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강솔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홍일도 마찬가지였다.둘 다 신동과 대화를 이어갈 의욕을 잃었다.여진동까지 직접 찾아왔으니 이제 더 이상 강솔을 찾아올 여씨 집안 사람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월요일 출근 첫날부터 또 손님이 찾아왔다.강솔이 회사 직원들에게 업무를 배정한 직후, 안내데스크 직원이 들어와 방문객이 있다고 알렸다.홍일이 물었다. “만나시겠습니까?”강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누군지부터 보자.”회사 안에서 대놓고 사람을 해칠 만큼 무모한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응접실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본 강솔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전에 보여 준 자료가 떠올랐다. 오주향, 여태진의 아내이자 여규창의 어머니였다.강솔은 알아보지 못한 척 물었다. “누구시죠?”오주향은 눈이 부어 있었다. 울다 온 게 분명했다. “강솔 씨, 오셨네요. 저는 오주향이에요. 여태진 대표의 아내입니다.”강솔은 맞은편에 앉아 가볍게 인사한 뒤 차분히 물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오주향이 강솔 옆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부탁드릴게요. 제 남편...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 사람이 강솔 씨에게 한 일이 너무 심했다는 것도 알고, 강솔 씨가 그 일로 얼마나 힘드셨는지도 알아요. 제가 뭐든 보상할게요. 제발 죽지만 않게 해 주세요.”강솔은 홍일을 바라봤다.홍일은 바로 뜻을 알아차리고 오주향의 팔을 잡아 단숨에 일으켰다.강솔은 이런 방식이 불편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앉아서 말씀하세요. 요즘 세상에 무슨 일 생겼다고 무릎부터 꿇으실 필요는 없잖아요.”“제 남편만 살려주신다면 평생이라도 무릎 꿇을 수 있어요.” 오주향은 다시 내려앉으려고 온몸에 힘을 줬다.하지만 홍일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결국 다시 무릎을 꿇지는 못했다.강솔은 오주향과 눈을 맞추며 냉정할 만큼 이성적으로 말했다. “평생 제 앞에 무릎을 꿇으셔도 저
송 집사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태진 도련님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해외에 계속 계시면 목숨이 위험하고, 돌아와서도 중형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요.”여진동도 머리가 아팠다. “다른 쪽에서 방법을 찾아야지. 하중현이 찾아낸 것들 가운데 일부라도 다른 사람 짓으로 돌릴 수 있는지 알아봐.” 여진동은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대체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항상 사고만 치고 다녀.”송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한참 고민하던 송 집사가 다시 물었다. “솔이 아가씨에게 지분은 정말 안 주실 생각입니까?”여진동은 이번에는 허세도 부리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네. 요즘 윤재 하는 거 너도 봤잖아. 걔가 마음먹은 걸 내가 막을 수 있겠어? 거기 사람들도 다 윤재 말을 듣는데.”송 집사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렇다면 솔이 아가씨도 그걸 알고 있어서 회장님께 그렇게 말한 건 아닐까요?”여진동이 송 집사를 봤다. “방금은 전부 진심이라며.”“연기를 잘하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여진동은 코웃음을 쳤다. “윤재랑 정숙이 딸이 연기를 그렇게 잘하겠어?”뜻대로 안 되면 힘으로 밀어붙이기 쉬운 두 사람 사이에서 강솔처럼 부드러운 성격의 딸이 나온 것만 해도 신기할 일이었다.여태진에 관한 문제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여진동이 물었다. “연락하라고 한 사람들은 연락했어?”송 집사가 답했다. “했습니다. 이틀 안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겠다고 했습니다.”여진동의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다. “오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면 좋겠군. 강정숙이 회사 시스템에 불법으로 침입해서 그 자료를 얻었다는 걸 밝혀낼 수만 있으면 아직 뒤집을 여지는 있어.”다만 강정숙 같은 사람이 정말 그렇게 허술하게 흔적을 남겼을까?강솔은 이런 대화를 전혀 모른 채 식당을 나와 홍일과 신동의 경호를 받으며 차에 탔다.강솔의 표정이 들어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자 호기심 많은 신동이 물었다. “아가씨
