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삼강(三江), 그 등불 아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By:  고독한포켓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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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쌀이로군. 하지만 정성은 있다." 1936년, 마지막 쌀 한 줌으로 올린 밥이 70년간 잠들어 있던 삼강의 터주신을 깨웠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고, 그녀는 하루하루 늙어간다. "네 눈가에 진 주름이 우리가 함께 살아온 증거인데, 왜 부끄러워하느냐." 불멸의 신과 필멸의 여자, 낡은 주막에서 피어난 시간조차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 작품은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리에 실존하는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문화재)과,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주모 유옥연 여사(1900년대~2005년)의 삶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세 강이 만나는 나루터 위의 낡은 주막, 외상값을 흙벽에 새기던 풍경, 그리고 한 여인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부뚜막의 온기는 실제 역사에서 빌려왔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사건은 허구이며, 실존 인물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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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대문을 부수고 강림하신 까탈스러운 구원자

-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

​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

​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

​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

​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

​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

​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

​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

​"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

​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

​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

​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옥연은 부엌 구석에 나뒹구는 썩은 부지깽이를 집어 들고 아궁이 안의 검은 재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아궁이 바로 옆 구석에는 찌그러진 무쇠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두꺼운 솥뚜껑 위에는 검붉은 녹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옥연은 앞치마 대신 둘러낸 치맛자락을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잡아당기며 솥 표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깊은 칼자국과 옛 화상 흔적에 아프게 스쳤다.

​그때, 부엌 천장 구석의 녹슨 쇠고리에 걸려 있는 물건 하나가 옥연의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먼지와 먼지벌레 껍질로 범벅이 되어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할 낡은 등불이었다.

​유리창은 한쪽이 크게 깨져 있었고, 그 안의 초는 형태도 없이 녹아내려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옥연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삐걱거리는 쇠고리에서 등불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곳을 지키던 분이 계셨다면... 제발 오늘 하루만 몸을 누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매 끝을 내어 등불의 먼지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가문이 망하고 부모를 여의었어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배운 정례와 마음가짐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옥연은 족두리를 대신했던 주머니 속을 가만히 뒤졌다.

​경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걸하다시피 얻어낸 쌀 한 홉이 헝겊 조각에 싸여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터져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옥연은 망설임 없이 우물가로 다가가 쌀을 씻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글 때마다,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옥연의 손길은 조금도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쌀알 하나하나를 부서지지 않게 정성스레 헹궈내고, 부엌 아궁이 안으로 말린 짚단을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부지깽이 끝으로 작은 불씨를 살려내자, 노란 불꽃이 아궁이 속에서 작게 피어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부엌 안을 가득 채우며 옥연의 눈시울을 붉게 적셨다.

​콜록거리며 매운 연기를 참아낸 옥연은 솥에 깨끗한 물을 채우고 뚜껑을 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캄캄한 부엌 안으로 아주 천천히 퍼져 나갔다.

​옥연은 제일 먼저 지어낸 가장 맑고 뜨거운 밥 한 숟갈을 작은 옹기 그릇에 정성껏 담아냈다.

​그리고 그 밥그릇을 먼지를 닦아낸 낡은 등불 바로 앞에 바짝 올렸다.

​"비록 보잘것없는 쌀밥 한 그릇이나... 제 정성입니다."

​옥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아궁이 그을음과 핏방울이 옹기 그릇 가장자리에 조그만 자국을 남겼다.

​"이 터의 주인이 계신다면, 부디 저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십시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옥연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산천을 흔드는 듯한 거친 충격음이 삼강주막의 마당 전체를 사정없이 울렸다.

​옥연의 작은 몸이 펄쩍 뛸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유옥연이!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나오지 못해!"

​걸쾌한 사내의 고함이 차가운 강바람을 타고 부엌 안까지 사정없이 쳐들어왔다.

​옥연의 심장이 바닥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최 참판의 수하들이었다.

​경성에서부터 쥐잡듯 뒤쫓아오던 그 악마 같은 자들이 결국 이 외딴 나루터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쾅! 쾅!

​"이 년이 감히 참판 댁 어른의 수청을 거절하고 도망을 쳐?"

