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아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진석이 손짓하자, 십여 명의 수하들이 경씨 가문 저택을 향해 길을 나섰다.십여 명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소항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 일말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경장명이 그에게 했던 말들, 그리고 소우연과 이진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하지만 이미 진석에게 임설과 아이들을 빼내 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한들, 진석에게 자신의 결단력만 의심받게 될 뿐이었다!이번 일은 오직 성공만이 있을 뿐, 실패란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그렇게 다짐하며 소항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진석이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경장명 덕분이지요. 그자가 이곳에 있었기에 천왕이 바짝 뒤쫓아온 것이고, 우리에게 이토록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그렇다, 이 모든 것은 경장명이라는 자 덕분이었다.경장명이 있었기에 심연희가 찾아왔고, 심연희가 찾아왔기에 이천이 이윤 같은 어린아이의 손에 나라를 맡기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진 도사께서 어째서 그토록 경장명을 제 군사로 삼으려 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그렇게 따지면, 경장명은 실로 영남에서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인재임이 틀림없군요!”진석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진 도사는 도를 깨우친 고인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어찌 틀릴 리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에는 우리 대인의 도우심이 있었고, 진 도사께서 열어주신 길까지 있는데 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소항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흠흠,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모름지기 대장부라면 모질어야 하는 법. 천하를 손에 쥐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이전에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길이 이토록 훤히 뚫려 있었다. 이씨 황족 사람들이 전부 영남으로 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것은, 그들이 나라의 대사를 장난처럼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덜컥 맡겨두었다는 사실
“그런 것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대왕께서 당장 대인과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으신다면, 제가 먼저 대왕의 목을 베고 소씨 일가를 모조리 도륙할 것입니다!”진석이 서슬 퍼런 얼굴로 악독하게 내뱉었다.“물론 대왕의 처자식이 경장명의 저택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경씨 가문 저택쯤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가, 감히!”“제가 감히 못 할 것 같습니까?”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아류를 제외한 여러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검을 빼 든 그들은 본래 소항의 암위였으나, 지금은 온전히 진석의 명을 따르는 결사대가 되어 있었다!아류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당장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주인이 왜 왕후와 아이들을 미리 왕부 밖으로 피신시켰는지 깨달았다.지금 보니, 그것은 필시 마지막 남은 핏줄이라도 지키기 위한 뼈아픈 수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경장명이 소항의 처자식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소항이 진석을 가리키며 다급히 말했다.“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데, 정말 해낼 수 있겠습니까? 대인께 전해 주십시오. 우리 다시 한번 다른 방도를 의논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불가능합니다! 이번에 대인께서 나서지 않으신다면, 그 어린것에게 모든 것을 망치게 될 테니까요!”어린것?소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진석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역시 몹시 답답했다. 대체 진 도사가 어째서 소항 같은 겁쟁이를 대왕으로 선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놈의 담력은 대인의 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했다!“어리석군요. 아까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황제는 물론이고 천왕과 월왕까지 모두 영남에 와 있습니다. 지금 상운국 조정에는 고작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세월을 기다리실 셈입니까!”“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소항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연히 그 여자아이가 천
“천도가 대체 무엇입니까?”용강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우리를 창조해 낸 자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본 것 같기도 합니다.”“사내였습니까, 여인이었습니까?”사내였을까, 여인이었을까. 용강한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단 한 번도 똑똑히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저 몽롱한 느낌에 여인이 아닐까 싶을 뿐이었다.“그럼 그자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이육진이 다시 물었다.용강한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이 세계를 수정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요.”이육진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 세계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소우연과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너무나 많은 장애물과 부딪쳐야 했다.마치 이야기꾼이 말하듯, 모든 사람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용강한의 도움으로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자신과 용강한이 모두 소우연을 사랑하게 된 이 모든 과정 역시 창조자가 써 내려간 대본에 불과한 것일까.“허, 허허…”이육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가슴 위에 손을 올리자 뛰는 심장과 온몸을 감싸는 선명한 감정, 그 모든 것이 더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그는 허망함이냐 진짜냐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운명에 농락당하는 것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대인께서는 그토록 대단한 능력을 지니셨으니, 반드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연이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늘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오지 않았습니까?”용강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역시 항복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으나, 오직 불안함이 발목을 잡았을 뿐이었다. 이제 이육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마주하자, 난생처음 다른 이가 주는 든든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연이는 제가 잘 다독일 테니, 대인은 소신껏 밀어붙이십시오. 무슨 지원이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요. 제게 무슨 말을 하라는 것입니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바라보았으나, 참으로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이육진은 잠시 침묵했다.“저는…”“무슨 말씀이십니까?”그가 이토록 말을 더듬거리며 머뭇거리자, 이육진은 진심으로 몹시 걱정되었다. 용강한의 이런 기운 없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의자 팔걸이에 얹혀 있던 용강한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한참 뒤, 그가 이육진을 보며 몹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아무래도, 제 명이 다한 것 같습니다.”“뭐라고요?”이육진은 극심한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용강한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분명 똑똑히 들으셨을 겁니다.”그랬다. 이육진은 확실하게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용강한의 나이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어찌 명이 다했다는 말인가? 만약 연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믿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육진이 용강한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예전에 저와 연이를 구해주신 일 때문에, 그 역풍을 맞으신 겁니까?”용강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그럼 어찌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만약 연이가 안다면, 필시 가슴이 찢어지게 슬퍼할 것입니다!”“제가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그는 뼈마디가 도드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각은 난생처음입니다. 마치 영혼이 이 육신에서 산산이 뜯겨 나가는 것만 같습니다.”본래도 수척했던 사내가 다시 이육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부디 연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제가 세상에 없어야 비로소 두 분이 백년해로하실 수 있을 테니, 그것이야말
