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걸 보며 아령은 그가 이번에 확실하게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이는 이민수가 처음 아령에게 진지하게 화를 내가 있는 것이다.만약 아령이 대답을 확실하게 하지 못하면 이민수는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이민수를 상대로 겪은 첫 시련에 아령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더니 이민수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인 같은 천한 여인이 어찌 왕비님이 어떻게 생기셨는데 알겠습니까? 세자 저하께서는 소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소인은 단지 어렸을 때부터 화장에 관심이 많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한 화장이 왕비님 얼굴과 흡사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세자 저하, 소인의 말은 다 사실입니다. 명문 가문 규수도, 기생집 여인들도 화장은 누구나 다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단지 소인은 그들보다 화장 실력이 조금 뛰어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화장에 흥취를 느꼈을 뿐입니다.”하는 말이 다 사실이라고?이민수는 아령 앞에 서서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아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 전체가 소우연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표정이나 눈매는 거의 소우연과 똑같다고 볼 수가 있었다.이민수는 심지어 예전에 소씨 가문에서 강제로 소우연을 회남왕에게 시집보낼 때 소우연이 이런 모습으로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린 채 아령을 쳐다보았다.“세자 저하, 소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전부 사실이라고 하였느냐?”이민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어마마마처럼 화장한 것도 우연이고 소우희의 시녀였던 혜주를 사들인 것도 우연이고 소우희를 만나 이 저택에 데리고 온 것도 우연인 것이냐? 아령, 넌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이민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아령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만 이 저택을 떠나거라. 그리고 앞으로 평서왕 저택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아령은 이민수가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올 줄
이민수는 아령의 얼굴을 한참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소인 맹세합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세자 저하께 먼저 허락을 맡겠습니다.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아령은 그렇게 한번 또 한번 이민수의 마음을 공략했다.“소우희 그자도 바로 쫓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소우희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민수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예전에 소우희가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라는 말만 믿지 않았어도 그는 절대 소우연을 회남왕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소인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제발 소인을 가엽게 여겨 주시어 내쫓지 말아주십시오. 소인은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는 백화루로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인은 세자 저하 곁에 있은 덕분에 백화루 사람들이 소인을 감히 잡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인이 이 저택을 떠나는 순간, 바로 잡혀가서 그 사람들 손에 죽게 될 겁니다.”말을 하던 아령이 서럽게 훌쩍이기 시작했고 이민수는 그런 아령을 쳐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정말 앞으로 내 말이면 뭐든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내 허락을 먼저 맡겠다고 맹세할 수 있느냐?”“네, 맹세합니다. 소인, 세자 저하의 말이면 뭐든 하겠습니다.”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령은 은근슬쩍 아양스러운 눈빛으로 이민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상대방이 원하기만 하면 그녀는 평생 그의 곁에서 자세를 바짝 낮추고 살 것만 같았다.이민수는 손을 뻗어 아령을 바닥에서 일으킨 뒤,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럼 평생 내 곁에서 그 여자 대체품으로 살아가거라. 그리고 명심하여라. 감히 내 말을 한 마디라도 거역해서는 안 될 것이다!”“명심하겠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평생 그렇게 살겠습니다.”“그래. 그럼 오늘밤 제대로 준비해 보거라. 이따가 다시 이리로 오겠다.”오늘밤?아령은 고분고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이민수 팔에 기대어 다정한 목
두 눈을 질끈 감은 소우희는 한참동안 눈물을 닦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문 좀 닫지 그래?”아령이 고개를 돌려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돌아서서 문을 굳게 닫았다.그제야 고개를 든 소우희는 혜주와 아령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제야 혜주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혜주의 배신으로 소우희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다.“왜! 네가 대체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것이냐!”소우희는 결국 또 한번 혜주에게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혜주는 평생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소우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아령을 쳐다보았다.“당신은 이지윤 사람 아니야? 날 진심으로 도와준 게 아니었어?”그 말에 아령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널 도와줘? 난 단지 이지윤 그자를 한번 도왔을 뿐이야. 하지만 넌 너무 멍청해서 도울 가치가 없지.”소우희는 이를 악문 채 소우연과 꽤 많이 닮은 아령의 얼굴을 노려보았다.“너 도대체 누구야? 너 이지윤의 사람이야 아니면 이민수의 사람이야?”“난 나 자신이지.”아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자신이라고? 허허,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 세상에서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다들 결국 남자의 노리개가 되고 말지.”“네 자신이 노리개라고 나도 똑같이 보지 마. 난 너와 달라.”아령은 여유롭게 손을 살짝 들어 자신의 백옥 같은 피부를 감상하며 말했다.“일단 자신부터 확실하게 알아야 해. 그래야 다른 사람을 네 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거든.”“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룬다고? 하하하하!”소우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민수처럼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매정하기까지 한 남자를 어떻게 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한편, 그런 소우희를 보며 아령이 담담하게 물었다.“그럼 어디 한번 얘기해 보시든가. 이민수 그자는 왜 조금 전에 나를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왜, 왜 죽이지 않은 건데?”“네 말이 맞아. 이민수