​"문 안 열어? 썩어 문드러진 초가집 따위 당장 불태워 버리기 전에 나와라!"

​대문 틀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짚가루와 흙 먼지가 사방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옥연은 숨을 죽인 채 등불 앞에 바짝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이빨이 다닥다닥 부딪힐 정도로 지독한 오한이 온몸을 덮쳐왔다.

​여기서 잡히면 늙은 가와구치의 부속품으로 팔려 가거나, 최 참판의 매질에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느님이시여... 조상님이시여..."

​옥연의 눈에서 떨어진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옹기 그릇에 담긴 뜨거운 밥 위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지이잉.

​부엌 안의 공기가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궁이 속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던 노란 불꽃이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등불 안, 먼지투성이였던 잔해 위에서 푸르스름한 불씨 하나가 팍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옥연은 커다랗게 확대된 눈으로 등불의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씨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이하게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은은한 푸른빛이 등불의 깨진 유리창을 뚫고 나와 부엌 전체를 감쌌다.

​"이... 무슨..."

​차가운 기운이 부엌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 강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강바닥 수심 속에서 느껴질 법한 압도적인 싸늘함이었다.

​푸른 불꽃은 이내 격렬하게 타오르며 검붉은 빛을 띠고 넘실거렸다.

​옹기 그릇에 담긴 밥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김이 푸른 불꽃 속으로 모조리 흡수되어 사라졌다.

​콰앙!

​결국 삼강주막의 허술한 대문이 완전히 박살 나며 마당 바닥으로 쓰러졌다.

​몽둥이와 쇠사슬을 든 사내 세 명이 거친 발걸음으로 마당의 흙을 짓밟으며 들어섰다.

​"허, 이 년이 부엌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구나!"

​대장 격인 거구의 사내가 침을 퉤 뱉으며 부엌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사내의 거친 손이 옥연의 뒷덜미를 낚아채려 부엌 안쪽으로 사정없이 뻗어 왔다.

​옥연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이악물고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서 지저분한 비린내가 나는가 했더니."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부엌 안을 꽉 채웠다.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깊고 어두운 강바닥에서 직접 울려 나오는 듯한, 뼛속까지 오한을 부르는 음성이었다.

​"감히 내 제물에 흙먼지를 튀기는 미물이 있구나."

​부엌 안으로 뻗어 나오던 사내의 손이 공중에서 딱 멈춰 섰다.

​사내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다.

​옥연 역시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등불 앞에서 일어난 푸른 연기가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연기는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며 한 사내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신이 벼려낸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고 수려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그림으로조차 감히 그려내지 못할 비현실적인 미모에, 옥연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칼날처럼 또렷하고 곧게 솟은 콧날과 단정하게 굳게 닫힌 붉은 입매, 차갑게 내리뻗은 턱선이 지독하리만치 수려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짙은 속눈썹 그늘 아래 깔린 그 눈빛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로움과 위압감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어깨를 넘어 길게 늘어진 푸른빛의 짙은 흑발은 바람이 없는데도 미세하게 불어오는 기운에 나부끼고 있었다.

​기품 있는 짙은 남색 도포를 걸친 사내가 옥연과 추격자들 사이에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도포 자락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찰랑거리듯 기이하게 빛났다.

​"너, 너 뭐냐! 어떤 놈인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사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몽둥이를 고쳐 겨눴다.

​남자는 달려드는 사내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찌그러진 솥과, 자신이 방금 기운을 흡수한 밥그릇을 무심하게 쏘아보았을 뿐이다.

​"상한 쌀에 물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군."

​남자가 수려한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입맛만 베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같이 때려잡아!"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몽둥이를 공중으로 내리쳤다.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소매를 가볍게 한 번 휘둘렀다.

​쿠웅!

​무거운 압력과 함께 강렬한 돌풍이 부엌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던 사내의 거대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크악!"

​비명과 함께 사내 세 명이 마당 한가운데로 지푸라기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흙담장 벽에 세게 부딪힌 사내들은 비명조차 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옥연은 숨을 멈춘 채 바닥에 바짝 굳어 있었다.