소우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이들도 그렇게 집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직 윤이만 그 자리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고요.”“그럼 영남도 윤이에게 같이 다스리라고 하면 되겠구나.”“다 좋지만, 영남은 상운국과 다릅니다. 이곳 백성들의 삶이 훨씬 더 고달프니까요…”“그럼 월왕인 진이에게 겸임하라고 맡기자꾸나. 어차피 진이의 점유지와도 꽤 가까우니 말이다.”소우연은 한참 동안 이육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진이는 줄곧 경성에만 있었는데, 만약 이곳을 맡게 된다면 수년 동안 여기에 머물러야 할 텐데요…”“우리가 이곳에 있는데, 진이 일행이라고 굳이 남기 싫어하겠느냐.”소우연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강요할 순 없습니다. 진이 본인이 원해야지요.”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법 아닌가! 더구나 진이는 제 배 아파 낳은 친딸인데, 어찌 아이가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킬 수 있겠는가.밤이 깊어 소우연은 이미 잠이 들었으나, 갑자기 다급하게 부르는 용강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온몸이 땀방울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육진이 즉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무슨 일이냐?”“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어요. 무언가 몹시 다급해 보였습니다…”“그저 꿈을 꾼 것일 뿐이다.”“아닙니다.”소우연이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산에 가셔서 오라버니를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그럽니다.”“진심이냐?”소우연은 가슴을 부여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오라버니께서 제 환생을 도와주신 이후로, 저희 두 사람 사이에는 진작부터 마음이 이어지는 묘한 교감이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지금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 오라버니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들 일이 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이육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왠지 모르게 자신까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소우연을 보며 말했다.“두려워하지
양세봉은 군자금을 받아들고 뒤에 서 있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우리가 예전에 군에 몸담았을 때는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할 뿐이었지만, 지금은 먹을 것이 넉넉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세 해동안 세금을 면제받게 되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만큼 모두 우리가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된단 말이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맞습니다, 장군 말씀이 옳습니다!”“저희는 모두 주 장군님과 양 장군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분명 잘못될 일은 없을 겁니다!”“주 장군님과 양 장군님을 따르자!”양세봉이 손을 들어 병사들의 환호성을 가라앉힌 뒤,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가 군에 들어온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아가 미래의 영남을 위해, 모든 이들이 사람답게 살고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천하태평을 누리기 위함이다!”“전쟁에서 벗어나, 천하태평을 누리자!”모든 이들이 한 목소리로 화답하자, 연병장엔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바로 그때, 주익선은 이진이 이육진과 소우연을 데리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진이 주익선을 향해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익선은 즉시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지금 걸어오시는 분들은 소 장군님과 왕 부인이시다. 두 분이 바로 이번 작전의 총 책임자이시다!”이육진 일행은 주익선에게 다가가 연병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섰다. 구름 떼처럼 모여든 군중을 내려다보며 이육진이 소우연에게 말했다.“연아, 네가 말하거라.”소우연은 군중을 가만히 응시하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내가 더 보탤 말은 없다. 주 장군이 방금 한 말이 곧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하늘이 우리를 굽어살피신다면, 나는 영남이 삼 년 안에 상운국과 통상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이 영남을 상운국과 같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모든 천민의 신분을 없애고,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 힘으로 살아가며 당당히 한
이영도 심초운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얼마나 많이 흔들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가끔 이런 짓까지 한 우리가 너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이영의 말에 심초운이 대답했다.“너무한 건 없습니다. 연희와 경장명 그자의 혼약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연희의 참 인연이 형님이 아니라고 해도 절대 경장명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심초운의 부모님, 그리고 황태후와 태상황에 이어 주익선의 부모님까지, 그들은 전부 일부일처를 고집하여 왔으며 평생 다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부
“제가 좋아하는 꽃이네요.”그녀가 가늘고 고운 손으로 꽃을 받아들며 향기를 맡았다.경장명이 물었다. “낭자, 아까는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 있었던 겁니까? 혹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그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처음에는 그녀가 잘 감추고 있는 듯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마음이 산만해 보였다.이 모든 것은 그녀가 이천이 장안거리에서 점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아닙니다.”그녀는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교외를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 양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했지
’만약 일찍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궁궐에 들어가 호위무사가 되든지, 아니면 마음잡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봤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텐데.’그는 가슴이 쓰렸다.이진은 주익선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며, 고운 입술선을 그려주기 시작했다.“아씨…”하녀 염이가 복숭아꽃 가지 몇 개를 안고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공주가 또다시 주익선에게 화장을 시키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광경이 전혀 낯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다만 이번에는 주익선의 화장된 얼굴을 본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깜
이튿날, 경문과 이천은 말을 달려 운불사에 당도하였다.달리는 내내, 이천의 가슴 속엔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한 예감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큰일이 아니고서야, 사부님께서 경문을 보내어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사부님.”이천은 용강한의 얼굴을 보자 안절부절못한 채 입을 열었다.“이영 누님은 사부님께서 누님 때문에 경성을 떠나셨다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용강한은 조용히 응하였다.“그 일은 이미 심초운에게 부탁하였다. 그 아이가 영이를 잘 달랠 것이다.”“경성을 떠나신 것이 누님 때문이 아니라면…”이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