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상진은 중현 쪽을 한번 바라봤다. 검은 재킷을 걸친 상진은 짧은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고, 목에는 값비싼 남성용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평소의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는 조금 덜어내고, 대신 젊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더해져 있었다.[전부 정상.] 상진은 도현에게 답을 보낸 뒤 핸드폰을 넣었다.“강솔 있는 데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해?” 중현이 물었다.“집으로 안 가.” 상진은 마중 나온 전용 차량의 문을 열며 말했다. “회사로 갈 거야.”중현이 눈을 살짝 들었다. 무언가 물으려 했지만 기사가 먼저 뒷문을 열어 주자 말을 삼키고 차에 올랐다. 아연은 당연하다는 듯 중현 옆자리에 앉았다.차 문이 닫히자, 아연이 중현의 팔을 끌어안으며 살짝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비행기에서도 계속 강솔 얘기만 하더니 지금도 또 묻네. 그렇게 강솔이 좋아?”중현은 티 내지 않고 몸을 움직여 아연의 손길을 피했다.중현의 팔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두른 아연은 잠깐 굳었다.중현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상처받은 기색이 담겼다.“미안해.” 중현은 차분하고 예의 있는 태도로 아연과 눈을 맞추며 방금 행동을 설명했다. “아직은 너랑 이렇게 가까이 닿는 게 불편해.”“나는 네 여자 친구야.” 아연이 강조했다.“그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잖아.” 중현은 철저히 이성적으로 따졌다. 깨어난 뒤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은 아연이 여자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건 중현도 어쩔 수 없었다.“둘이 같이 찍은 사진도 없고, 주고받은 메시지도 없고, 서로 선물하거나 같이 결제한 기록도 없어.” 중현은 하나씩 되짚었다.“맨날 같이 있었는데 무슨 메시지가 필요해.” 아연이 반박했다. 기억까지 잃었는데도 중현이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은 몰랐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것도 너잖아. 내가 억지로 찍을 수는 없지.”중현은 대꾸하지 않았다.아연이 다시 물었다. “네 부모님, 형, 친구, 주변 사람들 말까지 전부 못 믿겠다는 거야?”“응.”
“중현이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이렇게 나오진 않을 텐데.”도현은 강 비서를 바라봤다. 안경 너머의 눈에는 날카로운 관찰과 의심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태평하진 않았겠지.”“그건 대표님이 잘못 보신 겁니다.” 강 비서가 바로 정정했다.“뭘 잘못 봤는데?”“동생분이 아무 지시도 안 남겼기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있는 겁니다.” 강 비서는 진심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정말 지시가 있었다면 맡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느라 이렇게 편하게 있지 못했겠죠.”도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일 수도, 잘 꾸며 낸 말일 수도 있었다.지금 당장 어느 쪽인지 가려내기는 어려웠다.“게다가 이건 대표님의 집안싸움 아닙니까?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괜히 끼어들지 않는 게 맞습니다.” 강 비서는 아주 진지한 어조로 속내를 말하는 척했다. “솔직히 말해서 대표님과 동생분이 싸워 동생분이 이기면 저희는 풀려나서 다시 일하면 됩니다. 동생분이 지더라도 어차피 나가게 될 테니, 그때는 다 같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고요.”도현은 사람 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눈으로 강 비서를 바라봤다.강 비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도현의 시선을 맞받았다.둘 사이에 말 없는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몇 분에 불과한 시간이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 영원할 것 같았다.그러다 마침내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중현이는 기억을 잃었잖아.”“그래서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다.”강 비서의 대답에는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저희 셋도 다른 살길을 찾아야겠죠.”“그럼 실컷 기다려.” 더 캐낼 게 없다고 판단한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는 대로 되면 좋겠네.”“감사합니다.”도현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두어 걸음 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춰 선 도현은 비서에게서 서류 한 부를 받아 강 비서 앞에 내밀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느리고 차분했다. “앞으로 한동안 중현이 공들여 키워 둔 사람
“알고 있습니다.” 강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대표님 곁으로 불러서 일을 시키실 생각입니까?”도현은 속내를 읽으려는 듯 강 비서를 바라봤다.강 비서는 전반적으로 아주 편안한 태도였다. 목소리도 자연스러웠다.“저는 문제없습니다. 회사에서 필요하면 언제든 출근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표님은 제가 여기서 나가는 게 정말 괜찮으십니까?”도현의 눈에는 부드러운 흥미가 짙게 깔렸다.도현은 감출 필요도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안심은 안 되지.”강 비서는 중현이 가장 믿고 쓰던 측근이었다. HS그룹으로 돌려보냈다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을 안정적으로 밀어붙이려면 도현으로서도 선택지는 하나였다.“그래서 해고됐다는 걸 알려주려고 직접 왔어.”“이해합니다.” 강 비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보상은 제대로 해 주십니까?”“자리를 지킬 생각은 없어?” 도현은 강 비서가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게 의외였다.강 비서는 옆에 둔 겉옷을 집어 입으며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잡아 달라고 하면 대표님이 잡아 주십니까?”“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그럼 해고하지 말아 주십시오.”도현이 웃었다.강 비서도 따라 웃었다.짧은 말 몇 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둘은 계속 놀고 있어.” 도현은 임훈과 임풍에게 말한 뒤 강 비서를 바라봤다. 느긋한 말투였다. “난 강 비서랑 따로 얘기 좀 할게.”임훈과 임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현과 강 비서가 제법 멀어진 뒤, 임풍이 임훈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 비서 데려간 거, 설마 고문해서 뭐라도 캐내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도와주러 가야 하나?”“어떻게 도울 건데?” 임훈은 별장 주변에 배치된 경호원들을 쭉 훑어봤다. “저 사람들 다 이길 수 있어?”“해 보기 전에는 모르잖아.” 임풍은 원래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너 겁나냐?”“걱정 붙
