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By:  고독한포켓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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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쌀이로군. 하지만 정성은 있다." 1936년, 마지막 쌀 한 줌으로 올린 밥이 70년간 잠들어 있던 삼강의 터주신을 깨웠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고, 그녀는 하루하루 늙어간다. "네 눈가에 진 주름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증거인데, 왜 부끄러워하느냐." 불멸의 신과 필멸의 여자, 낡은 주막에서 피어난 시간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 작품은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리에 실존하는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문화재)과,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주모 유옥연 여사(1900년대~2005년)의 삶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세 강이 만나는 나루터 위의 낡은 주막, 외상값을 흙벽에 새기던 풍경, 그리고 한 여인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부뚜막의 온기는 실제 역사에서 빌려왔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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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대문을 부수고 강림하신 까탈스러운 구원자

-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

​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

​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

​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

​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

​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

​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

​"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

​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

​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옥연은 부엌 구석에 나뒹구는 썩은 부지깽이를 집어 들고 아궁이 안의 검은 재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아궁이 바로 옆 구석에는 찌그러진 무쇠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두꺼운 솥뚜껑 위에는 검붉은 녹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옥연은 앞치마 대신 둘러낸 치맛자락을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잡아당기며 솥 표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깊은 칼자국과 옛 화상 흔적에 아프게 스쳤다.

​그때, 부엌 천장 구석의 녹슨 쇠고리에 걸려 있는 물건 하나가 옥연의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먼지와 먼지벌레 껍질로 범벅이 되어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할 낡은 등불이었다.

​유리창은 한쪽이 크게 깨져 있었고, 그 안의 초는 형태도 없이 녹아내려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옥연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삐걱거리는 쇠고리에서 등불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곳을 지키던 분이 계셨다면... 제발 오늘 하루만 몸을 누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매 끝을 내어 등불의 먼지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가문이 망하고 부모를 여의었어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배운 정례와 마음가짐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를 대신했던 주머니 속을 가만히 뒤졌다.

​경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다시피 얻어낸 쌀 한 홉이 헝겊 조각에 싸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터져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옥연은 망설임 없이 우물가로 다가가 쌀을 씻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글 때마다,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옥연의 손길은 조금도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쌀알 하나하나를 부서지지 않게 정성스레 헹궈내고, 부엌 아궁이 안으로 말린 짚단을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부지깽이 끝으로 작은 불씨를 살려내자, 노란 불꽃이 아궁이 속에서 작게 피어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부엌 안을 가득 채우며 옥연의 눈시울을 붉게 적셨다.

​콜록거리며 매운 연기를 참아낸 옥연은 솥에 깨끗한 물을 채우고 뚜껑을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캄캄한 부엌 안으로 아주 천천히 퍼져 나갔다.

​옥연은 제일 먼저 지어낸 가장 맑고 뜨거운 밥 한 숟갈을 작은 옹기 그릇에 정성껏 담아냈다.

​그리고 그 밥그릇을 먼지를 닦아낸 낡은 등불 바로 앞에 바짝 올렸다.

​"비록 보잘것없는 쌀밥 한 그릇이나... 제 정성입니다."

​옥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아궁이 그을음과 핏방울이 옹기 그릇 가장자리에 조그만 자국을 남겼다.

​"이 터의 주인이 계신다면,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십시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옥연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산천을 흔드는 듯한 거친 충격음이 삼강주막의 마당 전체를 사정없이 울렸다.

​옥연의 작은 몸이 펄쩍 뛸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유옥연이!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나오지 못해!"

​걸쾌한 사내의 고함이 차가운 강바람을 타고 부엌 안까지 사정없이 쳐들어왔다.

​옥연의 심장이 바닥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최 참판의 수하들이었다.

​경성에서부터 쥐잡듯 뒤쫓아오던 그 악마 같은 자들이 결국 이 외딴 나루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쾅! 쾅!

​"이 년이 감히 참판 댁 어른의 수청을 거절하고 도망을 쳐?"