강솔은 어머니가 그날 밤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때 자신을 위해 여씨 집안에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강솔은 시선을 들어 여진동과 마주했다. “제가 아직 살아 있는 건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서 지켜 줬기 때문이에요. 작은할아버지가 봐준 게 아니고요.”여진동은 잠깐 굳었다.강솔이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지금까지는 여진동에게 늘 예의 바르게 대하지 않았던가.강솔이 말을 보탰다. “작은할아버지가 정말 아무 죄도 없고 깨끗한 사람이라면, 지안 아빠와 엄마가 아무리 벌을 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겠죠.”“할아버지께서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 자체가 작은할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닌가요?”여씨 집안의 배경을 생각하면 중현이 여태진을 잡으려 해도 여진동이 모든 힘을 써서 최소한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그마저 어렵다는 건 여태진이 강솔에 대한 살인 교사 말고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었다.여진동도 결국 인정했다. “죄를 저지른 건 맞아. 그래도 나는 태진이 목숨만은 살리고 싶다.”강솔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 부탁에는 답해 드릴 수 없어요.”여진동이 낮게 물었다. “내가 너한테 빌어도?”강솔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뜻은 단호했다. “법 앞에서는 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할아버지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여진동의 마음이 크게 내려앉았다.그동안 강솔은 인상도 부드럽고 성격도 온화해서 설득하기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다.바로 승낙하지는 않더라도 여진동이 계속 설득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하거나, 적어도 상당한 대가를 요구할 거라 예상했다.여진동은 결국 다른 카드를 꺼냈다. “내가 네 아버지가 너에게 지분을 주는 걸 막을 수도 있어. 내가 반대하면 네 아버지도 여러 가지로 곤란해질 거야. 그러면 네가 LS그룹 지분을 받는 일도 물 건너갈 수 있어.”강솔은 평온했다. “전 LS그룹 지분을 꼭 갖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요.”여진동의 날카로운 눈이 잠깐 멈췄다.강솔이
레미가 물었다. “요즘 여씨 집안에서 너를 찾아온 적 있어?”강솔은 사실대로 답했다. “없어. 찾아와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거고.”레미는 여진동이 여태진을 어떻게든 돌아오게 하려고 움직이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강솔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알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그날 저녁.여진동이 사람을 보냈다.강솔에게 따로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강솔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여태진이 지금 벌인 일에 관해 설명하거나 사과하려는 정도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 식당의 룸에서 만났다. 강솔이 들어오자 여진동은 어른다운 관심이 묻은 눈으로 바라봤다. “왔구나.”강솔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래 기다리셨죠.”“와서 앉아.” 여진동은 직원에게 메뉴판을 가져오게 했다. “먹고 싶은 거 골라.”강솔은 메뉴판을 받아 잠깐 본 뒤 다시 여진동에게 건넸다. “전 다 괜찮아요. 가리는 게 별로 없으니 그냥 골라 주세요.”강솔이 그렇게 말하자 여진동은 이곳의 대표 메뉴를 중심으로 주문했다.식사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음식이 차례로 상에 올랐다.여진동은 틈틈이 강솔을 살폈다.강솔은 모르는 척했지만 이미 느끼고 있었다.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예의를 갖춰 물었다. “아직 저를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여진동은 말을 조금씩 본론으로 이끌었다. “별일은 아니야. 지금 몸은 다 회복됐는지 보려고 불렀어. 태진이 이번에는 너무 선을 넘었지. 형인 내가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책임도 있고.”강솔은 형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그건 할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에요. 작은할아버지도 성인인데 뭘 하려는지 전부 막으실 수는 없잖아요.”여진동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강솔은 더 보태지 않았다.여진동이 여태진을 위해 부탁하려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그날 밤 일은 자세히 듣지 못했고 중현이 여씨 집안에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 식탁의 분위기만으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솔아.” 여진동이 마
