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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화

Author: 주 한잔
“태자 전하, 이건…?”

물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지 싶었다.

이육진은 손에 든 ‘품화보감’을 간석에게 던졌다.

“없애라.”

“…예?”

간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았다.

이육진은 그를 힐끗 노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돌아갔다.

간석은 품에 안긴 책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께서 이 책이 마음에 안 드신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지금 궁 안에서도 제일 유행하는 책인데.

문장도 훌륭하고, 삽화는 또 어찌나 공들여 그렸는지… 작가의 재주가 범상치 않건만.

“혹시 글 없이 그림만 있는 걸로 바꿔드려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간석이 중얼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옆을 지나가던 정연과 명심이 그의 품에 들린 책을 보고는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태감 나리, 괜찮으세요?”

정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다. 다들 들어가 쉬거라.”

간석이 손을 저어 보이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간석은 책을 들고 어둠 속에 손짓했고, 이내 작은 내시 하나가 달려왔다.

그에게 책을 맡긴 간석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방 안.

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이육진은 자리에 올라 소우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워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으나, 여전히 자는 척하는 그녀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춘왕이 붕어했으니 내일은 조문하러 가야겠지.”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육진은 살짝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무섭단 말인가. 요즘 들어 부부 사이의 일에 있어 그녀는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

다음 날.

소우연은 아침을 먹고 난 뒤 간석으로부터 이육진이 조정에서 바로 평춘왕부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을 맞춰 그녀도 곧 마차를 타고 평춘왕부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왕부의 집사들과 함께 이지윤이 정중히 마중 나와 있었다.

소우연은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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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라버니, 그렇게까지 격식 차리실 필요 없어요.”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 이육진은 밤새도록 그녀에게 오라버니라 부르게 했다.겉으론 무심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자신이 평소에 용강한을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한몫했는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기로 했고, 오랜 시간 그렇게 지내왔다.하지만 지금처럼 신분이 달라지고, 관계가 미묘하게 바뀐 뒤에는 그 친근한 호칭조차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될 수 있었다.특히 이육진이라면 겉으론 태연해도, 그 속마음은 질투심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그 생각에 소우연은 괜히 조심스러워졌다.가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직 날이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강한은 벌써 겨울 외투에 털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몸이 정말로 차갑긴 한 모양이었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마음이 살짝 저릿해졌다.“태자빈 마마, 혹시 목이 불편하신 겁니까?”용강한이 조심스레 물었다.들리는 목소리로 봐선 확실히 쉰 듯했다.소우연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무리하지 마십시오.”말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동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혹여 불편하신 게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소우연은 정중히 말했다.용강한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신세를 지게 되어 송구합니다.”곁에 서 있던 경문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실례를 무릅쓰고 여쭙습니다. 소인은 어디서 묵게 될지요…”소우연이 정연을 바라보자, 정연이 자연스럽게 답했다.“이 방 옆에 통방이 하나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별채 객실이 하나 있네.”경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용강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객실에서 머무르도록 하게. 자네 코 고는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은가.”“……!”경문은 한순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늘 가까운 방에서 주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7화