​"문 안 열어? 썩어 문드러진 초가집 따위 당장 불태워 버리기 전에 나와라!"

​대문 틀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짚가루와 흙 먼지가 사방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옥연은 숨을 죽인 채 등불 앞에 바짝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이빨이 다닥다닥 부딪힐 정도로 지독한 오한이 온몸을 덮쳐왔다.

​여기서 잡히면 늙은 가와구치의 부속품으로 팔려 가거나, 최 참판의 매질에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느님이시여... 조상님이시여..."

​옥연의 눈에서 떨어진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옹기 그릇에 담긴 뜨거운 밥 위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지이잉.

​부엌 안의 공기가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궁이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노란 불꽃이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등불 안, 먼지투성이였던 잔해 위에서 푸르스름한 불씨 하나가 팍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옥연은 커다랗게 확대된 눈으로 등불의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씨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이하게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은은한 푸른빛이 등불의 깨진 유리창을 뚫고 나와 부엌 전체를 감쌌다.

​"이... 무슨..."

​차가운 기운이 부엌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강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강바닥 수심 속에서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싸늘함이었다.

​푸른 불꽃은 이내 격렬하게 타오르며 검붉은 빛을 띠고 넘실거렸다.

​옹기 그릇에 담긴 밥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김이 푸른 불꽃 속으로 모조리 흡수되어 사라졌다.

​콰앙!

​결국 삼강주막의 허술한 대문이 완전히 박살 나며 마당 바닥으로 쓰러졌다.

​몽둥이와 쇠사슬을 든 사내 세 명이 거친 발걸음으로 마당의 흙을 짓밟으며 들어섰다.

​"허, 이 년이 부엌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구나!"

​대장 격인 거구의 사내가 침을 퉤 뱉으며 부엌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사내의 거친 손이 옥연의 뒷덜미를 낚아채려 부엌 안쪽으로 사정없이 뻗어 왔다.

​옥연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이악물고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서 지저분한 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부엌 안을 꽉 채웠다.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강바닥에서 직접 울려 나오는 듯한, 뼛속까지 오한을 부르는 음성이었다.

​"감히 내 제물에 흙먼지를 튀기는 미물이 있구나."

​부엌 안으로 뻗어 나오던 사내의 손이 공중에서 딱 멈춰 섰다.

​사내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다.

​옥연 역시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등불 앞에서 일어난 푸른 연기가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연기는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며 한 사내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신이 벼려낸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고 수려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그림으로조차 감히 그려내지 못할 비현실적인 미모에, 옥연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칼날처럼 또렷하고 곧게 솟은 콧날과 단정하게 굳게 닫힌 붉은 입매, 차갑게 내리뻗은 턱선이 지독하리만치 수려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짙은 속눈썹 그늘 아래 깔린 그 눈빛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과 위압감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어깨를 넘어 길게 늘어진 푸른빛의 짙은 흑발은 바람이 없는데도 미세하게 불어오는 기운에 나부끼고 있었다.

​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를 걸친 사내가 옥연과 추격자들 사이에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도포 자락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찰랑거리듯 기이하게 빛났다.

​"너, 너 뭐냐! 어떤 놈인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사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몽둥이를 고쳐 겨눴다.

​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찌그러진 솥과, 자신이 방금 기운을 흡수한 밥그릇을 무심하게 쏘아보았을 뿐이다.

​"상한 쌀에 물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군."

​남자가 수려한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입맛만 베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같이 때려잡아!"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공중으로 내리쳤다.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매를 가볍게 한 번 휘둘렀다.

​쿠웅!

​무거운 압력과 함께 강렬한 돌풍이 부엌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던 사내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크악!"

​비명과 함께 사내 세 명이 마당 한가운데로 지푸라기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흙담장 벽에 세게 부딪힌 사내들은 비명조차 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옥연은 숨을 멈춘 채 바닥에 바짝 굳어 있었다.

