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신의 입술 사이로 실의가 터져 나와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것은 땅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아르텐시아는 그 비를 묵묵히 맞았다.
누군가의 슬픔일지, 위로일지, 살의일지 모르는 그 비를.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과 땅의 울림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르텐시아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감정의 도화선을 지핀 발걸음은 신목의 뿌리가 남이었던 곳을 벗어나고 무덤가에 다다랐다.
그녀는 자신의 무덤에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지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비석이 번개를 맞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비석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새 생긴 얕은 웅덩이에 떨어졌다.
아르텐시아는 웅덩이에서 튄 더러운 물을 보지 못한 듯 가던 길을 멈추고 비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테르에게 상실을 느끼게 하며 회한이라는 거짓된 증명을 가진 그것에게.
“어딜, 감히.”
새카맣게 죽은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검푸른 빛이 비석 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세계를 잃었으니 너희는 곧 심연에 잠식되리라.]
그것은 악독하고 고약한 인간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자비이며,
“…나와 함께.”
천상의 아름다움을 담았던 여신의 목소리로 공포한 진정한 강림이었다.
먼 옛날.
만물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창조주이자 여신은 그렇게 사라졌다.
300년 전과 같이.
***
“이야! 거지다!”
“어디?”
“와, 진짜 거지야!”
아르텐시아는 세계의 끝을 떠나 비가 그치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은 가장 먼저 해가 뜨고 빠르게 어둠에 잡아먹히는 동쪽이었다.
에테르의 힘으로 간신히 이동한 곳엔 적은 인간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있었다.
아주 작고 가뭄이 든 땅이었다.
대부분 이방인인 그들은 아주 열악해 보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행색이 그러했고 허름한 나무판자로 된 집이 그러했다.
아르텐시아는 그 땅을 맨발로 걸으며 그것들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다.
“저 이의 행색을 보아하니 꼭 태풍을 만난 것 같군.”
하지만 그녀는 마을에 들어서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일까.
먼지와 흙이 묻어 더러워진 머리카락과 간신히 몸을 가린 천 쪼가리는 그녀의 앙상한 다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아르텐시아를 보고 대번에 손가락질했고 어른들은 혀를 찼다.
의심과 경계는 금세 연민으로 바뀌었으나 그것마저도 점차 사라졌다.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가장, 잘 판단한다.
그렇기에 비슷한 부류에게서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며 살아갔다.
그것은 무의식적이었으나 의식적이다.
아르텐시아는 그것을 잘 알았다.
알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적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러운 소매 속에 숨겨놓은 에테르의 조각을 아주 잠시 쓰다듬었다.
무의식에서 나오는 의식적인 회피였다.
아르텐시아는 인간들에게 지금 느끼는 낯선 것에 대한 공포라는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이제는 비가 그쳐 잔뜩 긴 구름이 몰려 있는 동쪽으로.동쪽에는,
‘시시.’
요정이며 숲의 현자인 시시가 있었다.
아르텐시아는 죽음 이후 시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되찾을 것이 있다면 그 처음은 그녀라고 생각했다.
시시를 생각하자 마르고 갈라진 입에서 뜨거운 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작고 귀여운 시시.
아르텐시아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함이라며 가늘고 긴 귀를 자랑스레 보여주던.
밝은 갈색의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여신의 손길이 닿았다 하여 양 갈레로 땋은 채 영원을 살 거라던.
사랑스러운 요정 시시.
아르텐시아는 옅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기억한 편에 에테르의 가지 아래서 행복했던 언젠가의 오후가 스쳐 지나갔다.
온통 초록빛으로 빛나던 그 오후가 그녀의 시선 끝 갈라진 땅 틈 사이로 사라졌다.
아르텐시아는 발목에 감겨 있던 과거의 온상들을 떨쳐내며 걸어 냈다.
어느새 그녀는 마을의 끝자락에 다다라있었다.
동시에 온몸을 휘감던 온갖 감정들이 잠시 주춤했다.
