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가자. 영재 녀석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집에 가자.” 진환식은 역시 영재가 제일 마음에 걸렸다. “겸사겸사 제 부모 이혼 절차도 시작해 줬다고 알려주고.”강솔은 진환식과 함께 영재 병실로 향했다.병실을 둘러봐도 영재가 보이지 않자 진환식은 옆에서 급히 다가온 한욱에게 물었다. “영재는 어디 갔어?”“잠깐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한욱은 적당한 핑계를 댔다. “대표님께서 회장님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볼일 다 보셨으면 돌아가서 쉬시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그게 영재가 한 말이면 내가 이 지팡이를 씹어 먹는다!” 진환식은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한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강솔도 잠자코 있었다.진환식은 더 머물지 않았다. “네가 여기서 영재 좀 잘 봐. 제 몸 아무렇게나 굴리지 못하게 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한욱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진환식은 짧게 대답한 뒤 병원을 나섰다.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집에 돌아온 진환식은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낮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평소보다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진환식을 보며 강정숙이 물었다. “네 외할아버지 왜 저래?”강솔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진환식이 이가희의 이혼을 돕기로 했다는 대목에서 강정숙은 잠시 말을 멈췄다.강정숙은 아버지가 체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진환식에게 이혼은 집안의 명예를 깎는 일이었다. 그래서 과거 강정숙이 여윤재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크게 분노했었다.당시 강정숙은 두 집안 사이에 얽힌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이미 마음을 준 뒤였기에 아버지 뜻을 거스르는 쪽을 택했다.“아버지랑 얘기 좀 하고 올게.” 강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환식의 방으로 향했다.강정숙은 진환식의 딸이었다. 누구보다 아버지 성격을 잘 알았다.고집스럽던 사람이 지금처럼 달라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알고 있었다.사람에게 가장 넘기 힘든 벽은 결국 자기 마음이었다.강정숙이 방에 들어갔
“네 외할아버지는...” 이가희가 말을 망설였다.강솔은 부드럽게 답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네 외할아버지가 내가 이혼하면 진씨 집안 체면을 깎는다고 생각하시진 않을까?” 이가희의 표정은 복잡했다. 큰 집안에 시집와서 살아온 세월 내내 보이지 않는 압박을 느껴왔다.“그렇지 않으세요.”이가희가 시선을 들었다.강솔은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이걸 먼저 묻는 게 실례가 아닐지 걱정하셨어요. 잘못은 작은외삼촌이 했는데 작은외숙모님을 집안에서 내보내는 것처럼 알려질까 봐요.”“아니, 아니야.” 이가희가 다급히 부정했다. “이건 나한테 선택할 자유를 주시는 거지.”이가희가 조금씩 마음을 정리하는 걸 보며 강솔은 더 설득하지 않았다.이제 누가 등을 밀어줄 필요는 없었다. 가장 크게 걱정했던 문제가 사라졌으니, 남은 건 이가희가 자기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솔아.” 이가희가 부드럽게 불렀다.“네?”이가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을 꺼냈다. “고마워.”이가희는 알고 있었다. 강솔이 자신을 대신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진환식이 진우찬과의 이혼을 허락할 리 없었다. 예전의 진환식은 집안 체면과 세간의 시선을 이유로 친딸까지 내쫓았던 사람이었다.진정숙과 비교하면, 진환식에게 이가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강솔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진환식은 진우찬을 호되게 혼내는 데서 끝냈을 가능성이 컸다.“그런 말씀 마세요.” 강솔은 이가희가 그토록 많은 걸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지금은 몸부터 잘 회복하세요. 마음 정해지시면 그때 한마디만 해주세요.”“지금...” 이가희가 결정을 내렸다.강솔은 잠깐 말을 멈췄다. 이렇게 빨리 마음을 굳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가희의 눈에는 망설임 대신 결심만 남아 있었다. “가능하면 네가 아버님께 말씀 좀 전해줘. 오늘 바로 이혼 절차를 시작하고 싶다고.”며칠 지나면 다시 용기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이 기회를 놓치면 진환식이 마음을 바꿀
