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도현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총수님, 5시 이사회 임원 보고 일정이……."
"10분 뒤로 미뤄."
도현은 비서실장의 다급한 말을 단칼에 자르며 1층 로비로 향하는 전용 버튼을 눌렀다. 수행원들의 밀착 경호를 단호히 물린 채, 도현은 홀로 1층 중앙 정원 유리 온실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온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원목 테이블. 주변의 뇌신경외과 교수들과 의사들이 웅성거리며 둘러선 가운데,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네 살배기 우진이 턱을 괸 채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수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아이의 맞은편에 섰다. 큰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체스판 위로 길게 내려왔다. 하지만 우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아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고사리손으로 백색 폰을 집어 들어 거침없이 전진시켰다.
"그 자리는 함정이다."
도현이 낮게 훈수를 두었다.
"상대 룩의 사정거리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악수(惡手)야. 나이트를 먼저 움직여서 중앙 진형을 장악했어야지."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말투였다. 그때, 우진의 작은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가 도현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우진은 한동안 도현을 올려다보다 턱을 살짝 비틀고 한숨을 쉬었다.
"저 아저씨는 눈빛이 참 멍청하네."
주변에 선 의료진의 얼굴이 굳었다. 차도현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할 사람은 어른 중에도 드물었다.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라고?"
"아저씨는 눈앞의 한 수만 보고 뒤에 숨겨진 세 수는 전혀 못 보잖아."
우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비숍을 사선으로 밀어 상대 킹 앞에 내려놓았다. 탁. 체스판 위의 판도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도현이 '악수'라고 폄하했던 폰의 전진은, 사실 상대 퀸의 탈출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치밀한 미끼였다.
비숍과 폰의 연계로 흑색 킹은 세 수 만에 움직일 곳을 잃었다. 체크메이트. 도현도 바로 읽지 못한 수를 네 살배기 아이가 먼저 봤다.
"다시 보여줘 봐."
도현이 의자를 빼자 우진은 허락도 없이 앉느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내 자리인데."
도현은 잠시 멈췄다가 맞은편 빈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는 앉아도 되나?"
"거긴 돼. 대신 말 옮기지 마."
우진은 방금 둔 수를 처음부터 다시 재현했다. 도현이 폰을 미끼로 쓴 이유를 묻자 아이는 작은 손으로 퀸의 퇴로를 하나씩 막아 보였다.
"아저씨는 센 말부터 하고 나중에 생각하잖아. 체스도 그러면 져."
도현은 반박하려다 체스판을 다시 봤다. 적어도 이번 판에서는 아이 말이 맞았다. 도현이 굳어버린 시선으로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자, 우진이 작은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아저씨한테서 싸구려 향수 냄새나서 머리 아파. 저리 가."
"내 향수는 아닌데."
"그럼 남이 묻힌 냄새를 왜 달고 다녀? 싫으면 떼고 오면 되잖아."
아이의 단순한 대답에 도현은 소매 끝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팔걸이에 기대었던 오유라의 향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오유라가 남기고 간 튜베로즈 향을 바로 알아챌 만큼 후각도 예민했다. 닮은 얼굴과 말투, 몇 수 앞을 보는 습관까지. 도현은 더는 그 기시감을 우연으로 넘길 수 없었다.
도현이 아이의 이름을 물으려던 순간, 온실 입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진아!"
서연이었다.
도현은 아이가 놓은 비숍의 위치를 다시 보았다. 틀렸다는 말을 인정하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온실을 떠나기 전에는 비숍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결혼식으로부터 3년이 지난 봄, 도현은 작은 의자 앞에서 잠깐 멈췄다."앉을 수는 있겠어?"서연이 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초등학교 교실의 의자는 어른에게 낮았다. 도현은 허리를 펴보려다 포기하고 책상 아래 두 발을 가지런히 넣었다.앞줄의 우진이 돌아봤다."아빠, 시끄럽게 움직이지 마. 수업 시작해."여덟 살이 된 아이는 예전처럼 작은 가방을 아빠에게 맡기지 않았다. 가끔은 손을 잡으려다 친구가 보이면 슬쩍 놓기도 했다. 도현은 이제 그 손을 다시 붙잡지 않았다.칠판에는 가족과 함께한 일을 소개하는 순서가 적혀 있었다. 서연은 연구소에 휴가를 냈고, 도현도 같은 시간에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우진의 첫 공개 수업이었다.아이들은 사진이나 그림을 한 장씩 들고 나왔다. 어떤 아이는 할머니와 간 시장 이야기를 했고, 다른 아이는 동생과 싸웠다가 과자를 나눠 먹은 일을 이야기했다.