그녀는 문득 더럽고 질척거리는 땅이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고르지 못한 땅은 비가 한차례 지나갔음에도 그 흔한 태양 빛 한 자락이 내비치지 않았다.
아르텐시아는 고개를 들어 진흙탕에 고인 거품마냥 낀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몸이 지쳤다.
다시 살아나 숨을 쉬고 보고 들었기에 당연했다.
[지상에 출현하였으니 인간과 다름이 없다.]
처음. 영문도 모르고 강림 되었을 때 주신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억울함이 눈과 입으로 제 존재를 알릴뻔했으나 참아냈다.
지금은 아니었다.
결국, 아르텐시아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고요가 어둠을 타고 그녀의 어깨 뒤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밤이구나.”
아주 오랜만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울렸다.
여신은 그렇게 길 한가운데 섰다.
그대로 밤을 지새우고 태양이 뜨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녀는 해가 지지 않는 곳에서 탄생하여 땅에 묻힐 때에도 스스로 어둠에 잠식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여신에게 밤이란, 태양을 몰아내고 어둠이 발목 위로 스며들면 다시 빛을 갈망하길 기약없이 기다리는 가혹한 시간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몸을 누이지도 못하는 그녀는 태양이 뜨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리라 마음 먹었다.
몸도 지쳤으니 이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르텐시아는 눈을 감았다.
“……여신이 꿈속에 찾아올 때까지.” 아르텐시아는 푸른 눈동자를 더욱 빛내며 노래를 불렀다. 힘이 솟고 체력이 좋아지는 기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인간들이 여신의 이름을 부를 때는 이 기분에 도취되어 더욱 힘차게 현을 뜯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 느꼈던 충만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쁨의 눈물이 아닌 울분의 눈물이. ‘아미노, 네가 나와 에테르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빼앗았구나.’ 인간으로서 감히 신의 자리를 빼앗아 그것을 취하며 누렸던 것에 중독되어 갔구나. 아미노는 이렇게 순수하고 찬란한 것을 받아 놓고 행실은 지옥의 사자보다 못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구정물과 같은 놈.’ 아르텐시아는 마지막 현을 튕기며 분이 맺힌 눈을 털어냈다. 며칠 후. 마을에는 비가 내렸다. 긴 가뭄을 조금은 해소해 줄 만한 비였다. 비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꾸준히 길게 내렸다. 마을 인간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잠시 비가 멈추었을 때는 땅을 일궜다. 이제 마을에는 여신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어렵지 않게 들려왔다. “이게 다 여신님 덕분이야!” “아르텐시아!” 처음에는 말장난으로 시작된 그것은 점차 진실로 변해갔다. 그리고 곧 숭배가 될 터였다. 라리아의 텃밭에도 물기가 어려 농작물이 생기를 찾고 새파란 이파리를 드러냈다. 올리브나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리! 오늘은 비가 오니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아르텐시아는 방안에서 어둠과 같은 새카만 자국이 양손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동안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라리아의 목소리에 나갈 채비를 했다. “곧 비가 잠시 그칠 거야.” “언제쯤?” 라리아가 조심스럽게 아르텐시아의 곁으로 오며 물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 있을 때.” “점심 식사를 해야할 때구나.” 그녀는 악기를 챙기는 아르텐시아를 붙
그녀는 약간 긴장한 채로 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자장가란다.” 하지만 답은 아르텐시아의 입에서 나왔다. “여신의 자장가지.” 그녀는 라리아가 긴장한 채로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사가 정말 좋던데!” “과연 음유시인이군!” 마을의 인간들은 음유시인이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를 가진 음유시인이었으니까. 한참을 그녀의 음률이 담긴 한 편의 시에 대해 찬양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르텐시아는 후드 안에서 아주 오랜만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웃음은 순수해 보이면서도 기쁨보단 희열에 차 있었다. “아르텐시아-. 아르텐시아-.”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를 부르면 그 음에 현을 튕겨 멜로디를 입혀줬다.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고 어른들은 그것을 보며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덧 어둠이 다가올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라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르텐시아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다다라서 그녀는 무심코 작은 텃밭에 시선을 돌렸다. “…….” 올리브나무의 새로운 줄기가 돋아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난 저녁 식사를 준비할 테니 간단히 씻고 나오렴.” 