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러면 단아가 어떤 처지인지 태휘한테 알려.” 중현은 최근에 여러 사정을 확인해 둔 상태였다.강 비서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도현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준호 역시 필요하면 잔인한 수를 쓰는 사람이었다.두 사람이 정말 손을 잡으면 중현도 편하게 기다리기 어려울 수 있었다.하지만 중현은 개의치 않았다. 미리 생각해 둔 세부 사항을 신동과 홍일에게 보내며 강솔을 지킬 때 각별히 신경 쓰라고 당부했다.신동은 홍일과 이야기하다 메시지를 받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세하게 보내셨네요?]중현이 답했다. [가능한 변수는 전부 막아.]홍일이 채팅창을 보며 말했다. “이거 거의 유언 남기는 수준인데.”신동도 동의했다. “그러게.”중현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잠깐 뒤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너희는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냐?]신동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이런 때 강솔을 두고 J시로 돌아갈 정도면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하 대표님, 아무 일 없이 잘 해결하고 돌아오십시오.]중현이 다시 말했다. [여태진 쪽은 민 팀장한테 맡겼어. 내가 집안일 끝내기 전에 그 사람이 돌아오면 민 팀장이 너희랑 바로 소통할 거야.]신동은 시원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중현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홍일은 세 사람이 있는 단톡방 메시지를 계속 들여다봤다.홍일이 신동에게 말했다. “진짜 하 대표님이 유언 남기는 것 같아. H시에서 쓸 수 있는 자원도 전부 우리랑 연결해 두셨잖아. 우리가 그걸로 사고 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신동은 단번에 답했다. “안 하지.”“왜?”“저 사람은 우리 신상에 대해서 속옷 색깔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털었는데 뭘 걱정하겠냐.”홍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근데 우리 정체를 어떻게 알아낸 거야? 대장님이 외부에서는 못 찾는다고 했잖아.”신동은 대충 넘겼다. “내가 하중현 대표님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궁금하면 네가 물
도현은 다시 경고했다. “네가 그러면 주주총회에서 언제든 대표직에서 해임될 수 있어.”중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라고 해.”도현은 중현을 빤히 바라봤다.왜 이 사람이 이런 것들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권력과 돈은 많은 사람이 평생을 걸고 쫓는 것이었다. 그걸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중현에게는 필요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도현은 또 하나를 꺼냈다. “하씨 집안 족보에서도 네 이름을 뺄 수 있어.”중현은 짧게 대답했다. “응.”도현은 정말 중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유력한 집안일수록 혈통과 이름, 집안의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가 싶었다.“난 형이랑 달라. 그런 건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어.”중현은 애초에 쉽게 틀 안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족보에서 빼면 내가 새로 내 집안 만들면 되고, HS그룹 없으면 내가 회사 하나 만들면 돼.”중현은 HS그룹 대표나 하씨 집안 후계자라는 신분에 한 번도 도취해 본 적이 없었다.언젠가는 내려놓을 것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 머리와 능력이 남아 있는 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하씨 집안은 중현에게 여러 선택지 가운데 가장 아쉬울 때 붙잡는 카드에 불과했다.도현이 그 속마음을 알았다면 화가 날 만했다. 도현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 중현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었다.중현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할 말 끝났으면 가.”도현은 중현이 너무 무모하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강솔 씨랑 지안이를 이용해서 널 협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예전에 네가 아버지 권한을 사실상 빼앗아 놨어도, 아버지 인맥까지 사라진 건 아니야. 강솔 씨한테 손을 대면 네가 멀리서 바로 막을 수 있어?”중현은 도현을 보며 말했다. “형의 머리가 이 정도일 리는 없는데...”도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야?”중현이 눈을 들어 도현과
더구나 중현이 무진의 일 때문에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레미가 위층으로 올라간 무렵, 중현도 도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걸어갔다.중현은 도현을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옆 별채로 향했다. 넓은 통유리창 앞에 선 중현은 밖의 잔디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건데?”도현이 보낸 메시지는 돌아오는 길에 이미 확인했다.“강솔 씨 집에는 강솔 씨가 불러서 간 거야, 아니면 네가 볼일이 있어서 간 거야?” 도현은 중현의 방문이 우연이었는지 강솔의 의도였는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중현은 강솔 앞에서 보이던 모습과 달리 차갑고 무심했다. “형이 신경 쓸 일 아니야. 이런 쓸데없는 얘기만 할 거면 문 저기 있으니까 나가.”도현은 중현 곁으로 다가갔다. “회사 경영권을 나한테 넘겨. 그러면 서무진이 왜 뛰어내렸는지 진짜 이유를 알려줄게.”중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놀랄 만큼 고요했다.도현은 강솔 집을 떠날 때 본 중현의 표정을 떠올렸다. “강솔 씨도 내가 했던 얘기는 다 전했겠지. 네가 경영권을 넘기면 내가 아는 것도 전부 말해줄게.”중현은 창가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여유로운 태도인데도 사람을 누르는 기세가 있었다.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도현은 느긋하게 되물었다. “부탁해야 하는 쪽은 너 아닌가?”중현은 비웃듯 말했다. “내가 형한테 부탁할 이유가 뭐가 있어?”도현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패를 너무 빨리 보여줬어.” 중현은 이 일이 자신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것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중요한 단서를 우리 솔이한테 알려준 건 고맙네. 덕분에 오래전부터 걸리던 부분을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할지 알았으니까.”도현의 안경 너머 눈빛이 무거워졌다.중현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보통이라면 도현이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는지부터 물어야 했다.중현은 도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로 말했다. “형이 아는 건 하 회장도