하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진작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도현을 설득해 권한을 일부라도 돌려받는 일이었다. 권한이 없으면 예전처럼 다른 사람의 결정에 휘둘리고 통제당하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다 달라는 것도 아니야. 네 입지에 영향 없을 정도만 조금 돌려줘.”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준호가 한 발 더 물러섰다. “처음 약속한 것의 절반만이라도.”“은퇴하셨으면 은퇴하신 분답게 쉬셔야죠.”도현은 하준호를 바라봤다. “다른 어른들이 아버지가 이미 은퇴하신 걸 아는데, 제가 계속 일을 맡겨 아버지를 괴롭힌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가 불효자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하준호는 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입 밖으로 안 낸다고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죠.”도현은 태연하게 받아쳤다.“중현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도 막 퍼진 참인데, 여기에 제가 아버지를 홀대한다는 말까지 나오면 HS그룹에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하준호는 도현이 절대로 권한을 놓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다.하준호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도현을 노려봤다. “다음 대표 선임 때 내가 네 숙부들이랑 집안 어른들 전부 중현이 쪽으로 돌리면 어쩔 건데?”“마음대로 하세요.” 도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설득하실 수만 있다면요.”하준호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그 한마디로 모든 게 이해됐다.도현이 최근 그렇게 바빴던 이유는 중현의 사람들을 하나씩 걷어 내고, 원래 하준호 쪽에 있던 사람들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도현... 처음부터 계산이 다 있었구나.’하준호가 알아들었다는 걸 확인한 도현도 더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괜히 일을 벌이거나 제 계획을 망치지만 않으시면, 남은 평생 부족함 없이 지내시게 해 드리겠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도현은 더 머물지 않고 비서와
중현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대신 머릿속으로 강솔이 어떤 사람인지 그려 보려 했다.‘강솔, 강솔... 이름만 보면 온순하고 얌전한 인상인가?’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접어 두고 다음 날 H시에 가서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그날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강솔과 중현 모두 아침까지 깊이 잠들었다.도현은 중현 일행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비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소아연 씨에게 따로 주의를 주지 않으셔도 될까요? 혹시 실수로 다른 말을 하면...”“상관없어.” 도현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은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가장 필요한 건 이미 손에 넣었어. 나머지는 어떻게 흘러가든 중요하지 않아.”강솔과 관련된 일은 그저 심심풀이에 가까웠다. 기억을 잃은 동생이 강솔에게 대체 어느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현재까지 지켜본 바로는 나쁘지 않았다.“하지만 중현 도련님이 가진 지분은 아직 못 받으셨습니다.” 비서가 짚었다.“급할 것 없어. 기회는 앞으로도 많아.”도현은 기다릴 줄 알았다. 서두를수록 빈틈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현은 기억을 잃었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예전처럼 거리를 두고 경계했다.그런 중현에게 대놓고 지분부터 달라고 했다가는 어렵게 가까워진 관계가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그때는 지분은커녕 도현이 무슨 말을 해도 중현이 믿지 않을 것이다.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천천히 계획을 세우면 됐다.“우리도 회사로 가자.”도현은 소매를 정리했다. 부드럽고 단정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회사 안에서 딴생각하는 사람들도 정리해야지.”“네.”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하준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도현이 인사하기도 전에 하준호가 먼저 화부터 냈다.“네가 중현이를 H시로 보냈어?”“네.”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
“아가씨한테 방 바꿔 달라고 할 거야.” 홍일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신동을 보는 눈에는 경계심만 가득했다. “네 옆방은 안 써.”그 말을 끝으로 홍일은 재빨리 사라졌다.신동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방금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려 봐도 오해할 만한 대목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강솔은 씻고 자려던 차에 홍일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을 바꾸고 싶다는 요구를 듣자 뜻밖이라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신동이랑 싸웠어?”“표현을 정확히 해 주십시오.” 홍일이 바로잡았다. “싸움보다는 갈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강솔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홍일을 봤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무튼 방 변경을 신청합니다. 신동 옆방은 거절하겠습니다.”강솔은 문 앞에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아가씨.” 홍일이 다시 불렀다.“응?”홍일은 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저택을 한번 둘러봤다. 승진과 급여 인상을 노릴 새 기회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이 집 관리할 집사를 따로 구하실 생각이십니까?”“응, 생각 중이야.”저택이 큰 만큼 관리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았다.이제 강솔도 충분히 돈을 벌고 있었다. 생활을 조금 더 편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데 돈을 쓰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홍일은 기회를 잡는 일에는 유난히 적극적이었다. “저는 이곳 사정도 잘 알고 있고 관리 능력도 좋습니다. 집사 역할을 맡을 역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강솔은 하품하다가 홍일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이미 몇 가지 일을 같이 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일이 부족하다고?’“홍일 씨...”“허락만 해 주시면 오늘 밤부터 바로 업무 시작할 수 있습니다.” 홍일이 먼저 말했다.“생각 좀 해볼게.”“면접도 보겠습니다.”강솔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문을 닫고 씻으러 갔다. 머릿속에는 계속 홍일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추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강솔이 주는 월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