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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화

Author: 주 한잔
“그저 노망이 든 늙은이일 뿐이죠.”

아령이 낮게 내뱉자, 곁에 서 있던 이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 평서왕부는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 분께선 이미 저희 손아귀 안에 들었사오니, 그깟 탕 한 그릇쯤은 드려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너무 다그쳐서… 황제가 끝내 반기를 들고 손을 번쩍 들어 외친다면 큰일 날 터였다. 자신이 이비와 그 무리에게 해를 입었다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진실이 무엇이든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아령은 이복의 표정을 살피며 조용히 생각을 거듭했다.

그 노인은 양고기탕에 눈이 멀긴 했지만, 맑은 정신을 되찾을 때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회유하고 위협해도, 이육진의 태자 책봉을 철회하는 성지를 내리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자가 막 나간 참이지… 난 믿는다. 저 늙은이는 과연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내 두고보마”

이복은 짐작했다. 마마께선 다시 한 번 시험해보시려는 것이다. 그 노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 결국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을 터.

“마마…”

아령은 황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폐하께, 어디 한번 중독적인 맛을 보여드려야지 않겠느냐.”

그 말과 함께 이복을 이끌고 유유히 전각을 빠져나갔다.

편전 안엔 궁인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황제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힘없이 손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곧 닥쳐올, 몸을 갉아먹는 듯한 고통.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그 순간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옥죄어 왔다.

그의 시선이 과도 하나에 머물렀다.

수없이 되뇌었다.

정녕…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탕에 섞은 약물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들의 뜻대로 성지를 내려, 이육진의 태자 책봉을 스스로 거두게 될지도 모를 터였다.

한편, 궁 밖.

수현은 이육진을 명화궁 앞까지 배웅한 뒤, 주위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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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34화

    “어머니, 우연이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나요?”“소우연 말고는 없어.”임씨는 더 이상 누구도 떠올릴 수 없었다. 평생 원한 살 일 없이 조용히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소현준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없었다.임씨는 단호하게 말했다.“아버지와 형 말을 잘 듣고, 평서왕가를 위해 충성하렴. 언젠가는… 소우연과 이육진, 그 두 놈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야.”임씨의 상태를 보니, 소현준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꾹 참았다.“어머니, 푹 쉬세요.”그가 등을 돌리자 임씨가 뒤에서 외쳤다.“현준아, 잊지 마라!”소현준은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밖으로 나오자 마당 한편에 어머니의 시종 유모가 앉아 있었다. 그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유모.”유모는 깜짝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아… 둘째 도련님…”“유모, 겁먹은 듯하군요.”“아, 아닙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정말요?”소현준이 어떤 인물인가.그가 대리사까지 올라선 건 결코 집안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오직 자기 실력 하나로 쌓아 올린 자리였다.그는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마치 죄인을 심문하듯 유모를 바라보았다.긴장한 유모는 더는 버틸 수 없었고, 그가 묻는 말마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어머니께서 우연이를 그토록 미워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친딸이 아니기라도 한 겁니까?”유모는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아닙니다! 우연 아씨는 부인께서 직접 낳으신 친딸입니다. 다만… 그게…”“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어머니 상태는 유모도 봤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무도 어머니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만약 거짓말을 하면, 유모뿐 아니라 유모의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 소현준.겉보기엔 부드럽고 예의 바르지만, 속은 누구보다 냉정하고 무자비한 인물이었다.유모는 결국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도련님… 이 말씀 드리기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부인께서는 예전부터 큰 마님을 깊이 미워하셨어요. 그런데 그 해 두 아씨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우연 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33화

    애초에 소씨 집안 사람들과 정이 없었다. 이 순간, 소우연은 이를 악물며 속으로 말했다.‘저런 덕 없는 어미 밑에서 자랐으니, 소씨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일 터. 다 어머니 스스로의 업보입니다.’그녀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소우희 하나 죽은 게 뭐 어때서요? 제 생각엔 부인께서 이곳에 있는 이상 소씨 집안은 머지않아 씨가 마를 겁니다.”“너, 너…!”임씨는 소우연을 향해 손가락을 떨며 가리켰지만,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저를 나무라기 전에, 먼저 소 부인 자신부터 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부인께서 저지른 짓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온 건 아닌지 말입니다.”“너, 너 이년이…!”임씨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구어지며 그대로 실신해버렸다.“어머니…!”소현준이 놀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중에 그녀가 도와주길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소현준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우연은 그리 깊은 감정은 없었지만, 소씨 집안 사람들 중 그나마 사리분별이 되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임씨가 소우연에게 했던 말들, 아이를 못 낳을 거라느니, 씨가 마를 거라느니… 그건 곧 그녀의 남편, 태자를 저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지금 아이 문제로 얼마나 애가 타 있는지, 그 말들이 얼마나 잔혹한지 임씨는 모를 리 없었다.이제 더는 여기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가죠.”소우연은 옆에 서 있던 용강한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이곳이든 어떤 목적을 가진 이지윤이든, 이미 세상의 권세 다툼은 시작됐다. 그녀는 그저 소씨 집안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길 바랄 뿐이었다.겨울바람은 살을 에는 칼날 같았다.소현준이 임씨의 인중을 눌러 겨우 정신을 돌려놓았고, 급히 불러온 의원은 그녀가 격한 감정에 휘말려 기절한 것이라고만 했다.“악귀 같은 년… 그년은 분명 아이를 못 낳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저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임신 소식이 없는 거야. 하하하…”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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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31화