아르텐시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라리아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잠시 의자에 앉았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요 며칠 자신의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되짚었다. 심란함이 턱 밑에서 맴돌았다. 이 고민과 고뇌는 아이작이 다녀가기 전부터 함께했으나 다시 찾아온 그를 마주하며 더욱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녀를 도와라.’ 그의 눈은 회색빛이 아니었다. 라리아는 아이작의 인간의 눈을 그때 처음 봤다. 그는 이미 자신의 딸이 아닌 이방인이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그리고 가끔 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
*** “저 이는 누구시오?” “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는 음유시인이라는 자들 있잖소.” “그런데 말을 안 하잖아?” 며칠 전부터 이 더럽고 허름한 마을에 음유시인이 나타났다. 그는 깔끔하지만 낡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다짜고짜 악기의 현을 뜯기 시작했었다. 처음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날, 음유시인은 가볍게 연주만 했다. 마을을 지나다니는 모두가 보았으나,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났다. 어둠이 몰려와 각자 집으로 돌아간 마을의 인간들은 작은 나무 의자를 회상하며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돈도 빵도, 마음도. “어라, 저 이가 또 왔네.” 하지만 음유시인은 다음 날 아침에도 마을의 중앙에 나타났다. 낡은 현을 튕겨내는 그의 가녀린 손이 빵 한 조각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이 같았다. ♩♪♬ “저런, 저 가는 손가락 좀 보게.” “저러니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거겠지.” 곧 죽겠구나. 마을의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중이 떠중이가 돌아다니다가 이 끝까지 떠밀려 왔구나, 하고. 송장 치우기 싫었던 어른들은 일찌감치 그에게서 관심을 껐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우와! 이런 소리 처음 들어봐!” “이건 무슨 악기에요?” 어깨너머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들은 아이들이 음유시인에게 몰려들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신비한 음유시인이 튕겨내는 멜로디는 아이들의 몇 안 되는 인생 중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낡았지만 소리가 맑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괜히 가슴이 울리고 두 손을 맞잡게 하는 힘에 매료되어 갔다. 그렇게 음유시인이 나타난지 둘째 날이 지나 셋째 날이 되었다. 음유시인은 여전히 마을 중앙에 나타났다. 머리 위에 태양 빛이 만연한 시간이었다. 작은 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은 그의 옆에는 얇은 천으로 덮인 바구니가 하나 놓였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앞에 자리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기억을 읽으셔도 좋습니다.” 아이작은 신력도 신성력도 가지지 못했던 인간이었다. 정말 우연과 운명이 겹쳐져 세계의 흐름과 같은 에테르의 힘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르텐시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해서, 아이작은 에테르의 힘을 일부나마 사용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후에는 쓰지 않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지금의 아르텐시아라면 분명 믿음 이전에 날 선 비난을 던질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아이작의 예상과 달랐다. 아르텐시아는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잡아챘다. “아, 아르텐시아?” 또 무례하게 여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아르텐시아는 한참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인상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현자의 눈. 에테르가 세상을 보게 했던 그 눈 안에 약하지만 분명한 신비한 빛이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여 얼핏 보면 회색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 빛은 분명…. “…에테르와 눈으로 이어져 그 힘이 일부 전해졌구나.” 에테르였다. “많지는 않습니다….” 거짓말.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에테르의 형상을 일시적이나마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결코 적지 않고 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300년이상을 그는 에테르의 눈으로 살았다. 아르텐시아는 순간 명치께가 조여오고 숨이 막혀와 급하게 떨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운 에테르의 힘을 끌어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만큼 그가 숨긴 에테르의 힘은 그 의미가 강력했다. 