“이따 물을 때는 최대한 조심해서 말해라.” 진환식이 강솔에게 거듭 당부했다. “영재 엄마한테 이혼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면 더는 이야기 꺼내지 말고.”강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진환식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강솔이 병실 문 앞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이가희는 강솔을 보자 부드럽게 웃었다. 잔잔한 봄비처럼 차분하고 고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들어와요.”강솔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병상 앞에 다가가 이가희 입가에 든 멍을 살핀 강솔의 눈에 걱정과 복잡한 감정이 섞였다. “아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네가 와준 것만으로도 난 기뻐.” 이가희는 웃을 때 특히 인상이 부드러웠다. “요즘 일은 안 바쁘니?”“괜찮아요. 당분간 급한 일은 없어요.” 강솔도 자연스럽게 안부를 주고받았다.이가희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갈수록 잘해 나가는 걸 보니 작은외숙모는 정말 기뻐.”“작은외숙모님은요?” 강솔이 물었다.이가희의 맑은 눈에 의문이 스쳤다. “나는 뭐?”“지금의 삶을 바꾸고 싶으세요?” 강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작은외숙모님이랑 작은외삼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도 어느 정도 알아요. 평소에 작은외삼촌이 숙모님께 잘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요. 혹시 작은외숙모님은...”“창피한 모습 보였지.” 이가희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인 줄 몰랐지?”“아니에요.”“맞서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이가희는 옅게 웃었지만 그 웃음이 더 쓸쓸해 보였다. “그냥 내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지.”강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이가희는 그런 강솔을 바라봤다. 눈에는 어른이 어린 사람을 걱정하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너는 나중에 절대 작은외숙모처럼 살지 마. 지금 가진 마음 그대로 끝까지 지켜. 쉽게 꺾이지 말고, 누구한테도 휘둘리지 말고.”이가희는 강솔과 중현 사이에 있었던 일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그 얘기
한욱은 잠시 말을 잃었다. 바로 병실로 들어갔다. 영재가 자기 피부를 긁기 시작한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망고는 언제 사셨습니까?”“한 비서가 안 사줄 줄 알았지.” 영재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었다. “엄마 상태 알아보러 의사 만나러 갔을 때 배달시켰어.”그 말을 끝내자마자, 영재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강솔이 놀라 외쳤다. “영재야!”한욱은 자기 상사가 사고 치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이 망고를 먹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와주십시오.”수화기 너머에서 황당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지금 다쳐서 입원한 거 아니었습니까?”한욱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방금 망고 두 개를 드셨습니다.”의사도 잠깐 말을 잃었다. 곧바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가겠습니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 선생님이 곧 오실 겁니다.” 한욱은 여전히 차분했다. “이틀이나 사흘이면 회복합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영재가...” 강솔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강솔은 영재에게 목숨으로 갚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영재가 지안에게 한 짓은 분명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사정을 전부 듣고 나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위에서는 큰아버지 도엽에게 눌리고, 가까이에는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었다. 영재에게는 충분한 힘도 없었고, 곁에 남은 친구들 역시 영재와 비슷한 처지였다.이해관계가 걸린 일에서는 외할아버지인 진환식마저 손자라는 이유로 영재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니 영재는 정상적인 길만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다.강솔이 생각한 속죄는 이런 게 아니었다. 영재가 지안과 직접 얘기하고, 함께 놀러도 다니며, 시간을 들여 잘못한 만큼 다정함과 관심으로 갚기를 바랐다.설마 자신을 해하는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이 일은 사모님께서도 비밀로 해주십시오.” 의사가 들어오는 걸 확인한 한욱이 강솔에게 말했다. “