    “소 대인께서는 총명하신 분이니, 오늘 제가 이리 찾아온 뜻 또한 아시리라 여깁니다. 소씨 가문에 원한을 품은 자가 있는지 묻고자 온 것이지요.”소현준은 고개를 저었다.“별다른 일은 없습니다.”“소 대인께서는 참으로 단호히 답하…”소우연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혹 절 믿지 못하여 그러시는 것입니까?”“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저 아는 바가 없어 그리 대답하였습니다.”“그렇다면 저도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령이란 자 말입니다. 보기엔 연약해 보일지 모르나, 실로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훗날 권세를 잡게 된다면… 소씨 가문을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곁에 있던 용강한도 병든 몸을 일으키다 연이어 기침을 하며 비틀거렸고,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소우연은 급히 부축하며 다급히 물었다.“오라버니, 괜찮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데려오지 말았을 것을…”용강한은 고개를 저으며,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전에 제가 소씨 가문의 운세를 점쳐본 적이 있사온데… ‘일가가 멸문할 팔자’라 나왔습니다. 이 화를 피하고자 하신다면, 소 대인께서도 하루빨리 대비하셔야 합니다.”“뭐라 하셨습니까…?”소현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다른 이의 말이라면 흘려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의 이치를 살피는 감정관, 그것도 용강한이 한 말이라면 함부로 넘길 수 없었다.용강한은 잔잔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소 대인께서 가문의 어른들께도 한 번 물어보시지요. 태자비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남에게 팔려놓고도 그 값을 스스로 세어주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그 말은 분명히 들렸으나, 그 속뜻은 두 겹이었다.대리사 소현준이라면, 그 뜻을 어찌 모를리랴.“그럼, 가보겠습니다.”용강한은 소우연의 손길을 살짝 밀쳐내고 혼자 걸음을 옮겼다.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군신 간이요, 남녀 사이인 만큼 예는 지켜야 했다.소우연도 그제야 깨달았다.자신이 너무 다급한 나머지 예를 잊고 있었음을 말이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30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좋아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용강한도 평소보다 두 겹은 두꺼운 방한포에 모자 달린 외투까지 갖춰 입고, 소우연과 함께 길을 나섰다.경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몸은 괜찮으시겠습니까?”용강한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태자비 마마께서 함께 계신데, 어찌 병이 들겠습니까?”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태자비는 용강한에게 있어 가장 효험 좋은 묘약 같은 존재였다.이번에는 정연을 따르게 하지 않고, 진우만 데리고 나섰다.진우와 경문, 두 사람이 교대로 마차를 몰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삼각시쯤 지났을 무렵, 마차는 소장군부 앞에 다다랐다.문을 지키던 호위병들이 태자부 마차임을 알아보고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중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 알렸다.소우연과 용강한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조용히 기다리며, 소씨 가문 사람들이 언제 모습을 드러내는지 지켜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준이 마중 나왔다.“신 소현준, 태자비 마마와 용 대인을 뵙습니다.”그는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예를 올렸다.소우연은 옆에 앉은 용강한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눈빛을 나눈 뒤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마차에서 내렸다.소현준은 소우연이 먼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어찌 혼자 오셨습니까?”소우연은 마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서며 문 안을 슬쩍 바라보았다.“형님들께서는 외출 중이시고, 막내는 다리를 다쳐 직접 뵙지 못한다 하였습니다.”“부디 태자비 마마께서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괜찮습니다. 제가 이리 온 것도 본디 소 대인을 뵙고자 함이었습니다.”속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소홍범과 소현준, 두 사람 모두 평서왕 쪽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음이 틀림없었다.며칠째 바람과 눈이 그칠 줄을 몰랐다.눈발은 거세지 않았으나, 살을 에는 찬바람이 날카롭게 얼굴을 파고들었다.소우연은 망토 자락을 여미며 몸을 감싸 안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29화

