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현민호의 집은 최강현과 어머니가 민호를 위해 직접 고른 집이었다.
해달라는 것도, 하고 싶다는 것도 없는 아들을 달래고 달랬다. 그런 그가 원한 것은 독립하겠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현민호는 샤워를 하고 나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에 식탁 등만을 켠 채 유리컵을 꺼냈다.
냉장고를 열자, 물과 이온음료 그리고 작은 위스키 병들만이 보였다. 얼음을 채우기 귀찮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는 위스키도 괜찮았다.
애호가라기보다는, 차가운 위스키 한 모금 마시면 잠이 잘 왔다.
무미건조한 하루 끝에 맛보는 자극적인 맛으로, 이런 한잔을 마시려고 사는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자, 수건으로 한 번 쓰윽 닦아내고는 위스키 잔을 들고 어두운 거실로 갔다.
통창 밖으로 검은 밤하늘과 강이 구분이 되지 않고 하나로 보였다.
강물은 빛을 품은 채 반짝이고 청담대교의 조명이 눈이 부셨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고장난 지는 오래된 것 같았다.
사고 이후 재활하는 동안 내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무의미했다.
너무 아파 다 놓아버린 것처럼 이제는 위스키 말고는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기를 좋아했던 기억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성욕도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제 꼴이 우습다며 자조하던 시절도 지났다.
민호는 회사에서 일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니를 만나면 멱살을 쥐고 따지고 울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매달리고 싶었는데, 그 날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 쫓아가지 않은 것만 봐도.”
혼잣말을 하며 위스키를 한모금 물었다.
감정이 망가진 지 오래되었는데 다니를 보니 가슴도 아파왔다. 자기 아래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도 떠오르고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다니야, 내가 너에게 미쳤었기는 했었나 보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었어도 널 보니 마음도 저린다.’
‘성욕도 없는 놈이 되었는데 널 보니 안고 싶다.’
민호는 무심한 듯 위스키를 계속 들이켰다.
다니를 회사에서 처음 보았던 날, 사무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총괄기획부 김 과장이 보였다.
“신다니엘 사원은 결혼하신 분입니까?”
“네, 디자인 부서에서 그렇게 들었습니다. 남자 직원들이 관심이 많아 미리 물어봤었죠.”
민호는 술을 털어 넣고 한숨을 쉬고 중얼거렸다.
“나쁜 계집애.”
“다니야, 네가 가라면 갈게. 너라도 잘 살아.”
…
다니와 김 주임은 깨끗한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노대리와 다른 직원까지 다섯 명이 한 객실을 사용했다. 방이 두 개 였다.
임 주임은 어디 소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내 다니와 김 주임의 방에 와 있었다. 침대와 온돌이 섞인 방인데 아마 잠도 같이 잘 기세였다.
여자 여섯 명이 모이자 즐거운 수다 타임이 시작되었다.
“임 주임님은 이상형이 뭐예요?”
객관적으로 예쁜 임 주임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인도 없었다.
“돈 많고 능력 있고, 또는 잘생기고 밥벌이 정도만 하는?”
“미치겠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다 바라진 않으니.”
김 주임이 웃으며 말했다.
“김 주임님은요?”
“나도 임 주임하고 똑 같아. 그리고 이태하 팀장님 스타일?”
“어머 어머 진짜요?” 다니가 놀라며 대답했다.
“다니 씨, 시폰 원피스 자주 입던데? 그거 좋아해?”
“네.”
“그렇다고 모든 시폰이 다 좋아? 좋은 것만 좋은 거지.”
“아, 스타일이라고 붙이신 걸 간과했네요.”
“다니 씨 이야기 해봐. 혹시 소개라도 해 줄지.”
“음, 저는요. 그냥 아이 아빠요. 소개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애 낳아도 안 나타났다면서.”
“네, 사실 이 년동안 헤어지기로 한 상태였어요. 그래도 임신하면 올 줄 알았어요. 제가 임신 내내 그리고 산후에도 우울증이 왔어요. 산후우울증은 정말 무섭더라고요. 많이 힘들었어요. 죽을 고비였다고 생각이 들 만큼요.
아무것도 못 하고 아이 젖도 안 먹였어요. 친구들이 돌아가며 왔고 산후도우미 지원받아 겨우 넘겼어요.
제가 아이를 낳겠다고 해서 아버지 지원이 다 끊어졌고, 우울증으로 취직은 고사하고 아이도 키울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남자친구가 군대 가기 전 주고 간 차를 팔았거든요. 그 돈으로 대학 졸업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1년 버텼어요.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옆에는 없더라도, 그의 배려로 힘든 시기를 넘어가고 있지 않냐고. 그가 못 오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의 전 재산을 준 거였어요. 그의 자상한 마음이 그래도 아이를 지켜준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어요. 서른 살까지...”