​장정 세 명을 손짓 하나로 날려버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색 눈동자가 옥연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닿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숨이 막힐 듯한 기운과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물이끼와 고요한 깊은 강물의 향이 풍겨 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어떠한 흠집도 허용하지 않는 수려하고 완벽한 이목구비가 옥연의 시야를 온통 가득 채웠다.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옥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롭고 잘생긴 눈매가 불쾌함으로 가늘어졌다.

​"네가 나를 깨운 하인이냐."

​"저... 저는..."

​옥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남자는 옥연의 찌들어버린 치맛자락과 피 묻은 손가락을 차갑게 훑어내렸다.

​"터무니없이 약하고 볼품없는 인간이로군."

​남자가 고풍스러운 어조로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세로로 찢어진 청색 눈동자 안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팍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수백 년 만에 깨어나 방금 과도하게 신력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남자의 투명하던 피부가 순식간에 반투명하게 희미해지며 영체가 빛을 잃고 점멸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커다랗고 창백한 손끝이 서서히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가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더니 바닥의 옥연을 향해 시선을 내리꽂았다.

"나 좀... 잘 잡거라."

​"예...?"

​옥연이 채 대답도 하기 전이었다.

​남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 신력이 파르르 떨리며 한순간에 팍 소리를 내고 꺼져 버렸다.

​실체화가 해제되며 순간적으로 점멸한 남자의 거대한 무게감이 옥연의 작은 어깨 위로 그대로 쏠려 내렸다.

​"...다음엔... 밥 좀... 제대로... 지어..."

​푹.

​남자의 고개가 옥연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차갑고 기다란 흑발이 옥연의 뺨을 간지럽히며 어지럽게 흐트러져 내렸다.

​"저, 저기요! 정신 차려 보세요!"