아르텐시아는 진정하기 위해 손안의 에테르 조각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아이작은 묵묵히 그것을 지켜봤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숲을 흔드는 바람만이 그들의 사이를 오갔다. 그녀는 다시 차갑게 죽은 눈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미노도 알고 있는 것인가.” 그 눈에는 의심과 경계의 빛이 서렸다. “모릅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르텐시아님…!” “하!” 아이작은 내심 부활한 여신과의 재회를 기대했었다. 진실을 고하고 용서를 빌어 자비를 바라길 고대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태풍 앞에 얇은 유리창과 같았다. “살고 싶은 것이냐?” 아이작의 세상이 돌았다. 탄생하여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여신이 땅에 묻힐 때였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아미노의 편에 서서 나와 에테르를 능멸할 때는 언제고, 살고 싶은 것이구나.” “아닙니다, 아니에요!” 기어코 터져나오지 못한 억울함이 주체를 알 수 없는 원망으로 가슴을 찔렀다. 아르텐시아에게 자신은 한낱 어리석고 멍청한 살인자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에테르여, 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저, 에테르가 말했던 ‘언젠가 필요한 기억’의 언젠가가 지금 이 순간일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혜를 나누는 에테르의 눈이 지혜를 얻지 못해 길을 잃고 있었다. “이제 그대들은 내게 필요 없다.” 아르텐시아는 아이작을 뒤로하고 제대를 마주했다. “나와 에테르에게 필요 없는 존재야.” 그녀는 물기가 남아있는 제대 위를 눈으로 쓰다듬고 그곳에서 비켜섰다. 도통 움직일 마음이 없어 보이는 아이작을 내버려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이작이 혹시라도 다른 현자들에게 알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아미노에게만은 전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니까. 그의 눈동자에서 아미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읽기란 아주 쉬웠다. 아르텐시아는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아이작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필요 없다.” 아르텐시아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매몰차게 걸었다. “돕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필요, 없다.” “지금은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아이작은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이곳에 오신 이유도, 시시를 찾아 가시려는 이유도.”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던 작은 발소리가 멈췄다. “신력을…, 힘이 필요하
아르텐시아를 그것을 마치 창에서 뽑아낸 칼날처럼 손에 쥐었다. “이해와 자비를 베풀 여신이 없으니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같잖은 짓은 그만두어라. “그저, 기다리세요.” 아이작. “여신이 그대들의 목을 취하기 위해 몰고 올 죽음을.” 이 세계와 함께 저물기를 기다려라. “지금 죽이지 못하는 이 한이 심연과 함께 찾아올 테니.” 그때, 나 또한 에테르를 끌어안고 심연의 바다에 같이 뛰어들리라. 아르텐시아는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며 생명의 샘이 마를 때까지 고통의 공포에 절여지는 형벌을 내릴 날을 고대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이 혼란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난일 뿐이다. 그녀는 그리 쉽게도 생각했다. 그때, 땅에 떨어져 마구 밟힌 꽃잎처럼 늘어져 있던 아이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이미 심연이 다가와 있었으나 그녀를 올려 보는 눈동자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현자를, 인간을 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에테르가 부재인 지금, 현자마저 사라진다면 세상은 망조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면 혼란과 절망이 땅 위로 솟아나 인간들은 원망과 절망 속에서 멸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작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리며 대답 없는 아르텐시아를 올려다봤다. “혹여… 시시에게 가시는 길입니까.”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 터를 옮아 매던 스산한 바람이 순식간에 태양 빛과 함께 어우러져 사라졌다. 다시 제대에는 태양 빛이 내려앉았다. 아르텐시아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의 끝이었다. “시시에게 내리셨던 힘을 거두러 가시는군요….” 이곳은 동쪽으로 향하는 길의 입구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시시의 숲이 있었다. 역시 아이작이 유추하지 못할 리 없었다. 현자의 눈 아이작. 그래서 그는 아르텐시아가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자였다. 이전에는 영민하고 총명하여 에테르와 여신의 선택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녀는 난감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르텐시아는 끝내 그 무엇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