여자들 다섯 명 모두 말을 잇지 못하고 김 주임이 다니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지난 후 임 주임이 한마디 했다.
“난 아들도 없어. 괜찮아. 아이 아무나 낳나.”
다니가 웃으며 임 주임을 보았다. 좋은 언니같다.
…
점심 식사 후 워크샵 개회식이 진행이 된다고 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들을 먹고 힘을 내자며 다짐했다.
체육대회마다 꼴찌를 면치 못하는 디자인 부서는 올 해도 특별한 의욕은 없는 것 같았다.
점심 식사중이었다. 노 대리가 다니며 참가 종목에 이름이라도 적으라고 다니고 있었다.
다니는 배구에 자기이름을 적으며 후보라고 적어 놓았다. 추가로 다치면 저녁에 노래 못한다고 썼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개회식을 한다.
임 주임이 무역, 회계팀 부서사람들과 서로 자기네 본부장이 더 잘생겼다고 우기다가 내기를 걸었다.
우리방 6만원 회계팀 방이 6만원씩 12만원이 걸렸다.
곧 이상한 내기의 결말이 날 것이다.
의기양양한 임 주임을 믿고 다니도 만원을 손을 떨며 내어 놨다.
‘돈 없는데. 축구 교실도 보내야 하고.’
다니가 정리한 14층 창고는 비워졌다.13층 새로운 원단실로 물건들이 옮겨졌다. 다니는 새 원단실을 패턴사와 샘플실 직원과 함께 정리했다.셋이 하니 할 만했다. 앵글도 전문가가 다시 조립하고 새로운 것들도 들어왔다.비 오는 날 이후 이태하는 업무 지시를 할 때 떠넘기듯 시키던 일들을 일답게 지시하기 시작했다.‘민호가 본부장으로 일을 잘 하는 거겠지.’서쪽 창고라 계단으로 다니면 가깝기는 한데 심부름을 다니는 처지에서는 이제 실내화 슬리퍼 대신 운동화로 바꿔야 할 것 같았다.현 본부장의 사무실과 비워진 창고가 연결되는 확장공사가 거의 끝났다. 임 주임은 이동민의 일이 있은 뒤로 결연한 의지로 현민호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었다.이동민이 한 일을 알렸고 현 본부장은 여직원을 도왔던 일이 부각되었다. 그렇게 임은영은 현 본부장의 임시 비서를 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비서가 필요할 시 호출받아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유니 건설 비서 경력이 3년이 있었다.‘잘하면 비서실로 갈 수도 있는데, 몸을 사리고 다니한테 잘하면 되지 않을까?’임 주임은 현 본부장의 신임을 얻어야 하니 비밀 유지를 위해 조심했다.괜히 다니가 본부장과 썸이라도 탄다는 소문이 나면 당사자로 지목되는 다니가 공격받을 수도 있었다.그건 임 주임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예쁜 여자끼리 돕고 살아야지.’그리고 겪어 본 바로는 현 본부장이 나이답지 않게 날카로울 때가 있어서 조심하는 중이었다.이동민도 이태하도 현 본부장이 성질내면 한 성깔 할 바탕이 보이자, 몸을 사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너 아들이고 차기 대표일 텐데.현 본부장이 신다니 볼 때 멜로 눈이 되는 거 보면 감성도 있고 여린 심성은 맞는 것 같았다. ‘옛날 친구를 불쌍하게 보고 도와주다니. 사람은 마음에 든다. 두사람은 어차피 안 될 사이지만.’가끔 웃을 때는 몽실몽실한 귀여운 20대 같다가도, 지난번처럼 눈이 돌 때가 있어 역시 기업인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드디어 성공!’[안녕하세
보라의 생일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다니는 아빠가 선물 사라고 준 돈을 그대로 봉투에 넣고, 생일 카드를 썼다. 마음에 없는 생일 축하를 하는 것이, 자신의 최선이었다.새엄마는 12시에 있는 케이크 커팅을 보라고 했다. 새엄마와 보라는 호텔로 케이크를 찾으러 나갔다.아침 일찍부터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청소하느라 여러 방문이 열려 있었다. 다니는 처음으로 새엄마의 방을 보았다. 방이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TV에서나 볼 법한 방이었다.다른 문을 열자 드레스룸이 나왔다. 자신의 방보다 두 배는 넓었다. 행거들이 호텔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조심히 보라의 방문을 열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마음에 분노와 원망이 차올랐다.다니의 작은 방에 있는 큰 벽장은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박스로 가득 차 있었다. 방이 작아 초등학생 사이즈 침대와 책상도 아닌 테이블과 서랍장이 전부였다. 공간이 좁아서 모든 물건을 서랍에 몰아넣고 사용했다. 다니는 보라의 화려한 방을 보니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분노와 원망도 잠시일 뿐, 곧 자신은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벽장의 물건을 빼서 둘만한 곳들은 많았다. 55평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의 벽장을 비워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곧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새엄마는 내가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아빠와 새엄마는 나를 왜 데려왔을까.’