​옥연은 자신을 바짝 짓누르는 남자의 단단한 무게와,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숨결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삼강주막의 스산한 밤하늘 아래, 의식을 잃은 남자를 안은 옥연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캄캄한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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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대문을 부수고 강림하신 까탈스러운 구원자
- 1936년 11월 (일제강점기 후반, 늦가을)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거칠게 엉켜 드는 삼강 나루터의 바람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볕 한 점 내리쬐지 않는 스산한 먹구름 아래로, 강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습한 강바람에 말라붙은 갈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꺾여 나갔다.​유옥연은 피멍이 든 손가락 끝을 찌들어버린 붉은 치맛자락 속에 사정없이 문질러 넣었다.​짚신 나부랭이 사이로 스며드는 젖은 흙탕물에 발가락 마디마디가 감각을 잃고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여기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던 그곳인가."​옥연의 잔잔한 시선이 허물어져 가는 초가지붕 끝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흙벽은 곳곳이 터져 나가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몰골이었다.​경성에서 쫓기듯 밤길을 달려온 지 오늘로 딱 보름째였다.​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거두고, 가문이 풍비박산 난 뒤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때 탄 집문서 한 장뿐이었다.​친척들의 차가운 외면과, 늙은 최 참판의 후처 자리로 팔아넘기려던 모진 손길을 피해 도망쳐 온 끝이 이 외딴 나루터의 폐가라니.​옥연은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꼬질꼬질한 종이 조각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주막이라더니, 당장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구나."​나직하게 읊조린 목소리가 서리 품은 강바람 속으로 맥없이 지워졌다.​옥연은 떨리는 등을 똑바로 펴고, 비스듬히 기운 대문 틀을 지나 캄캄한 부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부엌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둡고 스산했다.​바닥에는 말라붙은 흙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거미줄이 아궁이 위를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옥연은 족두리 대신 두르고 있던 낡은 수건을 풀어서 머리를 단단히 고쳐 매었다.​슬퍼하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여유 따위는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당장 오늘 밤의 추위를 버티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저 아득한 강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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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은혜 갚는 신령은 대문짝을 고쳐라
​동녘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도 전에 차가운 서리가 마당 구석구석을 하얗게 덮어 나갔다.​강바람을 품은 새벽 공기가 찌그러진 부엌 창살 틈으로 스며들어 옥연의 뺨을 서늘하게 찔렀다.​옥연은 밤새 어깨에 얹혀 있던 차가운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자신을 안고 쓰러졌던 남자는 새벽녘 푸른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그가 정말 신령인지, 아니면 환각을 본 것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하지만 마당 한가운데에 처참하게 박살 난 대문짝과 흙담장의 파편이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옥연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낡은 짚신을 고쳐 신었다.​어깨와 목덜미에는 남자의 차가운 머리칼이 스쳤던 감각과 얼음 같은 체온이 여전히 아리게 남아 있었다.​"생각할 시간에 몸이라도 움직여야지."​옥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부엌 구석에 놓인 낡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마당으로 들어서자 살얼음이 박힌 흙바닥 위로 부서진 목재와 짚가루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최 참판의 수하들이 날아간 담장 벽에는 짚단과 흙이 움푹 파여 있었다.​그 자리에 남아 있던 기분 나쁜 핏자국은 밤새 내린 서리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옥연은 빗자루를 틀어쥐고 부서진 대문나무 조각들을 한곳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나무토막을 줍는 손끝이 추위에 붉게 마비되어 갔지만, 옥연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당장 대문이 없으면 밤사이에 짐승이나 나쁜 사람이 들어와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목수에게 맡겨 대문을 새로 짜려면 적어도 돈 한 냥은 족히 들어갈 터였다.​주머니 속에는 먼지 뿐.​옥연은 한숨을 삼키며 쪼그려 앉아 부서진 경첩을 짚어 들었다.​그때였다.​"미물아."​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서늘하고 나직한 음성에 옥연의 어깨가 굳어졌다.​인간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깊은 강물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울림이었다.