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니의 동그랗고 큰 눈이 흔들렸다. 심장이 너무 뛰어 몸을 숙여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강단 앞에 세 남자가 자리를 잡았다.
대표이사와 새로 부임한 두 명의 본부장이 좌우로 앉았다.
시간이 흘러서일까. 그는 분위기도, 눈빛도 달라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분명 동하 아빠이자 자신의 첫사랑 현민호였다.
현민호는 흰색 단체 트레이닝복 바지에 겨자색 폴로 셔츠를 입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단상으로 이동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먼저 인사하고 당당하게 마이크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패션사업부를 맡게 된 현에단 본부장입니다.
패션사업부는 대영어패럴의 전통과 가치를 이을 것입니다,
더불어 새로운 변화를 더해 가겠습니다.
기존 라인들의 정신은 유지하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모든 도전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니의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민호가 돌아왔다. 그것도 당당하게 경영인의 모습으로.
최강현의 연설도, 대표의 연설도,
다른 사람들의 박수 소리도 다니에게는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현민호의 눈과 얼굴만 따르며 다니는 눈시울이 젖어갔다.
손수건이 없어 티셔츠 소매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이제 우리 만나는 거지.’
‘이렇게라도 돌아왔으면 된거야.’
‘민호야, 이따 내가 공연 보여줄게. 고등학교 대학교 우리의 추억을 떠올리게…’
다니는 눈에 먼지가 들어간 듯 눈을 가렸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고개를 들고 다시 민호를 보았다.
그리워하던 그를 보자 눈물이 났다. 6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다니는 동하를 볼 때마다 민호가 아빠라는 생각에 그를 가끔 떠올렸다.
민호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앗싸, 이겼다.”
김 주임의 큰 소리에 울고 있던 다니가 깜짝 놀랐다.
‘아, 내기했었지.”
임 주임은 총괄 기획부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의 문자가 여섯 명의 단체방에 떴다.
[우리 이김]
단톡방 문자가 들어왔다.
사실 최강현도 괜찮지만, 마흔 살과 스물아홉 살의 차이는 넘을 수가 없다.
게다가 민호는 연예계에서도 인정한 마스크였으니…
우리 방 멤버들은 회식하기로 하고 환호했다.
‘내 남자친구를 이런데 이용하다니…’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는 상관없었다. 그의 재회가 인상적이었듯이 자신도 그래야 하니까.
다니는 가방을 열었다. 흰색 반바지와 옥색 실크 느낌 블라우스가 보였다. 공연마다 입던 옷이었다.
오늘은 그냥 흰 단체복 바지를 입으려 했지만,
민호가 처음으로 약속도 없이 자신을 기다렸던 그날이 떠올랐다.
…
흰 반바지와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은 어린 소녀였던 신다니엘로, 어린 소년이었던 그가 좋아했던 첫사랑의 모습으로 …
처음으로 고등학생 민호가 다니를 기다린 날이었다.
수진이가 연습생을 시작하며 더는 미술반에서 만날 수 없게 됐다. 힘이 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민호를 만났다.
같이 오디션도 보고 연습생 제의도 받았지만, 다니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 앞 하얀 벤치에 긴 다리를 뻗고 허리를 젖히고 앉아 있었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두고 있었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그의 평소의 자세를 보는 것 같았다. 남자 친구들을 이끌고 늘 당당한 그였다.
민호는 다니가 집에서 밥을 잘 못 먹으니,
삼겹살 집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고 이것저것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민호가 말했다.
“오늘 한 말이 일주일 동안 말한 것보다 많은 거 같아. 핸드폰 줘 봐.
아무 때나 문자 보내. 바로 못 봐도 이해하고. 운동할 때는 못 봐.”
“오늘은 갑자기 왜 기다렸는데?” 다니가 웃으면서 물었다.
민호의 얼굴이 당황한 듯 붉게 물들었다.
“그, 그게…”
다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민호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공연하는 날 너 너무 예뻐서… 잊지 못해서 네가 보고 싶었어.
오늘 시간이 돼서 무작정 기다렸어.”
민호가 몸을 숙이고 다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조금 가까이 가져왔다.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그의 통통한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넌 나 어때?”
“음, 노란 우산도 고마웠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그래, 잘 들어가.”
