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중현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대신 머릿속으로 강솔이 어떤 사람인지 그려 보려 했다.‘강솔, 강솔... 이름만 보면 온순하고 얌전한 인상인가?’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접어 두고 다음 날 H시에 가서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그날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강솔과 중현 모두 아침까지 깊이 잠들었다.도현은 중현 일행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비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소아연 씨에게 따로 주의를 주지 않으셔도 될까요? 혹시 실수로 다른 말을 하면...”“상관없어.” 도현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은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가장 필요한 건 이미 손에 넣었어. 나머지는 어떻게 흘러가든 중요하지 않아.”강솔과 관련된 일은 그저 심심풀이에 가까웠다. 기억을 잃은 동생이 강솔에게 대체 어느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현재까지 지켜본 바로는 나쁘지 않았다.“하지만 중현 도련님이 가진 지분은 아직 못 받으셨습니다.” 비서가 짚었다.“급할 것 없어. 기회는 앞으로도 많아.”도현은 기다릴 줄 알았다. 서두를수록 빈틈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현은 기억을 잃었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예전처럼 거리를 두고 경계했다.그런 중현에게 대놓고 지분부터 달라고 했다가는 어렵게 가까워진 관계가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그때는 지분은커녕 도현이 무슨 말을 해도 중현이 믿지 않을 것이다.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천천히 계획을 세우면 됐다.“우리도 회사로 가자.”도현은 소매를 정리했다. 부드럽고 단정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회사 안에서 딴생각하는 사람들도 정리해야지.”“네.”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하준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도현이 인사하기도 전에 하준호가 먼저 화부터 냈다.“네가 중현이를 H시로 보냈어?”“네.”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
“아가씨한테 방 바꿔 달라고 할 거야.” 홍일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신동을 보는 눈에는 경계심만 가득했다. “네 옆방은 안 써.”그 말을 끝으로 홍일은 재빨리 사라졌다.신동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방금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려 봐도 오해할 만한 대목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강솔은 씻고 자려던 차에 홍일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을 바꾸고 싶다는 요구를 듣자 뜻밖이라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신동이랑 싸웠어?”“표현을 정확히 해 주십시오.” 홍일이 바로잡았다. “싸움보다는 갈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강솔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홍일을 봤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아무튼 방 변경을 신청합니다. 신동 옆방은 거절하겠습니다.”강솔은 문 앞에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아가씨.” 홍일이 다시 불렀다.“응?”홍일은 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저택을 한번 둘러봤다. 승진과 급여 인상을 노릴 새 기회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이 집 관리할 집사를 따로 구하실 생각이십니까?”“응, 생각 중이야.”저택이 큰 만큼 관리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았다.이제 강솔도 충분히 돈을 벌고 있었다. 생활을 조금 더 편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데 돈을 쓰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홍일은 기회를 잡는 일에는 유난히 적극적이었다. “저는 이곳 사정도 잘 알고 있고 관리 능력도 좋습니다. 집사 역할을 맡을 역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강솔은 하품하다가 홍일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이미 몇 가지 일을 같이 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일이 부족하다고?’“홍일 씨...”“허락만 해 주시면 오늘 밤부터 바로 업무 시작할 수 있습니다.” 홍일이 먼저 말했다.“생각 좀 해볼게.”“면접도 보겠습니다.”강솔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문을 닫고 씻으러 갔다. 머릿속에는 계속 홍일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추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강솔이 주는 월급도
강솔은 자신이 조금 열받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중현에 대한 감정은 이미 정리했다. 그래도 기억을 잃자마자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과 붙어 다닌다고 생각하니, 밥을 먹다가 음식 속에서 죽은 벌레라도 본 듯 속이 불쾌했다.“이 밤중에 일부러 나 열받으라고 말한 거야?”“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가씨는 제 돈줄이신데요.”신동은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문제를 미리 말씀드리는 건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겁니다. 내일 하중현 대표가 왔는데 둘이 붙어 있는 걸 보고 거기서 충격받으시면 곤란하잖아요.”강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강솔이 묻기도 전에 신동이 뒤의 말을 꺼냈다. “확실한 소식인데, 하중현 대표가 내일 아가씨를 찾아올 겁니다.”“그 사람 기억 잃었다며?” 강솔이 의아해했다.“기억은 잃었죠. 그래도 가족들이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건 다 말해 줬답니다.”신동은 자신이 알아낸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물론 하준호 회장 부부는 아가씨를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놨고요. 하중현 대표랑 결혼한 것도 재산 나눠 가지려고 그랬다고 말했다더군요.”강솔은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기억상실이 지능까지 떨어뜨리는 건 아니었다. 지안의 양육권을 중현이 빼앗아 가기는 어렵겠지만, 정말 마음먹고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여전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강솔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진씨 집안 쪽 문제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그런데, 강솔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신동을 바라봤다. “너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아?”“대장님 밑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저도 나름 한자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신동이 입꼬리를 올렸다. 조명 아래의 신동은 여유롭고 밝아 보였다. “이 정도 확인하는 건 아직 할 수 있죠.”“무슨 자리였는데?”“그건 비밀입니다.”강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대장님이 나한테 너 좀 얘기해 보라고 한 게, 설마 그거랑 관련이 있어?”신동의 대답이 잠깐 막혔다.