​옥연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대문 틀 옆을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드는 기둥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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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첫 번째 손님과 질투의 서막 2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노 사공의 영혼을 통째로 구원하는 맑고 경이로운 온기였다.​김 씨의 검게 탄 뺨 위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국그릇 안으로 들어갔다.​"살았다... 살았어..."​김 씨가 놋대접을 부여잡고 바닥에 고개를 숙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이 따뜻한 국 한 사발이... 이 늙은이를 살렸소...! 주모,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노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순수한 감사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그 정순한 감사는 옥연이 정성껏 끓여낸 무쇠솥을 매개로 삼아 부엌 구석의 남자를 향해 폭풍처럼 쏠려 들어갔다.​지이잉!​부엌 전체의 공기가 산천을 흔들 듯 기괴한 울림을 냈다.​상마루에 서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노 사공의 진심 어린 감사가 솥을 거쳐 남자의 가슴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꽂혀 들어왔다.​수백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정순하고 경이로운 힘이 남자의 형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반투명하게 비쳐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한순간에 짙은 농도를 띠며 실체에 가깝게 변해갔다.​소매 자락에 수놓아진 은실 물결 문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발했다.​남자는 가슴 안쪽에서 차오르는 힘의 무게감에 절로 숨을 삼켰다.​"이... 무슨..."​단 한 사발의 국밥과 인간의 순수한 감사가 만들어낸 힘의 양은 어젯밤 제사를 통해 얻었던 기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충격적인 포만감 속에서 기력을 회복한 남자가 가슴을 편 바로 그 순간이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 씨가 눈물을 닦으며 옥연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주모는 내 목숨을 건진 은인이오! 내 가진 것은 없으나 앞으로 이 나루터의 모든 뱃사공들에게 이 집 국밥을 먹으라 소문을 내겠소!"​옥연은 쑥스러운 듯 단정한 볼에 작은 보조개를 띄우며 웃어 보였다.​"별말씀을요, 어르신. 몸이 좀 따뜻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김 씨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남긴 뒤, 한결 가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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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오카다 경부와 가짜 머슴 1
​붉은 노을빛이 낙동강 물결 위로 핏빛처럼 진하게 번져 나갔다.​산그늘이 기 길게 늘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자, 삼강 나루터의 강바람은 낮보다 훨씬 매섭고 스산하게 불어왔다.​유옥연은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잔불씨를 가만히 다스렸다.​낮에 다녀간 늙은 사공 김 씨의 소문 덕분이었는지, 나루터 근처를 지나던 뱃사공 두 어사가 주막에 들러 시래기국을 사 먹고 돌아간 뒤였다.​바닥에 놓인 조그만 옹기 항아리 속에는 사공들이 내고 간 동전 몇 푼이 제법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옥연은 그 동전들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경성에서 도망쳐 왔을 때만 해도, 당장 오늘 밤을 버틸 수 있을지조차 아득했었다.​하지만 이 작고 낡은 주막에서 지어낸 뜨거운 국 한 사발이 스스로의 목숨을 이어나가게 해주고 있었다.​옥연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닦아내고 상마루 쪽을 바라보았다.​아까 옥연과 한탕 국사발 밀당을 벌였던 남자는, 식은 국을 사발째 비워낸 뒤 상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남색 도포 자락을 넓게 늘어뜨린 남자의 모습은 여전히 현실의 사람이라 믿기 힘들 만큼 기풍이 흘렀다.​낮에 사공의 감사를 흡수하여 신력을 회복한 덕분에, 그의 몸은 반투명하던 영체에서 벗어나 완벽한 실체로 굳어 있었다.​옥연은 남자의 단정하게 굳게 닫힌 붉은 입술과 짙은 속눈썹 그늘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까탈스럽고 고고하게 굴면서도, 식어버린 국사발을 하나도 남김없이 싹 비워낸 모습이 은근히 기가 차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옥연은 툇마루 위로 올라가 남자가 남겨둔 빈 옹기 사발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그때였다.​저 멀리 대문 밖에서 둔탁하고 기분 나쁜 구두지옥 소리가 서걱서걱 흙바닥을 짓밟으며 다가왔다.​일반적인 뱃사공들의 짚신 소리가 아니었다.​빈틈없이 다듬어진 가죽 구두가 마른 흙을 짓눌러 갈아버리는 묵직하고 섬뜩한 소리였다.​옥연의 손끝이 나직하게 떨리며 옹기 사발 테두리를 바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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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오카다 경부와 가짜 머슴 2