아파트 정문에서 그는 단지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뛰어 가던 그는 뒤를 돌아보며 뒷걸음질 쳤다.
손을 흔들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노래할 때 너 너무 예뻤어.”
…
현민호는 단상 오른쪽 자리에서 자신의 인사말을 들으며 우는 다니를 보았다.
‘그래, 나 잊은 것은 아니네. 게다가 울기까지’
다니가 울어 주는 모습만으로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라 하면 가야 하는데 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거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은 지금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른 탓이라 생각했다.
현민호는 현에단으로 돌아와 객실을 나왔다. 다니를 보고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 불륜은 아닌 거지. 보기만 하자. 보기만.’
다치고 난 후에는 하늘이 예쁜지 사람이 어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옷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말고 그 안에 무슨 진심이 있는지는 믿을 수가 없다.
겉으로는 천사 같고 자신을 집어삼킬 정도로 관능적이던 여자도 그렇게 변해버렸는데.
하지만 의상은 최소한 사람의 취향과 그가 바라는 이상을 조금이라도 반영한다.
어차피 지저분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겉이라도 꾸미면 자기 모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옷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힘을 주는 것.
편안한 옷은 몸을 쉬게 하고, 격식이 있는 옷은 스스로를 다잡게 한다.
민호는 어제와 다른 자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꽤 무더운 날씨에 흐린 하늘이 다행이었다.
대영이라고 쓰여 있는 캡모자가 촌스러워 웃음이 났다.
촌스러웠던 그 캡을 막상 써보니 자신에게 꽤 잘 어울렸다.
‘회사가 마음에 들려고 하네.’
기정준은 메모를 읽고 현 회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종이를 내밀었다.현 회장의 얼굴에 당황과 분노가 역력했다.“아버지, 어떻게 할까요?”“여기까지 와서.”기정준은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제가 내려가 볼까요?”“민호도 함께 가.”“민호요?”“그래, 최 여사가 말을 들을 사람은 민호뿐이잖아.”기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이었다. 여기 참석한 어느 누구도 최민주와 친하지 않았다.기정준은 현민호도 어머니를 멀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들이기에 말이 통할 거라 생각했다.기 실장이 돌아보니 현민호는 제 앞에 놓인 호박죽을 한 입 뜨고 있었다.…따뜻하게 입안으로 퍼지는 호박죽의 맛과 향이 나쁘지 않았다.아침에 빵 한 조각 뜯어 먹고 제대로 된 식사라고는 하지 못했던 속이 달래졌다.현민호는 이선영의 거친 손에서 지난번 만남에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본인이 끼고 싶으면 꼈겠지.’외면하고 싶은데 현민호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반지를 끼지 않았는지 알기에, 가슴이 울렁대기 시작했다.그는 따뜻한 죽을 넘기며 이선영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제가 마음을 정리하게 시간을 주세요. 어느 방향으로 정하든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친어머니인 것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있었다.다정해 보이는 둘을 보며 현일두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그 순간 기정준이 조심히 다가와 현민호에게 귀엣말을 했다.“민호야, 잠깐 내려갔다 와야겠는데?”“왜요?”“최 여사님이 아래 색동에 계셔.”“하.”진심으로 최 여사는 보고 싶지 않았다.자신도 사고를 당한 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담을 받아 왔었다.그러기에 민호는 최민주의 이상한 태도도 병 때문일 거라 믿고 이해하려 했었다.‘방법이 없어. 내가 가는 수밖에.’“잠시 급한 볼일이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현
현민호는 다니에게 문자도 보냈고, 바람도 쐬었으니 호텔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의 시야에 윤세나의 동생 윤세헌이 들어왔다.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것 같았다.윤세헌은 지나가는 모델들을 보느라 쉴 새 없이 눈을 굴리고 있었다.그런 윤세헌을 보며 현민호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저러니 나도 그런 줄 알고 형수 될 누나를 꼬셨다고 생각했겠지.’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싱가포르 포럼 이후 처음이었다.현민호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 현 대표님. 말씀 들었습니다. 대표 되신 거요.”“아, 네. 잘 지냈어요?”“네. 잘 지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여기서 먼저 뵙게 돼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현민호가 갑작스러운 사과에 세헌의 얼굴을 살폈다.“형, 10년 전 일을 누나가 다 고해성사했어요.누나가 결혼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 부렸었다는 거요. 형하고 전혀 상관없었다고요.”“하하. 그랬군요.”“그리고 순전히 외모가 이상형이라 결혼하겠다고 했다고요. 시간도 벌고 싶었다고요.형이 어리니까 대학 졸업하면 보자고. 우리 누나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원.”“세나 누나가 고맙네요. 이제라도 말해 주니.”