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12시에 생일 케이크 커팅만 보기로 하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다니는 낡은 흰 원피스에 할머니가 사주신 진주 핀을 꼽았다. “너, 다니엘이구나. 말 많이 들었어.”“공주같이 예쁘네.”방을 본 충격에 저런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이미 학교에서 단련된 것도 있었다.칭찬 아닌 뾰족한 말을 다니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케이크 커팅이 있고 선물들 이야기를 할 때였다.“다니 봐. 이렇게 성의 없이 십만 원을 넣어주었네.”보라가 봉투를 한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런 비난이 올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상관
보라는 엄마의 결혼식 후에는 자신의 방에서만 지냈다. 보라의 넓은 방은 블랑네일의 손녀의 방답게 핑크빛 침구, 하얀색 원목 침대, 하얀색 책상, 예쁜 유리 장식장이 있었다. 유리 장식장에는 명품 가방들과 지갑 그리고 향수나 화장품이 놓여 있었다.블랑네일은 매니큐어와 페디큐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블랑네일의 브랜드 제품을 판매했다. 보라는 아빠를 처음부터 아빠라고 불렀다. 기억 속에 없는 아빠를 대신해서 들어오신, 엄마의 애인은 친절하고 좋았다. 멋진 새아빠는 외모도 성격도 보라의 마음속 아빠와 닮았었다. 보라는 상견례에 갈 때에 동갑 딸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들었다.엄마가 아빠의 딸이 하나가 있다고 했지만, 동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막연히 언니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긴장한 엄마가 집을 어지르며 옷을 입고 있었다. 상견례 날이라 엄마가 정신이 없었다.보라는 집에 이미 들어와 있는 아빠가 따로 오는 것도 싫었다. 긴장한 엄마와 함께 보라는 외할머니의 차를 타고 왔다. ‘대전 할머니를 위해 엄마가 일부러 1층을 예약한건가.’‘로즈가든 호텔은 스카이라운지가 좋은데…’뭔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었다.호텔 1층 커피숍에서 먼저 도착해 아빠의 가족을 기다렸다. 아빠와 할머니 그리고 여자애가 걸어왔다.아빠는 긴장한 듯한 여자애의 등에 손을 얹고 있었다. 키가 적당히 크고 몸매와 비율이 좋아 눈에 띄는 여자아이였다.엄마가 일어서서 대전 할머니와 인사했다. 그리고 아빠 딸을 살짝 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보라는 자기 엄마를 유심히 살폈다.“네가 다니엘이구나. 예쁘구나.”‘크크, 우리 엄마 긴장하네. 예뻐서 질투하나. 하긴 나도 쟤 마음에 안 들어.’자기 딸 곁에 앉은 아빠는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얼굴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사랑스럽다? 귀엽다? 아빠의 미소는 무슨 뜻일까.’착하게 생긴 게 고개는 들고 허리를 세우고 걷는 것이 왠지 얄미웠다. 한집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
"임 주임, 신다니 씨 좀 돌봐 주세요. 다니 씨는 내 동창이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현 본부장이 임은영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자, 하마터면 임 주임은 놀라서 딸꾹질을 할 뻔했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고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눈치와 호기심을 기본으로 주변을 살피며 살아온 임 주임의 정확한 촉이 발동했다.‘아, 동창인데 그 시절 신다니한테 관심이 있던 거고.”한때 인기가 많았던 임 주임은 다니와 비슷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다 이해한다는 눈치였다.현 본부장은 원래 쓸데없이 개인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데, 다니 가정에 문제가 되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동창이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젠장,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민호의 머리카락과 흰 셔츠도 젖어 있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긴 복도를 가로질러 디자인 개발부로 걸었다.“이동민 대리, 이태하 팀장, 회의실로 들어와요.” 디자인부로 현민호 본부장이 들어서서 이동민을 찾았다. “이 대리, 원래 부하 직원을 그렇게 다룹니까?’“그건 오해시고요. 난 신다니 씨에게 일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이동민은 먹힐 리 없는 변명을 뻔뻔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20킬로도 넘는 짐들을 인턴에게 맡기고 대리는 뭐 하셨습니까?”“그건 신다니 씨일입니다.”“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느라 무거운 짐을 들고 간다는 걸 모르셨던 건 아니겠죠.전 인성을 눈여겨봅니다. 동료 간의 이해와 협조 없이 업무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인턴 여직원 비 맞게 하고 구경하는 거 직접 봤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을 겁니다.그리고 내 업무 보고서에도 자세히 쓸 겁니다.”이동민의 얼굴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바꿀 수가 없었다.“이 대리, 두고 보겠습니다. 난 머리가 좋아서 웬만한 것은 잊지 않습니다.”현민호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앞으로 뻗고 있었다.이동민을 향한 적개심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주먹이 나가는 것을 참으러