“나도 쉴 시간은 충분히 넣었어.” 강솔은 몸이 버텨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심히 일 안 하면 너희들 고액연봉의 꿈은 어떻게 이뤄 주겠어.”홍일은 바로 납득했다.“그건 맞습니다.”신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아가씨, 하루에 두 시간만 더 일하시죠?”강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두 사람은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뒤에야 둘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신동은 정원을 느긋하게 걸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하중현 대표님 때문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저러시는 거겠지.”홍일이 답했다. “누가 봐도 그렇지.”“저러는 기간이 짧다면 정신적으로 좀 피곤한 정도로 끝날 수도 있어.” 신동은 진심으로 강솔을 걱정했다. “근데 기간이 길어지면 몸은 백 퍼센트 망가져.”홍일이 신동을 봤다. “그래서 아까 네 제안이 괜찮았어.”신동은 영문을 몰랐다. “무슨 제안?”“일을 더 넣자는 거.”신동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신동은 홍일을 위아래로 훑었다.“너 이런 놈인 줄은 몰랐다.”신동은 턱을 문지르며 홍일을 못된 인간 보듯 쳐다봤다. “가뜩이나 하루에 몇 시간 못 쉬는데 두 시간을 더 넣으면 아가씨 과로로 쓰러지는 거 아니냐?”홍일은 억울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야?”신동은 다시 한번 홍일을 훑었다.표정만 보면 ‘딱 그래 보이는데’라고 말하는 듯했다.“내가 말한 건 일정 항목을 하나 더 넣자는 거야. 다른 업무 시간을 줄이고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넣자고.”홍일은 현실적으로 설명했다. “체력이 받쳐 줘야 지금 같은 일정에서도 덜 무너질 테니까.”신동은 일부러 빈정거렸다. “결국 높은 연봉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아가씨 몸은 갈려 나가도 네 조건은 못 낮추겠다 이거지?”홍일이 바로 받아쳤다. “나는 아가씨가 일하시면 24시간 옆에서 같이 일할 수 있어. 너는?”“당연하지.”“나 야근 수당 안 받아도 돼.”신동도 질 수 없었다.
레미가 입을 열었다. “너 솔이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있어?”시후의 미간이 좁아졌다.‘무슨 뜻이지?’“중현이 솔이를 구한 건 첫째, 과거 일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서고 둘째, 솔이를 다시 잡고 싶어서야.” 레미는 차분하게 따졌다. “솔이는 중현이한테 바라는 것도 없고, 예전 일 때문에 아직 상처도 남아 있어. 그런데 왜 네 부탁까지 들어줘야 해?”“그건...” 시후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레미가 예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키우는 뱀을 풀어서 너를 물게 했어. 나중에 그 사람이 뱀굴에 빠졌다고 하면 넌 구하러 갈 거야?”시후가 반박했다. “그거랑은 다르지.”“다르긴 하지. 그래도 아주 다른 얘기는 아니야.”레미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강솔이 중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깊이 관여하면, 그 다음에는 중현이 수단과 체면을 가리지 않고 다시 강솔을 쫓아다닐 가능성이 컸다. 강솔과 재결합할 때까지.반대로 강솔이 돕지 않아 중현이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 일이 중현에게 과거의 약속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결국 예전에 강솔을 찔렀던 칼이 돌아와 또 한 번 상처를 내는 셈이었다.둘 중 그 어느 쪽도 강솔이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다.시후가 되물었다. “넌 중현이 괜찮아지는 걸 바라지 않아?”레미는 중현의 고집과 집착을 이해했지만 평생 그렇게 살게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 “그 정도 일로 못 일어나면 그냥 죽으라고 해.”시후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뒤 입술을 다문 채 말했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자. 우리 가서 한번 보자.”레미는 다시 평소의 느긋한 태도로 돌아와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스승님 쪽에 처리할 일이 있어.”시후는 뒤늦게 미안해졌다.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 상했어?”레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혼자 의미 부여하지 마.”레미는 더 머물지 않고 차 문을 열어 내렸다.시후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둘이 나 몰래 야근 수당 얘기하면 어떡합니까? 저도 주세요.” 어느새 돌아온 신동이 생생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강솔이 물었다. “당신 내려간 거 아니었어?”“두 분이 차 타고 나가셨습니다.” 신동은 재벌 형제끼리 맞붙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아마 다른 데서 얘기하려는 것 같습니다.”강솔은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 더 묻지 않았다.그 뒤로도 강솔은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중현이 그 사실 때문에 얼마나 흔들릴지 자꾸 떠올랐다.조금 전까지 표정도 말투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솔은 중현을 너무 오래 봐 왔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차분한 척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더 어지러워졌다.그 걱정을 끊어 놓은 건 시후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고 대표님.” 강솔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시후가 바로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중현이 하도현이랑 만났습니까? 그 얘기를 했고요?”“만났어요.”시후는 잠깐 말을 멈추고 옆의 레미를 봤다.강솔은 두 사람이 더 추측하게 두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제가 먼저 지안 아빠한테 말했어요.”[그레서...]시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중현이 반응은 어땠습니까?]“겉으로는 아주 평온했어요. 별일 아닌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요.” 강솔은 감정을 섞지 않고 설명했다. “조금 전에 하도현이랑 같이 나갔어요. 아마 자세히 확인하려는 것 같아요.”[강솔 씨는 같이 안 가셨어요?]강솔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안 갔어요.”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시후는 중현이 이런 일에 얼마나 약한지 알면서 왜 곁에서 버틸 힘을 주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강솔과 중현은 이미 법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강솔이 따라가지 않은 게 당연했다.강솔은 달리 할 말이 없어 아는 사실만 전했다. “떠난 지 거의 30분정도 됐어요.”[지금 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