우진이 들고 나온 것은 기다란 기차 선로 사진이었다."이건 우리 집에서 만든 거예요."도현이 서연을 봤다. 오래전 쟁반 위에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집의 거실과 방 사이를 돌아오는 선로였다."길은 제가 그렸고, 엄마가 종이집을 만들었어요. 아빠는 다리 잡아줬어요. 손 놓으면 자꾸 무너져서요."친구들이 웃었다. 선생님이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여기는 왜 길이 끊겼을까?""화장실 가야 해서요. 이어버리면 밟고 지나가야 되잖아요."이번에는 뒤에 앉은 어른들도 웃었다. 우진은 설명을 마친 뒤 사진 아래의 세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한우진, 한서연, 차도현. 셋이 만들었어요."서연은 박수를 치다가 도현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는 사진을 보느라 박수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잘했지?""네. 당신도. 다
"아빠. 엄마 생일인데 왜 내 기차를 예약해?"우진이 도현의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화면에는 기차 모양 식당에서 생일파티를 할 수 있다는 사진이 떠 있었다.도현은 몇 초 동안 화면을 보다가 예약 창을 닫았다."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엄마 생일이라니까."지적은 정확했지만, 우진이 꺼낸 선물 계획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로봇을 사서 엄마가 힘들 때마다 짐을 들어주게 하겠다는 것이었다."그 로봇이 정말 짐을 들 수 있어?"도현이 묻자 우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아직은 못 들어."둘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서연은 연구소에서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했다. 부자는 저녁을 맡겠다는 말만 해놓은 상태였다."엄마는 노란 꽃 좋아해. 밤 들어간 빵도."도현이 말하자 우진이 새 종이에 꽃을 그렸다."그건 나도 알아. 꽃 아빠한테 줬잖아.""응. 이번에는 엄마 것도 사자.""빵은 복숭아랑 같이 안 만든 건지 물어봐."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이 먹을 것은 늘 확인했다. 우진은 꽃 아래에 커다란 상자를 그리다가 연필을 멈췄다."엄마는 뭐 할 때 좋아해?""연구 얘기 할 때. 책 읽을 때.""내가 잘 때도 좋아하던데."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진은 자기가 무슨 웃긴 말을 했는지 모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서연이 퇴근했을 때 집은 유난히 조용했다.현관에는 노란 꽃이 꽂힌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새로 산 병이 아니라 서연이 물꽂이할 때 쓰던 것이었다. 옆에는 우진의 글씨로 '생일 축하해, 한서연'이라고 적힌 카드가 세워져 있었다.서연은 꽃잎을 건드리려다 손부터 씻으러 갔다. 거실에서 도현이 고개를 내밀었
"이거 누가 치웠어?"우진이 거실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 서연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아이가 가리키는 자리를 봤다. 아침에 발에 걸려 상자 안에 넣어둔 블록들이었다."엄마가 넣었어. 청소하려고.""아직 다 만든 거 아니었는데. 역이랑 철길 붙이던 거였는데."아이는 상자를 끌어당겨 뒤집었다. 완성해두었던 부분까지 풀어진 걸 보고 입이 나왔다. 서연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그랬구나. 엄마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해.""다시 만들어줘.""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줄래?""엄마도 몰라?""응. 엄마가 봤던 건 우진이가 만든 다음이니까."우진의 얼굴에 실망이 더 짙어졌다. 마침 주방에서 나온 도현이 바닥에 앉았다. 손에는 세 사람이 마실 물이 들려 있었다."우진아, 아까 그린 그림 있지 않았어?"아이가 책상으로 달려갔다. 돌아올 때는 연필 자국이 진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도현은 종이를 받으려다 팔꿈치로 서연의 자료를 건드렸다. 얇은 서류 더미가 거실 바닥에 흩어졌다.우진이 한동안 부모를 번갈아 봤다."우리 집 왜 이래."서연은 결국 웃고 말았다. 도현도 종이를 줍다가 고개를 숙였다."아빠까지 사고를 쳤네.""엄마는 내 철길, 아빠는 엄마 종이.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아직은."서연이 덧붙이자 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셋은 자료부터 모았다. 서연이 페이지를 맞추는 동안 도현과 우진이 블록을 색깔별로 나눴다. 한쪽 구석의 물컵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서야 선로를 펼칠 자리가 생겼다."식탁도 아빠 컴퓨터가 있고, 여기에는 엄마 종이가 있고. 내 기차는 어디 가?"아이의 말에 서연과 도현이 거실을 둘러봤다. 함께 살기 시작한 뒤 빈자리는 금방 사라졌다. 서