강솔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영재가 말을 이었다. “하중현이 누나와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어. 하중현 정도 능력이면 뒤에서 일을 시킨 사람이 나라는 것도 결국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고.”강솔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하중현이 알고 있었다고?”“알고 있었어...” 영재가 가볍게 헛기침했다. ‘이거 나도 모르게 매형을 팔아넘긴 건가?’강솔의 속에서 화가 확 치밀었다.‘하중현...당신... 정말 대단해.’“그래서?” 강솔은 여전히 영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중현을 만나서 뭘 하려고 했는데?”“만나면 거래를 제안하려고 했어. 고모 교통사고에 관한 일도, 지분에 관한 일도 알려주고.” 영재가 말했다. “대신 하중현이 태휘 형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걸 도와주는 거지.”“태휘를?”“태휘 형만 끌어내리면 매형 성격상 누나한테 JX그룹을 맡겼을 거야.” 영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대고 말하다가 무심코 예전 호칭을 입에 올렸다. “그때가 되면 협력자였던 내가 조건 하나쯤 내거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테고.”“무슨 조건?”강솔이 물었다.“내 권한을 좀 키워달라거나, 아버지 힘을 빼달라거나. 그런 거.” 영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 말을 듣자 강솔의 머릿속에서 뒤늦게 모든 게 이어졌다.옆 병실에 누워 있는 작은외숙모가 떠올랐다. 강솔이 물었다. “엄마 때문이었어?”영재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영재는 태휘처럼 타고난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도엽처럼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진우찬은 성품이 거칠었다. 화가 나면 물건부터 집어 던졌고 걸핏하면 폭력을 썼다. 그런 진우찬을 누르려면 진우찬보다 더 큰 권한과 더 강한 발언권을 가져야 했다.하지만 영재는 집안에서 내준 경영 평가 과제에서 실패했다. 그런 영재의 손에 남은 건 엔터테인먼트 회사 하나뿐이었다.그 일을 망친 사람이 태휘인지 도엽인지도 알지 못했다. 평가 종료 직전까지
진환식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재를 한 번 노려본 뒤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까 날 오라고 한 건 핑계고, 솔이를 만나려는 게 진짜 목적이구나.”“말씀이 좀 서운한데요.” 영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전화한 사람은 제가 아니잖아요.”말하며 한욱 쪽으로 슬쩍 시선까지 보냈다.진환식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뻔뻔한 영재를 더 상대하기도 싫었다. 진환식은 한마디를 던지고 몸을 돌렸다. “주먹질이 입만큼 야물었으면 네 아버지한테 그 꼴로 얻어맞았겠냐?”영재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진환식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줬다.“누나랑 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영재는 자기 비서와 홍일 일행을 차례로 훑어봤다. 특히 ‘둘이’라는 말에 힘을 줬다.홍일은 반사적으로 강솔을 바라봤다.그 반응에 영재가 피식 웃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누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네.” 홍일이 바로 답했다.“조금은 돌려 말하면 안 돼?”“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요.”“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홍일은 영재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위아래로 훑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멍청한지는 모르겠는데, 똑똑해 보이진 않습니다.”“누나.” 영재가 능청스럽게 강솔을 불렀다. “누나 경호원은 사회성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야? 내가 그래도 진씨 집안 막내 도련님인데, 이런 소리 들으면 체면이 좀 상한다고.”“네가 괜히 놀리지만 않으면 이런 말도 안 들어.” 강솔은 제 사람 편을 들었기 때문에 홍일과 신동을 바라봤다. “너희 둘은 밖에서 외할아버지 좀 모시고 있어. 내가 영재랑 둘이 얘기할게.”“알겠습니다.” 신동이 답했다.홍일이 망설였다. “하지만...”신동은 홍일의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향했다. “더 말하면 월급 깎는다.”“아가씨가 방금 지분 양도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갑자기 둘이 얘기하겠다고 하잖아. 혹시 딴마음이라도 있으면 어떡해?” 홍일이 목소리를 낮췄다. 신동에게만 들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