옥연은 자신을 바짝 감싸 안은 남자의 커다란 손길과,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숨결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쳐 올랐다.​머슴이라니. 수백 년 된 신령님이 머슴을 자처하며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옥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오카다는 사내의 얼음 같은 눈빛과 황당한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머슴? 이까짓 주막에 무슨 이런 머슴이 있어!"​"우리 주모가 워낙 마음이 여리고 순해서 말이다."​남자가 옥연의 어깨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오카다를 향해 비꼬듯 중얼거렸다.​"너 같은 지저분한 똥파리가 꼬여도 제대로 내치질 못하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파리를 잡으려 나온 것이다."​"이, 이 미친놈이!"​분노한 오카다가 허리춤의 군도를 반쯤 뽑아 올리려 했다.​그 순간, 남자의 차가운 청색 눈동자 안에서 붉은 불꽃이 소름 끼치게 번뜩였다.​쿠웅!​오카다가 서 있는 마당 바닥의 흙이 아래로 움푹 파여 내리며, 뼛속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중력이 오카다의 전신을 사정없이 내리눌렀다.​"크윽...!"​오카다의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며 바닥으로 꺾여 내릴 듯 비틀거렸다.​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괴한 압박감에 오카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군도를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경련을 일으켰다.​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옥연의 어깨를 감싼 손가락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가만히 다독이고 있을 뿐이었다.​"내 터 안에서 칼끝을 꺼내는 자는... 강물 밑바닥 귀신들의 밥으로 만들어 주겠다."​남자의 나직하고 서늘한 한마디에 오카다의 정수리로 소름이 소용돌이쳤다.​직감적인 공포였다.​이 사내의 말을 더 거역했다간, 정말로 이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 강물 속으로 수장될 것이라는 근본적인 마물의 공포였다.​오카다는 겨우 짓눌린 숨을 토해내며 반쯤 뽑았던 군도를 칼집에 억지로 내리꽂았다.​"네... 네 연놈들의 수상쩍은 기운은 내가 조만간 읍내 교번소 순사들을 모조리 끌고 와서 파헤쳐 주겠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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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차가운 도포 자락, 따뜻한 손끝 1
​스산한 밤바람이 삼강주막의 허물어져 가는 지붕 틈새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낙동강 깊은 강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한기는 문창살을 뚫고 들어와 안방 구석구석을 시리게 물들였다.​유옥연은 부엌 마루 구석에 놓인 놋대접을 정성스레 닦아내다 말고, 가만히 손을 멈추었다.​머릿속이 둔탁한 돌에 맞은 것처럼 아득하게 어지러웠고, 시야가 자꾸만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흔들렸다.​경성에서부터 보름이 넘도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밤길을 달려온 여파였다.​거기에 살얼음 동동 뜬 우물물에 손을 담그며 일한 노고와, 최 참판 수하들 및 오카다 순사의 위협까지 겹치며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옥연은 갈증에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 끝으로 가만히 적셨다.​손가락 마디마디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더니, 이내 뼛속까지 소름이 돋는 지독한 오한이 덮쳐왔다.​"아직... 솥을 정리하지 못했는데..."​옥연은 땋은 머리가 풀어져 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부엌 기둥을 짚고 겨우 허리를 펴려 했다.​그러나 무릎에서 힘이 맥없이 풀려나가며, 그녀의 마른 몸이 차가운 흙바닥을 향해 꺾여 내렸다.​쿵.​몸이 바닥에 부딪히기도 전에, 스산한 밤공기를 찢고 푸른빛이 번개처럼 부엌 안을 가득 채웠다.​"옥연!"​날카로운 음성이 캄캄한 부엌 안을 사정없이 흔들었다.​상마루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옥연의 코앞으로 실체화하여 나타났다.​바닥으로 떨어지던 옥연의 어깨를 커다랗고 창백한 손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잡아채었다.​남자는 옥연의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그녀의 마른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아 올렸다.​남자의 남색 도포 자락이 옥연의 파리해진 뺨을 부드럽게 덮어 내렸다.​옥연은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자신을 안아 든 사내의 몸에서 느껴지는 깊은 강물의 향을 감각했다."...누구 마음대로 정신을 놓느냐."남자의 나직한 음성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수백 년을 살아온 신령의 목소리가 흔들린 것은, 그 자신도 처음 겪는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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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차가운 도포 자락, 따뜻한 손끝 2
​단단하고 차가운 그의 손바닥이 옥연의 열나는 이마에 닿는 순간, 옥연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손이... 시원해요..."​옥연이 무의식중에 뺨을 남자의 손바닥에 바짝 밀착시켜 왔다.​차가운 얼음 같은 남자의 체온이 지독한 열기를 가라앉혀 주자, 옥연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남자의 손에 얼굴을 비벼댔다.​남자의 세로로 찢어진 청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대되었다.​자신의 손길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얼굴을 묻고 안도하는 인간의 반응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남자의 길쭉한 손가락 끝이 옥연의 부드러운 뺨을 스쳤다.​그의 차가운 체온 너머로 옥연의 거친 호흡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었다.​그때, 도깨비들이 얼음물이 담긴 대놋대접과 젖은 무명천을 들고 쩔쩔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주, 주령님! 물을 가져왔습니다!"​"거기 두고 나가거라."​남자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심하게 쏘아붙였다.​도깨비들은 남자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대접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남자는 차가운 우물물에 무명천을 적셔 손으로 꼭 짜냈다.​수백 년 동안 강물의 물길을 통제하던 고귀한 신령의 손이, 한낱 인간의 이마에 얹을 물수건을 만지고 있었다.