"5시에는 데리러 오셔야 합니다."정 실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진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아빠 말고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나 책 더 보자고 할까 봐."어린이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우진의 부탁에 정 실장이 토요일 오후를 내준 참이었다. 서연은 간식과 물통이 든 가방을 건넸다."불편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두 분도 책만 들여다보다 오시지 말고요."정 실장의 말에 도현이 눈썹을 들었다. 우진은 벌써 도서관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아이를 보내고 나니 두 사람 사이가 허전해졌다. 늘 가운데 있던 손 하나가 빠진 탓이었다. 서연이 먼저 도현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리 늦겠다.""예약 안 했는데.""마음이요. 괜히 돌아가고 싶어지기 전에."***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서점은 조용했다. 서연은 연구 서적 앞을 그냥 지나쳤다. 여행 에세이 한 권을 꺼내 몇 장 읽더니 도현에게 펼쳐 보였다."여기 바다 색 좀 봐요.""가고 싶어?""지금은 책으로 보려고요. 또 비행기부터 알아보지 말고."도현이 휴대폰을 넣었다. 서연은 그 동작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짜 찾으려고 했어요?""위치만.""못 말려."그는 변명하는 대신 옆 진열대에서 다른 책을 골랐다. 서연은 그 책 표지를 보다가 조금 놀랐다. 어린 시절의 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었다."이런 것도 읽어요?""오늘은 읽어보려고.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방이 그렇게 많았는데, 생각나는 데는 별로 없거든."서연은 다시 책을 봤다. 도현은 표지 모서리를 만지다 계산대로 가져갔다.카페에서는 나란히 창가에 앉았다. 서연은 자기 몫의
우진이 가져온 안내문에는 체스 심화반 체험수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현이 일정부터 보자 아이가 다른 종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유치원 친구 준호의 생일 초대장이었다."둘이 같은 날이야.""체스 수업은 다음에도 있나 보자."도현이 안내문을 넘기는 동안 우진은 손가락으로 초대장의 기차 그림을 문질렀다."선생님이 나 잘한다고 가보랬는데.""가고 싶어?""준호 집에 새 기차 있어."질문과 대답이 달랐다. 도현은 안내문을 내려놓았다."준호 생일에 가고 싶은 거네.""응. 근데 체스 안 하면 못하게 돼?"도현이 바로 답하지 않자 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서연은 싱크대에서 손을 닦으며 두 사람을 봤다.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나 못해도 아빠가 좋아해?"도현은 의자를 당겨 아이와 마주 앉았다."우진아. 아빠가 너랑 밥 먹는 게 체스 잘해서인 것 같아?""처음에 그거 보고 왔잖아."아이의 말에 도현의 손이 멎었다. 온실에서 체스판 앞에 앉아 있던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 닮았다는 이유와 뛰어나다는 이유를 번갈아 앞세웠던 자신까지."처음에는 그랬어.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싶었어."서연도 손을 멈췄다. 도현은 우진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지금은 네가 체스판 안 꺼내도 같이 있고 싶어. 오늘은 기차 얘기 해줘도 돼."우진이 초대장을 조금 더 밀었다."기차 소리도 나. 준호가 새로 샀대.""그럼 구경하러 가자. 체스 수업은 네가 다시 가고 싶어질 때 알아보고."우진은 안내문을 접어 책장에 꽂았다. 버리지는 않았다. 도현은 초대장을 냉장고에 붙였다.***토요일, 도현은 우진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을 따로 챙겨 준호
우진은 가방에 사진을 넣었다가 꺼냈다. 결혼식 사진과 식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둘 다 투명 파일에 끼웠다."할아버지는 뭘 더 좋아하실까?"서연이 아이 옆에 앉았다."엄마가 웃는 걸 좋아하셨어.""둘 다 웃는데.""그럼 둘 다 가져가자."우진은 그제야 파일을 닫았다. 도현은 현관에서 보온병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서연이 부탁한 보리차였다.파주로 가는 길, 우진은 한참 떠들다가 잠들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무에 어린 잎이 돋아 있었다. 서연은 뒷좌석을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췄다."아버지 보러 가자고 하면 당신 불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네가 가고 싶다고 했잖아.""그것만으로 괜찮아요?"도현이 신호 앞에서 차를 멈췄다."내가 괜찮은지부터 묻느라 네가 못 가는 건 싫어."서연은 앞을 봤다. 빨간불이 바뀌기 전, 기어 위에 놓인 그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추모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조금씩 내렸다. 도현은 차에서 내리기 전 우산을 폈다. 우진은 잠이 덜 깬 얼굴로 그 안에 들어왔다.서연의 발이 계단 앞에서 잠깐 멎었다. 도현도 걸음을 멈췄다. 누구도 빨리 가자고 하지 않았다."엄마, 미끄러워?"우진이 물었다."조금. 천천히 가자."서연은 난간을 잡았다. 도현은 두 사람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였다. 옆구리에 남은 흉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안으로 들어오니 젖은 우산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서연은 우산을 접어 입구에 두고 아버지 사진 앞으로 갔다."아빠, 나 왔어요."우진이 먼저 사진 두 장을 내밀었다. 서연은 유리 앞에 사진을 받쳐 들었다."결혼식 때 찍은 거예요. 우진이가 직접 골랐어요. 그리