원하던 반응을 끌어낸 진무천은 시선을 거두고 도엽을 바라봤다. “아까 식탁에서 한 말 진짜야?”도엽은 창밖을 보며 답했다. “네, 사실입니다.”“누구한테 들었어?”“제 친구가 J시의 프라이빗 클럽에서 하중현을 봤습니다.” 도엽은 아는 내용을 설명했다. “친구가 먼저 인사했는데 하중현이 친구를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답니다.”“그 정도야 이상할 것도 없잖아?” 진무천도 최근 중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걔가 눈에 담고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도엽의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무천 자신조차 중현이 모르는 척하려 들면 얼마든 외면할 수 있는 상대였다.“그것만으로 기억상실이라고 판단한 건 아닙니다.” 도엽은 전체 상황을 확인한 뒤 결론을 내렸다. “지금 하중현과 어울리는 사람이 하도현 곁에 있던 유상진으로 바뀌었고, HS그룹 총괄 책임자도 하도현이 됐습니다.”진무천은 생각에 잠겼다.도엽이 말을 이었다. “친구에게 직접 떠보게도 했습니다. 하중현은 과거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자신을 집안에서 놀고먹는 둘째 도련님 정도로 알고 있더군요.”“연기하는 거 아닐까?” 진무천은 여전히 완전히 믿기 어려웠다.그렇게 뛰어나고 빈틈없이 모든 수를 계산에 넣고 치밀하게 움직이던 사람이 갑자기 기억을 잃는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더구나 중현 곁에는 실력 좋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그래서 아까 강솔을 떠본 겁니다.” 도엽은 소식을 들은 뒤부터 이미 여러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담담했고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유일하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진무천은 식탁에서 강솔이 보였던 반응을 되짚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일단 치명적이지 않은 선에서 조금 건드려 보려고 합니다.” 도엽은 이미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하중현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으면 정말 기억을 잃었다고 봐도 될 겁니다. 그때는 강솔 쪽에만 집중할 수 있고요.”“그래.” 진무천은 반대하지 않았다.
진우찬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할 말이 없었다.진환식은 다시 진무천을 바라봤다. “넌 젊었을 때 가능했어?”진무천도 입을 열지 않았다.“이건 그렇게 정해.” 진환식이 결론을 내렸다. “솔이랑 지분 계약 세부 내용 얘기하러 온 거잖아. 계약서 내놔. 내가 한번 보고 문제없으면 맡아 둘 테니까, 솔이가 집안 역량 평가 과제를 끝냈을 때 같이 서명해.”“아버지!” 진우찬은 역시 감정을 참지 못했다.“네.”진무천은 짧게 답했다. 곧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진환식에게 건넸다.진우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진무천을 보다가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형, 미쳤어?”강솔이 맡은 일은 지금 순항 중이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길어도 두 달 안에는 과제를 끝낼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이 가진 지분까지 강솔에게 넘어가면 강솔은 집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된다.‘형 같은 사람이 그런 상황을 두 눈 뜨고 지켜본다고?’‘따로 준비한 게 있는 건가? 아니면 정숙이랑 화해할 생각이야?’“그래! 다들 아주 잘한다!” 진우찬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결국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계약서도 내밀었다.진무천이 계약 이야기를 핑계 삼아 강솔을 압박하려는 줄 알았다.그런데 정말 지분을 넘길 것처럼 보였다.그날 식사는 끝까지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솔아.”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까지 말이 없던 도엽이 강솔을 불렀다.강솔이 도엽을 바라봤다.도엽은 평소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로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는 척했다. “하중현한테 사고가 있어서 기억을 잃었다던데, 그 얘기 알아?”“잘 몰라요.” 강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답했다.반면 진무천과 진우찬은 도엽 쪽을 바라봤다.‘기억을 잃었다고?’“나도 J시 쪽 친구한테 들었어.” 도엽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HS그룹 실권도 도현한테 넘어갔다더라.”강솔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둘이 연락 안 해?”“별
강솔과의 통화를 끝낸 시후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강솔과 레미는 중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강 비서와 임훈, 임풍은 전화받지 않았다. 그나마 연락이 닿는 도현과 상진은 시후를 해외로 내보낸 장본인들이었다.처음에는 상진이 왜 굳이 중현의 상황을 알려 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강솔과 레미의 반응을 보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여러 생각을 정리하던 시후는... 결국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시후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강솔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통화를 끝낸 강솔은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진환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환식은 강솔에게 식사할 장소의 주소를 보내며 오라고 불렀다. 진무천과 진우찬이 지분 계약서를 들고 왔으니 세부 내용을 함께 논의하자는 이야기였다.강솔은 알겠다고 답했다.퇴근하자마자 곧장 약속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강솔이 도착했을 때 별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무천, 진우찬, 태휘, 도엽, 여기에 강솔의 집에서 함께 온 진환식까지 있었다.“솔이 왔네.” 진환식은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강솔을 보면 늘 반가워했다. “얼른 와서 앉아.”강솔은 자리에 앉으며 한 사람씩 인사를 건넸다.지금의 강솔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훨씬 차분하고 안정된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이제 음식 내오라고 해.” 진환식이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말했다.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진무천은 강솔을 바라보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못 봤더니 우리 솔이 더 야무져졌네.”“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강솔도 겉으로는 예의를 갖춰 답했다. “업무에 조금 익숙해진 정도예요.”진무천이 웃었다. “겸손하네.”진우찬은 진무천의 속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두 번째 프로젝트도 아주 잘 진행된다면서?” 진무천이 본론을 꺼냈다. “조만간 검수 끝내고 대금도 받을 수 있겠어?”강솔이 눈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