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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화

육문주의 낯빛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색 눈동자가 조수아에게 단단히 박혔다.

“내가 결혼은 안 된다고 했잖아. 그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애초에 내 제안을 거절했어야지.”

조수아의 눈가에 옅은 붉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 둘만의 감정이었는데 지금은 세 사람이 엮였잖아.”

“걔는 너한테 위협이 안 돼.”

자조 섞인 웃음이 지어졌다.

“그녀의 전화 한 통에 당신이 내 생사는 상관도 안 하고 나를 내팽개치는데. 말해 봐, 문주 씨. 대체 어떻게 해야 그걸 위협이라고 쳐주는지.”

육문주의 눈밑에 선명한 노기가 피어올랐다.

“조수아, 고작 생리통 때문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일이야?”

“내가 임신해서 그렇다고 하면?”

“애기 갖고 트집 잡을 생각 마. 매번 안전조치는 제대로 다 했으니까!”

그의 음성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답변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어도 육문주는 아마 자신을 끌고 가서 아이를 떼어냈겠지? 조수아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환상마저도 완전히 파멸되는 걸 느꼈다.

꽉 움켜쥔 손바닥에 손톱이 깊게 박히는데도 조수아는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턱을 작게 치켜들고 버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이 예전에 그랬지. 우리 서로 감정만 나누고 결혼얘기는 하지 말자고. 그러다가 어느날 누구 한쪽이 싫증 나면 서로 좋게 헤어지는 걸로 하자고.”

“문주 씨, 나 이제 질렸어. 우리 헤어지자.”

질질 끄는 게 없이 깔끔한 이별통보였다. 다만 그녀의 가슴이 지금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육문주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살벌한 눈빛이 조수아를 향했다.

“너 지금 그 말을 내뱉은 후과가 뭔지 알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먼저 나와서 당신 자존심이 상할 거라는 걸 알아. 그래도 문주 씨, 나 이제 힘들어. 세 사람이라서 나누는 사랑따위 난 싫어.”

예전의 그녀가 너무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그녀가 틀렸음을 일깨워 주었다. 육문주의 마음은 한 번도 그녀에게 있은 적이 없었다.

육문주가 손을 뻗어 조수아의 턱을 단번에 붙잡았다.

“그런 방법으로 너랑 결혼하게 협박하려고? 내가 널 너무 얕본 걸까, 아니면 네가 너무 스스로를 믿는 걸까?”

조수아는 실망스럽다는 듯 그를 마주봤다.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나 오늘 이 집에서 나갈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 땅에 발을 딛으려는데 육문주가 우악스레 그녀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축축한 입술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물어버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서늘함이 섞였다.

“지금 나한테서 떠나면 조 씨 가문이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 안 돼? 네가 3년이라는 청춘으로 바꿔온 거잖아.”

조수아는 대뇌가 펑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제대로 얘기해. 3년의 청춘이라니?”

육문주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난 치흔을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입가를 비틀었다.

“계략을 꾸며서 내가 널 구하게 만들고, 결혼은 안 된다는 데도 나랑 같이 있겠다 하고, 네 아버지를 도와 조 씨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게 아니었으면 날 납득하게 할만한 다른 이유가 있어?”

그의 말대로 3년 전에 조 씨 가문에 전례 없는 경제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육문주와 사귀게 된 후로 그녀의 가문을 사업적으로 많이 도와줘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조수아는 육문주가 자신을 좋아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줬다 생각했었다. 입술이 열리고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당신 뜻은 여태까지 나한테 잘해 준 게 그저 어쩌다 보니 적당히 분위기 맞춰줬을 뿐,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 말이야?”

육문주의 이마에 세워진 핏대가 툭툭 튀었다. 꽉 깨문 이 틈새로 말이 짓이겨져 나왔다.

“그럼 내가 짜고 치는 게임에서 진심으로 임할 줄 알았어?”

짧은 한 마디에 조수아는 칼에 찔린 것처럼 피가 철철 흘렀다. 3년이나 진심을 다해 사랑을 주었지만 그게 육문주한테는 적나라한 거래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조수아는 멍청하게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온몸의 피부가 사냥개한테 물려 찢기듯 고통스러웠다. 눈밑에 서린 비통함도 이제는 서늘함으로 변해갔다.

“3년의 청춘으로 육 대표님의 은정을 충분히 다 갚았으니, 그럼 저희는 이제 서로 빚진 게 없겠네요. 앞으로 제 갈 길을 각자 가도록 하죠.”

고집스런 조수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육문주는 화가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조수아, 하루만 더 줄 테니까 잘 생각하고 다시 얘기해!”