“현일두 형은 배경도 모르고 만날 만큼 이상형이니 궁금하네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형.”“그래, 일두 형 보면 세나 누나 취향이 어떤 스타일인지 바로 알 거야. 하하.”“그렇게 잘생기셨어요? 하하하. 궁금하네요.”“세헌이는 지금 어디서 일해?”“선진생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은 아직 공부하고 있고요.”“그래. 기회 되면 가끔 보자고.”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선진생명 대표 내외와 세헌, 그리고 상견례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귀국한 세나의 언니 미나도 있었다.선진건설 대표인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촌 오빠들까지 참석했다.일두의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부부, 단우와 단하, 기정준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할아버지는 이미 세나와 일두를 따로 만났다고 했다.현성의 작은아버지는 건강상의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고 현민호는 새로 받은 커피의 향을 맡았다.‘동양호텔?’어젯밤까지 동양그룹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오늘은 형의 상견례까지 그 호텔에서 하게 생겼다.현성은 동양과의 오랜 친분 덕분에 늘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받았다.새로 받은 커피는 그나마 마실 만했지만, 입이 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지난 일이지만 세나 누나도 대단하네. 나 보기 민망하지 않나? 취향은 확실하군.’…현민호는 옷을 갈아입으러 청담동 집으로 향했다. 최민주는 없었다.비밀 번호를 모르니 문앞에서 무작정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는 브라운 계열의 양복을 입고 금색 넥타이를 맸다.호텔앞에서 내린 현민호는 어느새 따뜻해진 바람을 맞았다. 부서지는 햇살도 좋아서 그는 호텔 앞에 잠시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다니는 요즘 왜 그렇게… 미행을 하지를 않나. 아줌마처럼 바가지를 긁지 않나.’어제 현민호는 다니 품에서 쉬고 싶었지만 다니에게 맞은 가슴만 저릿하게 아팠다.호텔앞은 모델대회를 앞둔 모델들이 모여 있었다.현민호의 앞을 지나가며 모델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서로 빙긋 웃었다.“You must be a model.”“I used to be. Good luck.”현민호는 그녀들이 다가 오려하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았다.다니의 짧은 문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렇게 나를 못 믿고, 서운하게...’[다니야,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뻐.지금 호텔에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모델 대회가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모델들이 와 있어.그런데 다니, 너보다 예쁜 여자는 한 명도 없어.내 눈에 너보다 아름답고 청초하면서도 섹시한 여자는 없어.너와 닮은 것은 내 아들과 하얀 도자기 인형뿐이야.나 그 도자기 인형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본가 장식장에서 가지고 나왔어.나무 상자를 맞춰서 깨지지 않게 금고에 넣어 두었어.아무도 손댈 수 없게.내가 악당들에게서 지킬 수 있을 때, 나의 소중하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다니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소파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아무렇게나 던져진 민호의 양말이 보였다.깨끗하고 깔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양말도 세탁물 통에 넣고, 머리도 젖은 상태로 눕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수건을 깔고 누워 있었다.민호의 가슴을 때린 것은 충동적이었다.그가 아파하자 당황해 아무 말도 못했다.다니는 리나에 대한 일에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민호도 정우를 이렇게 질투했지만 동하가 정우의 아들이라고 해도 품어 주려고 했었다.‘사랑하니까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데...’다니는 벌떡 일어나 민호를 쫓아 나갔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휴대전화로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민호의 휴대전화는 무음이었다.다니는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슬리퍼를 신은 채 민호를 쫓았다.‘술도 마셨고 운전도 못 할 텐데…택시 부르겠지.그럼 내 전화도 확인하겠지.’가까운 호텔 앞에 택시 승강장이 있었다. 그곳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다니는 현민호가 어디로 갔든 따라가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동하를 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민호야, 미안해. 때린 것도 미안하고.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는데.네가 결혼하자고 말도 안 해도 난 너 못 떠나잖아.내가 왜 그랬을까.”눈물범벅이 된 다니는 문자를 보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해.]다니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걸었다....현민호는 집 앞 호텔에 방을 잡았다.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침대에 누웠다.수술한 왼쪽 몸통이 욱신거렸다.‘하아, 정말 힘드네.’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내려놓았다.다니에게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눈을 감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에 현민호가 눈을 떴다.몇 시인지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떠 있었다.[잘 자고 내일 봐. 오늘은 내가 미안해. 네 아픈 거, 네 슬픔 다 사랑