아령의 웃음은 절대 우호적인 웃음이 아니다.하지만 소우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아령 같은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소우희 아씨, 한 가지 더 알려줄까? 난 뭐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그러다가 잠시 고민하던 아령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소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소우희는 아령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귀에 확실하게 꽂혔다.“너…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너무 놀란 소우희는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뭐라고 했냐고? 소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고!”아령이 언성을 높여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하자 소우희뿐만 아니라 곁에 서있던 혜주도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아령 아씨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왜? 대체 왜?”소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아령이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을 바꿨다.“장난일 뿐이야.”장난? 어떤 사람이 이런 말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탁자 앞에 앉은 아령은 소우희를 보며 물었다.“봐 봐. 이제 더 이상 가렵지가 않지?”소우희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가렵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소우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리고 가려움 증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하루 종일 몸을 긁은 탓에 피부가 벗겨져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소우희는 그제야 해방 받은 표정으로 바닥에 축 늘어져 누웠다. 그녀는 며칠 동안 한숨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일단 잠 좀 자자. 잠을 자야겠어.”소우연이 소우희에게 감염시킨 독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소우희는 수많은 명의를 찾아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지윤이 그녀를 위해 어의까지 불렀는데도 전혀 방법이 없었다.그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는 같은 말만 반복했지만 피부가 뜯기고 피가 흐르는데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소우희 아씨, 벌써 자려고?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말을 하던 아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비를 베푼 거라고?”알약을 노비 혜주의 요강에 넣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말을 할 수 있는 걸까?“당신과 나 사이에 그 어떤 원한도 없는 것 같은데?”소우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동안 체내의 독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서 거의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의와 의원들이 약을 처방해주긴 했지만 그 어떤 약도 아령이 조금 전에 준 알약처럼 그리 효과가 좋지 못했다.소우희는 지금 온몸이 한 군데도 가려운 곳이 없었다.때문이 이 알약이 체내의 독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가려움 증상을 해소할 수 있기에 소우희는 이 알약들이 간절하게 필요했다.한편, 아령은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원한이 없다고?’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혜주를 쳐다보았다.“혜주야, 이자가 원하면 그 요강을 이자에게 주고 이자가 싫다고 하면 네가 좀 수고해서 알약을 잘 챙겨두거라. 나중에 이자가 반드시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고개를 끄덕인 혜주는 아령이 바닥에 버린 도자기병을 주웠다. 그리고 숟가락 하나를 가져오더니 숟가락으로 요강 안에 있는 알약을 꺼내 오줌과 함께 도자기병 안에 넣었다.그리고는 뚜껑을 꼭 닫은 뒤, 소우희의 발 근처에 놓아두었다.“이 안에는 여덟 알이 있어. 삼시 세끼 한 알씩, 하루에 세 번 먹어야 할 거야. 내가 원하는 걸 네가 이뤄준다면 알약은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면 네 체내에 있는 독은 점점 심각해질 거야. 결국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긁게 되겠지. 점점 살을 에이는 고통이 심해질 거고 심지어 뼈가 튀어나오는 걸 보게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살과 뼈 위엔 벌레들이 잔뜩 기어 다닐 것이고. 마지막엔 눈이 멀어 앞도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방에 죽지도 않아… 소우희, 모든 건 너에게 달렸어.”말을 마친 아령은 곧바로 방을 떠났고 소우희는 그제야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줌이 잔뜩 묻은 도자기병을 끝까지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 알약들을
