희미해지며 영체가 빛을 잃고 점멸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커다랗고 창백한 손끝이 서서히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가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더니 바닥의 옥연을 향해 시선을 내리꽂았다.
"나 좀... 잘 잡거라."
"예...?"
옥연이 채 대답도 하기 전이었다.
남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신력이 파르르 떨리며 한순간에 팍 소리를 내고 꺼져 버렸다.
실체화가 해제되며 순간적으로 점멸한 남자의 거대한 무게감이 옥연의 작은 어깨 위로 그대로 쏠려 내렸다.
"...다음엔... 밥 좀... 제대로... 지어..."
푹.
남자의 고개가 옥연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차갑고 기다란 흑발이 옥연의 뺨을 간지럽히며 어지럽게 흐트러져 내렸다.
"저, 저기요! 정신 차려 보세요!"
옥연은 자신을 바짝 짓누르는 남자의 단단한 무게와,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숨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삼강주막의 스산한 밤하늘 아래, 의식을 잃은 남자를 안은 옥연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캄캄한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