​장정 세 명을 손짓 하나로 날려버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색 눈동자가 옥연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닿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숨이 막힐 듯한 기운과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물이끼와 고요한 깊은 강물의 향이 풍겨 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어떠한 흠집도 허용하지 않는 수려하고 완벽한 이목구비가 옥연의 시야를 온통 가득 채웠다.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옥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롭고 잘생긴 눈매가 불쾌함으로 가늘어졌다.

​"네가 나를 깨운 하인이냐."

​"저... 저는..."

​옥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남자는 옥연의 찌들어버린 치맛자락과 피 묻은 손가락을 차갑게 훑어내렸다.

​"터무니없이 약하고 볼품없는 인간이로군."

​남자가 고풍스러운 어조로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세로로 찢어진 청색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팍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수백 년 만에 깨어나 방금 과도하게 신력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남자의 투명하던 피부가 순식간에 반투명하게 희미해지며 영체가 빛을 잃고 점멸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커다랗고 창백한 손끝이 서서히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가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더니 바닥의 옥연을 향해 시선을 내리꽂았다.

"나 좀... 잘 잡거라."

​"예...?"

​옥연이 채 대답도 하기 전이었다.

​남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신력이 파르르 떨리며 한순간에 팍 소리를 내고 꺼져 버렸다.

​실체화가 해제되며 순간적으로 점멸한 남자의 거대한 무게감이 옥연의 작은 어깨 위로 그대로 쏠려 내렸다.

​"...다음엔... 밥 좀... 제대로... 지어..."

​푹.

​남자의 고개가 옥연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차갑고 기다란 흑발이 옥연의 뺨을 간지럽히며 어지럽게 흐트러져 내렸다.

​"저, 저기요! 정신 차려 보세요!"

​옥연은 자신을 바짝 짓누르는 남자의 단단한 무게와,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숨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삼강주막의 스산한 밤하늘 아래, 의식을 잃은 남자를 안은 옥연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캄캄한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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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대문을 부수고 강림하신 까탈스러운 구원자
-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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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은혜 갚는 신령은 대문짝을 고쳐라
​동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도 전에 차가운 서리가 마당 구석구석을 하얗게 덮어 나갔다.​강바람을 품은 새벽 공기가 찌그러진 부엌 창살 틈으로 스며들어 옥연의 뺨을 서늘하게 찔렀다.​옥연은 밤새 어깨에 얹혀 있던 차가운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자신을 안고 쓰러졌던 남자는 새벽녘 푸른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그가 정말 신령인지, 아니면 환각을 본 것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하지만 마당 한가운데에 처참하게 박살 난 대문짝과 흙담장의 파편이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옥연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낡은 짚신을 고쳐 신었다.​어깨와 목덜미에는 남자의 차가운 머리칼이 스쳤던 감각과 얼음 같은 체온이 여전히 아리게 남아 있었다.​"생각할 시간에 몸이라도 움직여야지."​옥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부엌 구석에 놓인 낡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마당으로 들어서자 살얼음이 박힌 흙바닥 위로 부서진 목재와 짚가루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최 참판의 수하들이 날아간 담장 벽에는 짚단과 흙이 움푹 파여 있었다.​그 자리에 남아 있던 기분 나쁜 핏자국은 밤새 내린 서리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옥연은 빗자루를 틀어쥐고 부서진 대문나무 조각들을 한곳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나무토막을 줍는 손끝이 추위에 붉게 마비되어 갔지만, 옥연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당장 대문이 없으면 밤사이에 짐승이나 나쁜 사람이 들어와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목수에게 맡겨 대문을 새로 짜려면 적어도 돈 한 냥은 족히 들어갈 터였다.​주머니 속에는 먼지 뿐.​옥연은 한숨을 삼키며 쪼그려 앉아 부서진 경첩을 짚어 들었다.​그때였다.​"미물아."​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서늘하고 나직한 음성에 옥연의 어깨가 굳어졌다.​인간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깊은 강물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울림이었다.​옥연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대문 틀 옆을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드는 기둥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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