현민호가 눈을 감자 다니는 작은 수면등을 켠 채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그럼 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오늘은 그냥 좀 자자.”다니가 민호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현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하.”[최여사]한쪽에서는 휴대전화가 반짝이고 있었다.민호는 조용히 동하의 얼굴을 잠시 보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끝을 디뎠다.샤워 후 덜 마른 머리 때문에 깔아 둔 수건에 휴대전화를 싸서 동하가 깨지 않게 방을 나왔다.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다니는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거실 시계는 아직 10시도 안 된,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현민호는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작은 위스키병을 따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자야 해. 나 한계야.’현민호는 갑자기 등장한 생모와 형 때문에 주변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아버지, 최 여사, 생모까지 작당해서 자신을 속였다.세상이 뒤틀리고 있었고, 감정이 사라져 약을 먹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머릿속이 텅 비고, 가슴은 수술 후처럼 텅 비어 가는 느낌을 견디고 있었다.그 상태로 돌아가면 회사 일도, 동하도, 그리고 다니도 지킬 수가 없었다.폐 수술로 피우지 않던 담배라도 배워 볼까 생각 중이었다.그 와중에 휴대전화는 계속 반짝였다.‘하, 나 좀 그냥 두면 안 되나.’현민호는 최민주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한 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않았다.‘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내 마음도 모르겠는데.’주변에서 재촉하는 사람들이 싫었다.[최여사]“흠.”그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민호, 너 지금 어디야?“왜 그러시는데요?”-내가 전화한 게 몇 번째인지 알아? 왜 안 받아?“바빴어요.”-바빠?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지내는지 알기나 해?현민호는 입을 다문 채 피곤한 듯 벽에 기대 섰다.-너 정말 이럴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내가 너를
리나는 계속 울리는 문자에 인상을 썼다.[맥주창고로 와. 기다리고 있어.][리나야,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버틸 수 있어.]메시지가 쌓이자 무음으로 돌린 리나가 휴대전화를 백 안에 넣었다.남자들끼리의 대화가 이어지자 조용히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같은 빌딩에 있으니 김정호를 돌려보낼 요량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현 대표도 기정준 실장과 더 이야기할 것 같아 리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왔다.맥주창고에 들어서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정호가 손을 들었다.“정호 오빠, 왜 왔어. 지금 아버지와 오빠가 근처에 있어.”“보고 싶어서. 주말이니까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너 주려고 이것저것 장도 봐 두었어.”“오빠, 우리 오빠 만났었다며? 뭐라 그래?”“뭐라든 상관없어. 백주대낮에 납치라도 하겠나. 괜찮아. 그리고 대영은 아직 현 대표가 있는데 나를 자르기라도 하겠어.”민리나는 막상 김정호를 마주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다.정호가 손을 잡고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자 리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곧 손을 뺐다. 주말이라도 회사 근처였다.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회사 일만 한 김정호가 나이에 비해 순진한 것도 왠지 부담이 되었다.우연히 집에서 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연애를 한다고 했지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오빠들이 너무 오버였다. 하지만 현민호라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아무리 훈남인 정호도 현민호를 마주한 뒤에 보면 왕자와 집사를 보는 느낌이었다.속물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명품이 겉돌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현민호였다.‘오빠, 그냥 좀 조용히 사귀자.’…어른들까지 접대해야 하는 긴장된 술자리는 8시 정도에 끝났다.아침에 만진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현 대표의 자세는 여전히 반듯하고 예의 바른 자세였다. 민 회장이 연로해서 그 정도에 끝난 것이었다.기정준은 동양의 제안에 나름 호의가 담겨 있다며 친분이 중요하다고 현민호에게 다시 가르쳤다.현민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