“그러면 단아가 어떤 처지인지 태휘한테 알려.” 중현은 최근에 여러 사정을 확인해 둔 상태였다.강 비서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도현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준호 역시 필요하면 잔인한 수를 쓰는 사람이었다.두 사람이 정말 손을 잡으면 중현도 편하게 기다리기 어려울 수 있었다.하지만 중현은 개의치 않았다. 미리 생각해 둔 세부 사항을 신동과 홍일에게 보내며 강솔을 지킬 때 각별히 신경 쓰라고 당부했다.신동은 홍일과 이야기하다 메시지를 받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세하게 보내셨네요?]중현이 답했다. [가능한 변수는 전부 막아.]홍일이 채팅창을 보며 말했다. “이거 거의 유언 남기는 수준인데.”신동도 동의했다. “그러게.”중현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잠깐 뒤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너희는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냐?]신동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이런 때 강솔을 두고 J시로 돌아갈 정도면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하 대표님, 아무 일 없이 잘 해결하고 돌아오십시오.]중현이 다시 말했다. [여태진 쪽은 민 팀장한테 맡겼어. 내가 집안일 끝내기 전에 그 사람이 돌아오면 민 팀장이 너희랑 바로 소통할 거야.]신동은 시원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중현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홍일은 세 사람이 있는 단톡방 메시지를 계속 들여다봤다.홍일이 신동에게 말했다. “진짜 하 대표님이 유언 남기는 것 같아. H시에서 쓸 수 있는 자원도 전부 우리랑 연결해 두셨잖아. 우리가 그걸로 사고 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신동은 단번에 답했다. “안 하지.”“왜?”“저 사람은 우리 신상에 대해서 속옷 색깔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털었는데 뭘 걱정하겠냐.”홍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근데 우리 정체를 어떻게 알아낸 거야? 대장님이 외부에서는 못 찾는다고 했잖아.”신동은 대충 넘겼다. “내가 하중현 대표님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궁금하면 네가 물
도현은 다시 경고했다. “네가 그러면 주주총회에서 언제든 대표직에서 해임될 수 있어.”중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해.”도현은 중현을 빤히 바라봤다.왜 이 사람이 이런 것들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권력과 돈은 많은 사람이 평생을 걸고 쫓는 것이었다. 그걸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중현에게는 필요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도현은 또 하나를 꺼냈다. “하씨 집안 족보에서도 네 이름을 뺄 수 있어.”중현은 짧게 대답했다. “응.”도현은 정말 중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유력한 집안일수록 혈통과 이름, 집안의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가 싶었다.“난 형이랑 달라. 그런 건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어.”중현은 애초에 쉽게 틀 안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족보에서 빼면 내가 새로 내 집안 만들면 되고, HS그룹 없으면 내가 회사 하나 만들면 돼.”중현은 HS그룹 대표나 하씨 집안 후계자라는 신분에 한 번도 도취해 본 적이 없었다.언젠가는 내려놓을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 머리와 능력이 남아 있는 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하씨 집안은 중현에게 여러 선택지 가운데 가장 아쉬울 때 붙잡는 카드에 불과했다.도현이 그 속마음을 알았다면 화가 날 만했다. 도현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 중현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었다.중현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할 말 끝났으면 가.”도현은 중현이 너무 무모하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강솔 씨랑 지안이를 이용해서 널 협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예전에 네가 아버지 권한을 사실상 빼앗아 놨어도, 아버지 인맥까지 사라진 건 아니야. 강솔 씨한테 손을 대면 네가 멀리서 바로 막을 수 있어?”중현은 도현을 보며 말했다. “형의 머리가 이 정도일 리는 없는데...”도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야?”중현이 눈을 들어 도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