    밤은 깊어가고, 뜰 안의 등불들이 하나둘씩 환히 켜졌다.하늘엔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둥근 달은 반쯤 가려진 채 수줍은 듯 사람 세상을 엿보고 있었다.이내 구름이 걷히자, 달빛은 유난히 밝고 또렷하게 아래를 비추기 시작했다.태자부 전체가 불을 밝힌 듯 환했고, 그 중심인 본채는 바람 소리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질 만큼 봄기운이 감돌았다.온 뜰이 달빛에 잠긴 밤, 마치 봄날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웠다.그렇게 두 시진쯤 흘렀을까.본채 밖 풍경에 달린 방울이 서너 번이나 울려 퍼졌다.그날 밤, 물을 부른 것만 해도 벌써 서너 번째였다.간석은 먼지떨이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태자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속으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하지만…‘태자빈 마마의 배는 어째서 아무 소식이 없단 말인가…’간석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마음속 기도를 올렸다.‘하늘이시여, 두 분이 이토록 정성껏 애쓰시니, 부디 귀한 아기를 점지해 주시옵소서. 태자부는 물론 상운국 전체가 기뻐할 일 아니겠습니까…’그날 밤 마지막으로 물을 부른 것은 소우연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였을 때였다.기억나는 것은 이육진이 직접 그녀를 정갈히 씻기고, 이불을 덮어준 장면뿐이었다.정신을 온전히 차린 것은 다음 날 새벽,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눈을 뜬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정연을 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양이보다도 작고, 새된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결국 그녀는 손을 들어 침상 옆에 달린 방울 끈을 당겼다.딸랑, 딸랑.방울 소리가 울리자 정연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태자빈 마마, 깨어나셨습니까?”소우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대답 대신 정연을 바라보았다.입을 열 기운조차 없었기에.말없이 누운 그녀의 모습을 본 정연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전날 밤, 태자빈 마마는… 많은 것을 견뎌내신 것이다.오늘은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계셔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6화

    창밖으로는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따스한 봄바람이 불자 뜰 안의 꽃잎과 풀잎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거렸다. 곳간에서 피어난 은은한 꽃 향은 마치 봄기운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향이 번지자, 간석과 정연은 눈치껏 본채 문 앞에서 조용히 물러섰다.누군가는 옷가지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욕탕을 손질하며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그로부터 한 시진이 흐른 뒤, 하늘은 어느새 어둠으로 뒤덮였다.그제야 이육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물을 준비해라.”간단한 세신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소우연은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을 뜨는 손끝이 자꾸만 힘을 잃어갔다.이육진이 손짓을 하자 정연이 얼른 앞으로 다가서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뿐만 아니라 간석과 명심에게도 전부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졌다.갑자기 시중 드는 사람을 내보내시다니… 또 그럴 작정이신 건가?정연은 속으로 아연실색했다.요즘 태자저하의 정력은… 지나치다 못해 겁이 날 지경이었다.태자빈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고, 윤기 없는 손끝, 가늘어진 숨결, 나긋하게 젖은 눈매까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얼마나 부른 걸까. 목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라니.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힌 뒤에야 소우연은 문득 깨달았다.방 안에는 이제 자신과 이육진, 단둘뿐이라는 것을.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순간, 이육진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젓가락을 빼앗았다.곁으로 다가와 바짝 앉더니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반찬이 먹고 싶으냐?”“예…? 제가 먹을 수 있어요.”얼떨결에 말하면서도, 소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수 있느냐? 방금 전엔 분명 못 하겠다 하지 않았느냐.”‘못 하겠다’라니…?소우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숨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저… 더는 못 하겠어요…’맞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못 하겠다’… 그 말이 또 그런 의미로 들렸을 줄이야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5화

    “용 감정의 병세가… 그리 심각한 것이냐?”이육진이 조심스레 물었다.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몸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고, 맥도 약해요. 피가 흐르는 것조차 느릿느릿할 정도예요.”입술을 한 번 달싹이던 이육진은 소녀의 손을 쥐고 물었다.“생각해둔 방도가 있느냐. 완치할 수는 있겠느냐?”“지켜보면서 치료해나가야 해요.”소우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치료를 맡게 되면 자주 뵈어야 해요. 솔직히 꽤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어요.”“자주라 하면… 얼마나 자주 말이냐.”이육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처음엔 매일 찾아가야 할지도 몰라요. 이후엔 차츰 경과를 봐가며 조절해야겠죠.”매일 얼굴을 본다.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소우연이 그를 ‘오라버니’라 부른 것도 그렇고, 이육진의 속은 은근히 뒤틀렸다.물론 소우연을 믿었다.그리고 용 감정이 자신과 소우연을 도와준 것도 고맙게 생각했다.하지만 아내가 매일 외간 남자의 집을 드나든다? 그것도 얼굴을 붉히며 ‘오라버니’라 부른다?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혹시… 질투하시는 거예요, 부군?”소우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질투 안 한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한참을 망설이던 이육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아예 용 감정을 태자부로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 병세가 나아질 때까지만 머무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요?”소우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말했다.“하지만… 오라버니가 원치 않으실 수도 있어요.”오라버니? 이육진의 얼굴이 또 한 번 굳어졌다. 질투의 기운이 은근히 번져나갔다.그걸 눈치챈 소우연은 작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용 오라버니는 점과 괘를 보는 분이에요. 이번 병도… 아마 저희를 도우시다 얻은 후유증 같아요.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요.”“그렇다면 네가 봐주는 게 마땅하지.”이육진은 조용히 대답하고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그 걸음이 얼마나 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4화