​남자는 젖은 수건을 옥연의 뜨거운 이마 위에 가만히 내얹었다.​수건이 닿자마자 치지직 소리가 날 것처럼 옥연의 몸에서는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옥연은 괴로운 듯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남자의 소매 자락을 손가락으로 꽉 잡아채었다.​"가지 마세요... 혼자 두지 마세요..."​경성에서 부모를 잃고 홀로 도망쳐 오며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아이 같은 두려움이 열꽃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이었다.​옥연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남자의 짙은 남색 도포 자락을 부서뜨릴 듯 틀어쥐었다.​남자는 소매를 빼내려 손에 힘을 주었다.​하지만 옥연이 옷자락을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기는 바람에, 남자의 상체가 옥연의 얼굴 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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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맹목적인 차단, 완벽한 통제 1
​동녘 하늘이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에 갇혀 있던 새벽녘이었다.​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마주치는 삼강 나루터 위로 지독하게 짙은 물안개가 폭포처럼 밀려들었다.​손가락 하나를 내밀어도 마디가 보이지 않을 만큼 묵직한 안개는 젖은 흙바닥과 허물어져 가는 삼강주막의 지붕을 축축하게 적셨다.​살얼음이 동동 뜬 강물 밑바닥에서는 뼛속을 자르는 듯한 스산한 소리가 소용돌이치며 기어 올라왔다.​유옥연은 안방 툇마루 끝자락에 가만히 앉아 자신의 기다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밤새 온몸을 깨부술 듯 덮쳐왔던 지독한 몸살 기운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이마와 뺨에 남아 있던 타오르는 열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마비되었던 손끝에는 다시 맑은 피가 도는 감각이 선명했다.​옥연은 윗목 바닥에 놓여 있던 차가운 대놋대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밤새 자신의 이마를 덮고 있던 얼음 같은 손바닥과, 귓가를 간지럽히던 낮은 숨결이 피부 위로 아리게 피어올랐다."...참."휘의 차갑던 손바닥과 금빛이 스며들던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옥연은 얼른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옥연."​​옥연은 머리 수건을 한 번 더 단단히 매어 묶은 뒤, 그러곤 괜히 우물가에 놓인 찌그러진 물양동이를 서둘러 집어 들었다.​자신을 위해 밤새 기력을 쏟아부은 그 까탈스러운 신령에게 바칠 정갈한 첫 우물물을 길어 올려야 했다.​옥연은 조용한 걸음으로 대문 틀을 지나 마당 밖 나루터 길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바깥의 물안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짙고 축축했다.​발밑의 말라붙은 풀줄기마다 하얀 서리가 칼날처럼 돋아나 있었고, 강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짚신 틈새로 시린 한기가 파고들었다.​옥연은 우물가를 향해 몇 걸음 내딛다 말고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섰다.​짙은 물안개 너머, 강가 쪽에서 희미하고 아득한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옥연아..."​바람 소리도, 물결 소리도 아니었다.​세상을 떠나기 전, 경성에서 옥연의 머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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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맹목적인 차단, 완벽한 통제 2
​옥연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눈을 가린 남자의 긴 손가락 사이로 물이끼 향과 깊은 강바닥의 향기가 쏟아져 들어왔다.​수살귀가 내지르던 어미의 기괴한 환청도, 강물이 출렁이던 스산한 소리도 모두 거짓말처럼 뚝 끊겨 버렸다.​남자는 옥연의 시청각을 자신의 온몸으로 완벽하게 밀봉하여 차단해 버린 것이었다.​"하... 아..."​옥연은 시야와 청각이 동시에 차단된 극도의 정적 속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무게감과, 귓가를 사정없이 울리는 단단한 심장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다가왔다.​남자가 옥연의 눈을 가린 손가락에 살그머니 힘을 주며, 그녀의 귓가에 고풍스럽고 나직한 음성을 내리까시었다.​뼛속을 울리는 울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듣지 말거라."​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옥연의 귓바퀴를 쓸어내리며 깊게 스며들었다.​옥연의 심장이 옷감 너머에서 거세게 들썩였다.​"보지도 말거라."​남자가 옥연의 허리를 안은 팔을 더욱 바짝 틀어쥐며 그녀를 제 품 안으로 완벽히 통제해 넣었다.​옥연은 남자의 단단한 품속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가 뿜어내는 기운에 온전히 사로잡혔다.​남자는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옥연의 떨리는 속눈썹을 감각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옥연의 영혼에 새기듯 읊조렸다.​"지금 여기는 너와 나 둘 뿐이니라."​옥연의 숨통이 죄어왔다.​어미의 환청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남자의 목소리 하나로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그러니 내 말만 듣고 나만 보거라."​남자의 낮은 음성이 옥연의 가슴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꽂혀 들어왔다.​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혼자 살아온 신령이 한 인간에게 바치는 가장 맹목적이고 완벽한 구속이었다.​남자가 옥연의 이마 끝에 자신의 턱선을 살그머니 감싸 안으며 나직하게 덧붙였다.​"나 역시 너만을 느끼겠다."​그 한마디가 떨어진 순간, 옥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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