고개를 숙여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힐끔 쳐다보던 소우희는 이내 허리를 쫙 펴고 꼿꼿한 자세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소우연 그 계집애가 지옥에 떨어지는 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말 거야! 죽더라도 그 계집애가 먼저 죽는 걸 보고 죽어야 돼!’한편, 태자부에서.연못 앞 정자에 앉아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소우연이 물었다.“태자 저하는 아직 서재에 계신 것이냐?”“네, 마마.”정연이 대답했다.흠칫하던 소우연은 손에 남은 물고기 먹이를 연못 안에 툭 던지더니 고개를 들고 흐린 하늘을 힐끔 쳐다보았다.“부엌에 얘기해서 태자 저하께 다과를 준비해가거라.”고개를 끄덕인 정연은 돌아서서 가까이에 서있던 명심에게 말을 전했다. 정연이 정자로 돌아왔을 때 소우연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먹이통을 정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정연아, 네가 먹이거라.”“네, 마마.”정연은 곧바로 먹이통을 받아 먹이를 조금 꺼내 연못 안에 골고루 던졌다. 순간 물고기들은 하나둘씩 몰려와 먹이를 빼앗기 시작했고 연못에 작은 물결이 일기도 했다.“저 통통한 물고기는 계속 다른 물고기의 먹이를 빼앗습니다. 이제 배부를 만도 한데 말입니다.”정연이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적자생존인 것이지.”말을 하던 소우연은 손을 뻗어 물고기들을 어루만졌다. 물고기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잡힌 물고기만 조금 바둥거릴 뿐이었다.조금 뒤, 먹이통 안에 있는 먹이가 텅텅 비었다.“마마, 오늘 물고기들이 과식한 것 같습니다. 마마? 마마?”정연이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소우연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녀는 조금 전에 소우희가 도대체 어디로 도망갔을까 생각하고 있었다.용강한은 소우희가 이육진을 먼저 찾아올 거라고 했고 확실히 찾아오긴 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혹시 소우희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닐까?“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소우연이 작
이육진에게 지는 게 두렵다고?소우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정말 진다고 해도 이육진이 그녀를 손해 보게 하기나 할까?이런 생각에 소우연이 물었다.“그럼 무엇을 걸고 싶으신 겁니까?”“네가 나를 이기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겠다. 대신 내가 이기면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거라.”“좋습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우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우희는 지금 몸과 마음이 극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래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겠지요. 아무리 늦어도 이틀 뒤에 바로 저하께 다시 찾아올 겁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그럼 난 이틀 뒤의 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네.”“그렇습니다.”“에이, 아무래도 내가 진 것 같구나.”소우연이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 싫으신 겁니까?”“당연히 아니지.”이육진은 소우연이 뭘 원하든 당장 들어줄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소원을 얘기할 기회가 적어진 것 같아서 못내 아쉬웠을 뿐이다.그렇게 두 사람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 사이, 구름 뒤에 숨어있던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해질녘이 되자 아름다운 노을을 선물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손을 잡고 돌다리 길을 여유롭게 산책하다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본채로 향했다.그러다가 본채 앞을 지키고 있는 낯선 얼굴을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간석은 지금까지 저택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어제부터 저택 어디에도 간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왜 그러는 것이냐?”이육진은 소우연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아닙니다.”소우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던 그때, 정연이 다가와 물었다.“저하, 마마, 이제 식사를 준비할까요?”“그리하여라.”“네, 저하.”고개를 끄덕인 정연이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자 하인들이 진수성찬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은 의서를 연구하고 있었고 이육진은 처음 보는 태감에게 상소를 전부 본채로 가져오라고 했다.“아직 공무
“침상에서 마저 이야기할까?”소우연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나 그에게 있어서 이는 그저 간지럼 태우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거침없이 번쩍 들어 올려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안 돼요, 전하. 몸이 좀 불편해서… 그 날이 왔단 말이에요.”이육진이 입을 살짝 벌리고 품 안에서 제멋대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너도 나를 놀릴 줄 아느냐?”소우연이 제법 득의양양하게 답했다.“네, 맞아요. 그래서 어쩌시려고요?”남자는 어이없는 듯하면서도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네 몸이 괜찮아지면 그때 제대로 혼을 내주겠다.”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소우연을 침상 위로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난 아직 볼일이 남아 있어 더는 너와 놀지 못하겠구나.”소우연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다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어렴풋이 남자의 몸에 나타난 반응이 보였다.이육진이 무심한 척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누가 그녀더러 이렇게 사랑스럽게 태어나라고 했던가. 입맞춤은커녕, 그저 손을 잡거나 손가락만 살짝 걸어도 그는 늘 이리 되어버렸다.소우연은 두 손을 뒤로 짚은 채, 반쯤 눕듯 기대며 말했다.“전하 정말 재미없어요. 방금 전에는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잖아요.”이육진이 잠시 말을 잃었다.소녀의 새침하고도 짐짓 화난 듯한 표정이 무척 생동감 넘쳤다.그녀가 이렇게 발랄하고 제멋대로 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의 소녀는 원래 이런 모습이어야 옳았다. 마음껏 활짝 피어나고,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야 했다.“연아.”그가 다가와 몸을 숙이고 진지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지금 모습이 좋구나. 정말 좋다. 앞으로도 늘 이렇게 기뻐해 주렴. 나와 함께 있을 땐 꾸미지 않아도 되고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저는…”“내 곁에 있을 때만큼은 온전히 너 자신이면 된다. 네가 즐겁다면, 하늘 끝 구름이든 밤하늘의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