윽박지르는 한 마디만 남겨놓고 남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혼자 남은 조수아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7년을 사랑해왔고 3년을 아낌없이 챙겨주었는데 육문주의 눈에는 남들한테 보여줄 면목조차 없는 거래로 느껴졌다는 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두 사람의 감정에 있어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그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육문주보다도 4년이나 먼저 더 그를 사랑하게 된 조수아였으니, 여지없이 패배하게 되리란 건 어찌보면 정해진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다 울고 난 뒤 슬픔을 추스른 조수아는 간단히 짐을 챙긴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육문주의 집을 나섰다.

검은색 컬리넌이 번개처럼 적막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육문주의 머리속에는 온통 조수아가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던 결연한 모습으로 가득찼다. 고작 생일을 같이 안 보내줬다고, 그깟 질투 때문에 헤어지자니. 아무래도 그녀의 투정을 조만간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이 답답해져서 타이를 풀어 한쪽으로 던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가 한참을 울린 뒤에야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너머로 방탕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받아.”

“운전.”

그의 친구 허연후가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차, 조 비서님 꺼? 내가 두 사람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

“그렇게 한가해?”

“아니. 그게 아니라 나이트바 올 건지 물어보려고. 학진이가 쏜대.”

10분 후, 나이트바.

허연후가 술잔을 건네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조수아 씨랑 헤어졌어?”

육문주가 무슨 소리냐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

“연인끼리는 조금씩 다퉈야 감정도 깊어진다는 거 못 들어봤어?”

“어라라? 너 그래도 같이 잔 시간이 오래됐다고 그 사람 좋아졌나 보다?”

장난스런 물음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꺼져.”

“오키오키, 꺼질게. 근데 너 만약 조수아 씨 진짜 좋아하면 송미진이랑은 선을 긋는 게 좋을 거야. 난 분명 미리 경고했어. 그렇게 계속 전화 한 통에 송미진한테 달려가면 나중에 마누라 잃고 나한테 와서 질질 짜지 말고.”

육문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송미진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데도 안 믿어.”

“여자라면 다 못 믿지. 송미진이 너랑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기도 했고, 일찌감치 서로 혼약도 오갔는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자가 툭하면 다른 여자한테 달려가는 거 참을 수 있겠어.”

담배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 육문주가 깊게 연기를 빨며 어두운 눈빛을 했다.

“나랑 걔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룸의 문이 열리며 송학진과 송미진이 같이 들어섰다.

“미안, 오늘 미진이가 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같이 데리고 왔어. 괜찮지?”

허연후는 그늘이 내려앉은 육문주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네 동생이 내 동생이고 그런 거지 뭐. 미진아, 여기 와서 앉아.”

제 옆을 툭툭 치며 말하는데 송미진이 고의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연후 오빠. 그쪽 자리가 마침 에어컨 바람을 정통으로 맞는 자리라 제가 좀 추위를 많이 타서 이쪽에 앉을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육문주의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문주 오빠, 지난번에 저 때문에 오빠 여자친구분 생일도 못 챙겼는데 그분 화나신 거 아니죠?”

“아니야.”

“다행이다. 이거 제가 너무 죄송해서 사과의 의미로 산 립스틱이에요. 혹시라도 아직까지 오해하고 있으면 제가 직접 가서 해명할게요.”

육문주는 상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거절했다.

“필요없어.”

송미진이 불쑥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문주 오빠, 제가 자꾸 오빠한테 전화 해서 저 밉죠? 저도 안 그러고 싶은데 병이 발작할 때면 저도 모르게 오빠한테 전화하게 돼요.”

콩알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육문주는 미간을 모으더니 립스틱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대신 받을게 일단.”

곧 울음을 그치고 다시 환하게 웃기 시작한 송미진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문주 오빠, 이거 마셔 봐요. 우리 오빠가 외국에 나갔다가 경매로 사온 건데 82년산 술이거든요.”

술잔을 육문주에게 건네며 송미진은 손끝으로 몰래 그의 손목을 쓸었다.

육문주는 즉시 피하며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털었다.

“거기에 놔 둬.”

상대가 자신을 무척이나 배척하자 송미진의 눈밑에 서늘함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한 얼굴로 돌아갔다.

송학진은 잔을 든 손을 육문주를 향해 건배 동작을 하며 말했다.

“나 아직 네 여자친구 본 적도 없어. 언제 한 번 데려와서 같이 밥이나 먹자.”

허연후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요즘은 안 될걸? 두 사람 싸웠거든.”

아직도 얼굴이 펴지지 않은 육문주를 보며 송학진이 웃었다.

“다퉜으면 잘 달래주면 되지. 나 얼마 전에 어떤 여자를 구해준 적 있었는데 글쎄 그 여자 남편이 마누라가 지금 유산해서 피를 철철 흘리는데 전화 하니까 아예 받지도 않더라고. 들어 보니까 다른 여자한테 가 있느라 그랬다던데, 그런 것만 아니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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