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치해요.”강아연은 작게 중얼거리고 메달을 가져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아빠, 엄마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제대로 못 들은 성준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제가 준 메달이 예쁘다고 하셨어요?”성규연은 몸을 굽혀 아이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엄마가 너 유치하대.”“네?”성준서가 어리둥절해 했다.성규연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강아연을 따라 들어갔다. 성준서도 얼른 뒤쫓았다.“아빠, 엄마! 같이 가요!”키 큰 남자와 작은 아이가 가녀린 여인의 뒤를 따르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정원에서 꽃가지를 손질하던 정원사가 그 광경을 보고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과 사모님이 화해하신 것 같습니다.]...경성 병원 VIP 휴게실에 앉아 있던 서영란은 그 메시지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마침 검진을 마치고 돌아온 심소연이 물었다.“어머님, 무슨 일이세요?”조금 전 건강검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내가 전에 네 생일 파티에서 규연이한테 너랑 춤추라고 특별히 부탁했잖니.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았어?”서영란이 따져 물었다. 심소연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고 자신이 참석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파티에도 가지 않았다. 그만큼 모든 걸 믿고 맡겼건만...심소연은 움찔하며 눈빛을 피했다. 자기만을 위해 마련된, 상류층 사교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망쳐 버렸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성규연은 사람들 앞에서 심소연을 버려두고 강아연을 데리고 나갔다. 그 바람에 심소연은 연회장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그래서 그 소문을 막느라 갖은 애를 썼다.“어머님,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으세요?”심소연이 조심스레 되물었다.하지만 서영란의 눈에는 그 반응 자체가 실패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 눈살을 더 깊이 찌푸렸다.“소연아, 이번에는 정말 실망이 크구나!”심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즉시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 어머님, 잠깐 판단
‘기분을 풀어 주려고...’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치 빈 황금홀에서 연주되는 첼로 선율 같았다.강아연은 잠시 멈칫하다 목걸이를 돌려주었다.“너무 비싸요. 받을 수 없어요.”하지만 성규연은 받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남편이 아내에게 선물을 줄 때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아? 아내가 받아 주는 거야. 그리고...”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선물 고르는 안목이 좋다고 칭찬해 주는 거.”강아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안목은 모르겠고 돈을 잘 낭비하는 건 알겠네요.”‘목걸이 하나에 무려 200억이라니. 무슨 배춧값 내듯 말하는 거지?’“널 위해서라면 전 재산을 써도 아깝지 않아.”성규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텅 빈 강아연의 목을 바라보았다.“내가 걸어 줄까?”강아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싫다거나 좋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성규연은 대답을 기다리며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끝내 대답하지 않으면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한참 뒤 강아연은 그 집요함에 못 이겨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성규연 씨, 다른 여자들한테도 늘 이런 식으로 잘해 줬어요?”“몰라.”대답은 즉각적이었다.강아연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성규연은 그녀의 손에서 목걸이를 가져와 몸을 숙였다. 강아연이 받아들이든 말든 가느다란 목에 팔을 둘러 조심스럽게 걸어 주었다.강하게 권하지 않는 이상 강아연은 목걸이에 손도 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전에도 경매장에서 강아연에게 어울릴 만한 보석을 보면 사다가 보석함에 넣어 두곤 했다. 직접 착용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그 보석들을 전부 팔기까지 했다.‘다른 여자에게 거액을 쓰는 건 그토록 신경 쓰면서 왜 정작 자신에게 쓴 돈에는 아무 의미도 두지 않는 걸까?’차창 밖으로 풍경이 흘러갔다. 황혼의 빛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마지막 햇살 한 줄기가 뒷좌석의 두 사람에게 비쳤다.그때 성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달래 준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타, 아연아.”성규연이 강아연을 보며 웃었다.강아연은 한껏 멋을 부린 공작새 같은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차 문을 열고 탔다. 서지원에게는 부드럽게 작별을 고했다.“그럼 가 볼게요.”서지원은 아무 말 없이 강아연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스스로 성규연의 차에 탔지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그러나 더 바라볼 틈도 없이 성규연이 차창을 올려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마이바흐가 멀어졌다.차 안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강아연은 또 서지원과 무슨 사이냐고 추궁할 줄 알았다.하지만 성규연은 그러지 않았다.“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벌써 일하러 나갔어?”성규연이 먼저 침묵을 깼다.“돈 버는 건 제 자유예요.”강아연이 담담히 답했다.“매달 돈 주잖아. 그런데도 꼭 직접 일을 해야 해?”성규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벌어 봤자 얼마나 된다고...”“성 대표님처럼 아무나 돈이 넘쳐서 남한테 선물 하나 사 주는 데 백억씩 쓸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강아연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성규연이 멈칫했다.차 안의 공기가 다시 싸늘해졌다.강아연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잠시 후 성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선물을 사 준 적 없어. 지난번 경매장에도 네 선물을 사려고 갔던 거야. 심소연은 어머니랑 같이 왔고, 그 왕관도 어머니가 사 주신 거야.”그렇게 촌스럽고 못생긴 왕관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그런데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을 내세워 기사를 썼다.서영란이 시킨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영란은 늘 이런 식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밸런타인데이 불꽃놀이 때도 원래 사진에는 여러 명이 함께 있었는데 성규연과 심소연이 나란히 선 부분만 잘라 퍼뜨렸다.당시에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강아연에게 관심도 없는데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미안해. 