‘볼륨도 있고 다리는 정말 예쁘네.’‘치마나 조금만 당겨 올릴까.'이동민은 체육대회에서 노래하던 다니를 보고는 매일 신다니 곁을 맴돌았다. ‘이런 여자를 버린 놈은 여자가 많은가 아니면 돈이 많은가. 어떻게 신다니엘을 버리지.’치마자락을 조금이라도 올리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먼저 가디건을 옆으로 흐르게 당겼다.‘가디건이 덮고 있어서 쉽지 않네.’다니의 가디건을 잡아당기자 무릎까지 덮은 치마 아래로 다리가 약간 벌어진 모습이었다.그 순간 가디건을 따라 다니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놀란 다니가 눈을 떴다.이동민은 가디건에서 얼른 손을 떼고 소리를 질렀다.“일어나요. 다 왔어.”이동민이 큰 소리를 지르자 다니의 심장이 잠결에 놀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아, 네.”어릴 때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다니는 차에서 내려서 트렁크에서 큰 쇼퍼백을 꺼내 어깨에 둘러메고 걸었다.귀에서 삐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며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내가 질 줄 알고.’다행히 세한의 공장장이 나와 있었다.“다니 씨, 짐 줘요. 오늘은 전무님도 뵙고 가요. 전에 못 봤으니.”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직원들과 같이 먹고 원단을 싣고 회사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가져가기 좋게 두 박스로 나누어 주었다.세한의 전무는 대학 선배인 김정한이었다. 명함을 주며 밥 한 번 먹자고 인사를 했다. “다니야, 복학하고 너 보고 참 예쁘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바빠 보이니 다음에는 차도 한 잔하자. 반갑다.”다니는 별말 없이 웃어 보였다. 이동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이동민은 그 모습도 물끄러미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저런 벤츠 보내고 똥차 잡은 건가…’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박스를 하나씩 챙겼다. 이동민은 바닥에 박스를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갔다.다니도 10킬로가 넘는 박스를 들어 올리느라 손이 떨렸다. 뒤 트렁크를 넣으려는데 도무지 박스를 들어 올릴 수
다니는 이태하를 좋은 상사라고 믿었지만, 너무 많은 업무를 시켰다. 인턴사원은 디자이너들에게 원단 조각인 스와치와 컬러칩등을 주어야 했다.대영어패럴의 주 공장은 베트남에 있었고, 하이패션 계열의 생산과 샘플 제작이나 소량 생산은 협력사인 세한의류에서 맡고 있었다. 원단도 세한 의류의 원단 공장과 연결되어 있었다.이태하는 현 본부장이 지시한 드롭 숄더 코트에 색을 추가해 보라는 지시를 혼자 하지 못했다.기어이 다니를 옆에 앉히고 같이 자기 일을 했다.“팀장님, 어두운 계열에서 블랙느낌이지만 가벼운 컬러 3종류, 블루, 그레이 계열에서도 각각 3가지 정도 골랐습니다.”다니가 서양화가 주 전공이어서 색감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기도 했고, 상업성이 없는 코트를 화보용을 만드는 느낌이라 더 책임감이 들어서였을 수도 있었다.“팀장님, 세한의류에 한 번 가 주셔야 할 거 같아요.”“나 바쁜데, 신다니 씨가 직접 운전할래요.”“저 운전은 못 하고 회사 앞 버스를 타고 다녀올게요. 안산 시외 버스터미널까지 가면 세한에서 차 보내주셨어요. 이번에도 그렇게 갈게요. 가지고 와야 할 짐은 퀵으로 보내도 될까요? 20킬로 넘을 것 같아요. 자체 샘플실 물품도 필요하시다고 하시네요.”“아, 다니 씨 나와 있어야 하는데.”다니는 할 말이 없었고 이태하에게 실망해서 더는 말하지 않았다.이태하는 두 사람은 가야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물었다.“오늘 세한 갈 수 있는 사람 있나요? 원단 궁금한 사람 같이 가 봐요. 운전할 수 있는 사람 중에.”다니의 눈이 흔들렸다. 누가 일어설지 짐작이 갔다.“이 팀장님, 저 혼자 간다고요.”“제가 가겠습니다.”이동민이 차키를 챙기며 일어섰다.“이 대리님, 바쁘신데 제가 혼자 가겠습니다.”이동민이 얼굴을 굳히며 신다니를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일하러 가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학교 다녀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아주 공주야 공주.”이동민이 혼잣말로 웅얼거리지만 다니는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