    미풍이 스치고 지나가며, 햇빛에 달아올랐던 소우연의 뺨에 잠시 시원한 기운이 스몄다.소우연은 손으로 뜨거운 햇살을 가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이렇게 계속 햇볕 아래 계시는 건 좋지 않아요.”“하지만 이렇게 햇살을 맞고 있으면… 가장 편안합니다.”잠시 깊은 숨을 들이킨 후, 소우연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제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 치료해드릴게요.”용강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엔 결심이 담겨 있었고, 그 표정은 단단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전생에서 소우연을 위해 복수에 나선 이육진의 광기를 똑똑히 보았다.그 광기 속에 그는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졌다.그래서 이번 생에서, 그들이 진정한 인연이 되어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비록 지금 그녀에게 솔직히 말한다 해도, 그녀와 함께 살기만 해도 자신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질 거라 해도, 그녀는 아마 이육진을 두고 자신을 택하지 못할 터였다.그녀가 택하더라도, 이육진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만약 그렇게 되면 이육진은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잘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좋습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이후 두 사람은 병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우연은 치료 방향에 대해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했다.용강한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매일같이 마마와 뵙게 될 텐데요. 태자 전하께서 괜찮아 하실까요?”소우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그 부분은… 제가 태자 전하와 상의해보겠습니다.”“예, 알겠습니다.”그는 말을 아끼며 눈을 감았다.무슨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는 이미 운명을 바꾸었다.또한 이육진의 능력이라면 전생처럼 몰락하지는 않을 터였다.소우연은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햇빛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3화

    소우연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용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운명을 점쳐봤습니다. 앞으로 십여 년은 무리 없을 것입니다.”그가 말한 ‘십여 년’은 아마도 소우연과 이육진이 황제와 황후가 되는 그 순간까지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십 년 남짓이 뭐가 충분합니까. 용 감정께서는 아직... 스물셋이시잖아요.”“예, 스물셋입니다.”“이렇게 젊은데, 장수하셔야죠. 백 년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렇다면 말씀대로 백 세까지 살아보겠습니다.”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소우연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런 몸으로 백세까지 산다는 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에게도, 곁에서 함께하는 이들에게도.용강한은 옆의 빈 안락의자를 바라봤다. 소우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 자리에 앉았다.“복용하셨던 약 처방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참고해보고 싶습니다.”“아직도 저를 치료해보시겠다는 겁니까?”“당연하죠. 감정께서는 태자 전하께도, 저에게도 큰 은인이십니다.”용강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저... 인연이었을 뿐입니다.”그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외로웠던 어느 날. 그녀가 건넨 하나의 장명쇠가 그의 모든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그녀를 위해 선택한 모든 길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그녀가 진심으로 웃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날을 맞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기나긴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용 감정은… 저에겐 정말 오라버니 같으십니다.”잠시 망설이던 소우연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세상에서, 태자 전하 말고는 용 감정께서 저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 같아요.”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이제부턴 저를 진짜 오라버니라 생각해도 좋습니다.”“참, 태자 전하께 이미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감정께서는 제 친정 식구 같은 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2화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1화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380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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