아연아,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성규연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럽게 비위를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아연의 눈빛이 흔들렸다.‘이혼 소송...’사실 성규연의 곁으로 돌아온 뒤로도 강아연은 한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규연이 이혼 합의서를 산산조각 내 눈앞에 흩뿌렸을 때,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느꼈다.어쩌면 재판상 이혼이 가장 나은 방법일지도 몰랐다.그러나 경성에서 성규연의 영향력은 하늘을 찔렀고 미래 그룹에는 국내 최강의 법무팀이 있었다. 소송에서 진 적도 없었다. 일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성규연이 보복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까지...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하지만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고 이혼까지 성공한다면 배 속의 아이를 데리고 떠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였다.강아연은 손가락을 천천히 말아쥐었다.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허수빈은 강아연의 고민을 알아채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급할 거 없어요. 충분히 생각하고 이야기해요. 우선은 아버님 사건부터 준비하죠.”“네.”강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그럼 잘 부탁드려요, 허 변호사님.”“저야말로요.”허수빈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허수빈과 이야기를 마치자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카페에서 나오던 강아연은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서지원과 마주쳤다.아름다운 여자를 품에 안고 있던 서지원은 강아연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강아연은 별다른 표정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인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과 같은 관계로 지내는 게 좋겠다고 이미 말한 뒤였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 딱 그 정도였다.강아연은 서지원의 곁을 지나 천천히 걸었다. 허벅지에 쓸린 상처가 아직 아파서 빨리 걸을 수 없었다.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특히 곤란했다. 건너편 신호등이 곧 빨간불로 바뀔 듯한데 강아연은 아직 도로 한가운데 있었다. 서두르다 비틀거리기까지 했다.그 순간 누군가 팔꿈치를 잡아 주었다.은은한 오
강아연은 최근 일주일 동안 가파르게 오른 수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이대로라면 회사 자금 사정이 안정될 테고, 매달 성규연에게 받던 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애초에 자기 돈도 아닌 만큼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이후 강아연은 하유리와 회의를 열어 플로리스트 몇 명을 유명 대회에 참가시켜 실력을 쌓게 하고, 사업을 점차 해외로 넓히는 방안도 의논했다.회의가 끝나자 어느새 오후 세 시였다.강아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마침 그때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떴다.해외에 있는 그 변호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귀국했어요. 시간 되면 한 번 만나죠.]강아연이 컵을 탁자에 내려놓자 물이 조금 넘쳤다.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강아연이 약속한 카페에 도착하자 창가에 베이지빛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단번에 알아보았다. 백인 엘리트들이 즐비한 법조계에서 홀로 두각을 나타내 ‘월가의 여우’라고 불리는 유명 변호사, 허수빈이었다.어린 나이에 이름을 날린 법률 천재로, 변호사 일을 시작한 뒤 거의 패소한 적이 없었다. 백인들이 장악한 업계에서 자신의 로펌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허수빈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굵은 웨이브 머리에 눈에 띄는 귀걸이를 하고 머리 위에는 선글라스를 얹고 있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당당한 분위기였다.“강아연 씨.”허수빈이 강아연을 보고 미소 지었다.“오랜만인데도 예전이랑 별로 안 달라졌네요.”두 사람은 원래 아는 사이였다. 과거 강명우가 허수빈을 고용해 몇 차례 소송을 진행했고 모두 승소했다. 다만 나중에는 의견 충돌로 더는 함께 일하지 않았다. 이후 허수빈이 해외로 떠날 때 공항까지 배웅한 것도 강아연이었다.강명우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 강아연은 허수빈에게 연락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그런데 이제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시점에 답장이 온 것이다.사건의 경위를 들은 허수빈이 말했다.“강명우 씨의 사건을 맡을 수 있어요. 승소할 자신도 70% 이상 있
이 말을 하기까지 마음속으로 얼마나 오래 망설였는지 몰랐다.“응? 아연아?”애틋하면서도 절제된 목소리였다. 사실은 어깨를 잡고 돌려세워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자신을 피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충동을 억눌렀다.강아연은 강압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굳게 닫힌 마음을 무리하게 열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그래서 성규연은 그저 조심스럽게 마음을 떠보았다.어쩌면 강아연도 아직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여자 문제를 왜 신경 쓰겠는가. 실제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무리 설명해도 믿어 주지 않았다.강아연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신뢰를 되찾고 싶었다. 이를테면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는 식으로 말이다.그는 강아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아연아?”포기하지 못한 성규연이 다시 조용히 불렀다.역시 대답이 없었다.몸을 일으켜 강아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서야 눈을 감은 채 고르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잠든 것이었다.‘그러면 그토록 고민한 끝에 겨우 꺼낸 말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성규연의 입가에 씁쓸하고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눈빛도 어두워졌다.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못 들었다면 다음에 다시 말하면 된다. 언젠가는 들을 테니까.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성규연은 강아연의 등 뒤에 몸을 웅크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등 뒤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 강아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성규연의 입에서 나오는 ‘좋아한다’는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예전이라면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던 성규연의 아내로 살아가는 현실에 환상이 깨진 지금, 그토록 가벼운 고백 하나로는 마음의 상처를 지울 수 없었다.이제는 그런 말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정오가 가까워지자 창밖의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빛이 구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