    “허나 평춘왕 이종대의 죽음은 원작에서 서술된 바와 전혀 다릅니다. 원작에서는 이민수가 즉위한 후 가을쯤 형벌로 죄를 물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 현실은 소우희가 이지윤과 손을 잡고 이종대를 죽였습니다!”“만약 이지윤이 이종대를 대신했다면?”“무슨 말씀이십니까?”용강한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원작에서도 이민수는 평춘왕 이종대를 이용한 뒤, 즉위하고 나서야 처벌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평춘왕 자리에 있는 이지윤 또한 이민수와 같은 배를 탄 자라 할 수 있죠.”소우연은 말을 하려다 잠시 멈칫하였다.“맞습니다. 그날 제가 궁 안에서 이지윤을 보았습니다. 지금 황궁 내에서 금위군 부도독으로 있더군요.”“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 아령이라는 여인…”용강한은 전생을 곱씹어보았으나, ‘아령’이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했다.“그 여인은 분명 이지윤과 관련이 있습니다.”용강한은 소우연에게 찻잔을 건넸다.“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정리해 봅시다.”자신도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소우연 역시 차를 마시고는, 곧장 용강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마 이번 생에서는 소우희가 이종대를 해쳤기에, 이지윤과 아령 두 사람 모두 저마다의 목적을 품고 나선 것이겠지요.”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전생에는 소우희 덕에 이민수의 일파가 순조로웠고, 그 덕에 아령이나 이지윤이 무슨 야심을 품었더라도 싹이 트기도 전에 사라졌을 겁니다.”“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입니다.” 용강한도 고개를 끄덕였다.“전생에는 이민수가 황제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군과 암투를 벌였기에, 이지윤이나 아령 같은 자들이 나설 자리는 없었습니다.”“헌데 이번 생에는 변수가 생겨, 아령이 때를 놓치지 않고 평서왕부로 들어왔고, 그녀의 분장술을 이용해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이비가 되어 조정을 뒤흔든 것이지요.”소우연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허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28화

    수현은 옥병을 곱게 싸 봉한 뒤 고개를 숙였다.“예, 전하. 염려 마시옵소서.”수현을 통해 이육진은 황제가 진정 사지에 내몰린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급히 어전으로 향한 그는 수현이 말한 그 성지를 찾아냈다.황제는 정말로 이미 전위의 조서를 미리 마련해두고 있었다. 언젠가 국정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을 예견한 것이다.그중에는 수현의 사면령도 포함되어 있었다.태자부로 돌아오자 소우연이 그를 반겼다.“아바마마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아셨다면, 어째서 직접 그들을 처단하시지 않으신 겁니까? 저하께서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이육진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문제는 삼만 금위군이 모두 이민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다. 평서왕부 또한 오랜 세월 경성에 뿌리를 박고 있었지. 조정 대신 절반도 그들과 한통속이나 다름이 없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낮게 말했다.“게다가 아바마마께서 오래도록 그 독에 시달려 오신 듯 하다. 그런 아바마마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조정의 대신들이 과연 무사할지 의문스럽구나.”정말이지, 황제에게조차 독을 쓸 수 있는 자들인데, 그 외의 인물들이야 말해 무엇하랴.“그 아령이라는 여인,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소우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원래의 책에 그런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기에, 의문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연아, 난 우선 좀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 내일 곧장 조정으로 들어가야 하니…”“부군, 저야 괜찮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어디를 가시든 반드시 호위병을 여럿 대동하십시오.”“그래, 알겠다.”그날 이육진은 진규 등 소수만 대동하고 떠났다. 간석은 일부러 데려가지 않았다.소우연은 간석을 붙들고, 이육진이 궁에서 겪은 일들을 자세히 물었다. 간석은 태자보다 더 세세히 상황을 전해주었다.들으면 들을수록,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듯했다. 그 바퀴에 자신들과 그들의 삶이 깔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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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526화

    “아바마마, 아들된 자식으로서 그저 염려되어 왔습니다.”“염려? 네가 나를 염려한다고? 내가 보기엔 네놈은 그저 짐이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겠지. 그래야 네 앞길이 트이지 않겠느냐.”황제는 가늘게 눈을 뜨며 이육진을 가리켰다. 떨리는 손가락 끝이 겨누는 방향엔 참을 수 없는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태자라면서 국사도 그저 형식일 뿐,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려는 생각이 있기는 하더냐?”“아바마마…!”이육진은 아버지의 꾸짖음에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토록 애써온 세월인데, 황제가 이처럼 차갑게 몰아세우실 줄이야. 그것도 아령 앞에서 말이다.약을 먹인 것이 분명했다. 평서왕 부자가 황제께 무슨 약을 먹였는지, 이리도 성정을 바꾸어놓을 줄이야.“물러가라!”황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쳤다.이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자애로운 부친이 아니었다.“폐하, 태자 저하께서는 그저 폐하께서 걱정되어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아령이 부드럽게 말을 이으며 중재에 나섰다. “아직 젊으신 탓에, 혼자서 국정을 감당하시기 벅찰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도와드리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그 눈빛은 온화해 보였지만, 속내는 은근한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황제는 그런 속내를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그깟 정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가 무슨 황위 계승자란 말이냐.”이어 황제는 이육진을 다시 바라보았다.“태자,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냐?”그 시선엔 마치 평범한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하지만 그 기대는 어쩌면 마지막 경고이기도 했다.그 순간 이육진은 분명히 깨달았다.황제는 지금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태자 책봉을 지키고 있었다.“소자는 괜찮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수련의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황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옆에 있던 수현에게 향했다.수현은 그 눈빛을 받아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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